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배를 띄워도 될 만큼 크고 아름다운 인공호수라니.
‘수영장도 아니고 이런 걸 집에다 꾸몄단 말이야? 빌어먹을. 오늘 돌아가면 나도 하나 만들라고 해야겠군.’
쓸데없는 일에 박민준과 경쟁심을 느끼며, 그가 계속 정원을 가로질렀다.
마침.
박민준은 집 앞에 나와 있었다.
조카 채영이의 수련을 돕고 있었는데, 최현민이 다가와도 슬쩍 한 번 바라볼 뿐.
전혀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히려, 김채영이 그를 먼저 알아봤다.
“설마? 최현민 선배님?!”
“뭐야? 네가 아는 사람이야?”
“당연히 알지요. 저분이 바로 한국 최초 S등급 헌터 최현민 선배님이시잖아요.”
“최초? 그렇게 늙어 보이진 않는데?”
게이트가 열린 지, 벌써 20년이 지났다.
그러니, 한국 최초라고 하면 적어도 십수 년, 어쩌면 20년은 되어야 맞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고 말한 박민준이었다.
“당연하지요. 저분은 13년 전에 각성한 분이시니까요. 그리고 아직 삼십 대로 알려져 있는걸요?”
“그래? 어쩐지. 나보다 더 어린놈이었구나. 근데 왜 수련을 멈춘 거야?”
“죄송해요. 갑자기 저분을 보고 놀라서 그만.”
“뭐가 대단하다고. 알았으니까. 어서 계속해.”
“네. 외삼촌.”
잠깐 놀라긴 했지만, 김채영이 다시 평정심을 되찾고 수련에 몰두했다.
박민준이 뒤늦게 최현민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뭘 그렇게 보는 거지? 내가 너무 잘생겼나?”
제 딴에는 긴장을 풀고, 여유 있게 말한 거였는데.
그런 최현민을 무시한 박민준이 자기 말만 했다.
“제법 쓸만한 놈이구나. 생긴 건 기생오라비 같아서 별로인데, 근골이 정말 좋아.”
“뭐? 기생오라비? 너 미쳤냐? 어디 하늘 같은 선배를 보자마자 막말이야?”
“선배? 무슨 개소리인지 모르겠군. 너 여기 어떻게 들어왔냐? 방수열이 보낸 거면 어서 그놈 말이나 전해.”
“방수열? 설마 그 방수열을 말하는 건가? 내가 방 부장의 명령을 왜 들어? 설마 내가 누구 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사람으로 보였나?”
“아니면, 꺼져. 당장 내 집에서 나가.”
그 말을 듣고.
결국, 화가 폭발했다.
최현민이 눈알을 부라리며, 얼굴을 구겼다.
“선배로서 좋게좋게 하려고 했는데. 더는 못 참겠다. 네가 자초한 일이니. 각오해라.”
혼자 악을 쓰는 최현민이었지만, 박민준은 그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뭐야? 감히 날 앞에 두고 한눈을 팔아?”
상대가 자기를 무시한다고 생각한 그가 무력행사에 나서려던 그때.
뒤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죄송합니다. 너무 당당하게 초인종을 누르길래. 손님인 줄 알았습니다.”
누굴까?
분명 아무도 없었는데?
속으로 깜짝 놀란 최현민이 빠르게 몸을 돌렸다.
한쪽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 남자가 보였다.
“착각할 수도 있지.”
“이해해 주시다니. 참으로 너그러우시군요.”
“내가 원래 마음이 넓어.”
“감사합니다. 그럼 저 쓰레기는 제가 알아서 치우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박민준과 낯선 남자의 대화를 듣고.
“허허. 지금 누굴 보고 쓰레기라고 하는 거지? 보아하니 저놈 부하 같은데, 사람 잘못 봤다. 나 최현민이야. 한국 최강 최초 S등급 헌터 최현민이라고.”
잔뜩 거들먹거리는 그를 향해.
“나도 안다. 그리고 너도 날 알고 있지. 그렇지 않나?”
중얼거리며 고개를 치켜든 이나즈마였다.
“뭐?”
처음엔 어리둥절했던 최현민이 상대를 알아봤다.
“어? 넌…. 이나즈마? 네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쓸데없이 너와 대화를 나눌 생각 따윈 없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손을 빠르게 앞으로 내민 이나즈마였다.
빠지직!
작게 스파크가 일어나는 걸 보고.
