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넌 집 지키는 개를 시키면 딱 맞을 것 같군.”
“네? 뭐라고요?”
이나즈마는 순간 상대의 통역기가 고장이 난 줄 알았다.
박민준이 한국말을 하면, 그의 목에 부착된 작은 원형 기계에서 일본어가 통역되어 나왔으니.
“네놈을 죽이지 않는 대신 내 집을 지키란 말이다.”
“아니. 나보고 그런 하찮은 일을 하란 말입니까? 내가 누군지 모릅니까? 나 이나즈마입니다. 일본에서 넘버원의 자리를 앞다투는 S등급 헌터란 말입니다.”
얼마나 억울하고 황당했는지.
이나즈마가 엄청난 속도로 말을 쏟아냈다.
그런 그에게 박민준이 짧게 되물었다.
“그래서 싫다고?”
당연히 싫다고 대답하기 전.
박민준과 눈이 마주친 이나즈마였다.
‘여기서 말을 잘못하면 난 죽는다.’
순간 몸이 싸늘하게 식는 걸 느꼈다.
그가 고개를 빠르게 좌우로 저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닙니다. 제가 잠시 잘못 생각했었습니다. 당신의 집을 지키는 일은 매우 명예롭고 훌륭한 일이지요.”
“죽기 싫으면 당연히 그래야지.”
“네네. 물론입니다.”
그렇게 이타쿠라 청장을 죽이는 대신 정보를 받기로 했고, 이나즈마를 살려주는 대가로 경비 일을 맡긴 박민준이었다.
***
주말이 되고.
집으로 돌아온 김채영이었다.
거실에서 박민준을 만나자마자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외삼촌. 우리 집 근처에 이상한 사람이 서성거리고 있어요.”
“이상한 사람?”
“네. 햇빛도 없는데, 선글라스를 끼고, 은색 정장을 입고 있었어요.”
조카가 말하는 사람의 복장에 대해 듣고.
굳어있던 얼굴을 푼 박민준이었다.
“그거 내가 새로 들인 경비원이야.”
“경비원이요? 근데 뭔가 이상하면서도 굉장히 강해 보이던데? 정체가 뭐예요?”
“이름이 이나즈마라고 하던데.”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네요?”
“그놈이 말하길, 자기가 일본에서 좀 유명하다고 하더라.”
“설마? 외삼촌이 말하는 이나즈마가 그 일본의 S등급 헌터 이나즈마는 아니겠죠?”
“맞을걸?”
“세상에. 그게 어떻게 가능해요? 그 사람이 왜 우리 집 경호원을 해요.”
아오야마 겐조 사망 이후.
일본에서 가장 떠오르고 있는 S급 등급 헌터 이나즈마였다.
헌터계에 몸을 담고 있는 그녀로서는 놀라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으니.
놀라서 토끼 눈이 된 조카의 말을 듣고.
단어를 정정해주는 박민준이었다.
“경호가 아니라 경비야. 당분간 우리 집 밖에만 지키고, 집안엔 들이지 않을 생각이거든. 외부시설 관리인이라고 할까?”
“왜요? 그는 굉장한 사람이잖아요? 아시아 최강 10인이라고도 불리던데.”
“내가 아직 그놈을 믿을 수 없으니까.”
“아니, 믿을 수 없는 사람에게 경비 일은 시켜도 돼요?”
“어. 돼. 내가 절대 배신하지 못하도록 상황을 만들어놨거든.”
“어떻게요?”
“그런 게 있어.”
“그러니까 그게 뭔데요?”
“어린 애는 알 필요 없어.”
“떳떳하지 못한 방법이에요? 설마 협박이라도 한 거예요?”
“협박이라니? 내가 그놈에게 자비를 베푼 거야.”
“자비요?”
“그래 원래는 수문이를 훔쳐 간 죄 때문에 진작 죽었어야 할 놈을 내가 살려준 거니까.”
“아. 그렇다면 말이 되지요. 그나저나 엄마는 어딨어요?”
피는 못 속인다고 했던가?
박민준의 조카여서 그런지.
이나즈마의 처지에 대해 쉽게 이해하고 넘어간 그녀였다.
“주방에서 뭐 만들고 있다고 하던데?”
“아. 그래요?”
나머지 가족에게 인사를 마저 하려던 그녀가 주방으로 들어갔다.
“엄마……. 어머. 깜짝이야! 이 사람은 또 누구예요?”
“딸 왔어. 뭘 그렇게 놀라.”
