155화
강단 있는 여자라는 건 예상했었다.
바네사가 언론에 보여온 일련의 행동들은 물론이고, 일본 측을 통해 받은 자료에도 그런 특징이 잘 나와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건 정말 놀랍군.’
박민준은 상대를 차별하지 않았다.
원하는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 점혈 수법을 펼쳐가며 그녀의 몸에 고통을 가했는데.
이게 웬걸.
두 번이나 정신을 잃고 기절할 때까지 버티더니.
다시 깨어난 뒤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박민준을 향해 웃으며 협박했다.
투명화를 풀지 않은 상태라 그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래서 더욱 두려운 상태였을 텐데 말이다.
“누군지 몰라도, 이런 식으로는 나한테서 원하는 걸 얻어낼 수 없어. 죽이든지, 풀어줘야 할 거야.”
박민준도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네가 이렇게까지 버틸 줄은 몰랐는데. 뉴 유니온의 본거지와 주요 인물들의 정보가 네 목숨보다 중요하다는 건가?”
“당연하지.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 아까 빌딩을 날아서 벗어날 때는 죽음이 두렵다는 듯, 오리처럼 소리를 꽥꽥 지르더니.”
왜 이제 와서 저런 강단을 보이는 걸까?
“네가 원하는 걸 말해주면 내가 무사히 풀려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뒤엔? 배신자의 결말이 어떤지 난 아주 잘 알고 있어.”
“그놈들은 두렵고, 난 두렵지 않다는 건가?”
“그래. 넌 기껏해야 나만 죽이고 끝날 테니까.”
“뉴 유니온은 다르다는 건가? 놈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든 간에, 나 또한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아. 적어도 넌 사람이잖아.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나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어.”
“그럼 놈들은 사람이 아니라는 건가?”
“맞아. 적어도 그중 한 사람은 악마 그 자체지.”
“웃기지도 않는군.”
바네사의 말을 듣고.
잠시 침묵에 잠긴 박민준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가 돌연 투명화를 풀었다.
다만 박민준이 서 있는 쪽이 무척이나 어두워서, 그의 형태만 간신히 보이고 있었다.
바네사는 자신 앞에 대놓고 모습을 드러낸 남자를 보고 흠칫 몸을 떨었다.
정체를 숨기지 않는다는 건.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는 뜻이었으니까.
하지만 언제 두려워했냐는 듯.
바네사가 싸늘하게 웃으며 고개를 쳐들었다.
“스스로 정체를 드러내다니. 날 죽일 생각이군. 마침 지겨웠는데 잘됐어. 어서 날 죽이고, 이 지루하고 쓸모없는 짓을 끝내줘.”
그녀의 말이 끝나자, 박민준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둠에서 나온 그의 얼굴을 보고, 바네사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너였어?”
“그래. 날 보고 생각이 좀 달라졌나?”
바네사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자신이 속한 뉴 유니온을 배신하는 일이 두려웠지만, 상대가 세계 최고 레벨을 가진 최강의 S등급 헌터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
‘이 기회에 완전히 배신하고, 나도 독립해버릴까?’
그녀도 처음엔 뉴 유니온에 스스로 가입했지만, 나중엔 억지로 끌려다니면서 어쩔 수 없이 동행하고 있었다.
너무나 광범위하고 강력한 조직의 주요 구성원들은 둘째치고, 회장인 페이 노인은 도무지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나이가 많은 건 알겠지만, 정확히 몇 살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또한, 임무에 실패한 조직의 S등급 각성자를 손가락 하나로 죽이는 걸 볼 때마다 얼마나 두렵던지.
‘그러고 보니. 박민준 저놈과 비슷한 수법인 것 같은데? 서로 연관이 있나?’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그녀는 결국, 묻지 않았다.
자신의 정체를 알고 난 뒤로도.
다시 침묵을 지키는 그녀를 향해.
박민준이 다시 말했다.
“내게 협조한다면, 널 여기서 살려주고, 보호해주겠다. 또한, 놈들을 완전히 박살 내고 난 뒤에 이권을 얼마든지 취해도 좋다.”
그의 제안을 듣고, 바네사의 눈이 빛났다.
그녀는 평생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은 들어본 기억이 없었다.
