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아가씨가 이름만 같은 게 아니라, 그 이지원이었다니.”
“네. 제가 그 이지원이에요. 박민준 씨 아버님 되시죠? 눈매가 정말 많이 닮았네요. 아니, 더 미남이신 것 같아요.”
“하하하. 아들 녀석이 날 좀 닮긴 했지요. 그나저나 무슨 일로 여길 찾아온 건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아저씨의 부탁을 받고 여기 온 거예요. 혹시 이 집의 경호원분은 지금 어디 계신가요?”
“경호원이라면 지금 주방에 있을 텐데. 여기로 불러드릴까?”
“아니에요. 제가 직접 가볼게요. 주방이 어디죠?”
“저기 저쪽으로 가면 됩니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전 그럼 저쪽으로 가볼게요.”
어려서 유명하고 부자가 되면 싸가지가 없을 줄 알았는데.
박철수가 본 이지원은 정말 싹싹하고 착해 보였다.
‘우리 아들의 개인 심부름을 올 정도면 서로 얼마나 친한 거지? 녀석이 설마 저 처자와 사귀나?’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그를 뒤로하고.
이지원이 주방에 들어섰다.
제일 먼저 주방 입구 쪽 냉장고 문을 열고 있는 중년 여성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어머니? 아가씨는 누구죠? 어디서 많이 본….”
“제 이름은 이지원이라고 해요. 어머니.”
“아! 세계 최연소 S등급 각성자 이지원! 정말 그 아가씨예요?”
“예. 맞아요. 제가 화면 하고는 좀 다르죠? 절 처음 보면 다들 한눈에 알아보질 못하더라고요.”
고개를 끄덕인 장미령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살피더니.
“우리 아들하고는 어디까지. 아니. 녀석을 어떻게 만나서.”
“네?”
“제법 나이 차이가 있을 텐데. 아가씨가 어려운 결정을….”
이지원은 상대가 자신과 박민준의 사이를 오해한다는 걸 알았다.
“뭔가 오해하셨나 본데요. 전 그냥 박민준 씨의 부탁 때문에 방문했을 뿐이에요.”
“어떤 부탁이지요? 우리 아들은 지금 출장 중일 텐데. 왜 직접 오지 않고?”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서요. 혹시 저기 저분이 경호원이신가요?”
“네. 맞아요. 존슨 씨. 손님이 존슨 씨를 찾네요. 감자는 그만 깎고 잠기 여기 좀 봐줄래요?”
빙글 몸을 돌린 블랙 존슨을 보고 이지원이 순간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다시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분명, 자신이 아는 그 사람이 맞는데, 왜 연고도 없는 한국에서 주방일을 하는 걸까?
그것도 수저로 겨우 감자나 까고 있다니?
“스폐셜 쓰리의 블랙 존슨 선배님?! 선배님이 왜 여기에?”
“아…. 이지원 양이 여긴 왜?”
블랙 존슨도 그녀를 알아봤다.
헌터 업계의 대선배인 스폐셜 쓰리의 일원으로서 세계 최연소 S등급 헌터인 그녀와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저는 박민준 씨가 경호원을 데리고 미국으로 와달라고 해서 왔어요,”
“아. 나는 사모님께서 점심에 감자 부침개를 해주신다고 해서 감자를 깎고 있었는데. 이것 참.”
자신의 모양새가 볼품이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는지.
슬그머니.
손에 든 감자와 수저를 식탁 위에 내려놨다.
입고 있던 앞치마도 서둘러 벗었다.
충격적인 그의 모습을 보고, 적응하지 못했던 이지원은 그제야 말끔해진 블랙 존슨을 보고 마음이 조금 진정되었다.
두 사람이 거실로 나오고.
자리를 비켜준 박철수와 장미령이었다.
“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저 아가씨가 직접 온 걸까요?”
“글쎄. 나도 모르지. 하지만 두 사람 모두 특별한 신분이니. 아주 큰 일이지 않을까?”
둘이 거실을 향해 귀를 기울였지만, 대화를 전혀 엿들을 수 없었다.
설사 그게 박민준의 가족이라고 해도.
아무나 들어서는 안 되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이지원과 블랙 존슨은 은밀하게 속삭이듯 얘기를 나눴다.
“그러니까 나보고 지금 동료인 로즈를 붙잡는 걸 도와달라는 건가?”
“네. 맞아요. 그게 아저씨가 나에게 전한 말이었어요.”
이지원의 말을 듣고, 계속해서 놀란 블랙 존슨이었다.
그와는 가족이나 마찬가지인 제시카 로즈다.
