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붉은 머리에 검은 셔츠와 앞트임이 돋보이는 롱스커트를 입은 여인.
옆에 있던 블랙 존슨도 그녀를 알아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시카? 왜 벌써 돌아왔어? 설마 일찍 임무 교대해 주려고?”
드디어.
미국에 있는 가족을 보러 갈 수 있는 건가?
잔뜩 기대한 그였는데.
“아니. 미안하지만, 다른 볼일 때문에 온 것뿐이야.”
“어쩐지. 네가 그럴 사람이 아니지. 그런데 한국에 무슨 볼일이 있어?”
“너 정말 아무것도 몰라서 계속 그렇게 묻는 거야? 줄곧 저자 옆에 있었잖아?”
“전혀. 저자가 나에게 뭘 말해주는 성격일 것 같냐?”
그녀가 박민준을 슬쩍 훔쳐봤다.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전혀 그렇진 않지.”
“그럼 네가 설명해봐. 대체 무슨 일이야?”
“그럴 순 없어. 아무것도 모른다면,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우리가 남이냐?”
“당연히 남이지. 네가 내 오빠는 아니잖아? 아빠는 더더욱 아니고.”
“젠장. 도대체 뭐라는 거야? 날 놀리는 거라면 성공했으니까. 어서 제대로 설명해봐.”
좀 모질게 말하긴 했지만, 그녀는 블랙 존슨을 안전하게 지켜주고 싶었다.
‘내가 속한 조직의 다른 일 때문에 저 좋은 녀석까지 위험에 빠뜨릴 순 없어. 그런 건 나와 저자로도 충분하니까.’
그의 말을 애써 무시한 그녀였다.
빙글 몸을 돌리더니.
박민준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
“진작 같은 편인 줄 알았다면, 애초에 당신을 노리지도 않았을 텐데.”
“같은 편? 왜 내가 너와 같은 편이지?”
“그럼 아닌가요? 당신이 갈랜드 박사님을 도와주기로 했다면서?”
“아니. 내가 아는 사람이 잡혀있다고 하길래 심심해서 구해주려는 것뿐이야. 나머진 관심도 없어.”
“방해만 없으면 게이트를 닫을 수 있게 될지도 모르는데?”
“이론일 뿐이지 않나? 확실하지 않은 일에 도박하고 싶진 않다.”
“확실해지면요?”
“그땐 그때 가서 생각해보도록 하지.”
“그나마 다행이군요, 아무튼, 이젠 출발하도록 하지요.”
반말과 존댓말이 번갈아서 나왔지만, 박민준은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제시카 로즈는 줄곧 영어로 말했고, 한국말은 통역기를 통해서 흘러나온 거였으니까.
‘의미만 통하면 되지 뭐.’
그렇게 두 사람이 떠나려는 걸 보고.
매우 당황한 블랙 존슨이었다.
“어이~ 정말 어디 가는 건데? 나만 두고 갈 거야?”
그새 차에 탄 제시카가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말했다.
“넌 여기나 지켜. 그게 나와 저 사람을 도와주는 일이니까.”
“내가 네 말을 왜 들어야 하는데? 나도 함께 갈 거야.”
무작정 따라나서려는 그를 향해.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남아서 내 가족을 지켜라.”
“알겠습니다.”
감히 박민준의 말은 거역하지 못한 블랙 존슨이었다.
짜증이 난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멀리 사라지는 제시카의 차만 바라봐야 했다.
그리고 잠시 후.
뭔가를 깨닫고 혼자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어느새 그 일본놈도 데려갔잖아? 대체 왜 나만 빼돌리는 건데?”
운전하던 제시카 로즈가 보조석을 힐끔 바라봤다.
선글라스를 낀 동양인 남자를 보고 중얼거렸다.
“차에 태우긴 했는데. 이자를 믿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네? 저 사람 부하면 한국인인가? 아니면 중국인? 설마 일본인은 아니겠지?”
이나즈마가 입을 일자로 꾹 다물고 절대 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박민준을 따라와야만 했다.
어제 갈랜드 박사가 다녀간 뒤로.
이타쿠라 청장과 박민준의 중간에서 가교역할을 하고 있었다.
박민준이 정보를 요청하고, 이타쿠라가 알아내서 이나즈마에게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다만, 그가 보내온 모든 자료가 일본어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걸 통역기를 착용한 이나즈마가 읽었던 것이다.
