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운전병의 외침을 듣고.
‘설마?’
고개를 획 치켜든 그녀였다.
그녀의 눈에 지쳐 보이긴 했지만, 무척이나 멀쩡해 보이는 박민준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차에서 뛰어내리더니.
그대로 박민준을 향해 돌진했다.
“뭐야?”
어리둥절한 박민준을 두고, 점프한 그녀였다.
덥석.
그를 꽉 끌어안았다.
“왜 이래? 우리가 이럴 사이는 아니잖아?”
계속 당황한 박민준을 두고, 그녀가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정말 고마워요. 아무 상관도 없는 우리 국민을 이렇게나 많이 무사히 구해주시다니.”
그녀가 네덜란드어로 말하는 통에.
그는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뭐라는 거야?”
시큰둥한 그의 반응에도,
그녀는 감사의 말을 아낌없이 계속 내뱉었다.
“당신은 내 영웅이에요. 아니, 우리 수리남 공화국의 은인이에요. 아직 그놈이 남았지만, 그래도 너무나 감사해요.”
쪽!
그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춘 이자벨라였다.
살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 박민준을 뒤로하고.
빙글 몸을 돌린 그녀가 군인들에게 소리쳤다.
“뭘 보고 있어요? 저기 있는 사람들을 데리고 돌아갈 준비를 하지 않고.”
“모두 들었지? 지금 바로 대통령궁으로 돌아간다. 10분 안에 민간인들의 상태를 살피고 이동할 준비를 끝내도록.”
응급치료가 필요할 정도로 위급한 사람은 없었다.
대신 탈수증세가 심하거나, 배고픔을 호소하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모두에게 나눠줄 만큼의 식량은 없으니. 당장은 이걸 드십시오.”
군인들이 비상용으로 가지고 있던 초콜릿과 식수를 그들에게 나눠주는 거로 대신했다.
민간인들을 차에 태우고, 모두가 무사히 복귀할 수 있었다.
“지금은 밤이 늦었으니까. 가까운 곳에 모두를 재우도록 해요. 가능하죠?”
대통령궁에 수백 명을 모두 수용할 수는 없었다.
보안의 문제는 둘째치고, 방이 그렇게 많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가까운 곳에 있던 군용 시설과 숙박업체에 머물도록 민간인들을 나눴다.
뜻밖의 상황에 무척 분주했던 수리남 측과는 달리.
한국에서 온 일행은 남의 일을 구경하며 한가하기만 했다.
그들은 혼자 나간 박민준을 걱정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으니.
오히려 자유롭게 개인 시간을 보내고 있던 참이었다.
방수열만이 향후 계획이나 한국과 수리남의 게이트 관리 협력 문제를 고민했다.
‘박민준 씨가 이곳의 7등급 괴물을 죽이는 건 기정사실이다. 다른 여타 괴물 따위는 문제도 되지 않지.’
그렇다면 그 뒤에 각성자가 부족한 수리남 상황을 고려해서 자신과 게이트 관리국이 뭔가 이득을 취할 수 있지 않을까?
박민준이 들으면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겠지만.
‘한국은 미국이 아니야. 쓸데없이 국제경찰을 자처하지 않는다. 그럴 여유도 이유도 없다.’
사실 지금도 박민준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해외의 문제에 끼어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덕분에 기회를 얻었으니.
‘나도 더는 다른 사람 밑에서 뒤치다꺼리나 할 필요가 없단 말이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박민준의 도착 소식을 듣고, 진한 미소를 지으며 방을 나섰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셨군요. 역시 저 사람들 때문이겠지요?”
“그래. 괴물을 생포하는 일이라면 진작 끝냈었지.”
“어쩐 일로 저 많은 사람을 구하신 겁니까?”
“어쩐 일이라니?”
“귀찮은 일은 질색하시는 줄로만 알고 있었거든요.”
“그건 맞아. 하지만, 내가 귀찮다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무시할 정도로 냉혈한인 건 또 아니야.”
“그 말이 맞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지난번에 이어 또 이렇게 외국에 나와계신 거겠지요.”
“그나저나. 내가 먼저 보낸 괴물 새끼들은 어디 있어?”
박민준이 느끼지 못할 정도로.
대통령궁에서도 은밀한 곳에 괴물을 보관하고 있었다.
“지금 바로 확인하시려고요?”
“당연하지.”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그렇게 방수열을 따라 도착한 곳은 지하에 있는 감옥 시설이었다.
“이런 게 왜 있지? 그 이자벨라란 여자한테 이런 취미가 있었나?”