“당연히 놀라지요. 모르는 외국인이 갑자기 주방에 서 있는데.”
“이 사람? 민준이가 경호원이라고 데려왔어. 이름이……. 내가 그새 까먹었네.”
둘의 대화를 듣고, 그가 미소를 날리며 자기소개를 했다.
“스폐셜 쓰리의 블랙 존슨입니다. 그나저나 박민준 씨의 조카분이 이렇게 아름다우실 줄은 미처 몰랐군요. 어머니를 똑 닮았습니다. 하하하.”
“존슨 씨도 참.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우리 채영이가 젊은 시절 나하고 판박이라니까요. 호호호.”
김채영이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
“뭐예요? 지금 스폐셜 쓰리의 블랙 존슨이 우리 집의 경호원을 하고 있다고요? 거기다 두 분이 왜 그렇게 친해 보이는 건데요?”
블랙 존슨이 칭찬이라도 받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또 씨익 웃었다.
“친해 보이다니? 그것참 다행이군요.”
“네? 다행이라고요?”
“박민준 씨 가족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제가 많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김채영 양.”
“아……. 네. 근데 진짜 스폐셜 쓰리의 그 블랙 존슨 씨가 맞는 거지요?”
“물론입니다. 그런데 절 몰라보다니. 혹시 선글라스를 껴서 그런가?”
그가 화보를 찍듯이 천천히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리고 김채영을 향해 느끼한 미소를 또 날렸다.
“내가 알던 그 얼굴이 맞네요. 근데 아까부터 표정이 왜 그러세요?”
“제 표정이 뭐가 어떻다는 겁니까?”
“너무 느끼해요. 버터에다 밥 비벼 먹는 느낌이에요.”
“곧 익숙해지실 겁니다. 채영 양의 어머니께서 금방 익숙해지셨거든요.”
“엄마가요?”
딸의 시선을 받은 박민희가 멋쩍은 듯 웃었다.
“그래. 실은 나도 저 사람이 너무 느끼해서 처음엔 싫었거든. 근데 사람이 좋더라. 말도 듣기 좋게 하고.”
“감사합니다. 민희 씨.”
“사실을 말한 건데요. 뭐.”
김채영은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아니. 일주일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그 유명한 일본의 이나즈마와 미국의 스폐셜 쓰리 블랙 존슨이 동시에 우리 집에 있다니?’
이 모든 일의 장본인인 박민준은 지금.
거실 소파에 누워서 배를 긁고 있었다.
‘알다가도 모르는 게 세상일이라더니. 저렇게 보면, 그냥 백수 같은 외삼촌인데.’
실종되었다 돌아온 이후.
박민준은 딱히 직업을 구하지 않았다.
그저 지구에 나타난 괴물을 몇 마리 처리한 일이 전부였다.
물론, 그 괴물이 고등급이라서, 다른 헌터들이 쉽게 처리할 수 없었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엄청난 피해가 생긴 뒤에야 수습했을 터.
‘그렇게 생각하니까. 또 달리 보이네. 외삼촌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구나.’
***
한국 최초 최강 S등급 헌터 최현민.
세계 최연소 S등급 각성자 이지원의 등장 이후.
그의 인기가 잠시 주춤했지만, 실력으로 지지율과 인기를 다시 복구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한국에서 왕 노릇을 하며 편하게 지냈는데.
박민준이란 놈이 불쑥 나타나 그의 인기를 모조리 빼앗아가 버렸다.
그리고 지금.
오랜만에 찾아온 방송국 사람과의 인터뷰에서 그가 질문을 받더니.
순간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박민준 씨의 연이은 국내외 활약에 관해서 전임 한국 최강 S등급 헌터로서 최현민 씨에게 한마디 듣고 싶은데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전임? 지금 나보고 전임 한국 최강이라고 말한 건가? 감히?! 그럼 지금은? 내가 한국 최강이 아니라는 건가? 그놈이 한국 최강이라는 거야?”
그의 싸늘한 목소리를 듣고.
MC를 맡은 여인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했다.
“죄…. 죄송합니다. 저는 그냥 대본에 적힌 대로 질문했을 뿐이에요. 절대 제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었어요.”
“그래? 그럼 그 대본을 쓴 놈은 어디 있나? 지금 여기 있을 텐데?”
찾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유난히 불안한 얼굴로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는 마른 남자를 볼 수 있었다.
성큼성큼 걸어서 그의 앞에 도착한 최현민이었다.
“너냐? 네가 저따위 대본을 쓴 거야?”
“네? 그게…. 죄송합니다. 저는 그냥….”
