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제시카 로즈의 어머니는 아일랜드 펜싱 국가대표 출신이었다.
미국인 사업가 남자와 결혼하며 은퇴하기 전까지, 2연속 금메달을 따낼 정도로 독보적인 실력의 선수였다.
제시카 로즈 또한 한때, 어머니와 같은 펜싱 플뢰레 선수를 꿈꿨다.
‘미국 펜싱 국가대표로 나가서 3연속 금메달을 따겠다. 엄마의 기록을 뛰어넘겠어.’
그녀의 피에 새겨진 펜싱에 대한 재능 덕분에 그 꿈을 충분히 이룰 수 있을 듯 보였다.
하지만 그녀가 9살이 되던 무렵 게이트가 열렸다.
부모를 괴물에 잃고 그녀는 고아가 되었다.
그래도 펜싱 검을 손에서 놀을 수는 없었다.
그녀에게 남은 건 국가대표를 향한 꿈밖에 없었으니까.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그녀의 나이 21살 무렵.
각성하게 되었다.
초감각 특기를 지닌 S등급 헌터가 된 것이다.
능력이 일반인을 뛰어넘었기 때문에, 더는 일반인과 함께 펜싱 경기를 할 수 없었다.
강제로 은퇴하고, 본격적으로 헌터 일을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몸으로부터 10m 이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알 수 있다.
공기의 흐름부터 모습을 숨기고 있는 암살자의 존재까지.
처음 비니를 쓴 동료가 쓰러질 때만 해도 그녀는 박민준의 존재를 몰랐다.
블랙 존슨마저 제압되었을 땐 그녀로부터 8m 내의 거리였으니.
그때부터 박민준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그자인가? 왜 우리 뒤에 있는 거지? 어떻게 들킨 걸까?’
자신들이 정문 부근에서 출발했으니.
상대가 집에서 나왔다면 선두에 있던 자신이 먼저 그를 마주해야 했는데?
더는 고민할 수 없었다.
너무나 어이가 없을 정도로 쉽게 동료 블랙 존슨을 쓰러뜨린 상대가 뒤이어 자신을 노리고 다가왔으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너무 강한 상대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척.
움직이다가, 적의 존재를 바로 뒤에서 느낀 그 순간.
휙!
무기를 빼 들고 마력을 잔뜩 담아 찔렀다.
‘이건 더원도 막거나 피할 수 없어.’
한때 세계 제일이었던 남자가 상대였다고 해도, 그녀는 방금 한 방에 쓰러뜨릴 수 있다고 자부했다.
지금 그녀는 최상의 상태였다.
극한의 집중력, 부드럽게 이완된 몸.
돌아서서 검을 뽑은 타이밍.
마력의 움직임까지.
만약 자신이 올림픽 금메달 3연패를 결정할 순간을 맞이했다면, 지금 같은 상태이길 바랄 정도로 완벽했다.
하지만, 그건 그녀의 착각이었다.
아니, 상대가 너무 강해서, 그런 건 아무 소용 없었다.
***
제시카 로즈를 제압하려던 박민준은 뜬금없는 반격에 살짝 당황했다.
그는 내공을 이용해 최대한 기척을 숨겼고, 심지어 투명화까지 한 상태였다.
‘내가 저 여자의 입장이었다고 해도, 공격을 받은 뒤에야 알아차릴 수 있었을 텐데?’
대체 어떻게 내 공격을 미리 알고 대비한 걸까?
정작 박민준의 얼굴을 찔러오는 기운과 공격은 아쉬울 정도로 약했다.
물론 그건 박민준의 기준이었고, 다른 그 어떤 S등급 헌터라고 해도, 얼굴에 구멍이 날 상황이었으니.
그가 제시카의 목덜미를 향해가던 손을 틀어, 검날을 옆으로 밀어냈다.
그리고.
얼마나 당황했는지.
눈만 동그랗게 뜬 그녀를 향해 다시 손을 뻗었다.
덥석.
박민준이 제시카의 목을 한 손에 움켜쥐었다.
그녀가 이미 커다란 눈을 더욱 크게 부릅뜨며.
컥!
하는 탁한 숨소리를 입에서 내뱉었다.
‘아무것도 없는데? 뭐가 어떻게 된 거지?’
그녀가 뒤돌아서며 기습한 순간.
보이지 않는 뭔가에 의해 공격이 틀어진 걸 알았다.
그리고 미처 다음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제압당하고 말았다.
맹세코,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당황스러운 순간이 바로 지금이었다.
‘대체 뭐야?’
스르륵.
정문에서 출반한 세 명을 모두 제압하는 데 성공한 박민준이었다.