‘그런데 그녀가 최근 논란의 중심이 뉴 유니온의 일원이라는 걸 내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니.’
배신감까지 들 정도였다.
그리고 그가 또 놀란 이유는 이지원이 박민준을 부르는 호칭 때문이었다.
박민준 씨라고 불렀다가, 가끔 친근하게 아저씨라고 부르는 모습이라니.
물론 둘의 나이가 삼촌과 조카 정도 되기는 하지만.
블랙 존슨이 보기에는 이지원이 뭔가 그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설마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인가? 정말 제법이군. 이러니 제시카가 그의 눈에 안 들어왔겠지.’
아까 이지원이 절대 아니라고 한 말을 그도 들었지만, 그걸 그대로 믿지 않았다.
자신의 말을 듣고.
대화 도중 혼자 생각에 잠긴 블랙 존슨을 빤히 바라보며 기다린 이지원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탁!
블랙 존슨이 허벅지를 살짝 내려치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우선은 네 말대로 하도록 하지.”
“고맙습니다. 선배님.”
“미국으로 가서 로즈를 만나보면 알게 될 테니까. 서두르자고.”
“네. 인천공항으로 가면 바로 출국하도록 조치해놨어요.”
급하게 떠나는 두 사람을 보고.
박철수 부부가 나섰다.
“아니. 손님인 이지원 양은 그렇다 쳐도, 우리 경호원인 자네까지 이렇게 갑자기 나간다는 건가?”
“박민준 씨가 절 불렀습니다.”
“우리 민준이가?”
“네. 그리고 경호 일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이 또 누가 오나?”
“일본인 녀석이 곧 집으로 돌아올 거라고 합니다. 실력이 나쁘지 않으니. 저 대신 잘할 겁니다.”
박민준과 함께 미국에 갔던 이나즈마였다.
그는 비행기에 남아 있다가 습격을 받았다.
이나즈마를 얕봤던 적들을 물리치고 유유히 그곳을 빠져나왔으면 좋았겠지만, 크게 다치고 말았으니.
다행히 그의 특성 때문인지 몸의 회복이 다른 사람보다 상당히 빨랐다.
치료를 받자마자 상태가 확 좋아졌기 때문에, 뒤늦게라도 한국에 들어올 예정이었다.
둘의 대화에 장미령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건 걱정 없는데. 대체 어딜 간다는 거예요? 존슨 씨. 우리 민준이는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고요?”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나중에 돌아와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아니면 아드님인 박민준 씨에게 직접 들으실 수도 있겠지요.”
“알았어요. 그렇게 말하면야 뭐. 우리가 별수 있나? 제발 조심히 다녀와요. 우리 민준이도 잘 부탁하고.”
“알겠습니다.”
알겠다고 대답은 했지만, 블랙 존슨은 이미 그가 자신을 부른 이유가 무력 때문이 아닌 걸 알고 있었다.
‘내 특기인 기억을 읽는 능력을 통해서 제시카를 빨리 찾아내라는 거겠지.’
***
그 시각 박민준은 RWNJ의 바네사를 만나기 위해 본사 앞에 도착했다.
처음엔 투명화한 상태로 무작정 쳐들어가서 그녀를 찾아 협박하고, 뉴 유니온의 본거지를 알아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나즈마를 통해 그녀에 대한 정보를 접한 뒤로, 계획을 조금 바꿨다.
자존심이 강하고, 비밀이 많은 여자이니.
난리를 피우면 오히려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숨어버릴지 몰랐다.
또는 뉴 유니온의 인물들이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을 터.
‘그녀와 놈들이 이상한 낌새를 느끼면, 일이 어렵게 된다.’
그러니.
지금은 조용히 기다리면서 상황을 살피다가, 그녀가 집으로 돌아간 뒤에 일을 시작하는 게 더 낫다는 판단이었다.
설마 바네사가 퇴근 후 집안에까지 외부인들을 들이진 않을 테니까.
그렇게 건물 안으로 잠입한 박민준은 바네사의 위치만 확인하고 기다렸다.
해가 저물고, 혼자 차를 몰고 집으로 향한 그녀를 따라나섰다.
박민준의 예상처럼.
그는 바네사가 탄 차의 앞뒤로 멀리 거리를 두고.
수상한 차량 여러 대가 함께하는 것도 발견했다.
‘뉴 유니온 녀석들일까? 아니면 회장인 그녀를 호위하는 회사 측 경호원들일까?’
둘 다 상관없었다.
바네사만 잡으면 확실할 테니까.
초고층 초호화 아파트의 꼭대기.
펜트하우스가 집인 건지.