“그냥 뭐? 똑바로 말해. 아니면 이 자리에서 목을 비틀어 버릴 거니까.”
꿀꺽.
마른 침을 삼킨 방송국 작가가 더욱 심하게 몸을 떨며 말했다.
“최근에 전혀 활동하지 않은 최현민 씨와는 달리, 박민준 씨는 국내외에서 고등급 괴물을 연이어 사냥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다들 그렇게 생각한다고 여기고 대본을 쓴 건데…. 아무튼 죄송합니다.”
살고 싶은 생각에 속사포처럼 말을 뱉어낸 남자를 보고.
의외로 표정이 풀린 최현민이었다.
“내가 최근에 좀 오래 쉬긴 했지. 하지만, 여전히 내가 한국 최강이야. 활동을 재시작하면 금방 내가 최고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게 될 거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당연히 당신이 한국 최초이자 최강의 S등급 헌터이시지요.”
그 말을 듣고, 다시 불쑥 화를 낸 최현민이었다.
“거짓말! 정말 그렇게 생각하면 왜 몸을 개 떨듯 떠는 건데? 거짓말이니까 그런 거지?”
“아닙니다. 전 그냥. 당신이 무서워서, 너무 존경해서 이러는 것뿐입니다. 이건 제가 억지로 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 그럼 다행이고.”
방송국 작가의 멱살을 풀어준 그가 혼자 생각에 잠겼다.
‘처음 그놈이 등장했을 때. 바로 짓밟아놨어야 하는 건데.’
최근 박민준이 해외에서 벌인 7등급 괴물 사냥이 모두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뉴스와 함께.
이젠 최현민과 박민준의 인기는 반딧불과 태양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급격하게 기울어졌다.
이에 위기를 느낀 그가 행동에 나서기로 했다.
“더는 이대로 두고 볼 순 없지. 사람들에게 누가 진짜 한국 최강의 헌터인지. 그걸 다시 일깨워줄 때가 온 것 같군.”
독하게 마음먹은 최현민이 박민준을 만나려고 했다.
그렇게 박민준의 집 앞에 모습을 드러낸 그였다.
처음엔 부하들을 모조리 끌고 와 기세를 제압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무궁화 마을의 보안 문제로 출입을 거절당했으니.
아무리 S등급 헌터라고 해도, 예외는 없다는 말과 함께 그 혼자만 들어올 수 있었다.
“여긴가? 활동을 개시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놈 주제에 정말 좋은 집에 살고 있었군.”
한국에서 제일 비싼 집을 소유하고 있는 최현민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와 보니.
자기 집 못지않게 박민준의 집도 무척이나 넓고 좋아 보였다.
평소 같으면 문을 박살 내고 들어갈 텐데.
나름대로 자신이 헌터 선배였으니.
‘후배에게 체면을 지켜야겠지. 뭐, 직접 만나서 건방지게 굴면 그땐 할 수 없지만.’
그런 상황을 일부러 만들 생각이면서, 우선은 점잖은 척, 그가 초인종을 눌렀다.
띵 동!
“박민준 씨 안에 있습니까?”
“누구신데요?”
“저는 최현민이라고 합니다.”
“누구요?”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자길 한눈에 알아 봐주는 사람들 사이에서 지내온 그였다.
그런데 이름을 직접 밝혔음에도 못 알아보는 중년 여인의 목소리를 듣고, 그가 살짝 열 받았다.
‘뭐야? 이 아줌마. 일부러 날 모르는 척하는 건가?’
그가 인터폰 화면에 자신의 얼굴이 더 잘 보이도록 가까이 가져갔다.
그리고 목소리도 높였다.
“헌터 최현민입니다. 박민준 씨가 안에 있으면 지금 좀 만나고 싶습니다.”
“아. 헌터 최현민 씨라고요? 이제 누군지 생각났네. 우리 민준이 지금 집에 있어요. 바로 문 열어 드릴게요.”
장미령도 최현민을 알고 기억할 정도로.
그의 명성과 인기는 굉장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최현민이 그저 자기 아들과 함께 일하는 동료 정도로만 생각하고, 문을 열어줬을 뿐.
엄청난 인기를 지닌 사람이라 찾아와서 문을 열어 준 게 결코 아니었다.
그걸 모르는 최현민은 뒤늦게 자길 알아봐 준 여인의 목소리에 불쾌한 감정이 바로 날아가듯 사라져버렸다.
철컥.
문이 열리고.
뭔가를 본 최현민이 충격받은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