그가 투명화를 풀고 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박민준을 알아본 그녀가 순간 매서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걸 본 그가 제시카의 목을 부러뜨릴지 말지를 잠시 고민했다.
손에 약간의 힘만 주면, 이 약해빠진 여자의 숨통을 끊어 놓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앞서 그가 따로 생각해 둔 일이 있었기 때문에 우선 점혈만 했다.
그대로 그녀를 버려두고, 집 뒤편으로 향해 몸을 날렸다.
‘나머지 네 명을 마저 제압해야겠군.’
제시카 로즈는 상대가 자신을 그냥 놓아주고 떠나자 몹시 놀랐다.
살기를 품는 것조차 잊을 정도였다.
‘날 왜 갑자기 그냥 풀어준 거지?’
혹시 내 미모에 반해서?
자신이 생각해도 그건 아니다 싶었는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외모 따위로 인해 마음이 흔들리거나 바뀔 만한 사람의 눈빛이 아니었어.’
어쨌거나 그가 눈앞에서 사라졌으니.
다른 동료의 상태를 살피고, 최대한 멀리 도망칠 생각이었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아? 말도 나오지 않잖아?’
점혈이 뭔지 모르는 그녀는 박민준이 마비 마법이나 속박 특성으로 자신을 제압한 거라고 판단했다.
‘대체 특기를 몇 개나 가지고 있는 거지? 투명화만 있는 게 아니었나?’
1분.
아니면 기껏해야 2분이나 지났을까?
제시카는 자길 두고 사라졌던 그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는 걸 발견했다.
‘왜 벌써 다시 온 거지? 동료들을 놓쳤나?’
이번에도 그녀의 생각은 틀렸다.
박민준의 뒤로 두둥실 떠서 날아오고 있는 동료들이 보였으니.
‘저건 또 뭐야? 손도 대지 않고, 사람을 네 명이나 공중에 띄웠어?’
저것도 각성할 때 얻은 특기인가?
몸을 투명화하고, 살짝 건든 것만으로 상대의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며, 저렇게 여러 사람을 공중에 띄울 수 있는 능력까지.
대체 저자의 진짜 각성 능력이 뭘까?
설마 저걸 다 가진 건 아니겠지?
그건 불가능하다.
각성하면서 얻는 특기는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다른 능력을 배우거나 익히고 싶어도, 시스템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리 노력해도, 적당히 따라 하는 수준에서 멈출 수밖에 없는데.
‘저건 아무리 봐도 본래 능력이야. 카피하거나 적당히 따라 하는 게 아니라고.’
마저 남은 적을 제압하고 돌아온 박민준은 그녀의 눈빛을 보고, 피식 웃었다.
‘무슨 마술쇼라도 본 표정이군.’
박민준이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제각각 아무렇게 쓰러져 있던 7명이 나란히 줄을 맞췄다.
엄청난 허공섭물 능력이었지만 그걸 알아보는 사람은 역시나 아무도 없었다.
그 일을 당한 당사자 일곱 명조차 그저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대체 우리가 누굴 건드린 거지?’
‘저자는 사람이 아닌가?’
‘누가 저자의 능력을 보고,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S등급 각성자 7명을 제압하는 데 걸린 시간이 총 3분이 넘지 않았다.
심지어 그중 두 명은 스폐셜 쓰리라고 불리는 헌터였다.
자신들이 잡혀서 나란히 누워있는 걸 알고, 스스로 어이가 없고, 참담하기 그지없었으니.
‘우리가 건들면 안 되는 존재를 마주하고 있구나.’
‘스폐셜 쓰리고 뭐고, 그냥 도와주지 않는 거였는데.’
대부분이 박민준을 노린 걸 후회만 하고 있었다.
오직 두 사람만 다른 생각을 했다.
제시카 로즈와 블랙 존슨이었다.
‘저렇게 강한 사람이 왜 우릴 바로 죽이지 않고, 그냥 제압만 한 거지? 나 같으면 바로 죽였을 텐데.’
‘우리가 자길 노리고 올 거라는 걸, 대체 어떻게 미리 알았을까? 설마 미래를 보는 능력이라고 가졌나?’
일곱 명이 두려움에 떨거나, 의문을 가지고 고민하는 사이.
박민준은 어딘가로 연락을 취했다.
“야. 내 집으로 좀 와라.”
“지금 말입니까?”
“그래. 네가 말한 놈들이 지금 내 앞에 있거든.”
“설마 전부 죽인 겁니까?”
“그건 네가 직접 와서 확인해.”
뚝.
그 말만 남기고, 박민준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이런 썅!
