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이미 박민준의 활약을 지켜봤지만, 여전히 의구심이 가득한 이자벨라 대통령의 얼굴이었다.
그녀가 겪은 7등급 괴물은 그냥 자연재해나 마찬가지였다.
가장 무서운 놈의 무기는 거대하고 강한 몸 그 자체였다.
길게 뻗어 나온 어금니인지 뭔지를 휘두를 때마다 녀석의 앞을 가로막는 건물이나 산이 무너져 내렸다.
표피가 엄청나게 두꺼워서 총알은 아예 박히지도 않았다.
포탄은 그저 그을음만 만들 뿐이었고, 대전차 지뢰 같은 건 느낌도 없는지, 그냥 무시할 정도였다.
핵폭탄을 쏘면 또 모르겠지만, 그런 걸 수리남 공화국에서 가지고 있을 리 없었다.
미국에서 대신 쏴준다고 해도, 괴물이 땅 깊이 숨거나, 피하지 않고 핵미사일을 가만히 맞아줘야 했다.
그리고 성공적으로 죽여도, 그 땅은 향후 수십, 아니 수백 년간 인간이 살지 못하는 황폐하고 오염된 지역으로 남아버릴 것이니.
수십 미터 길이의 거대한 녀석이 움직일 때마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양, 땅이 크게 흔들렸다.
징그럽게 많이 달린 다리는 또 어떠한가?
길고 날카로운 다리는 마치 창과도 같았다.
주변의 모든 살아있는 존재를 찌르고, 자르고, 분쇄했다.
그런 엄청난 존재의 힘을 직접 경험한 이자벨라였다.
‘저자가 아까 그런 활약을 보였다고 해도, 과연 그 괴물을 혼자서 이길 수 있을까?’
그것도 저 방수열이란 사람의 말처럼 그렇게 쉽게?
그녀 자신이 각성자이고, 나름대로 상급이라 불리는 A등급 헌터였으니.
괴물의 무서움을 가장 잘 아는 수리남 공화국의 사람 역시 그녀일 것이다.
방수열은 자신의 말을 믿지 못하는 그녀의 눈빛을 확인하고,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명백한 비웃음.
이자벨라는 그걸 보고도 참을 여자가 아니었다.
아무리 귀중한 손님과 일행이라고 해도, 할 말을 해야겠네.
“뭔가요? 감히 그 표정은?”
“우리 박민준 씨를 믿지 않으면서 도움을 청했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그…. 그건. 당연한 거잖아요? 세상 그 누가 그 거대한 괴물을 혼자 막아낼 수 있겠어요?”
방수열이 대답하기 전 고개를 돌렸다.
그가 열심히 스테이크를 잘라 먹고 있는 박민준을 바라봤다.
“저기 계시지 않습니까? 당신의 공화국을 지켜줄 영웅이 말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는 지구의 운명까지도 어쩌면 박민준의 손에 달렸을지 모른다는 말을 하려다가 말았다.
‘그건 내가 생각해도 너무 나간 것 같군.’
확고한 그의 태도와 목소리 때문일까?
이자벨라도 박민준에 대한 믿음이 아주 조금 생겼다.
‘아직은 저자처럼 확신할 수는 없지만, 필리핀에서의 활약도 있고, 분명 우리 나라에 나타난 그 괴물을 죽일 수 있을지도…….’
그때 마침 식사를 마친 박민준이었다.
그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방수열에게 물었다.
“괴물이 어디 숨어있는지 알고 있대?”
“아니요. 이 사람들도 전혀 모른다고 합니다.”
“아니. 그걸 왜 몰라? 여기 오는 도중에 보니까, 도시가 완전 박살 나서 난리 났던데? 그냥 놓쳤다고?”
“저기 대통령님이 수도에서 자리를 비운 사이에 괴물이 나타났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녀가 돌아오자, 거짓말처럼 괴물이 종적을 감췄다.
처음엔 그 이유를 몰랐는데.
나중에 확실히 알게 되었다.
녀석과 똑같이 생긴 새끼 괴물들이 떼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럼 또 내가 괴물을 찾아내서 죽여야겠네.”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순간 말이 없어진 박민준이었다.
그가 괴물과 싸우기 전에 원한 건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지난번처럼, 괴물을 찾아 도시 곳곳을 헤매지 않도록 미리 녀석의 위치를 확실하게 파악할 것.
그런데 이번에 또 괴물이 어디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말만 들었으니.
‘아니. 그 큰 괴물이 숨어봤자지. 왜 다들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말만 하는 거야?’
싸워서 막지 못하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도록, 녀석을 추적하는 성의는 미리 보였어야지.
