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조종사가 왜 없어? 여기 있잖아?”
“네가 직접 비행기를 몰 거라고?”
“왜 그래? 내가 바로 더원이야. 비행기 정도는 몰 줄 알아야 남자 아니겠어?”
그의 말을 듣고, 이지원이 불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건 최신형 제트기잖아요? 설마 경비행기 면허 같은 걸 따놓고 이걸 몰겠다는 건가요?”
“어. 맞는데. 어차피 하늘을 나는 건 다 똑같지 않나?”
“미친. 난 죽기 싫으니까. 당장 조종사 데려와요.”
“싫은데. 내가 직접 운전할 거야.”
더원이 그녀를 향해 메롱 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이지원이 할 말을 잃고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대중에게 알려진 더원은 인류 최강의 헌터이자, 과묵한 수호자였으니.
그녀가 이전에 몇 번 만났을 때도 무척이나 말이 없고 진중한 모습만 보였었다.
‘세상에. 더원이 저런 인간이었어? 너무 철부지 같잖아?’
뒤늦게 미간을 잔뜩 찌푸린 이지원이 한마디 하려고 했는데.
박민준이 먼저 나섰다.
그가 더원의 뒤통수를 세게 후려쳤다.
팍!
“개수작 부리지 말고, 가서 조종사 데려와.”
“진짜로 내가 몰 수 있다니까.”
박민준이 눈알을 부라렸다.
바로 꼬리를 내린 더원이 툴툴거리며 비행기에서 혼자 내렸다.
“알았어. 데려오면 되잖아. 근데 진짜 아깝다. 이번 기회에 제트기도 한번 몰아볼 수 있었는데.”
잠시 후.
더원이 콧수염이 인상적인 중년인을 데리고 돌아왔다.
아직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조종사의 얼굴에는 어리둥절한 표정이 역력했다.
“이봐. 워싱턴 D.C까지 단숨에 날아가 보자고.”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 시간에 비행하는 건 일정표에 없었는데요. 제가 정말 이걸 운전해도 되는 겁니까?”
“당연하지. 더원인 나를 의심하는 거야?”
“그럴 리가요? 더원 님을 못 믿으면 누굴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럼 어서 출발해.”
“알겠습니다.”
콧수염 남자가 조종석에 앉는 걸 보고, 더원이 보조석으로 향했다.
박민준은 그런 둘을 보며, 고개를 작게 저었다.
‘오랜만에 보는 신선한 또라이네. 마치 무림 맹주의 막내 제자 놈을 보고 있는 것 같군.’
조종석을 빠져나온 그를 이지원이 맞이했다.
“저자를 믿고 조종석을 내줘도 괜찮을까요?”
“괜찮겠지. 조종사를 따로 데려왔으니까.”
“제 말은 그걸 물은 게 아니었어요.”
“그럼?”
“더원 저자가 동료들과 절 사로잡은 장본인이라고요. 그런데 저렇게 멋대로 행동하도록 따로 둬도 되냐고 물어본 거였어요.”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마.”
“어떻게 걱정을 안 해요? 아저씨가 나타나기 전에 지구에서 제일 강한 사람이었는데.”
박민준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놈이 조금 강하긴 하지. 하지만 그건 너 같은 애들을 상대할 때 얘기지.”
“아저씨는요? 저자가 몰래 수작을 부리면 바로 제압할 수 있어요?”
“당연한 걸 묻는군. 나한테는 너나 저놈이나 모두 약골일 뿐이야.”
“그 정도인가요?”
“그래. 그 정도지.”
“아저씨의 말을 들으니까. 뭔가 안심이 되긴 하네요.”
“그럼 이제 네 얘기를 좀 들어보자꾸나.”
“제 얘기요?”
“아까는 네 말을 제대로 못 들었으니까. 어차피 비행기에서 딱히 할 일도 없잖아?”
“그런 그렇죠.”
비밀기지에 갇혀있는 이지원을 만났을 때.
박민준이 그녀에게 질문했었다.
그때 이지원이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가서 듣지 못한 답변을 지금 듣겠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녀도 이번엔 제대로 말해줄 생각이었다.
‘상황이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어. 아저씨와 얘기하다 보면 뭔가 가닥이 잡히겠지.’
이지원은 자신을 구하러 온 박민준과 그 조직의 요원들이 서로를 못 알아보고 싸운 것부터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날 구하러 온 사람들끼리 대체 왜 싸운 건데?’
그래서 박민준에게 그 일을 제일 먼저 물어봤다.
“대체 아까는 왜 싸운 거예요? 그냥 그 사람들하고 합류해서 비행기를 타고 거길 빠져나갔으면 좋았을 텐데.”
“나도 모르겠는데?”
