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박민준의 숙소.
그를 앞에 두고 대통령과 통역사가 짧게 말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저랑 결혼해주세요. 라고 대통령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끔뻑끔뻑.
전혀 뜻밖의 얘기를 들어서인지.
박민준이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입을 꾹 다물었다.
‘이게 남미 스타일인가?’
속으로 당황한 그를 향해 통역사가 다시 말했다.
“게이트가 열린 이후로 우리 수리남 공화국의 대통령은 연임 제한이 없습니다. 국민의 지지를 받는 한, 거의 평생 대통령을 할 수 있으니. 나와 결혼해서 나라를 오랫동안 통치해 봐요. 라고 대통령님께서 또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박민준의 입이 열렸다.
“결국, 나와 결혼하고 싶은 게 정치적 이유라는 건가? 내 힘을 빌려서 대통령을 더 오래 하려고?”
통역사가 그의 말을 이자벨라에게 전했다.
그녀가 빠르게 고개를 저으며 빠르게 변명했다.
“대통령님께서는 강하지만 상냥한 당신이 마음에 들었답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도움이 되는 건, 그다음 문제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강한 건 알겠는데. 상냥해? 내가 언제?”
“거대 여왕개미 괴물이 죽고 난 뒤에. 라고 하시는데요?”
“어? 그때?”
자신의 행동과 말을 돌아봤지만, 전혀 상냥함 따윈 없었다.
오히려, 경험치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그녀에게 꺼지라는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아니었나?’
그가 잠시 그때 일을 생각하는 사이.
가까이 다가온 이자벨라였다.
언제 준비했는지.
다이아몬드가 박힌 백금 반지까지 꺼내 드는 모습이었다.
“검은 물소 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이 있으니. 지금 말이 나온 김에 확답을 듣고 싶습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자벨라는 기대에 찬 눈빛이었다.
그녀는 수리남에서 제일 강한 여성 헌터이고, 정치적으로 제일 막강한 권력을 가진 상태이며, 경제적으로도 나름대로 부족함이 거의 없었으니.
더욱이 실전으로 다져진 탄력적인 몸매에 자신이 있었고, 외모 또한 스스로 생각해도 예뻤다.
‘이런 나를 누가 감히 거절하겠어? 저 사람도 당연히 내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들이겠지.’
그렇게 박민준의 긍정적인 답변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젓는 그였다.
“결혼이라니? 그건 싫은데? 거기다 너랑?”
통역사도 설마 그가 거절할 줄은 몰랐는지.
바로 박민준의 말을 대통령에게 전하지 못하고 눈만 크게 떴다.
하지만, 이미 표정과 말투에서 거절의 느낌을 느낀 이자벨라였다.
처음엔 실망감을 느꼈다.
그리고 모멸감과 분노가 치솟았다.
‘감히 날 거절해?’
하지만 상대는 7등급 괴물을 사냥한 최강 최고의 S등급 헌터였다.
그녀가 함부로 할 수 없는 사람인 걸 알았기 때문에, 그저 속으로 화를 삭여야 했다.
그런 이자벨라 대통령을 똑바로 바라본 박민준이었다.
‘대통령까지 한 여자애라 그런가? 아주 맹랑한 표정이군.’
정신 차리라며,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아 줄까? 라는 생각을 했던 그가 피식 웃고 넘겼다.
그의 웃음을 본 이자벨라가 폭발했다.
“뭐가 그렇게 웃긴 거죠?”
“대체 나에 대해서 뭘 알고 결혼하자는 건지. 정말 웃기지 않나? 네가 나였어도 똑같이 웃었을걸?”
“전혀 그렇지 않아요.”
“그래?”
“네. 당신은 그 누구보다 강하고, 멋있고, 상냥한 남자니까요. 당연히 결혼하고 싶은 남자이지요.”
“하하. 내 얼굴에 금칠을 하는군. 그리고 날 아주 제대로 알고 있었어.”
그는 자신이 강하고 멋있고, 좋은 성격을 지닌 사람이라고 여겼다.
박민준이 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 그녀가 다시 슬쩍 결혼 의사를 내비쳤다.
“그러니까, 나하고 결혼해요. 나도 중남미에서는 제일가는 신붓감이니까. 당신에게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해요.”
“그건 그렇지. 누가 봐도 넌 어리고 능력 있는 여자니까. 앞으로 더 발전할 가능성도 크게 열려있고.”
“그렇다면 나와 결혼을?”
“아니. 그래도 역시 결혼하는 건 안 되겠어.”
“왜요?”