얼굴을 있는 대로 구긴 최현민이었다.
“이런 미친놈이! 감히 날 공격해? 좋아. 너부터 상대해주마.”
그가 최대한 빠르게 몸을 뒤로 날렸다.
하지만, 인간이 전기보다는 빠르게 움직일 수 없는 법이었으니.
그대로 이나즈마의 특기에 당해버렸다.
‘빌어먹을. 저놈이 이나즈마라는 걸 미리 알았다면, 내가 이렇게 허무하게 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최현민은 나름대로 경험이 많았다.
그래서 이나즈마의 특기도 미리 알고 있었고, 처음부터 그를 상대할 생각이었다면, 이렇게 가까이 서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박민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를 청하는 남자가 설마 일본의 대표 S등급 헌터 이나즈마일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지금도 이렇게 직접 자기 눈으로 보고 있지만, 최현민은 비현실적인 상황을 쉽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대체 저놈이 언제부터 박민준 저 자식의 부하가 된 거지? 어떻게? 왜?’
아무리 생각해도 박민준과 이나즈마 사이의 접점이 없었다.
머릿속이 잔뜩 복잡해진 그의 앞에 또 다른 한 사람이 나타났다.
2대8 금발 머리를 한 중년 남자였다.
‘저자는 또 뭐야? 저놈이 일본놈에 이어 서양놈까지 끌어들인 건가?’
이나즈마에게 당해서 몸이 굳어버린 최현민이었다.
고개를 돌리지 못하는 상황에서 간신히 금발 머리 남자의 정체를 확인하고는.
‘헉! 스폐셜 쓰리의 블랙 존슨이잖아? 저자가 한국에 들어왔다는 말을 들었었는데. 그 목적이 박민준을 만나기 위해서였나?’
거기다 여태 출국하지 않고, 이 집에서 지내고 있었다니.
스폐셜 쓰리가 지닌 세계적인 높은 명성에 비하면, 최현민은 두 수 아래였다.
당장 일본의 이나즈마만 해도, 왕성한 활동으로 최현민과 동급이라고 소문나고 있었는데.
이젠 블랙 존슨까지 나타나다니.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연이어 엄청난 충격에 빠진 최현민의 귀에,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블랙 존슨의 말이 들려왔다.
“제가 너무 늦게 온 것 같군요. 정말 죄송합니다.”
“괜찮아. 밖을 지키는 건, 이나즈마 저놈의 일이니까. 넌 집안만 잘 지키면 돼.”
“그렇게 말씀해주시다니. 마음이 좀 놓이는군요. 감사합니다.”
세상에.
스폐셜 쓰리가 지금 누구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사과하고 있는 거지?
‘저자가 미쳤나?’
최현민은 자기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편, 한쪽에서 수련하던 채영이 슬쩍 동작을 풀며 끼어들었다.
“외삼촌. 저 사람을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어떻게 하다니? 어른들 일에 끼어들 생각이라면 그만둬라.”
“저도 어른이거든요. 그리고 혹시라도 저 사람을 죽일 생각이라면 절대 그러지 마세요.”
“어째서?”
“지금 보니 싸가지가 없고, 재수도 없지만, 그래도 한국에 나타나는 괴물로부터 사람들을 지켜주는 헌터니까요.”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넌 계속 수련이나 해.”
“알았어요.”
둘의 대화를 듣고,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진 걸 실감한 최현민이었다.
‘내가 내 무덤을 스스로 판 건가?’
이렇게 엄청난 인간들이 저놈 주변이 있는 줄 알았다면, 이렇게 정면돌파를 시도하지 않았을 텐데.
분명, 천천히 시간을 두고 기다리면서, 박민준이 혼자 있을 때 일대일 승부를 봤을 것이다.
억울함과 분노가 공존하는 최현민의 눈동자를 보고, 박민준이 마음을 바꿨다.
원래 그의 계획은 방수열을 불러서, 제압한 최현민을 넘길 생각이었다.
‘조카 녀석 말처럼 한국에 괴물이 계속 출현할 테니까. 저놈이 죽으면 민간인의 피해도 늘어나겠지.’
그래서 두 번 다시 이딴 짓을 벌이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무단 침입과 휴식을 방해한 것에 대한 위로금을 왕창 뜯어내려 했었는데.
‘저놈 눈을 보니. 겨우 그 정도로는 안 되겠네.’