“아저씨도 모른다고요?”
“그래. 난 그냥 아놀드랑 싸우던 놈들이 겁도 없이 나한테도 달려들길래, 어이가 없어서 혼내준 것뿐이야.”
이지원이 평소 박민준에 대해 생각했다.
‘아저씨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 말보다는 행동이 앞서는 사람이니까.’
고개를 작게 끄덕이던 그녀의 눈에 순간의 의문이 다시 생겼다.
“그런데 아놀드라니요? 아까 거기에 그런 사람도 있었어요?”
“더원 그놈 본명이 아놀드야. 설마 모르고 있었나?”
“아. 그렇군요. 전 전혀 몰랐어요.”
“네 얘기를 들어보겠다고 했는데. 내가 또 질문만 받았군.”
“아저씨. 미안해요. 그럼 이제 어디서 말해드리면 될까요?”
“네가 갈랜드 박사의 조직에 합류한 시점부터 얘기해봐.”
“알았어요. 그러니까 그게…….”
그 조직에서 이지원을 처음 찾아온 건 불과 몇 달 전이었다.
박민준이 나타난 뒤로, 이지원의 유명세가 한풀 꺾였다.
그걸 그녀는 기뻐했다.
각성한 뒤로 너무 많은 일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정신이 없을 정도로 너무 바빴었는데. 이젠 아저씨가 나 대신 바쁘겠네.’
그렇게 여유를 좀 부릴 수 있나 싶었는데.
그녀를 찾아온 사람들이 있었다.
박민준에게 찾아왔던 것처럼.
샌님 같은 연구원 노인이 혼자 이지원과 만남을 요청해왔다.
처음엔 그냥 싫어서 거절했었는데.
“영구적으로 게이트가 열리지 않게 만들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나니. 박사를 만나지 않을 수가 없겠더라고요.”
“그래서 놈들을 위해서 넌 어떤 일을 했지?”
“박사와 조직의 일을 방해하는 자들을 처리해왔지요. 그 대표가 바로 미국과 더원이었거든요.”
“놈을 죽이려다가 네가 제압되었다는 말이군.”
“네. 더원이 그렇게까지 강할 줄은 몰랐어요.”
언론에서 과장해서 떠든 줄 알았는데.
그 이상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곳에 갇혀있으면서 뭔가 이상함을 느끼지 않았나?”
“어떤 점에서요?”
“그 시설 말이야. 미국이 정말 게이트가 닫히는 걸 막으려는 자들의 중심점일까?”
“글쎄요? 잘 모르겠지만, 딱히 그런 점은 못 느꼈던 것 같아요.”
그녀는 말에는 확신이 없었는데.
그건 적에게 포로가 되어 잡혀있는 상황에서 여유롭게 주변을 살피고 깊게 생각할 여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갈랜드 박사의 말처럼 게이트와 괴물 자체가 산업이 되어 버렸으니. 충분히 박사의 일을 막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흠. 그런가? 내 생각은 좀 다른데.”
“어떻게요?”
“내가 본 그 시설과 연구원들은 지극히 평범했어.”
그냥 외부에 자신들의 존재만 숨겼을 뿐이지.
박민준이 보기에는 딱히 추잡한 목적을 가지고 연구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더원의 여자친구던 그 여인 역시, 악당의 눈빛이 아니었고.
결정적으로 박민준이 갈랜드 박사와 조직을 의심하게 된 계기는 바로, 5명의 S등급 헌터들을 상대하면서였으니.
“그자들은 사람을 죽이는 일에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오히려 눈빛에 숨어있던 광기도 엿보였지.”
“그게 뭐 이상한가요? 각성하면 원래 호승심이 생기는 법이잖아요?”
“많이 이상하지. 좋은 목적을 가진 자들이라면 남의 목숨을 빼앗는 순간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미안함의 표정을 엿볼 수 있거든.”
“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각성하면, 보통 인간을 훌쩍 뛰어넘는 신체 능력을 가질 수 있게 된다.
간혹 특기라는 각성 스킬도 함께 부여받았으니.
갑작스럽게 엄청난 힘이 생기게 되면 그걸 자랑하고 싶고, 남과 겨뤄보고 싶은 게 인간의 심리였다.
이지원도 다른 사람에게 일부러 시비를 걸고 다니지는 않지만, 남과 다투게 되면 은근히 기쁜 마음으로 싸움을 피하지 않았다.
“내가 놈들을 보고 느낀 건, 살육을 즐기는 미친개들이라는 거였다.”
“그랬어요?”
이지원이 더원을 노릴 당시 동료들은 그런 감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었다.
