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흐읍.
박민준이 숨을 가득 들이마시더니.
그대로 내공을 듬뿍 담아 소리를 내질렀다.
으헝!
크고 맑은 고음이 사방으로 퍼졌다.
그의 내공이 얼마나 대단한지.
박민준이 보이지 않는 곳에 있던 사람까지도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한편, 가까이에서 대통령과 그를 향해 연신 악담을 퍼붓던 사람들이 모두 손을 들어 귀를 틀어막았다.
“으악! 내 귀!”
“이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두려움에 몸을 바들바들 떨며 바닥에 주저앉거나 쓰러져버렸다.
그렇게 한바탕 소리가 사람들을 휩쓸고 지나가고.
하나둘씩 고개를 다시 쳐들고, 하늘에 떠 있는 박민준을 우러러보기 시작했다.
의심과 불평불만이 사라지고, 두려움과 공경심이 대신 그 자리를 차지했다.
앞선 상황처럼 감히 박민준이나 대통령을 욕하는 소리를 함부로 내뱉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차에 타고 있던 이자벨라와 방수열도 그가 내뱉은 소리 때문에 마음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
‘정말 놀랍다. 사람의 입에서 어떻게 저런 소리가 나올 수 있는 거지?’
기계음이라고 해도 그를 따라 하기가 어려울듯싶었다.
박민준이 다시 차로 내려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표정으로 자리에 앉는 그를 보며, 이자벨라가 빠르게 물었다.
“방금은 뭘 어떻게 한 건가요? 대체 뭐였어요?”
통역사도 같은 궁금증을 가졌었기 때문에, 그녀의 말을 바로 박민준에게 전했다.
“사자후를 응용해봤다.”
마치 사자가 크게 울부짖는 것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무공 명이었다.
원래는 큰 소리를 내서 상대를 공격하는 무공이지만, 박민준은 민간인을 공격할 생각이 없었다.
그저, 명문정파 곤륜의 정심(正心)한 기운이 어지럽혀진 사람들의 마음을 바로잡고, 머리를 맑게 해줄 의도뿐이었다.
“저들도 이젠 네 말을 들을 거다.”
박민준의 말을 듣고, 대통령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직접 사자후를 겪었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마워요.”
그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 이자벨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확성기에 대고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 수리남 공화국을 위기로 몰아넣은 근본적인 괴물을 잡기 위해서 여러분의 혈액이 필요합니다. 괴물이 좋아하는 사람의 피를 모아서 녀석을 유인해낼 겁니다.”
말을 마친 그녀가 사방을 돌아보며 귀를 기울였다.
이번엔 야유나 항의하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다행이다. 이번엔 다들 내 말을 들어주는구나.’
크게 안심한 이자벨라가 용기를 얻었다.
마저 소리쳤다.
“여러분의 자발적인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한국에서 온 영웅께서 괴물을 찾아 죽일 수 있습니다.”
할 말을 마친 그녀가 다시 주위를 돌아봤다.
아까 같으면 바로 헛소리하지 말라며 부정적인 말들이 쏟아져 나왔을 텐데.
이번엔 달랐다.
그녀가 박민준을 돌아봤다.
‘저 한 사람이 상황을 완전히 뒤바꿨어. 저런 사람이 내 곁에 있으면 얼마나 든든할까?’
정치적인 상황이든, 물리력이 필요한 상황이든 간에.
박민준 같은 사람이 아군이라면, 그보다 더 좋을 순 없을 텐데.
툭툭.
“뭐 하십니까?”
“네?”
잠시 딴생각에 빠진 그녀를 방수열이 깨웠다.
“다른 곳으로 왔으니. 아까처럼 대통령님께서 다시 말씀해 주십시오.”
“알았어요.”
수도를 돌아다니며, 서너 번 대통령이 직접 시민들에게 말을 전하면서 위기로 치닫던 상황이 일단락되었다.
다시 대통령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박민준에게 감사를 전한 이자벨라 대통령이었다.
“정말 고마워요. 당신이 아니었으면, 진짜 큰일 날 뻔했어요. 시민 폭동이 일어났거나 나라가 분열됐을지도 몰라요.”
괴물에게 가족과 집을 잃고, 마음이 피폐해졌던 수리남 사람들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강압적인 정부의 태도로 인해 오해가 생겼으니.
사람들이 그동안 억눌렀던 부정적인 감정을 일시에 폭발시키며 상황이 극도로 나빠졌었다.
대통령인 그녀가 직접 나서도 해결하지 못한 일을, 박민준이 해냈다.