박민준이 이나즈마에게 명령했다.
“야. 저놈에게 건 기술을 풀어.”
“네?”
“다시 움직일 수 있게 하라고.”
“알겠습니다.”
이나즈마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의 명령에 따랐다.
빠지직.
전기로 최현민의 몸을 다시 자극해서, 신경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게 만들었다.
잠시 움직이지 못했던 후유증 때문에 최현민은 온몸이 뻣뻣했다.
그가 주위의 눈치를 잔뜩 보면서 천천히 몸을 풀었다.
“저 쪽발이에게 날 풀어주라고 말한 건. 네가 직접 날 상대하겠다는 의미겠지? 그렇지 않나?”
“맞아. 네놈을 내가 직접….”
자신이 먼저 말을 걸어놓고.
상대가 대답하는 틈을 타서 기습 공격을 시도한 최현민이었다.
휙!
빠르게 몸을 날린 그가 손바닥을 쫙 펴고 앞으로 내밀었다.
“마력파!”
최현민이 각성하면서 얻은 특기.
자신이 현재 지닌 마력의 절반을 손에 담아 쏠 수 있었다.
흡사 용공 만화의 캐릭터들이 사용하는 기술처럼 두 손을 모아서 쓰는 게 최현민의 시그니처 포즈였으니.
이나즈마나 블랙 존슨조차 놀라서 혀를 내두를 정도로 엄청난 기운이 계속해서 그의 손에 집중되고 있었다.
“엄청나다! 저게 말로만 듣던 마력파인가? 과연 과거 한국 최강이라고 불릴 만하군.”
“어이쿠. 저걸 아까 나한테 먼저 쐈다면 골로 갔겠는데. 먼저 제압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군.”
순수하게 감탄하는 두 사람과는 달리.
조카 채영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외삼촌! 막으려 하지 말고 어서 피하세요.”
그녀의 말을 신호탄처럼 사용하듯.
번쩍!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 빛과 함께.
최현민의 손바닥에서 마력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조카의 경고를 들은 박민준이었지만, 전혀 피할 생각 따윈 없어 보였다.
그는 그저 가볍게 오른팔을 들고, 앞으로 내밀 뿐이었다.
나름대로 강한 측에 속하는 S등급 헌터의 마력 절반이 담긴 공격.
어지간한 6등급 괴물은 물론이고, 7등급 괴물에게도 타격을 줄 수 있을 만한 힘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마력파의 기운이 박민준의 손끝과 마주한 순간.
콰콰콰콰쾅!
산사태가 일어난 듯한 굉음이 크게 울려 퍼졌다.
귀를 때리는 폭발음에 비해서, 흙먼지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걸 맨손으로 받아낸 박민준 또한, 별다른 표정을 보이지 않고 있었으니.
오히려, 옆에서 구경한 세 사람과 당사자인 최현민의 표정이 극적으로 변했다.
먼저 블랙 존슨과 이나즈마의 경우.
박민준을 먼저 상대한 경험 때문에, 그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났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 피해는 있을 줄 알았는데. 저렇게 멀쩡하다니. 진짜 사람이 맞긴 한 건가?”
“두렵다. 해독제 때문이 아니더라도, 앞으로 평생 저자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구나.”
조카 채영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세상에. 빌딩을 통째로 날려버릴 만한 기운이 느껴졌었는데. 그걸 그냥 막았어? 아무리 외삼촌이라고 해도, 저런 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그리고.
최현민은 그저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다.
“뭐야? 마력파를 그냥 막았어? 어떻게?”
그 누구보다 제일 가까이에서 직접 보고도. 방금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만이 그의 얼굴에 가득했다.
한편, 엄청난 마력파을 받아낸 박민준은?
속으로 기뻐하는 중이었다.
‘혹시 가능할까 싶었는데. 정말로 성공하다니.’
상대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성공한 것뿐만 아니라, 그 안에 담긴 기운의 일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이건 단순히 그가 기존에 익힌 무공의 응용이 아니었다.
최근 휴식을 취하면서 새롭게 읽기 시작한 비급에 담긴 내용이었으니.
한편, 최현민이 이를 바드득 갈고, 소리쳤다.
“이럴 순 없어! 이건 뭐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거야. 믿을 수 없다고!”
다시 혼자 발악하는 그를 향해.
박민준이 가볍게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이게 끝인가? 날 더 재밌게 해줄 수 없다면 이젠 내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