내가 얼마나 당신을 믿었는데.
이렇게 날 배신할 수 있는 건가?
분노의 질주!
부아 아 앙~
밤공기를 가르며 과속으로 차를 몰았다.
끼익!
그렇게 박민준의 집 앞에 도착한 방수열이었다.
헐레벌떡.
뛰어오는 그를 향해 박민준이 손을 살짝 흔들었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자들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지금 발밑에 있잖아?”
“네?”
그러고 보니.
방금 뭔가 뭉클한 게 느껴진 것도 같긴 한데.
너무 서두르기도 했고, 이 주변에는 가로등도 없이 어두워서 미처 못 봤다.
방수열은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시체를 밟은 줄 알았다.
‘젠장! 내가 이렇게 구둣발로 밟았는데도 미동도 없다니! 정말 다 죽인 건가?’
그래서 치밀어 오른 화를 참지 못하고, 씩씩거리며 움직이다가 다시 뭔가를 밟았다.
뭉클.
‘아! 또 밟았다. 역시 이번에도 반응이 없군.’
시체의 신원을 확인하고자, 그가 몸을 낮췄다.
쪼그려 앉더니.
가까운 사내의 코 밑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응? 숨을 쉬고 있는데요?”
놀란 방수열이 마저 다른 사람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역시나 그자도 움직이지 않았지만, 멀쩡히 숨은 쉬고 있었다.
“죽인 게 아니었군요. 그럼 그 점혈이란 걸…….”
“내가 언제 너한테 이놈들을 죽였다고 했나? 그냥 와서 직접 확인하라고만 했잖아.”
“분명 그러셨지요. 하지만 말투가 너무 차가워서.”
“날 죽이려고 온 놈을 멀쩡히 살려뒀는데. 내 기분이 좋을 리가 있냐?”
“정말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누가 보면 네가 저놈들 아비인 줄 알겠다.”
방수열은 진짜 기뻤다.
스폐셜 쓰리를 비롯한 그들의 시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이곳에 오면서 수백 번도 더 생각했었다.
하지만 똑똑한 그가 아무리 생각해도 시체유기와 정보 은폐 이외에는 방법이 없었는데.
“이렇게 살려서 제압하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너 날 믿고 있는 거 아니었나?”
“당연히 믿고 있지요. 아마 국장님보다 박민준 씨를 더 믿을 겁니다.”
“그래?”
“네. 그분보다 당신과 함께한 시간이 더 길지 않습니까?”
대답을 들은 박민준이 피식 웃었다.
하지만, 기분은 확실히 아까보다 더 좋아진 듯 보였다.
“그런 놈이 날 의심하고 그렇게 씩씩대면서 뛰어오냐?”
“그건…. 전화를 받고 너무 놀라서. 제대로 상황 판단을 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미소 지은 얼굴과는 달리.
퉁명스럽게 말하는 박민준을 향해, 그가 연신 허리를 깊게 숙이며 사과했다.
“됐고. 이젠 네놈이 수고 좀 해라.”
“수고라니요? 대체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통역 좀 하라고.”
“아. 네. 그런 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럼, 이제 옆으로 좀 물러나. 계속 그놈들 밟으면서 돌아다니지 말고.”
아차!
순간 이상한 표정을 지은 방수열이었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몸을 마구 밟고 다녔으니.
미안하고 당황스럽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기 합리화를 하는 뭐 그런 복합적인 감정이 전부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살아있다는 걸 그땐 내가 알았나? 몰랐으니까 그랬지.’
혼자 속으로 변명한 그가 서둘러 뒷걸음질 쳤다.
박민준이 그런 그를 슬쩍 바라본 뒤.
한차례 손을 내저었다.
손끝에서 나온 기운이 바닥에 누워 있는 일곱 명의 몸으로 향했다.
팍!
거의 동시에.
일곱 번의 작고 둔탁한 소리가 들리고, 꿈틀거리기 시작한 스폐셜 쓰리 일행이었다.
점혈이 풀렸다고 해도, 방수열이 여기 오는 동안 계속 몸이 굳어 있었던 터라.
곧장 바로 일어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팔다리를 조금 움직이면서 그대로 누워있거나, 상체만 일으켜 세우는 모습이 전부였다.
“왜 날 아니, 박민준 씨를 죽이러 온 거지? 당신들하고 아무 원한도 없을 텐데?”
방수열을 통역을 듣고,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서로 눈치만 볼 뿐이었다.
그리고 한 사람에게 그들의 시선이 쏠렸다.
그녀가 리더였는지.
제일 먼저 입을 연 제시카 로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