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주지육림(酒池肉林)
고사성어로 술로 만든 연못과 고기로 된 숲이란 말이다.
주로 방탕하고 호사스러운 생활을 빗대어 얘기하는 거였는데.
‘그게 진짜였잖아?’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헐벗은 남녀가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었다.
실내 수영장에는 술병이 가득 떠다녔고, 분수대에서는 포도주가 뿜어져 나왔다.
그래서인지. 내부가 술 냄새로 가득했다.
솟구치는 포도주를 입 벌려 마시거나 손으로 받아먹는 사람들도 보였다.
사방에 널려있는 고기류와 과일들까지.
아마 제시카 로즈가 이곳에 함께 왔다면 유명인사들이 대다수인 걸 알아봤을 것이다.
미국과 세계의 경제, 정치, 사회, 연예계에 영향을 미치는 권력자들이 이곳에 모여 있었다.
‘밖에는 보안을 철저하게 해놓고, 안에서는 아주 막 나가는군. 개판이 따로 없어.’
사람들을 피해서 걸음을 옮기던 박민준은 정체를 알 수 없는 흰색 가루와 주사기도 발견할 수 있었다.
쯧쯧.
박민준은 아직도 투명화를 한 상태였다.
‘여기서 내가 투명화를 풀어도 상관없을 것 같은데? 자기들끼리 미쳐서 노느라 옆에서 누가 죽어도 모르겠어.’
쉽게 볼 수 없는 충격적인 모습이지만, 여기서 계속 구경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목표인 더원은 이곳에 보이지 않았으니.
박민준이 서둘러 혼돈의 장소를 빠져나왔다.
***
정신없던 곳을 벗어나니.
오히려 조용한 느낌까지 드는 더원의 저택이었다.
미리 알아둔 정보를 떠올리며, 그가 더원을 찾아다녔다.
‘손님들은 저렇게 놀게 해놓고, 대체 그놈은 어디에 처박혀 있는 거지?’
그렇게 돌아다니던 박민준이 그를 발견한 곳은 더원의 개인 수련장이었다.
훅! 훅!
따뜻하게 느껴지는 캘리포니아의 기후에도 불구하고, 더원의 몸 위에 아지랑이가 보였다.
열심히 움직이며 훈련한 더원이 흘린 땀이 증발하면서 생긴 착시 현상이었다.
‘정말 의외네. 소문과는 전혀 딴판이잖아?’
망나니 같은 성격이라고 들었는데.
실제로 건물 내부에 들어서자마자 본 광경도 그 소문을 뒷받침했었다.
하지만 박민준이 직접 보고 있는 더원은 무척이나 진지했다.
눈빛은 노련한 무림의 고수처럼 차분했고.
그가 들고 있는 검의 경로는 흔들리지 않았다.
다리는 굳건하게 버티고 서서, 하체 훈련이 제대로 되어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더원에 대한 박민준의 종합적인 평가는?
‘내가 지구에서 본 놈 중에 제일 쓸만하다.’
만약 그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더원이 지구 최강 사내라는 걸 부정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런 긍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박민준은 상대가 자신보다 몇 수 아래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충분히 강하다. 하지만 아직 미숙하군.’
아마도 제대로 된 스승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하긴 저놈보다 더 강한 인간이 없는데. 누구한테 검술이나 수련법을 배울 수 있었겠어? 나라면 또 모를까?’
돌연.
아아아아아아악!
더원이 미친 사람이 된 것처럼 크게 소리쳤다.
탄탄했던 그의 검로가 흐트러지고, 강철같아 보였던 다리도 비틀거렸다.
흐느적흐느적.
마구 검을 휘두르던 그가 혼잣말했다.
“왜 여기서 더 강해질 수 없는 거야?! 어서 빨리 더 강해져야 한단 말이다. 그래야 그놈을 꺾고 내가 다시 세계 최고의 자리에 설 수…….”
그의 말을 듣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박민준이 갑자기 투명화를 풀었다.
대놓고 상대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누구냐?!”
그제야 인기척을 느끼고 그를 발견한 더원이었다.
박민준이 대답하지 않고, 몇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갔다.
어둠 속에서 조명 아래로 나온 그를 보고 눈을 더할 나위 없이 크게 부릅뜬 더원이었다.
“너는……. 박민준? 한국에 있어야 할 네놈이 왜 여기에? 대체 어떻게 들어온 거지?”
각성자 경호원 팀과 군인 출신 용병으로 이뤄진 경비팀이 자신의 집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다.
개미 새끼 한 마리조차 몰래 들어오고 나갈 수 없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그걸 비웃기라도 하듯.