바네사가 혼자 그 안으로 들어갔다.
아파트 주차장과 도로 주변엔 회사에서부터 그녀를 따라온 차들이 곳곳에 정차했다.
모든 상황을 지켜본 박민준이 아파트 외벽을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투명화한 상태라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또한, 엄청난 속도로 벽을 탔음에도 발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그렇게 꼭대기 층에 도착한 박민준이 테라스에 올라섰다.
설마 그 높은 곳까지는 누가 침범할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테라스 쪽 입구는 잠겨 있지 않았다.
유유히 그곳을 통해 집안에 들어선 박민준은 바로 집안 곳곳에 설치된 CCTV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자기 집안까지 감시 카메라를 설치해놨어? 대체 어떻게 된 여자인 거지?’
그가 CCTV가 설치된 동선을 파악해가며, 바네사에게 접근했다.
집에 돌아온 그녀는 이제 막 샤워를 할 참이었다.
아무리 꼼꼼하고 조심스러운 그녀라고 해도, 예외는 있는 법.
차마 자신이 사용하는 욕실과 화장실 쪽 부근에는 감시 카메라를 설치하지 않았다.
“오늘은 정말 피곤하네. 박민준인지 뭔지. 그 개자식 때문에 내가 이 무슨 고생이야?”
뉴 유니온의 간부 회의 때마다 제트기를 타고 한국과 미국을 오가는 건 은근히 피곤하고 귀찮은 일이었다.
최근 박민준 때문에 회의가 잦아졌고, 거기다 이번 일의 총 책임자가 된 바네사였으니.
언론과 대중 앞에서 중대 발표를 마친 오늘.
그동안 쌓인 피로와 스트레스가 한 번에 자신의 온몸 위로 쏟아진 듯한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장미 향을 듬뿍 넣고 몸을 담근 뒤에, 샴페인을 마시면서 피로 좀 풀어야겠다.’
그렇게 대형 욕조에 뜨거운 물을 먼저 틀어놓고, 옷을 벗으려던 그때.
불쑥.
그녀는 뭔가 자신의 입을 가리는 존재를 느꼈다.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물리적인 감각은 입술 위로 뚜렷하게 느껴졌다.
‘크고 거친 남자의 손길. 설마 투명인간인가?’
하지만 현관에는 적외선 탐지기와 함께 열화상 카메라로 출입자를 감시하는 시스템이 있었다.
‘그 경보가 울리지 않았어? 그럼 어디로 들어온 거지? 설마 날아서 들어왔나?’
헬리콥터 소리도 전혀 듣지 못했는데?
만약 누군가 뭔가를 타고 아파트 근처를 날았다면, 분명 경호원들이 그걸 봤을 터.
그들에게도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했다.
‘이 감각을 보면, 귀신은 절대 아닌데. 대체 누가 왜?’
미국 정부에서 보낸 각성자인가?
결국, 바네사는 더원과 미국 정부를 강하게 의심하게 되었다.
그런 그녀를 보고, 박민준이 조금은 감탄했다.
‘정말 들은 대로 대단한 여자군. 놀랄 법도 한데. 이런 상황에서 이 정도로 침착하다니.’
하지만 단순히 감탄이나 하자고, 그가 여기까지 온 게 아니었다.
원래는 집안에서 그녀를 취조할 생각이었는데.
곳곳에 있는 감시 카메라를 보고 또 계획이 바뀌었다.
그가 그녀의 입을 막은 상태로 움직였다.
CCTV가 찍는 동선을 교묘하게 피해가며, 그녀를 데리고 아까 자신이 들어왔던 테라스로 향했다.
‘누군지 몰라도, 여길 잘 알고 있어. 감시 카메라를 피해서 아무것도 없는 테라스로 나오다니.’
바네사는 밖에 나오면, 투명인간이 자신을 협박할 줄 알았다.
하지만 멈추지 않고 계속 움직이는 걸 느끼고, 크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걸으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었으니.
‘설마 그냥 날 여기서 밀어 죽이려고?’
돈을 원하거나, 정보를 얻어내려고 날 찾아온 게 아니었나?
계속 침착하던 그녀였지만, 죽음의 공포에는 어쩔 수 없었던 걸까?
갑자기 박민준의 곁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그러든 말든.
박민준은 계속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테라스를 벗어나 허공에 발을 디뎠다.
‘아악! 안 돼. 난 아직 젊고 아름답단 말이야. 이렇게 죽을 순 없어. 억울해.’
바네사가 속으로 비명을 지르다가, 자신의 몸이 허공에 완전히 올라선 걸 보고 그대로 기절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