하지만, 결국 바네사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노. 그 제안을 거절한다. 그냥 날 죽여라.”였다.
“그럼 할 수 없지. 시간을 낭비한 게 아깝지만, 이젠 죽어라.”
***
[뉴스 속보입니다. 어젯밤 RWNJ의 바네사 회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경찰은 우선 바네사 회장이 자신의 집인 펜트하우스의 테라스에서 뛰어내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정확한 사유는 조사를 통해 추후 밝히겠다고 했습니다.]
[죽은 바네사 회장의 집에서 유서 내용이 담긴 노트북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녀는 뉴 유니온이란 조직에 협박당하고 있었으며, 지난 발표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뤄진 것으로….]
[미국의 더원 대통령이 RWNJ 본사로 조문 사절을 보냈습니다. 바네사 회장의 유가족에게 위로의 말을 전달하고, 그녀를 죽음으로 내몬 뉴 유니온 조직의 소탕을 굳게 약속했습니다.]
전 세계 언론에서 앞다투어 바네사 회장의 죽음을 보도했다.
깊은 관심과 많은 사랑을 받아 온 그녀의 죽음이라서, 대중은 뉴 유니온에 대한 강한 적대감으로 불타올랐다.
“더러운 뉴 유니온을 처단하자.”
“더원 님. 제발 바네사 회장님의 복수를 대신해주세요. 우린 당신을 믿어요.”
어제의 발표로 잠시나마 상황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만들었던 뉴 유니온이었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이전보다 더욱 악화된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으니.
겨우 하루 만에 뉴 유니온의 최고 간부 회의가 다시 열렸다.
다른 때와는 달리.
회장 페이 노인이 제일 먼저 자리에 앉아있었다.
속속들이 도착한 최고 간부들이 그의 눈치를 보며, 자신의 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모두가 도착할 때까지.
어색한 침묵만 흘렀다.
감히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했는데.
그건 페이 회장이 지금 화난 표정을 대놓고 보였기 때문이었다.
평소, 사람을 죽일 때조차 온화함을 잃지 않았던 걸 기억해보면, 그가 지금 얼마나 기분이 상했는지를 잘 알 수 있었다.
마지막 간부가 도착하고 자리에 앉자마자.
페이 회장이 입을 열었다.
“바네사는 절대 자살할 아이가 아니다.”
누구 하나 그의 말에 반발하지 못했다.
천천히 간부들의 표정을 살핀 회장 노인이 다시 말을 이었다.
“3일 안으로, 그 아이의 죽음이 조작되었다는 걸 밝혀내고, 그 범인을 찾아내라.”
아무도 먼저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게 못마땅했는지.
페이 회장이 목소리를 살짝 높였다.
“이 일은 여기 있는 모두가 나서서 해결하도록 한다. 3일 안에 해결하지 못하며 내가 직접 나설 것이다. 그리고 그땐.”
잠시 말을 끓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희와 너희 가족을 모두 없애고, 이 쓸모없는 조직도 폐쇄하겠다. 내 말을 명심하도록.”
이게 바로 바네사가 박민준의 협박에도 굴하지 않은 이유였다.
뉴 유니온을 배신하면, 단순히 배신자만 찾아서 처단하는 게 아니었다.
그 배신자의 가족은 물론이고, 그의 친척과 사업체까지 철저하게 파멸시켜버렸으니.
바네사는 아마 자신이 혼자 죽고 끝내는 게 제일 나은 선택이라는 판단을 내렸으리라.
그렇게 회장 노인이 먼저 회의장을 떠나고.
남은 최고 간부들이 하나둘 입을 열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지금 누가 누굴 협박하는 거야?”
“그러게. 아무리 강하다 해도 자기 혼자서 우릴 다 어쩌겠다고? 정말 말 같지도 않군.”
“이럴 게 아니라 우리가 먼저 나서서 힘을 합쳐야지.”
“배신하자는 건가?”
“배신은 무슨. 우릴 죽이겠다고 먼저 말한 건 회장이야. 그럼 우리도 스스로 살길을 찾아 놔야지.”
제롬은 간부들의 대화에 끼지 않았다.
조용히 그들의 말을 듣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일 안 할 건가? 이제 3일밖에 시간이 안 남았는데?”
“제롬! 우리 말을 다 들어놓고,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자네 혼자서 행동하겠다는 건가?”
