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입 열지 마. 바보야. 너 그러다가 죽는다.”
곧장 그에게 경고한 박민준이었다.
‘거기다 나까지 위험해진단 말이지.’
기를 운용하느라 뒷말은 하지 못했다.
다행히, 경각심을 느낀 블랙 존슨이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는 박민준의 손바닥이 닿은 부위로부터, 엄청난 양의 마력이 자신의 몸속으로 흘러들어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이건 정말 엄청나다. 이토록 순수하고 맑은 마력이라니? 끝도 없이 내 몸을 가득 채우고 있어.’
이런 기운을 가진다면, 어느 누구와 싸워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박민준을 보고 바로 사라졌다.
‘그래. 저 인간은 빼고. 다른 그 누구라도 이길 수 있을 듯싶다.’
잠시 후.
박민준이 그의 몸에서 손을 뗐다.
동시에 블랙 존슨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눈에는 황홀경이 엿보였다.
“내 능력으로 이런 일이 가능하다니.”
“야! 시간 없어. 그만 감동하고 어서 말해.”
“네. 모든 걸 봤으니. 이제부터 제가 모시겠습니다. 가시지요.”
먼저 앞장선 블랙 존슨의 발길이 이전보다 더 빠르고 힘이 넘쳤다.
박민준의 기운이 아직 그의 몸속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서 도착한 곳은 인천항이었다.
블랙 존슨이 외국 선박을 가리키며 말했다.
“제가 본 약속 장소가 바로 여기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저 배를 타고 한국을 떠나 일본으로 갈 겁니다.”
선미(船尾)에 일본어가 적혀 있었는데, 두 사람 다 일본어를 몰랐다.
블랙 존슨도 일본 글자를 그림처럼 기억해서 말한 거라, 확실하지 않다고 말한 거였다.
눈을 가늘게 뜬 박민준이 배 주변을 살폈다.
야구 모자를 눌러 쓴 남자 두 명이 배 앞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대놓고 총을 들고 있지는 않았지만, 박민준은 그들이 몰래 무기를 지니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상체와 허리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럽다. 장총이나 검 같은 무기를 옷 속에 숨겼군.’
블랙 존슨이 성큼성큼 걸어서 그들에게 다가가려 했다.
“아직 출항하지 않을 걸 보니. 다행히 우리가 먼저 도착한 모양입니다. 제가 가서 저놈들을 제압하겠습니다.”
박민준이 서둘러 그를 말렸다.
“가만있어.”
“어째서 말입니까?”
“그놈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잖아. 혹시라도 이상한 낌새를 느끼면 멀리서 보고 도망쳐 버릴지도 몰라.”
“아. 듣고 보니. 당신 말이 맞습니다. 제가 너무 쉽게 생각했군요.”
“알았으면, 녀석이 나타날 때까지 조용히 찌그러져 있어.”
“네.”
그의 말을 듣고, 어깨가 축 늘어진 블랙 존슨이었다.
‘누구 덕분에 여기까지 온 건데. 고마운 줄도 모르고, 날 아주 못 괴롭혀서 안달이네. 말 좀 좋게 해주면 안 되나?’
박민준은 중년 미남자의 투정 같은 건 관심도 없었다.
그저 배와 진입하는 경로를 번갈아 살필 뿐이었다.
잠시 후.
검은색 세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앞서 공터에서 봤던 것과 같은 차종은 아니지만, 일본 자동차였다.
***
목적지에 도착한 이나즈마가 조심스럽게 차창 밖을 살폈다.
‘아무 문제도 없군. 내려도 안전하겠어.’
별다른 일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난 뒤에야 그가 차에서 내렸다.
그러곤 트렁크 문을 열더니.
배를 향해 소리쳤다.
“뭘 보고 서 있는 건가? 어서 이쪽으로 와서 물건을 배에 실어라.”
“네! 알겠습니다.”
최신형 통역기의 성능이 얼마나 좋은지.
사방이 조용한 덕분에 박민준과 블랙 존슨이 목에 부착한 통역기가 일본어를 듣고 통역해냈으니.
두 사람은 저들이 하는 말을 곧장 알아들을 수 있었다.
배 앞에 서 있던 남자 두 명이 서둘러 차량으로 뛰어왔다.
트렁크에서 큰 상자를 꺼내서 배로 옮기려 했다.
크기가 남다르게 큰 아이스박스 형태의 상자에 건장한 성인 남자들이 힘들여서 드는 걸 보면, 무게가 상당할 터.
미약하게 수문이의 기운도 느낄 수 있었다.
‘저기 갇혀있구나. 그런데 상태가 좀 이상한데?’
고개를 갸웃한 박민준이 드디어 행동에 나섰다.
휙!