‘한국어로 번역해서 자료를 받는 것보다 이게 훨씬 빠르고 편하다. 급하게 번역하다 생기는 정보의 왜곡도 막을 수 있지.’
그 때문에 졸지에 박민준과 갈랜드 박사 사이의 일에 대해서도 어렴풋이 알게 되었고.
억지로 미국까지 끌려가게 되었다.
박민준은 이타쿠라에게 지속해서 정보를 받아야 했고, 그걸 통역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또한, 제법 많은 걸 알게 된 이나즈마를 한국에 혼자 남겨두면, 그가 중간에 배신하고 미국에 달라붙을 가능성도 있다.
미국의 기술과 의학이라면, 자신의 중독을 치료해 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이나즈마를 미국으로 데려가는 거로 그의 배신을 사전에 방지하는 효과도 있었다.
물론, 이 모든 일은 박민준과 이나즈마 사이의 비밀이었다.
한집에 사는 블랙 존슨에게 숨긴 건 물론이고, 이제 막 도착한 제시카 로즈에게도 절대 알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비밀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이지. 정보의 격차에서도 힘이 나오는 법이니까.’
갈랜드 박사는 물론이고, 경호원으로 만든 제시카 로즈도 이번 일 때문에 더욱 믿지 않게 되었으니까.
‘어느 쪽이 진짜 나쁜 놈들인지는 내가 직접 판단한다.’
한쪽 말만 듣고, 신뢰하는 일 따윈 전혀 하지 않을 박민준이었다.
‘그놈들을 직접 만나보고, 이지원을 구해내다 보면, 뭐가 진실인지 어느 정도 알 수 있겠지.’
한참을 달려서.
인적이 드문 장소에 차를 세운 제시카 로즈였다.
“다 왔어요.”
“여긴 공항이 아니잖아?”
“당연하지요. 당신이 미국에 가는 건 절대 비밀로 해야 한다고요.”
“그런 건 나도 알아. 하지만 비행기를 타야 미국에 갈 수 있잖아.”
“그래서 저기 저렇게 준비해뒀잖아요.”
그녀가 가리킨 방향을 동시에 살핀 이나즈마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것도 없이. 그저 넓은 평지만 눈에 들어왔으니까.
반면에 박민준은 눈을 가늘게 뜨고, 한참 허공을 응시했다.
“재밌군. 비행기 전체를 투명화시킨 건가?”
“어떻게 알았어요?”
박민준은 그녀의 호기심을 풀어주지 않았다.
그 때문에 약이 오른 제시카가 더욱 가까이 달라붙었다.
“아니. 진짜 어떻게 알았냐고요?”
“그게 그렇게 궁금해?”
“네. 밝은 낮이라면 모를까? 지금 같은 밤에는 비행기를 절대 맨눈으로 볼 수 없을 텐데.”
확신하는 그녀의 말을 듣고.
피식.
비웃은 박민준이었다.
“다른 놈들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나한테는 어림없지.”
“그래서 어떻게 알았어요?”
무려 세 번이나 질문했지만, 한 번도 대답을 듣지 못했다.
“네가 먼저 날 놀렸으니. 절대로 답해주지 않을 생각이다.”
“놀리긴 누가 놀려요? 그냥 우리 조직의 기술력을 자랑할 겸, 깜짝 놀라게 해줄 생각일 뿐이었는데.”
박민준도 사실 맨눈으로 봤을 때는 비행기가 있다는 걸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인기척을 느꼈지.’
아무것도 없는데 사람의 기운이 느껴진다면?
투명화를 했다는 것밖에 남지 않지.
박민준의 생각처럼.
비행기는 최첨단 기술로 기체를 투명화할 수 있었다.
제시카 로즈가 신호를 보내자, 스르륵.
날렵한 모습을 드러낸 검은색 비행기였다.
평소 일본의 기술력이 세계 제일이라고 여겼던 이나즈마지만, 지금은 그도 무척이나 놀랐다.
‘S등급 각성자인 내 눈을 속일 수 있을 정도란 말인가? 대체 어떤 조직이길래?’
비행기에 올라타고, 낮은 고도로 한국을 날아서 빠져나간 비행기였다.
눈에도 보이지 않고, 레이더 탐지에도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출발하고 난 뒤.
“따로 할 말이 있으니까. 다른 칸에 가 있어.”
“알겠습니다.”