그러니, 그녀도 당연히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연이어 몇 번이나 감사 인사를 박민준이었지만, 별로 좋아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저 귀찮다는 말투로 툭 내뱉었다.
“너 혼자 능력이 부족한 걸 알았으면, 아랫사람이라도 제대로 뽑아 써라.”
상당히 무례하고 건방진 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아이울 국방부 장관이 제멋대로 일을 처리하는 바람에 대통령인 그녀까지 위기를 맞이했으니.
‘내가 정치적 기반이 약하다는 이유로, 너무 기존의 정치인들에게 기대서 권한을 위임했던 것 같아.’
대통령이 된 젊은 A등급 헌터는 이제야 뭔가 깨달았다.
괴물이 사라지면, 제대로 된 사람들을 뽑아서 다시 나라를 일으키겠노라 다짐했다.
‘그 일을 저 사람이 도와주면 참 좋을 텐데. 나와 함께.’
박민준이 그녀의 시선을 느꼈다.
“뭘 봐? 나에게 무슨 할 말 있어?”
“그게…. 지금 할 말이 아니에요…. 나중에 말하든지 할게요.”
이자벨라가 대충 얼버무렸다.
관심을 돌린 박민준과는 달리.
방수열은 심각한 표정으로 그녀를 몰래 훔쳐봤다.
‘설마?’
***
피를 가득 담은 특수차량이 대통령궁을 빠져나왔다.
앞서 괴물을 발견한 거대 인공산으로 향했다.
그 트럭을 따라 여러 대의 차량이 뒤를 이었다.
이자벨라 일행이었다.
한편, 그녀는 트럭의 운전석 지붕에 올라탄 사람이 볼 수 있었는데.
‘어쩜 저럴 수가 있지? 보통은 얼마 못 버티고 떨어져야 정상이지 않나?’
바로 박민준이었다.
엉망인 도로 사정 때문에 차가 크게 덜컹거렸지만, 그는 평지에 서 있는 것처럼 거의 미동도 없었다.
박민준은 천근추 무공을 사용해서 발바닥을 지붕에 굳게 붙여놨다.
내공을 소모하지 말고, 편하게 안에 타고 갈 수도 있지만, 그건 평범한 사람에게 해당하는 말이었다.
오히려 박민준의 엄청난 내공 때문에 여기서 자칫 힘을 더 쓰면, 그의 발이 그대로 트럭 지붕을 뚫어버릴 수도 있었으니.
최소한으로 내공을 조절하면서 주변을 살피는 데 집중했다.
위이이잉!
트럭 주변 하늘을 날아다니는 드론도 보였는데.
방수열이 한국에서 직접 가져온 것들이었다.
수리남에 도착한 뒤로, 박민준이 자잘한 괴물을 처리할 땐 꺼내지 않았었다.
배터리의 문제도 있지만.
쓸데없는 장면을 찍다가 정작, 7등급 괴물을 상대하는 결정적인 장면을 놓칠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화면이 아주 깨끗하게 잘 나오는군. 배터리도 충분하고.’
드론에는 고성능 카메라가 장착되었는데, 실시간으로 찍힌 화면이 그가 손에 든 패드 화면에 고스란히 재생되었다.
주변에 괴물이 나타났는지를 확인하는 것 말고도 다른 목적이 있었으니.
‘지난번 필리핀 괴물 사냥에서 너무 아쉽게 박민준 씨의 활약을 놓쳐버렸다.’
이번엔 한 장면도 놓치지 않고, 그가 7등급 괴물을 사냥하는 걸 모두 화면에 담을 거라고 다짐했다.
끼익.
차가 멈췄다.
“일차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트럭 지붕에서 뛰어내린 박민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를 따라 차에서 내린 방수열이 그걸 보고 의아함을 느꼈다.
“왜 그러십니까?”
“전부 사라졌어.”
“네? 뭐가 말입니까?”
“내가 죽인 괴물 시체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고.”
“아! 그렇군요.”
그가 직접 이곳에 오지는 않았지만, 박민준의 활약을 전해 들은 터라.
‘이곳에 천 마리가 넘는 괴물 시체가 있었을 텐데. 그걸 겨우 하룻밤 사이에 다 치워버리다니?’
대체 남은 괴물이 얼마나 많다는 걸까?
설마, 몇천 마리가 또 있는 건 아니겠지?
방수열이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모두 가만히 서 있지 말고, 드론으로 주변을 수색해. 배터리 잘 체크하고.”
“알겠습니다.”