블랙 존슨은 금방 자기 옆에 있었던 그가 사라지자 화들짝 놀랐다.
‘아니. 말도 없이 사라졌어?’
잠시 두리번거린 그는 세단 앞에 서 있는 박민준을 발견할 수 있었다.
‘뭐가 저렇게 빨라? 순간이동 각성자라도 해도 믿겠네. 아무튼, 나도 가만있을 순 없지.’
지금은 박민준 때문에 가드 일이나 하고 있지만, 그도 명색이 스폐셜 쓰리의 일원이었다.
‘오랜만에 실력 발휘 좀 해 볼까?’
그렇게 그가 차로 다가갔는데.
도착해보니.
“뭐야? 벌써 다 끝났잖아?”
목소리를 듣고 힐끗 뒤를 돌아본 박민준이었다.
“동작이 그렇게 굼떠서야. 진짜 여태 어떻게 살아남은 거야? 그런 명성은 거저 얻은 건가?”
“아니. 내가 느린 게 아니라, 당신이 미치도록 강하고 빠른 겁니다. 아 놔. 이거 말해놓고 나니 억울하네.”
그런 그를 무시하고, 박민준이 이나즈마에게 다가갔다.
이나즈마는 지금 무척 화가 나고, 한편으로는 어리둥절한 상태였다.
갑자기 나타난 상대의 습격에 미처 제대로 된 대응 한 번 못해보고 당해버렸으니.
가볍게 내지른 주먹 한 방에 전신의 힘이 빠져버렸다.
바닥에 주저앉아서 고개를 쳐들어 보니.
그 적의 정체가 박민준이라는 걸 알았고, 그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강한 의구심도 들었고.
‘여길 어떻게 알고 온 거지? 미행은 분명 없었는데.’
이곳까지 오는 동안, 그 어떤 추적도 확인하지 못했다.
밤이 늦어서 뒤따라 오는 차량은커녕, 사람 구경조차 거의 하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목적지에 도착해서 떡하니.
자신이 훔친 괴물의 주인이 나타났으니.
그것도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었고, 심지어 동행인이 그 유명한 스폐셜 쓰리의 블랙 존슨인 것까지 알아봤다.
이쯤 되니.
이나즈마는 배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이타쿠라 청장이 날 팔아넘긴 건가? 하지만 왜?’
괴물을 들키지 않고 무사히 훔쳤다고 그에게 미리 보고까지 했는데, 어째서 자신을 배신 한 걸까?
그의 머릿속이 잔뜩 꼬인 줄처럼 어지러워지던 그때.
박민준의 차가운 목소리가 그의 귀에 날카롭게 박혔다.
“감히 겁도 없이. 내가 집에 없는 틈을 노려서, 내 물건을 훔쳐?”
다 알고 온 적에게 변명해봤자 아무 소용없다는 걸.
이나즈마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상대가 방심하는 순간을 기다렸다가…….
‘지금이다!’
자신의 각성 특기를 사용했다.
빠지직!
이나즈마의 손끝에서 작은 스파크가 발생했다.
“전기? 겨우 저 정도로는 건전지 충전이나 할 수 있겠는데?”
그걸 본 박민준이 대놓고 비웃었다.
하지만 미세한 전류가 그의 몸에 닿은 순간.
접촉한 부위부터 감각이 없어지는 걸 느꼈다.
박민준의 점혈 수법과는 다르지만, 타인의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만드는 종류인 건 분명했다.
‘요즘 따라 신기한 기술을 가진 놈들이 계속 나타나는군.’
오른쪽부터 점점 넓은 부위가 마비되는 걸 알고, 박민준이 내공을 운용했다.
앞서 보드카의 기술을 막아냈던 것처럼 이번에도 쉽게 상대의 기술을 무효화 할 수 있었다.
가만히 서 있는 박민준을 보고, 이나즈마가 히죽거렸다.
“흐흐. 어떠냐? 꼼짝도 못 하겠지? 아무리 네놈이라고 해도 내 기술에는 당해낼 수 없……. 어? 뭐야?”
상대가 멀쩡히 움직이는 모습에 순간 자기 눈을 의심한 그였다.
“어떻게 된 거야? 분명 내 기술에 당했을 텐데?”
“잠시나마 재밌긴 했어. 하지만 그런 잡기술이 나에게 정말 통할 거라고 생각했냐?”
“내 이나즈마 기술은 무적이야. 단 한 번도 날 실망시킨 적이 없는데. 대체 어떻게?”
일본어로 번개를 뜻하는 이나즈마는 당연히 그의 본명이 아니었다.
실제 이름은 류이치 신이었다.
손끝으로 작은 전기를 만들어내서 상대의 신경을 차단하는 게 그의 각성 특기였다.
그걸 아주 거창하게 번개, 즉 이나즈마라고 스스로 이름 지었던 거였고.