“그건 아닐 겁니다. 이 시설은 그녀가 대통령이 되기 전에 만들어진 거니까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관리자에게 그렇게 들었습니다.”
지하로 내려온 그들을 맞이한 중년인이었다.
콧수염을 진하게 기르고, 코가 상당히 컸다.
그리고 나름대로 엘리트였는지.
영어를 유창하게 해서 방수열과 대화가 원활했다.
“어서 오십시오. 괴물들을 확인하려고 다시 내려오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괴물들에게 먹이를 줘볼 참이었거든요.”
“이런 밤중에 말입니까?”
“괴물에게 밤낮이 따로 있겠습니까? 지금도 어딘가에서 시민들이 괴물에게 죽어가고 있을 겁니다.”
“무슨 말인지 잘 알겠군요.”
박민준이 구해온 사람이 수백 명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증언에 의하면, 얼마 전까지 몇 배나 더 많은 사람이 잡혀 있었다고 했다.
‘수리남의 인구가 급속하게 줄어든 이유가 바로 이거였어.’
박민준이 구해주지 않았다면, 매일같이 수십 수백 명의 사람이 죽어 나갔을 터.
조금이라도 빨리 모든 일의 원흉인 7등급 괴물을 찾아낼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관리인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합금으로 만든 창살과 그 위를 강화유리로 덮은 가로세로 3미터짜리 감옥이 줄지어 있는 장소였다.
그중 두 곳에 개미 괴물이 갇혀 있었다.
깡! 깡!
합금 창살을 부수려는지.
녀석들이 반복해서 창살을 주둥이로 들이박고 있었다.
그러다 인기척을 느끼고, 박민준 쪽을 돌아봤다.
그를 알아보고 공포를 느꼈는지.
바로 몸이 굳어버린 녀석들이었다.
그 모습이 신기한 관리인이었다.
“잡혀 와서 깨어난 뒤로 한 번도 저 짓을 멈춘 적이 없었는데. 정말 이상하군요?”
박민준은 자신 때문인 걸 알았지만, 그에게 말하지 않았다.
관리인도 굳이 대답을 들을 생각이 없었는지.
부하들에게 손짓했다.
“준비 끝났으면 어서 가져와.”
관리인의 명령을 받은 사람들이 여러 음식이 들어있는 통을 들고 나타났다.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설탕부터 소다수나 빵 같은 단 음식은 물론이고, 소고기, 닭고기, 물고기 같은 날음식까지 몽땅 녀석에게 들이밀었다.
어째서인지.
먹이를 눈앞에 두고도 녀석들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관리인의 부하들이 조금 위험하게 다가가 녀석들의 입 가까이 음식을 밀었다.
하지만 둘 다 아무 음식도 먹지 않았으니.
실망한 표정의 관리인과 방수열이었다.
“아! 저래서는 괴물이 뭘 제일 좋아하는지 모르겠군요.”
“왜 아무것도 먹지 않는 거지? 사람을 잡아먹는 녀석들이라면 고기 또한 먹으려 들었을 텐데.”
“그러게 말입니다. 일부러 다양한 고기를 준비했는데. 그마저도 먹지 않으니. 참 큰일입니다.”
박민준이 괴물들을 물끄러미 보더니.
관리인의 부하들 몸에 상처를 냈다.
여러 명에게서 동시에 피가 뿜어져 나오고.
바닥을 적시기 시작했다.
놀란 관리인이 버럭 소리 질렀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왜 내 부하들에게 상처를?”
방수열이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관리인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흥분하지 말고, 저길 보십시오.”
인간의 피 냄새를 맡고 나서야.
드디어 반응을 보인 괴물들이었다.
“그렇군요. 오직 인간이 녀석들의 최고 취향의 음식인 모양입니다.”
“이것 참 곤란하게 되었군요.”
방수열의 말에 관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괴물을 끌어내고자,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의 몸에 상처를 내고, 녀석에게 미끼로 던져줄 수는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박민준은 생각이 달랐다.
“녀석들이 피 냄새에 저런 강령한 반응을 보인다면, 굳이 시간을 더 끌 필요도 없겠어.”
“네?”
“대통령을 만나서 피를 좀 모아 달라고 해야겠군.”
“네?”
네네거리는 방수열을 뒤로하고.
그가 이자벨라를 찾았다.
***
이자벨라 대통령의 방.
박민준의 방문에 묘한 흥분을 느낀 그녀였다.
“이렇게 늦은 밤에 갑자기 날 보자고 한 이유가 뭔가요?”