나보고 녀석을 찾고 죽이고 뭐 다하라는 건가?
그는 다음에 괴물이 어디 숨었는지. 그 위치도 제대로 모르는 나라로는 절대 방문하지 않을 생각까지 했다.
짜증 난 표정을 숨기지 않는 그를 향해.
방수열이 억지로 분위기를 전환하려 했다.
”그런데 어째 식사를 하시고 기분이 좋으신가 봅니다. 아까처럼 웃으시는 모습을 오랜만에 보는 것 같군요.”
“응. 여기 고기가 진짜 맛있어. 괴물 처리 끝나면 따로 우리 집으로 배송해달라고 해.”
“알겠습니다. 얼마나 보내라고 할까요?”
“오늘 내가 먹은 것과 같은 소 한 마리를 통째로. 이왕이면 레시피도 확실히 적어서 같이 보내라고 해.”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대화를 마친 박민준이 순간 씨익 웃었다.
“갑자기 또 왜 그렇게 웃으시는 겁니까?”
“방금 좋은 생각이 떠올랐거든.”
“좋은 생각이요?”
“응. 내가 찾아내야 하는 놈이, 개미를 닮은 곤충형 괴물이라면서? 맞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녀석을 무작정 찾아 헤매지 말고, 좋아하는 거로 유혹해보자.”
“아! 좋은 생각입니다. 하지만 그 괴물이 뭘 좋아하는 줄 누가 알겠습니까?”
“어쨌든 개미니까 단 걸 좋아하지 않을까?”
“과연 그럴까요?”
“직접 확인해보면 알겠지.”
“어떻게 말입니까?”
“대통령에게 가서 생포해 놓은 놈의 새끼가 있는지 좀 물어봐.”
“네. 무슨 의도인지 잘 알겠습니다.”
괴물의 새끼 앞에 여러 가지 먹이를 놓고, 제일 선호하는 걸 찾아내면 된다.
그걸 최대한 많이 모아서 한곳에 놓으면, 녀석도 먹이를 먹이려고 찾아오지 않을까?
단순하지만, 일리가 있었다.
‘이전에도 필리핀의 거대 원숭이 괴물이 여관 앞에 수북이 쌓인 곡식과 잔뜩 모여든 사람 냄새를 맡고 나타난 적 있었으니까.’
이번에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대통령에게 괴물 새끼를 요구했는데.
“미안해요. 살아있는 상태의 괴물은 확보하지 못했어요.”
“어째서 말입니까? 괴물과 싸우려면 생포해서 약점이 뭔지, 습성이 뭔지 파악하는 게 우선이지 않습니까?”
“그게 맞긴 하지요. 하지만 그럴 만한 여력이 없었어요.”
몇 마리 생포하고, 그저 급소가 어디인지.
최소한의 공격으로 어디를 공격해야 괴물이 무력화되는지 정도만 파악한 게 고작이었다.
스스로 말해놓고도 부끄러운지.
고개를 떨구는 모습의 대통령이었다.
그런 그녀를 두고, 방수열이 박민준에게 말했다.
“생포해 놓은 괴물이 현재는 단 한 마리도 없다고 합니다.”
“그래?”
“어째 미리 알고 계셨다는 표정이군요?”
“여기 사정을 보고, 거의 기대도 안 했거든.”
“정말 죄송합니다.”
“네가 죄송할 게 뭐 있어? 네가 수리남 대통령이냐?”
“그건 절대 아니지요.”
“그럼 쓸데없이 사과하지 말고, 숙소에서 잘 쉬고 있어.”
“지금 바로 사냥 가시려는 겁니까?”
“그래.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속담이 있잖아.”
“맞습니다. 그럼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자신이 박민준과 함께 가 봐야 방해만 된다는 걸 잘 아는 그였다.
그래서 인사만 하고, 감히 따라가겠다는 말도 꺼내지 않았다.
반면에 이자벨라는 적극적으로 박민준을 따라나서기로 작정했다.
‘외부인에게 괴물 사냥 일을 전적으로 맡기고 모른 척 있을 순 없어. 나도 뭔가를 해야만 해.’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박민준을 보고 슬그머니 자리를 비웠다.
몰래 따라가서 혹시나 박민준에게 생길지 모를,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나 도와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박민준은 그녀의 움직임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래서 쓰윽.
그녀의 옆에 나타났다.
흠칫.
놀란 이자벨라가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통역사를 데려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손짓으로 X자를 그리며, 절대 자신의 뒤를 따라오지 말라고 경고했다.
뻔히 알아들었으면서도 그녀는 모르는 척 굴었다.
