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저 정도일 줄이야.”
“정말 놀랍군요.”
“사람이 맞긴 한 걸까요?”
“필리핀 쪽 정보원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말이요?”
“신이 괴물로부터 우릴 지켜주기 위해 보낸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그건 너무 과하군요.”
불쾌하다는 표정의 보싱 여사였다.
독실한 신자답게 신을 언급한 것 자체를 불경하다고 여겼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감히 신을…. 괴물 때문에 다들 신앙심이 약해진 건가?’
반면, 다른 두 명의 장관은 아이울의 말에 동의했다.
“저런 엄청난 모습을 보면 다들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겠군요.”
“맞습니다. 신께서 돕지 않고는, 사람의 몸으로 저런 일을 해낼 수가 없지요.”
그들의 대화를 알아듣지 못한 박민준이 방수열에게 물었다.
“뭐라는 거야? 왜 다들 날 힐끔힐끔 쳐다보는 거지?”
“필리핀 때와 비슷한 상황입니다. 당신이 진짜 사람이 맞는지, 혹시 신의 후광을 등에 입은 건 아닌지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놈의 신 타령은 여기서도 여전하군.”
이자벨라가 괴물에게 당해 죽거나 다친 사람들의 호송을 명령했다.
“언제 또 괴물이 잔뜩 몰려올지 모르니. 신속하게 여기 정리하도록 합시다.”
“네. 대통령님.”
“그리고 아이울 장관님은 이곳의 피해 상황을 정리해서 오늘 저녁까지 보고해주세요.”
원래는 이번 작전을 담당한 장군이 해야 하는 일이지만, 그는 사망하면서 시체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했다.
“알겠습니다.”
담담하게 대답하는 국방부 장관을 보며, 이자벨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다들 죽음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어. 이 끔찍한 일이 대체 언제 끝날까?’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나마 다행인 건,
수리남을 돕기 위해 강력한 지원이 도착했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시선이 박민준에게 향했다.
유난히 흰 피부를 가진 동양의 헌터.
‘저 사람이 얼마만큼 우릴 도와줄까? 저 새끼 괴물들을 만들어내는 놈만 죽여도 지금보다 훨씬 나라가 안정되고 상황이 좋아질 텐데.’
보다 적극적으로 도움을 청하고자.
그녀는 원래 이곳에서 괴물 퇴치가 끝나면, 한두 구역 더 다니면서 활약하는 모습을 보일 계획이었다.
하지만, 박민준이 나타나기 전까지.
그 짧은 시간 동안.
괴물에게 입은 인적, 물적 피해가 너무 컸다.
그 때문에 오늘로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장비를 모두 철수하세요. 당분간 추모의 시간을 갖고, 나 또한 현장에 나오지 않을 겁니다.”
“네. 대통령님.”
“그럼 한국에서 오신 분들을 모시고, 돌아갑시다.”
***
수리남 공화국의 대통령궁.
지붕을 제외하고 온통 하얀색으로 칠해놓은 서양식의 3층짜리 큰 집이었다.
전임 대통령의 취향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었는데.
그 이유를 물어보니.
“나라가 어려운 데, 쓸데없는 일로 세금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어요. 한 푼이라도 아껴서 괴물을 잡는 데 사용해야지요.”
괴물 퇴치 말고도 사용해야 할 돈이 너무 많았지만, 오늘 처음 만난 외국인에게 그걸 말할 정도로 허술하지 않은 이자벨라였다.
“그렇군요. 훌륭하십니다. 이러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네. 절대로 제 취향이 아니지만, 어쨌든 그래서 전임자가 사용하던 그대로 이용하는 것뿐이에요.”
박민준은 그녀가 상당히 실용적인 인간이라고 파악했다.
전형적인 정치인이 절대 아니고, 모든 걸 효율로 따지는 실용주의자.
‘저런 여자가 용케 전세기를 보내줬군. 그만큼 이곳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거겠지?’
그래서인지.
이곳 대통령궁에 도착해서도 딱히, 박민준을 환영하는 대규모 파티가 열리진 않았다.
그저 수리남의 주요 요직 인사가 함께하는 저녁 만찬이 준비되어 있다고 알려왔을 뿐이었다.
박민준의 숙소는 3층이었다.
국빈 자격으로 방문한 사람들이 머무는 VIP룸 중에서도 제일 좋은 방으로, 크기도 매우 컸다.
‘심지어 필리핀의 대통령궁에서 내가 머물렀을 때보다 지금 이 방이 더 화려한 것 같은데?’
똑똑.
대통령 비서실 직원이 그의 것으로 보이는 정장을 손에 들고 서 있었다.
“지금 옷이면 충분해. 딱히 갈아입고 싶지 않아.”
한국어로 말했지만, 대충 뜻은 통했는지.