야심한 밤에 여자 혼자 자는 방에 젊은 남자가 찾아왔으니.
뭔가 기대한 눈치였는데.
박민준의 뒤로 통역사가 서 있는 걸 보고, 미소가 사라졌다.
그리고 통역사가 전한 박민준의 말을 듣고, 몸이 싸늘하게 식었다.
“대통령님. 이분께서 사람의 피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사람의 피?”
“네. 마침 필요한 만큼 사람이 많이 있으니. 그들의 피를 뽑아서 모아서 자신에게 달랍니다.”
흡혈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혹시 뱀파이어 특성인가?
어쩐지 같은 인간이면서 너무 강하다고 느꼈었는데.
초자연적인 힘을 사용하고, 하늘을 날아다니며, 엄청난 속도로 움직일 수 있는 존재.
거기다 피를 원한다?
이자벨라는 박민준이 각성하면서 뱀파이어가 된 거로 확신했다.
‘더욱이, 겨우 몇 번 본 저자에게 내가 자꾸 빠져드는 걸 보면, 매혹 스킬도 가지고 있는 걸 거야.’
그가 아직 7등급 괴물은 물리치지 못했지만, 지금 상황으로도 충분히 수리남 공화국을 위해 큰 공헌을 했으니.
그녀는 박민준을 위해 피를 제공하기로 했다.
하지만 국민을 그의 희생양으로 만들 순 없으니.
‘차라리 내가 대신 저자에게 피를…….’
아까 엄청난 수의 괴물과 싸우면서 막대한 힘을 소비했으니.
‘어쩌면 내가 여기서 피를 빨리다가 죽을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우리 공화국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다.’
굳게 마음을 먹은 그녀가 박민준을 향해 아주 가까이 다가갔다.
그가 자신의 피를 빨아먹기 쉽도록 배려하기 위해, 고개를 살짝 꺾으며, 목을 길게 내밀기까지 했다.
적당히 구릿빛 피부를 가진 굉장한 남미 미인이 저런 모습을 하고 있으니.
여타 남자가 봤으면 상당히 매혹적으로 느껴질 만도 하건만.
박민준은 그저 두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을 뿐이었다.
고개를 살짝 갸웃한 그가 옆에 있는 통역사를 돌아보며 말했다.
“쟤 갑자기 왜 저러는 거야? 목에 담이라도 걸렸나?”
“그게 아니라. 대통령님께서 당신에게 직접 피를 제공해 주겠다고 저러시는 것 같은데요?”
“뭐? 저 상태에서 나보고 뭘 어쩌라고?”
“어쩌긴요? 피를 원하신다고 하셨으니. 마음껏 드시라는 거지요.”
“어? 어……. 뭔가 오해가 있었던 모양인데. 내가 먹으려고 피를 달라는 게 아니었어.”
“그럼요?”
“내가 생포한 괴물에게 실험해보니. 인간의 피에 가장 강렬한 반응을 보였단 말이지.”
“아! 그렇군요. 제가 그것도 모르고 멋대로 오해하고, 통역을 엉망으로 해버렸네요.”
한편, 이자벨라는 눈을 꼭 감고 여태 목을 길게 들이미는 중이었다.
‘왜 안 빨아 먹는 거지? 냄새가 나나? 아까 샤워도 했는데? 따로 원하는 혈액형이 있나?’
온갖 잡다하고 이상한 생각으로 그녀의 머릿속이 가득하던 그때. 통역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대통령님. 죄송해요.”
갑자기 뭐가 죄송하다는 걸까?
번쩍.
눈을 뜬 그녀가 본 건.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통역사와 뭐가 그리 재밌는지, 싱글벙글 웃고 있는 박민준이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둘을 번갈아 보는 이자벨라를 향해.
통역사가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이분께서는 흡혈을 위해서 피가 필요한 게 아니었어요.”
“뭐? 그럼, 사람의 피를 왜 원하는 건데?”
“그걸로 괴물을 유인하려고 하시는 거래요.”
“아…. 그랬구나. 애초에 그 일 때문에 밖에 나갔다 온 거였지.”
“맞아요.”
“하하. 그럼 내가 이렇게 할 일이 아니었구나. 괜히 혼자 허튼짓했어.”
그녀가 얼굴을 잔뜩 붉히며, 옷깃을 가다듬었다.
크크흠.
작게 헛기침을 하고 박민준을 향해 말했다.
“괴물을 유인하기 위해, 피가 얼마나 많이 필요한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