한편, 작은 괴물은 거의 다 죽었다는 걸 알고, 가벼운 마음으로 따라왔던 이자벨라였다.
박민준이 7등급 괴물과 싸우는 걸 지켜볼 생각뿐이었는데.
상황이 달라진 걸 알고.
순간 두려움을 느꼈다.
그녀가 흠칫 몸을 떨면서 주위를 빠르게 살폈다.
그리고 깨달았다.
‘지금 여기서 나만 두려워하는 건가?’
트럭에 남은 운전기사는 별개로 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은 오직 수리남 측 사람들뿐이었다.
박민준과 함께 온 한국 일행은 모두 멀쩡했으니.
오히려 조용히 잡담하며 웃거나, 진지하게 일에 몰두하는 모습뿐이었다.
그녀는 자기 일행과 한국 측과의 차이를 금방 알았다.
‘저들은 우리와는 달리, 저 사람을 완전히 믿고 있구나.’
그녀도 박민준을 믿고 의지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와 함께한 사람과는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계속해서 여기저기 드론을 띄워서 조종하는 방수열과 그의 부하들이었다.
“부장님. 제가 있는 방향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보고를 받은 그가 드론 회수를 명령했다.
“배터리를 아껴야 하니까. 드론을 그만 철수시켜.”
“알겠습니다.”
“7등급 괴물이 나오면, 그땐 내 명령이 없어도 다들 알아서 잘 찍도록 하고.”
“네!”
박민준이 주변을 직접 살폈다.
여기저기 뚫린 엄청난 수의 구멍을 통해, 죽은 괴물의 시체가 사라진 걸 알 수 있었다.
그가 몸을 밀어 넣으면 기어서 이동해야 할 정도로 구멍의 크기가 별로 크지 않았다.
당연히, 그런 좁은 곳에 들어갈 마음이 없는 박민준이었다.
몸에 흙먼지가 묻는 건 둘째치고.
좁은 구멍 안에서 기다가 사방이 틀어막혀서 옴짝달싹 못 하는 상태가 될 수도 있으니.
그런 상황에서 7등급 괴물을 만나는 건, 아무리 박민준이라고 해도 피하고 싶었으니까.
박민준이 트럭을 향해 손짓했다.
미리 얘기되어 있었는지.
운전석에 앉아 있던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고, 버튼을 눌렀다.
드르륵!
기계음과 함께.
트럭의 짐칸 지붕이 열렸다.
저온 상태로 보관된 피가 열린 지붕을 따라 강한 피비린내를 풍기기 시작했다.
난생처음 맡아보는 강렬하고 역한 냄새에 다들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하고 코를 틀어막았다.
이자벨라가 미리 준비한 방독면을 일행에게 전달했다.
“욱! 도저히 못 참겠네. 모두 이걸 쓰세요.”
양측 인원이 모두 신속하게 방독면을 착용했지만, 박민준은 그걸 건네받지 않았다.
그는 다른 세상에서 지금 같은 피 냄새를 여러 번 맡은 적이 있었다.
대규모 전투에서 수천, 수만 명의 사람이 죽으면서 풍기는 피 냄새.
박민준도 처음 몇 번은 참지 못하고 토할 정도로 역해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흐음. 이런 건 정말 오랜만에 맡아보는군.’
그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자 오히려, 정신이 맑아지고, 몸의 신경이 곤두서는 게 느껴졌다.
극한의 상황에서 죽을 뻔한 경험 때문인지.
그의 몸이 적과 싸울 준비가 자동으로 되고 있었다.
‘좋아. 이제 녀석만 나타나면 된다.’
피 냄새를 맡고 나타날 괴물을 기다리다가 문득, 마지막 천마와의 싸움이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지금 내 앞에 나타날 놈이 천마가 아니라 다행이다.’
여기서 더 얼마나 강해져야, 지치지 않고 온전한 상태의 천마를 이길 수 있을까?
이미 인간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강해진 자신인 걸 알면서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젠 잊어버리자, 그놈은 결국 내 손에 죽었고, 그보다 더 강한 적이 다시는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그가 잠시 과거의 기억에 빠져있는 사이.
바닥의 울림을 느낀 일행이었다.
“박민준 씨!”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그가 검을 빼 들었다.
챙!
“여기 있으면 위험하다. 박민준 씨에게 괴물을 맡기고, 모두 안전한 곳으로 대피한다.”
다른 사람들이 크게 들썩이는 바닥에 두려움을 느끼고 몸을 피하는 사이.
쿠구구구!
더 큰 굉음과 함께.
박민준 앞의 땅이 크게 갈라지며 위로 솟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