그걸 보고, 눈을 한 번 부라린 박민준이었다.
그녀가 따라오지 못하도록, 경공을 최대한 발휘해서 사라졌다.
엄청난 속도로 어디론가 가버린 그를 보고 감히 따라갈 엄두도 나지 않은 그녀였다.
하지만, 억지로 다시 용기를 내서 창을 챙겨 들었다.
그렇게 그녀 혼자 대통령궁을 빠져나갔지만, 그 사실을 아는 수리남 측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바람 같은 속도로 질주한 박민준은 아까 낮에 왔던 황야에 도착했다.
이곳이 새끼 괴물을 마지막으로 발견한 장소이니.
몇 마리쯤은 아직 남아있을 거란 생각이었다.
‘어째 눈에 보이는 괴물이 한 마리도 없군.’
짜증 난 그가 미간을 찌푸리고 잠시 고민하더니.
갑자기 땅에 엎드렸다.
귀를 바닥에 대고 내공을 운용했다.
그러자, 땅속에서 나는 작은 소리가 하나둘씩 그에게 들리기 시작했다.
작은 벌레부터 두더지 같은 동물까지.
그리고 그가 찾던 괴물의 둔탁한 큰 소리도 찾아냈다.
‘저쪽인가?’
과거 그가 다녀온 다른 세상에서 은둔술의 고수와 싸울 때 익힌 수법이 떠올랐으니.
‘그게 또 이렇게 쓰이는군.’
벌떡 일어난 그가 검을 빼 들었다.
챙!
내공을 가득 주입하고, 그것도 모자라 검날 밖으로 흘러넘칠 정도로 거대한 검강을 만들었다.
대체 뭘 하려고?
그가 아까 파악한 괴물의 위치를 다시 눈으로 확인하더니.
들고 있던 검을 그대로 땅을 향해 내리꽂았다.
푹!
생각보다 가벼운 소리를 내며 그 거대한 검강이 땅속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검 자루만 겨우 보일 정도로 땅에 검을 박은 그가 그대로 큰 네모를 그리며 빠르게 이동했다.
가로세로 10m 크기의 정사각형을 그리더니.
그대로 강하게 발을 내디뎠다.
쾅!
하는 땅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박민준이 잘라낸 땅이 네모반듯하게 지상으로 솟구쳐 올랐다.
다른 사람이 봤다면 스스로 눈을 믿지 못할 정도의 엄청난 광경.
지금 이곳에서는 그 일을 해낸 당사자인 박민준밖에 보는 사람이 없었다.
별거 아니라는 듯.
담담하게 그가 검을 도로 집어넣었다.
쿵!
위로 솟구쳤던 네모나게 잘린 흙덩어리가 바닥에 도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거대한 흙덩어리 안에 숨어있던 새끼 괴물 두 마리가 밖으로 튀어나왔다.
보통 인간이라면 제대로 녀석의 동작에 반응하지 못할 정도로 움직임이 빨랐다.
낮에 군인들이 총을 들고도 녀석들과 싸우길 포기하고, 괜히 도망친 게 아니었다.
총을 쏴서 제대로 맞히기도 어렵거니와 그렇다고 몇 방 맞아서 죽을 괴물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박민준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각성자도 감히 따라올 수 없는 반응속도와 무공 실력을 갖춘 자타공인 지구 최강의 인간이었으니.
마치 벌레라도 잡듯.
녀석들을 향해 다가가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펑! 펑!
작은 폭발음과 함께 괴물 두 마리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공중에 거꾸로 뒤집혀서 여러 개의 다리를 빠르게 버둥거리는 모습이었다.
녀석들이 벗어나려고 몸부림쳤지만, 당연히 아무 소용도 없었다.
장법에 이은 허공섭물로 놈들이 움직이지 못하게 꽉 움켜쥐고 있었으니.
그렇게 자신이 원하던 괴물 새끼를 두 마리나 생포하는 데 성공한 박민준이었다.
다만, 저 새로운 괴물의 혈도를 알았다면 이렇게 오래 걸리지 않고, 바로 점혈해서 움직이지 못하게 할 텐데.
그걸 모르는 상황이니.
‘그건 나중에 실험해도 충분하겠지. 지금은 저 두 마리로 만족하니. 그만 돌아가야겠다.’
그가 바람의 정령 왕자를 불러냈다.
“저 두 마리를 데리고 날 따라와.”
그렇게 푸노에스로 하여금 괴물들을 대신 제압해서 따라오게 만든 그가 다시 대통령궁으로 향했다.
그렇게 반쯤 갔을까?
도로에서 뭔가를 발견한 박민준이 눈살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