지금까지 100%의 성공률을 보장해왔다.
심지어, 박민준의 집에서 납치한 7등급 괴물의 새끼마저, 부하들이 목숨을 잃는 사이.
그의 기술로 괴물을 제압하는 데 성공했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내 기술이 막혀버렸다고?’
상황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를 향해.
박민준이 가볍게 손을 뻗었다.
팍!
둔탁한 소리와 함께.
몸이 빳빳하게 굳어버린 이나즈마였다.
“이건 또 뭐야? 너도 신경차단 스킬을 가졌던 것이냐?”
“아니. 이건 점혈이야. 네 그 조잡한 기술보다는 조금 더 나아 보이지?”
“흥! 웃기는 소리. 내가 제대로 능력을 발휘하면 이따위 잔재주 따위.”
그가 이를 갈며 말하는 걸 듣고, 박민준이 크게 하품했다.
“약해 빠진 패배자의 말 따위는 더 듣고 싶지 않네. 그만 조용히 해라.”
그가 마저 이나즈마의 아혈을 제압해서 말을 전혀 못 하게 만들었다.
모든 상황을 그저 서서 구경만 하게 된 블랙 존슨이 뒤늦게 끼어들었다.
“저자는 일본의 이나즈마가 아닙니까? 제법 강한 자라는 소문을 들었었는데. 직접 보니, 별로 그렇지도 않군요.”
“그래도 너보다는 강한 것 같은데?”
“농담이겠지요?”
“아니. 진심인데. 넌 약골이잖아. 저놈은 그래도 중간은 가겠던데.”
“그런 말 마십시오. 제가 당신 대신 저자와 싸웠어도 충분히 이겼을 겁니다.”
“저놈을 풀어주고, 너와 붙여봤으면 좋겠지만, 별로 기대도 되지 않아.”
“어째서 말입니까?”
“하수들의 싸움을 봐서 내가 무슨 재미를 느낄 수 있겠어? 어차피 네놈들 능력은 내가 이미 다 아는데.”
“그런.”
“됐고. 이제 넌 그만 돌아가라. 수문이도 챙겨서 집으로 먼저 가.”
“저 먼저 가라고요? 당신은 뭘 어쩌려는 겁니까?”
“나? 나는 저놈을 데리고 일본으로 갈 거야.”
“일본이요?”
“그래. 내 것을 노리라고 명령한 녀석을 직접 만나봐야지. 그리고 다신 그딴 짓을 못하게 만들 거야.”
“이나즈마 같은 자를 움직일 정도라면 분명, 권력을 가진 사람일 겁니다.”
“그래서? 난 그딴 거 신경 안 써.”
“흠.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전 이만 여기서 빠지겠습니다. 저 상자만 가지고 돌아가면 되는 거겠지요?”
“그래. 도착하면 호수에 풀어주고, 이번엔 좀 잘 지켜.”
“걱정하지 마십시오. 더는 방심하지 않겠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이젠 네가 방심하지 않는다고 해도 조금 불안하긴 해.”
“네?”
“네가 생각보다 약한 것 같아서.”
“아니라니까요.”
“어디서 소리를 질러? 확 그냥!”
박민준이 눈을 부라리자, 블랙 존슨이 목을 쑥 집어넣었다.
놀란 거북이처럼 행동한 그가 박민준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수문이가 든 가방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마비된 상태로 잠들어있는 문어 비슷한 모습의 괴물을 볼 수 있었다.
‘이전에 내가 봤던 것보다 더 커진 것 같은데?’
그의 행동이 효과가 있었는지.
화를 내던 박민준이 입을 꾹 다물었다.
힐끗.
가방 안을 바라본 그가 손을 내저었다.
꿈틀.
여러 개의 다리가 동시에 미약한 움직임을 보였다.
놀란 블랙 존슨이 서둘러 가방을 도로 닫았다.
“마비는 내가 풀었으니까. 집에 가면 호수에 바로 풀어줘.”
“그럼 저 먼저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가 대답도 하지 않고 귀찮다는 듯 손만 대충 내저었다.
코를 살짝 찡그린 블랙 존슨이 서둘러 차를 몰고 떠났다.
혼자 남은 박민준이 쓰러진 세 명을 지그시 바라봤다.
‘죽일까? 아직은 아니다.’
허공섭물을 이용해서, 그들을 그대로 배 안으로 던졌다.
쿵. 콰당. 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배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뭔가가 배 위로 떨어졌습니다.”
“어서 가서 확인해봐.”
“우리 편입니다. 여기서 만나기로 한 이나즈마 씨도 보이는데요?”
“뭐야?”
안에서 정신없이 떠드는 사이.
훌쩍.
몸을 날려 배에 올라탄 박민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