“그래. 난 자네들만큼 멍청하지 않거든.”
“자네 지금 말 다 했나?”
“아니. 여기서 단독으로 날 이길 사람이 아무도 없잖아. 그런데 말이야. 내가 다섯 명이 있다고 해도 회장을 이길 것 같지 않거든. 그럼 답이 나온 거지. 아닌가?”
제롬은 근육질의 거대한 덩치만큼이나 간부 중에서 가장 강력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만약 조직에서 더원을 상대하게 된다면, 제롬이 나설 거라는 계획까지 공공연하게 떠돌았으니.
그런 제롬이 무려 다섯 명이나 있어도 회장인 페이를 이기지 못할 거란 말을 듣고, 모두가 큰 충격에 빠졌다.
“설마 아무리 회장이 강력하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강하려고?”
“왜 아니겠나? 정 내 말을 못 믿겠으면, 자네들끼리 당장 회장을 찾아가 담판을 지어보든가?”
아무도 움직이는 사람이 없었다.
불만이 가득해서 입으로는 떠들었지만, 실제 행동으로 옮길 용기 따위는 없었다.
피식.
그걸 비웃은 제롬이 다시 말했다.
“내가 바네사의 집부터 확인해보도록 하지. 누구 나와 같이 갈 사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실망할 법도 한데.
“좋아. 그럼 나 혼자 가보도록 하지.”
그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혼자 자리를 떠났다.
남은 사람들도 더는 떠들지 않고, 제 갈 길을 떠났다.
일부는 존재를 감추고 도망칠 계획을 짜고 있었고.
대부분은 제롬이 향한 곳을 따라갈 생각이었다.
‘바네사의 죽음이 조작되었다는 걸 밝혀내려면, 현장부터 직접 확인해야 한다.’
***
제일 먼저 출발한 제롬이 펜트하우스가 있는 고층아파트에 도착했다.
바로 위층으로 올라가지 않고, 경비팀부터 찾았다.
“텍사스 방울뱀! 제롬 님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죽은 회장 하고 내가 안면이 좀 있거든. 그래서 어떻게 된 일인지 개인적으로 알아볼까 해서. 그날 찍은 CCTV 좀 보여줘.”
“그러셨군요. 하지만 그건 아무에게나 보여드릴 수가 없습니다.”
“내가 아무나였나?”
“그건 당연히 아니지요. 원래는 안 되지만, 특별히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렇게 그날 바네사의 아파트를 출입한 사람을 전부 확인하고, 그녀의 집 내부를 찍은 CCTV 화면까지 모두 꼼꼼하게 살핀 그였다.
“정말 독한 여자였군. 자기 집 안에까지 감시 카메라를 설치해놓다니.”
그가 바네사에게 감탄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딱히 수상한 점을 찾을 수가 없었으니.
당일 퇴근한 바네사가 욕실에 들렀다가 침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참 뒤에 혼자 나와서 테라스로 향한 게 감시 카메라에 찍힌 전부였다.
“정말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는 건가? 하지만 회장은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했는데.”
크게 틀린 적이 없는 페이 회장이지만, 제롬은 그가 이번에는 크게 실수했다고 생각했다.
제롬이 경비팀을 나와서 바네사의 집을 마저 살폈지만, 역시나 이상한 건 전혀 없었다.
아무 소득도 없이 펜트하우스를 떠나려는 제롬의 뒤로.
거대한 화분에서 떨어지던 야자수 잎이 바람이 불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중간에 방향을 틀었다.
마치 공중에서 뭔가에 부딪힌 듯 말이다.
그걸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각성 후 얻은 예민한 감각 덕분에 이상함을 느낀 제롬이었다.
그가 멈칫 서서 뒤를 돌아봤다.
“아무것도 없는데? 그냥 바람이었나?”
고개를 몇 번 갸웃한 그가 마저 걸음을 옮겼다.
집에서 수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으니.
이젠 그녀의 시체를 직접 확인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
뉴 유니온 조직의 간부들이 하나둘 바네사의 집을 찾아왔다.
제롬과 마찬가지로 뭔가 증거를 찾을 생각이었다.
역시나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그들이 다시 돌아가려는데.
주차장에서 뭔가를 보고 바로 멈춰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