‘저렇게 버젓이 내 앞에서 모습을 드러내다니.’
박민준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더원이 또다시 놀랐다.
상대의 몸이 흐려지는가 싶더니.
그대로 시야에서 놓쳐버렸다.
‘갑자기 사라졌어?’
초고속 이동?
세상에 내 눈을 속일 수 있는 이동 특기가 있었나?
흠칫.
당황하던 더원이 갑자기 몸을 작게 떨었다.
돌연 사라졌던 상대가 자신의 등 뒤에 바로 있다는 게 느껴졌으니.
휙!
소스라치게 놀란 그가 몸을 팽이처럼 돌리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회전하는 힘을 그대로 이용해서 검을 강하게 뒤로 휘둘렀다.
사사삭!
한때 세계 최강이었던 더원이다.
그런 그의 마력을 가득 담은 일검.
상대가 절대 막거나 피할 수 없을 거라고 여겼는데.
집의 보안을 자부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더원의 예상은 철저하게 빗나갔다.
박민준이 맨손으로 그의 검을 잡아버렸으니.
“어떻게 이런 일이? 검날에 손이 그대로 잘리거나 마력 때문에 닿자마자 바로 터져버려야 정상인데? 그걸 둘 다 버텼어?”
상대에게 질문한 게 아니었다.
너무 기가 막히고 놀라서.
그냥 혼잣말을 잔뜩 해버린 더원이었다.
그런 그를 향해 박민준이 작게 입꼬리를 올렸다.
조롱하고자 한 게 아니라, 순수한 감탄의 표현이었다.
“역시 제법이군. 내가 본 그대로야.”
“내 검을 맨손으로 막고 하는 말이 겨우 제법?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그의 인생 최악의 악몽일 터.
하지만 더원은 검을 쥔 손에 느껴지는 감각을 통해, 지금이 분명한 현실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박민준….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이렇게 강한 사내였나?”
“나도 네놈의 실력이 실제로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뭐?”
“제법 쓸만한 놈이라고.”
“닥쳐!”
상대가 자신에게 내린 평가를 듣고, 순간 이성의 끈을 놓친 더원이었다.
그가 이전보다 더 많은 마력을 담아 검을 내질렀다.
7등급 괴물조차 즉사하거나, 큰 피해를 볼 만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다른 사람이 아닌 박민준이었다.
7등급 괴물 따위는 그의 상대가 아니었다.
또한, 그 괴물과 비슷하거나 약하다고 볼 수 있는 더원은 더더욱 박민준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더원이 자신의 모든 걸 담아서 찌른 일검을 박민준이 그대로 돌려줬다.
검을 뽑아서 마주 찔렀으니.
쾅!
엄청난 굉음과 함께.
충격파가 두 사람을 강타했다.
두 발로 멀쩡히 서서 버틴 박민준과는 달리.
더원은 충격파를 이겨내지 못하고 그대로 뒤로 날아가 버렸다.
쿵!
수련실 벽에 등을 처박은 뒤에야 멈춰 설 수 있었으니.
으윽!
더원의 입에서 고통에 찬 신음과 함께 검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그걸 본 박민준이 빠르게 그에게 다가갔다.
상대가 공격하는 줄 알고 놀란 더원이 검을 다시 휘두르려고 했다.
‘망할. 검을 들 수가 없어.’
방금의 충격으로 팔을 다친 데다 힘과 마력이 고갈되어서 검을 들어 올릴 힘조차 없었다.
결국, 그가 모든 걸 포기하고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이게 내 최후였군. 하지만 나쁘지 않다. 아니. 나보다 강한 남자에게 죽게 되었으니. 오히려 기쁘다.’
죽음을 기다리던 더원은 뭔가가 자신의 몸 곳곳을 찌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처음엔 그게 상대의 공격인 줄 알았는데.
‘그렇다고 하기에는 아프지가 않다? 그냥 손가락으로 찌르는 느낌인데?’
그리고 그 뒤로.
오히려 몸의 고통이 사라지고, 마음이 안정되는 걸 알 수 있었다.
‘설마?’
더원이 눈을 번쩍 떴다.
바로 앞에 서 있을 거라 여겼던 상대였는데.
어느새 다시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어찌 되었건 간에.
다시 기력을 되찾은 더원이었다.
그가 여태 쥐고 있던 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 상태로 빠르게 박민준을 향해 돌진하려고 했는데.
순간 부러져서 반쪽이 되어버린 자신의 검날이 보였다.
‘언제 부러졌지?’