“난 그 누구와도 결혼할 마음이 없어.”
“독신주의자였어요? 아니면 다른 여자가 있어요?”
“둘 다 아니야. 그냥 아직 결혼할 마음이 없어.”
최종적으로 다시 부정적인 대답을 들었는데.
오히려 이자벨라 대통령의 표정이 살짝 밝아졌다.
‘비혼주의자도 아니고, 지금 그의 곁에 다른 여자도 곁에 없다니. 그럼 나에게도 아직 기회가 있다는 거잖아?’
그렇다.
그녀는 박민준이 혼자인 걸 알고, 안도감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이 그와 결혼할 수 있는 길이 아직은 열려있다고 생각했으니.
“좋아. 그럼 포기하지 않고, 계속 도전하겠어.”
“뭐? 대체 뭘 계속 도전하겠다는 거야?
“방금은 그냥 스스로 내 의지를 다진 것뿐이니까. 당신은 신경 쓰지 마세요.”
한결 표정이 밝아진 그녀가 이젠 떠날 줄 알았는데.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왜 계속 그러고 있는 거지? 아직도 나에게 할 말이 남았나?”
“맞아요. 당신에게 할 말이 남았어요.”
“그럼 어서 말하고 나가. 나 좀 쉬게, 그만 귀찮게 굴라고.”
그의 연이은 반말과 퉁명스럽고 부정적인 말투 때문에 중간에 고생이 심한 통역사였다.
대통령에게 통역을 해주면서 적당히 부드러운 말로 바꿔주느라 두통을 느낄 지경이었다.
‘확 그냥 직역을 해버려?’
그런 사정을 모르는 이자벨라였다.
그녀가 박민준에게 다시 호감을 보이며, 그를 방문한 두 번째 목적을 꺼냈다.
“이번에 당신이 우리나라에서 잡은 7등급 괴물과 새끼 괴물들에 대해서 의논을 하고 싶어요.”
“그건 이미 내가 한국에서 출발하기 전에 결정 난 일이 아닌가?”
수리남 공화국에 파견된 각성자가 잡은 괴물의 소유권은 한국 측의 소유로 한다.
정확히는 박민준 개인의 것으로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걸 지금 와서 다시 말하겠다니?
설마 계약을 뒤집어엎겠다는 건가?
‘귀엽다고 좀 봐줬더니. 감히 겁도 없이?’
박민준의 표정이 살짝 험악해졌다.
그걸 보지 못한 이자벨라가 통역사를 통해 자기 뜻을 전했다.
“S등급 각성자 파견을 대가로 한국 측에 넘겨줬던 괴물의 소유권 일부를 우리 수리남 공화국에서 다시 사들이고 싶어요.”
“아! 계약 파기가 아니었어. 괴물 사체 소유권 재구매 얘기였어.”
이자벨라가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내가 은혜를 모르는 짐승도 아닌데. 어떻게 상황이 달라졌다고 계약을 파기할 생각을 했겠어요?”
“당연히 그래야지. 아무튼, 그래서 얼마까지 생각하고 왔어?”
“예산이 별로 없어서, 최대 1000억까지 가능해요.”
“그 돈으로 소유권의 몇 퍼센트를 얻고 싶은 건데?”
“50%요.”
대답을 들은 박민준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태껏 은혜를 아는 척 잘도 말하더니. 이제 보니까, 날강도였군.”
“날강도라니요. 폐허가 된 나라를 재건하려면 1000억도 쥐어짜서 만들어낸 돈이란 말이에요.”
“그래도 내가 잡은 괴물 전체의 절반을 사들이는 데 턱없이 부족한 건 사실이지.”
스스로 생각해도 그러했는지.
얼굴이 빨개진 그녀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수리남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뻔뻔해지자. 지금 이대로라면 괴물이 사라져도 나라는 망할지 몰라.’
수리남 공화국은 모든 중요한 기반시설이 수도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래서 7등급 괴물과 그 새끼들에 의해 수도가 거의 완파된 이상.
앞으로 나라를 재건하는 일은 50년이 넘게 걸릴 거란 계산이었다.
더군다나 국민의 다수가 괴물에게 죽었기 때문에, 그 예산을 마련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세금을 부과할 대상이 극단적으로 줄었고.
설사 부과한다고 해도, 사정이 어려운 사람이 태반이라, 그걸 제대로 낼 수 있을 리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걸 잘 아는 대통령 이자벨라였다.
어떻게든 박민준을 설득해서 나라를 재건할 기반을 마련할 생각이었다.
그게 바로 괴물의 사체였으니.