그가 이나즈마를 쫓아내고 제시카 로즈를 가까이 불렀다.
“네 계획이 뭐지? 날 미국에 데려가면 바로 더원과 대통령 녀석을 만나게 해줄 수 있는 건가?”
“당연히 그건 아니지요. 당신이 말한 그 둘이 아무나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은 아니잖아요.”
“박사는 네가 날 그들에게 안내해줄 거라고 했는데? 이제 와서 말을 바꾸는 건가?”
“물론, 내가 최대한 당신의 일, 아니 우리 임무가 성공하도록 힘쓸 거예요. 하지만, 그건 무척 어려운 일이라는 건 알아주세요.”
박민준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때 세계 최고의 S등급 헌터 더원.
그리고 세계 최강 국가 미국의 최고 수장을 만나야 한다.
그것도 단순히 대화만 나눌 게 아니라, 흔적을 남기지 않고 그 둘을 처리해야 했으니.
그 과정에서 이지원을 비롯해 놈들에게 잡혀있을 조직원들도 구해내야 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지원만큼은 반드시 구할 생각이었다.
과거 태백시에서 위기에 처했던 조카 채영이를 구하는 일에 그녀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민준은 자길 도와준 사람을 절대 잊지 않는 사람이었다.
물론, 원한 또한 절대로 그냥 잊는 법이 없었고.
‘그나저나 이번 일은 무슨 첩보 영화를 찍는 것 같군. 미리 보드카 마티니라도 마셔야 하나? 젓지 말고 흔들어서?’
혼자 생각에 잠긴 그를 보며, 미소와 함께 고개를 가까이 들이민 제시카 로즈였다.
“뭐야?”
“그냥 무슨 생각을 갑자기 그렇게 오래 하나 싶어서요.”
“그렇다고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 들이밀어?”
“왜요? 나 때문에 심장이 갑자기 막 뛰고 그랬어요?”
제시카 로즈는 매력적인 여자였다.
건강미가 넘치던 수리남의 대통령 이자벨라와는 결이 다른 미녀라고 할까?
하지만 박민준의 심장을 뛰게 만들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다신 내 허락 없이 이렇게 가까이 다가오지 마라. 경고는 이번 한 번뿐이야.”
“또 그러면 어쩔 건데요?”
“네 머리를 박살 내 버릴지도 모르지. 아니면 목을 꺾어 버리든가.”
“둘 다 날 죽인다는 말이잖아요?”
“잘 알아들었군.”
순간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뒷걸음질 친 그녀였다.
그대로 박민준의 곁에서 멀리 떨어지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뭐 저런 놈이 다 있어? 나 같은 미녀를 보고 겨우 그딴 소리나 하다니? 혹시 고자인 건가? 나중에 블랙한테 물어봐야겠네.’
실제로 제시카가 박민준을 두고, 아예 다른 칸으로 가버렸다.
그리고 이나즈마가 돌아왔다.
“무슨 좋은 일이 있으셨나 봅니다?”
“뭐가?”
“방금 나간 여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던데요?”
“그거? 혼자 열 받아서 그런 걸 거야.”
“네? 그런 엄청난 미녀를 열 받게 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혹시 일을 치르려다 거기에 문제가 있어서?”
퍽!
박민준이 그의 다리를 걷어찼다.
그 통증이 얼마나 심한지.
순간 버티지 못하고 바닥을 나뒹군 이나즈마였다.
‘빌어먹을. 하마터면 다리가 부러질 뻔했네. ’
박민준이 잘 조절해서 때린 거였지만, 그는 자신이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쓰러져 있는 그를 다시 걷어찬 박민준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죽고 싶냐? 내가 널 너무 편하게 해줬나?”
“아닙니다. 다신 까불지 않겠습니다.”
“명심해. 내가 널 얼마든지 죽일 수 있어. 그냥 쓸모가 있으니까 살려두는 것뿐이라고.”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알았으면 어서 일어나. 아니면 미국까지 계속 누워있게 만들어 줄까?”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나즈마가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일어났습니다. 제발 때리지 마십시오.”
“누가 보면 내가 널 괴롭히고 싶어서 때린 줄 알겠다. 잘못은 네가 먼저 했는데?”
“맞습니다. 제가 잘못해서 맞은 겁니다.”
매가 약이라고.
바짝 군기가 든 이나즈마를 두고 본론으로 들어간 박민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