아마도 아까 상대의 검과 충돌할 때인 것 같았다.
더원의 시선이 박민준의 검으로 향했다.
멀쩡한 상태의 검날을 보고, 그가 돌연 움직임을 멈췄다.
‘이런 검을 들고, 다시 저자를 공격해봤자, 결과는 뻔하다.’
땡그랑.
죽어도 놓지 않을 것 같았던 검이었는데. 더원이 순간 손에서 검 자루를 놓아버렸다.
그리고 박민준을 지그시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이제 날 죽일 건가?”
“아니. 널 죽일 거면 아까 보자마자 진작 죽였지.”
“그럼 일부러 날 살려줬다는 거냐?”
“그래.”
박민준이 자신을 세 번이나 살려줬다는 걸 아직 모르고 있는 더원이었다.
처음 주지육림을 목격하고 난 뒤로.
박민준은 더원을 보자마자 그의 목을 쳐내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과 검을 보고 그 생각을 접었다.
그게 첫 번째.
그리고 두 번째는 더원과 검을 마주한 순간이었다.
더원의 거의 모든 마력이 담긴 검 끝을 박민준이 잡아냈을 때.
더 힘을 주지 않고, 그대로 흘러버렸다.
만약 그가 작정하고 강하게 밀어붙였다면, 더원의 검이 부러진 것에 그치지 않고, 그대로 몸이 갈가리 찢어져 버렸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충격파를 이겨내지 못하고 더원의 몸이 망가진 걸 봤을 때.
박민준이 자신의 내공과 점혈 수법을 이용해서 그를 살려줬다.
그리고 그 이유는?
‘이대로 죽이기엔 아깝다. 그나마 내 검을 받아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인 것 같은데.’
이전까지 만난 S등급 각성자 모두.
박민준이 장난으로 내민 검조차 받아낼 수 없는 실력이었다.
하지만, 더원은 달랐다.
박민준이 몸을 풀 수 있을 정도의 상대는 되었으니.
‘저런 놈이 하나 있으면, 심심하지는 않겠지.’
가볍게 검을 들고 놀거나, 가끔 지루할 때 가지고 놀기 좋은 상대라고 생각했다.
한편, 더원은 자길 빤히 바라보는 박민준을 보며, 머릿속이 점점 복잡해졌다.
‘날 죽이려고 온 것 같았는데. 대체 왜 살려준 거지? 뭐 때문에?’
돈?
여태까지 번 돈은 물론 더원 자신이 더 많을 것이다.
세계 최고 최강이란 타이틀을 가지고 정말 돈을 쓸어 담았으니까.
하지만 이제 남은 시간은 모두 박민준이 몫이었다.
‘나보다 더 많은 돈을 벌게 되겠지.’
그렇다면 명예는?
그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게이트가 열리고, 괴물이 끊임없이 나오는 세상에서.
세계 최고 레벨을 가진 최강의 S등급 헌터 박민준보다 더 유명한 사람이 과연 탄생할 수 있을까?
더원이나 다른 누군가가 다시 박민준을 꺾을 수 있다면 또 모를까?
‘하지만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것 같군.’
박민준을 직접 상대한 더원이 생각하기에는 그보다 더 강한 인간은 존재할 수 없었다.
그의 등장 이전에 자신이 인류의 마지막 진화이자, 최대한으로 강해질 수 있는 끝에 다다랐다 여겨온 더원이었으니.
‘지금도 나보다 약한 녀석들만 가득한 세상인데, 그런 나보다 훨씬 강한 저놈을 이길 수 있는 인간이 과연 있을까?’
생각에 잠겨있던 더원이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10년을 더 주고 수련하라고 해도, 상대를 이길 자신이 없었다.
그만큼 더원이 상대한 박민준의 무력은 압도적이었다.
한편, 박민준이 잠시 고민에 잠겼다.
‘저놈을 죽이기 아까워서 살려두긴 했는데, 이대로는 두고두고 귀찮게 되지 않을까?’
당장 다음 타깃인 미국의 수장을 처리하는 일도 힘들어질 테고.
저들에게 잡혀있는 이지원과 다른 사람들을 구하는 일도 어려워질 것이 분명했다.
‘우선 저놈을 통해 이지원이 갇혀 있는 장소만 알아내고, 그 뒤에 결정하는 게 좋겠다.’
상당히 변덕스럽지만, 여기서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차피 더원의 생사는 모두 박민준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
그리고 상대의 그러한 생각을 어렴풋이 알아차린 더원이었다.
뭔가를 결심한 그가 입을 일자로 굳게 다물고, 박민준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