‘S등급 최강 각성자의 에너지 블레이드도 견뎌내는 7등급 괴물의 사체라면, 분명 다른 나라에 비싼 값에 팔 수 있어.’
반드시 바로 판매하지 않더라도, 연구 목적으로도 1000억보다 더 값진 가치를 지녔으니.
그녀가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몸을 최대한 낮추고 박민준에게 사정했다.
“제발. 당신도 봐서 알잖아요. 우리 수리남 공화국의 사정이 얼마나 열악한지. 부디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다른 사람 같았으면 고민하는 척이라도 했을 텐데.
박민준은 바로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거절했다.
“싫어. 내가 왜 아무 상관도 없는 너희 나라 사정 때문에 손해를 봐야 하지?”
“아…. 내가 당신을 정말 잘못 봤군요.”
“그래서 아까 내가 말했잖아. 나에 대해서 뭘 알고 결혼하자는 말을 한 거냐고. 난 원래 이런 놈이야.”
“알았어요. 난 그만 가볼게요. 편히 쉬세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녀였다.
씩씩거리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그래봤자, 박민준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그녀와 그녀의 일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담담한 얼굴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할 말이 있으니까. 지금 바로 내방으로 좀 와.”
“알겠습니다.”
그렇게 박민준의 방을 찾은 사람은 방수열이었다.
그는 밤새 보고서를 작성하고, 출국 준비까지 동시에 하느라 혼자서 무척 바쁜 상황이었다.
하지만, 박민준의 부름에 달려왔으면서, 힘든 기색도 전혀 내지 않았다.
‘직접 괴물과 싸운 사람이 부르는데. 겨우 이런 일로 힘든 척할 수는 없지.’
그를 본 박민준이 의자에 앉으라는 말도 꺼내지 않고, 바로 본론을 시작했다.
“내가 여기서 잡은 괴물을 바로 팔아버려야겠어.”
“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직은 내가 이곳에 남아 있으니까. 괴물에 몰래 접근하는 사람이 없잖아?”
방수열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이런 상황에서 감히 누가 당신의 것을 노리고 괴물을 건들겠습니까?”
“하지만, 내가 출국하고 나면. 다른 나라에서 온 놈들이 그 괴물에 접근해서 표본을 채취해가겠지.”
“당연히 그런 시도를 할 겁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그러니까. 출국을 하루 미루더라도, 여기서 팔아버려야겠다는 말이야.”
“아. 무슨 말인지 잘 알겠습니다.”
바로 욕심을 부리는 이자벨라가 아니더라도.
미국을 포함한 강대국 소속 요원들이 언제 나타날지 모른다.
‘그럼, 괴물의 경제적 효용 가치가 자신들이 생각한 것과 다르다는 걸 알게 되겠지.’
지구 최강, 최고 S등급 각성자의 검강을 막아내는 7등급 괴물의 껍질이었으니.
하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여왕개미 괴물의 껍질은 체액과 함께 마력을 흡수한 뒤에야 강한 방어력을 가질 수 있었으니.
항상 껍질과 체액을 동시에 지니고 다니면서 마력을 쏟아부어야만 그와 같은 효과를 지닐 수 있었다.
“방어만 하다가 마력이 고갈되어서 죽는다.”
더욱이.
껍질의 방어력이 올라간 순간부터, 흡수하는 마력의 양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갔다.
거대한 7등급 괴물이라 박민준의 검강을 견딜 정도의 마력을 계속해서 유지한 거지.
일반 각성자는 그보다 약한 공격을 막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모든 마력을 써버려야 할 정도일 것이다.
한마디로 마력 소비 대비 효율이 엉망이라는 말이다.
“굳이 번거롭고 비효율적인 7등급 여왕개미 괴물의 표피를 사용하는 것보다, 더 멍청한 일도 따로 없겠군요.”
“그래. 맞아, 현존하는 방탄 물질이 더 싸고 휴대성과 효율은 물론이고, 방어 효과까지 더 뛰어날 테니까.”
“그렇다면 아직 그 사실을 모르는 강대국에 비싼 값을 받고 괴물을 팔아버리자는 거군요?”
“이제 확실히 내 말을 이해했군. 역시 똑똑해.”
“그래서 어느 나라에 얼마를 받고 팔 생각입니까?”
“그 전에 미리 떡밥을 뿌리고, 미끼를 들이밀어야지.”
“어떻게 말입니까? 아! 동영상.”
“그래. 네가 드론으로 찍은 동영상 일부를 인터넷에 유출시켜.”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