고개를 연신 끄덕인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만찬장으로 향했다.
만찬장은 100명이 한꺼번에 들어설 정도로 큰 식당이었다.
굉장히 화려하고 비싸 보이는 샹들리에가 천장에 여러 개 달려 있었다.
박민준 혼자 옷을 갈아입고 오지 않아서인지.
그 말고 다른 한국인 참석자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반면, 대통령 이자벨라를 포함해서, 수리남의 참석자는 모두 미리 와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깔끔하거나 화려한 정장을 입었다.
심지어 아까 현장에서는 투박한 방탄복을 입고 은빛 창을 휘두르던 여전사 이자벨라 역시. 몸에 쫙 달라붙어 몸매가 훤히 드러나는 붉은색 원피스를 입은 모습이었다.
다만, 목걸이나 팔찌 같은 사치스러운 장식품은 착용하지 않았다.
‘사치는 부리지 않지만, 나름대로 격식은 차린다는 건가?’
박민준은 제대로 눈길을 주지 않았지만.
어지간한 남자는 눈이 돌아갈 정도로, 그녀는 미인이었다.
심지어, 바뀐 옷을 제외하면, 아까 화장기 하나 없이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썼을 때와 지금이 별반 차이가 없을 정도.
박민준의 등장을 보고.
‘드디어 왔구나. 그런데 왜 옷을 갈아입지 않은 거지?’
이자벨라가 상석에서 일어났다.
그녀 뒤에는 수수한 정장을 입은 젊은 동양인이 서 있었다.
우르르.
그녀를 따라 모든 사람이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모두를 돌아본 이자벨라가 박민준을 향해 말했다.
그걸 다시 뒤에 서 있던 동양인 여자가 통역해줬다.
“어서 오세요. 다시 인사드릴게요. 나는 수리남 공화국의 대통령 이자벨라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나도 반갑다.”
짧게 말하며 고개만 까닥한 그를 보고, 수리남의 인사들이 모두 당황했다.
박민준의 태도가 상당히 무례하다고 느꼈다.
“실력이 굉장하다고 듣긴 했지만, 너무 예의가 없군.”
“우리 수리남이 그렇게 우습게 보였나?”
“흥! 도움을 주러 왔다고 벌써 저렇게 생색을 내다니.”
“어디 붙어있는지도 모르는 나라에서 온 주제에.”
만약 저 말을 박민준이 알아들었으면, 당장 큰일이 벌어졌겠지만, 대다수가 네덜란드어로 박민준을 욕했다.
그리고 아까 박민준과 동행했던 수리남의 장관 몇 명은 동료들의 말에 기겁하며 손을 내저었다.
“당장 그 입 다무시오. 지금 어디라고 그딴 소리를 마구 내뱉는 거요.”
“국방부 장관님 말이 맞아요. 우리 공화국을 망하게 할 생각이 아니라면 다신 그딴 말 하지 마세요. 저분이 알아들었을까 봐. 몹시 두렵네요.”
강렬하게 항의받자, 욕을 했던 사람들이 크게 당황했다.
“내가 뭘 어쨌다고. 내 입 가지고 내가 말도 못 하나? 그리고 저자의 복장 좀 보시오. 옷을 갈아입으라고 보내줬는데. 그냥 왔잖아. 그게 우릴 무시하는 게 아니고 뭡니까? 응?”
“당장 그 입 닥치라고 했소.”
아이울 국방부 장관은 박민준이 괴물 100여 마리를 아주 쉽게 죽이는 걸 보고, 그 감동이 여태 남아있는 상태였다.
자국 군인들의 목숨을 구해준 건 물론이고, 외국에서 비싸게 수입한 군수 장비도 무사히 회수할 수 있게 해준 은인이었으니.
그래서 그는 박민준을 욕하는 머저리 동료를 보고 화가 머리끝까지 나버렸다.
착!
허리춤에 차고 있던 권총을 꺼내 들고.
사내의 머리를 겨눴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머리에 총구멍이 나고 싶지 않으면 저분에 대해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마시오.”
박민준의 활약은 한 번이라도 실제로 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매우 컸다.
심지어, 동영상을 미리 봤어도 말이다.
남자는 국방부 장관이 드디어 미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그걸 겉으로 티를 낼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자신의 머리가 총알을 막을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헉! 알았소. 내가 잘못했으니. 그거 내려놓으시오. 제발 날 쏘지 마시오.”
두 손을 어깨 위로 올리고 사정하는 동료를 보며, 크게 한숨을 내쉰 국방부 장관이었다.
다시 경고하고 총을 제자리에 넣었다.
“내 말 명심하시오. 두 번째는 경고 없이 총알을 머리에 박아 줄 테니.”