그건 그들이 이지원처럼 나중에 박사에게 설득되어서 합류한 자들로 구성된 팀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리고 그런 놈들이 속한 조직은 대부분 사파나 사이비 종교 같은 것들이었지.”
“사이비는 알겠는데, 사파라니요?”
“그냥 내가 다녀왔던 세상에 나쁜 짓을 하던 조폭 집단 같은 걸 말하는 거야.”
“아. 네.”
반면, 나중에 나타난 자들은 처음부터 조직에 속했던 자들이었으니.
일전에 박민준에 상대한 3대 빌런 같은 자들이나 보일 법한 살육에 대한 목마름이나, 광기가 눈빛 뒤에 감춰져 있었다는 말이었다.
“아저씨를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뭔가 이상해요.”
“뭐가?”
“세상을 구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걸었다는 갈랜드 박사와 조직원들인데. 그렇게 살인광들이라니.”
“그러니까 내가 너한테 아까 그런 질문을 했던 거다.”
박민준과 대화를 나누면서 뭔가 자신이 속았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 이지원이이었다.
무척이나 뒤늦은 깨달음이지만, 그마저도 박민준이 없었다면 아무것도 모른 채로 박사의 조직에 이용이나 당했을 터.
순간 이지원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 놔! 그럼 갈랜드 박사가 날 속여서 사지로 몰아넣었다는 거잖아?”
박민준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건 아닐 거다.”
“네? 뭐가 또 아니에요? 방금까지 나쁜 놈들이라고 말해놓고?”
“갈랜드 박사 또한 너처럼 놈들에게 이용당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아. 그렇군요. 하지만 너처럼이라는 말을 좀 빼줬으면 좋겠네요.”
“왜? 사실인데.”
“사실이라고 해도, 내가 누군가에게 속아서 죽을 뻔했다는 걸 알게 된 게 별로 유쾌하지는 않으니까요.”
이지원은 지금 상당히 불쾌하고 쪽팔렸다.
그런 그녀를 보며, 박민준이 살며시 미소 지었다.
“아저씨. 그 표정은 뭐예요?”
“무슨 표정?”
“날 보면서 꼭 아빠처럼 웃고 있잖아요.”
“내가? 난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거기다 애도 없단 말이다.”
“애인은요?”
“응?”
“아저씨가 결혼을 안 했다는 건 나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사귀고 있는 사람 정도는 있겠죠?”
“그건 무슨 소리지? 왜 갑자기 내 사생활이 궁금한가?”
“그냥. 아저씨 같은 사람이 있으면, 주변의 여자들이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요.”
“딱히 그런 건 아닌데……. 아. 네 말이 맞는 것도 같군. 이자벨라가 자신과 함께 남아달라는 말을 했었지.”
순간 아니라고 하려던 박민준이 중간에 말을 바꿨다.
그의 입에서는 다른 여자의 이름이 전혀 나오지 않을 것 같았는데.
그걸 듣는 순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빠르게 되물어본 이지원이었다.
“이자벨라? 그 여자는 또 누군데요? 이름을 들어보니. 외국인 같은데?”
“외국인 맞아. 수리남의 대통령이기도 하지. 약하고 아직 어리지만, 나름대로 멋있는 사람이었어.”
“수리남이요? 괴물 사냥하러 해외에 가서 여자도 헌팅하셨나 봐요?”
박민준이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내 말 못 들었어? 그 여자가 수리남의 대통령이라고. 거기 나타난 괴물을 죽이려고 만났을 뿐이야. 근데 내가 왜 이런 말을 너한테 해야 하는 거지?”
이지원이 뭔가 말하려는데.
더원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여긴 또 왜 이렇게 뜨거워? 내가 조종석에 가 있는 동안에 재밌는 일이 있었나?”
박민준의 모습이 흐릿해지더니.
퍽! 악!
오른쪽 정강이를 걷어차인 더원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이지원도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그에게 빽 소리쳤다.
“변태 새끼.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 거야. 아저씨, 한 대로는 부족하니까 가운데도 차 버려요.”
박민준이 움직이려는 걸 보고.
더원이 그를 향해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내가 잘못했으니까. 어서 내리기나 하자고.”
“벌써?”
“응.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긴 좀 그렇지만, 미국에서 만든 최신형 제트기잖아. 그래서 빨리 도착했지.”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박민준이 그를 응징할 생각을 버렸다.
“멍청한 네놈을 교육하는 건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지.”
“휴. 그것참 고맙군.”
안도의 한숨을 내쉰 더원이 앞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이봐! 조종사. 어서 출입구 열어! 여태 안 열고 뭐 하는 거야?”
비행기 출구가 열리고, 박민준 일행이 밖으로 나왔다.
그들이 도착할 걸 미리 알았다는 듯.
비행기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무리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