박민준은 이번에도 그들의 대화를 알아듣지 못해서 왜 싸우는지 몰랐다.
하지만 두 가지에 놀랐다.
‘나 같이 초청받은 외국인과 대통령이 참석한 저녁 식사 자리에서 총을 소지할 수 있다니?’
그리고 60이 훌쩍 넘어 보이는 나이에 저렇게 다른 사람에게 총질하려는 듯, 대놓고 싸우는 혈기왕성한 모습이라니.
‘성격이 대단한 할아버지네. 저러다 회춘하겠어.’
한편, 잠깐의 소동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이자벨라는 별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그들이 하는 걸 지켜보다가 가볍게 주의하라고 경고하는 데 그쳤다.
“손님 앞이니. 제발 자중해주세요.”
아주 막장은 아니었는지.
젊은 그녀의 말에 두 노인이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대통령님.”
“죄송합니다.”
그렇게 상황이 종료되고, 박수열과 나머지 일행이 모두 내려왔다.
“왜 이렇게 늦었어? 저들을 상대로 나 혼자 계속 앉아있었잖아.”
“죄송합니다. 옷이 불편해서 다른 걸 다시 요구하느라 좀 늦었습니다.”
“앞으로 다신 날 기다리게 만들지 마. 무슨 일이 있어도 행사 때는 나보다 먼저 나와 있으라고.”
“네. 그런데 박민준 씨는 왜 옷을 갈아입지 않으신 겁니까?”
“쓸데없이 옷을 갈아입는 게 귀찮아서.”
“아. 네.”
다른 말을 필요 없었다.
이제는 그냥 그가 싫어서 안 했다고 하면, 그걸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방수열이었다.
‘저 사람을 굳이 머리로 이해하거나 설득하려고 하지 말자. 그냥 마음대로 하게 두고, 그대로 받아들이자.’
방수열은 몰랐겠지만, 그게 박민준을 상대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다.
그렇게 모든 참석자가 도착하고 만찬이 시작되었다.
이 자리에서 음식을 온전히 즐기는 사람은 오직 박민준 혼자였다.
나머지는 앞으로의 일에 관해 대화하기 바빴다.
수리남에서는 이자벨라 대통령과 국방부 장관이 대표로 말했고,
한국 측에서는 방수열 혼자 열일을 해야 했다.
원래는 박민준이 한국 일행을 이끄는 대표였지만, 그는 이런 자질구레한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난 그냥 괴물을 찾아서 죽이고, 경험치를 얻기만 하면 된다. 정치적인 일이나 세부 계획은 저 똑똑한 녀석이 알아서 잘하겠지.’
그래서 그는 나중에 결과만 듣겠다고 미리 말해놓고, 방수열에게 만찬장에서의 전권을 위임해 버렸다.
‘한국에서나 외국에서나 결국, 이런 일은 전부 내가 해야 하는구나. 하긴 그래서 국장님도 날 보고 박민준 씨를 따라가라고 한 거겠지만.’
속으로 한숨을 내쉰 그가 이자벨라 대통령에게 물었다.
“제가 들었던 것보다 작은 괴물의 숫자가 더 많은 것 같더군요. 아까 대통령님이 싸운 녀석들만 해도 200마리는 되었다고요?”
“그래요. 원래는 많아야 30에서 40마리 정도여야 하는데, 갑자기 그 많은 괴물 녀석들이 나타났어요.”
“7등급 괴물이 새끼를 낳은 속도가 너무 빠르군요.”
“네. 그래요. 처음엔 300마리가 전부였는데. 지금은 그 숫자를 감히 셀 수도 없을 지경인 것 같아요.”
이자벨라는 무척 억울했다.
7등급 괴물은 못 잡았지만, 그래도 그동안 그녀와 동료들이 죽인 괴물이 수백 마리는 넘었다.
그런데 그들이 괴물을 죽여나가는 속도보다 7등급 괴물이 새끼를 낳는 속도가 더 빨랐으니.
“마치 끝나지 않을 헛수고를 계속하는 기분이겠군요.”
“맞아요. 그래서 저분이 서둘러서 그 괴물을 처리해주셔야 해요.”
박민준이 나서서 7등급 괴물을 잡아준다면, 수리남의 남은 국토를 지킬 수 있다.
또한, 새끼 괴물의 숫자도 더는 증가할 일이 없을 테니.
반드시 서둘러서 놈을 죽여야 했다.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수리남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방수열은 굉장히 낙관적이었다.
그건 바로 그가 믿는 구석이 확실하게 있기 때문이었으니.
방수열이 안심하라는 듯.
이자벨라 대통령에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사실, 박민준 씨가 나서기만 하면, 괴물을 죽이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전혀 걱정하지 마십시오.”
“네? 하지만 상대는 7등급 괴물인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