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절반 이상, 무너져내린 천장.
한쪽이 완전히 무너져서 흔적만 남은 벽.
나무판자로 대충 만든 임시 입국사무소까지.
당연히 공항 직원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민간 이용객도 역시나 한 명도 없었고.
오직 박민준을 맞이하러 나온 수리남 정부 측 인사들만 몇 명 조촐하게 서서 피켓을 들고 있었다.
[We’d like to welcome you to Republic of Suriname.]
박민준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방수열이었다.
그가 피켓 문구를 번역해줬다.
“저분들이 환영하러 나온 수리남 공화국 측 사람들인가 봅니다. 우리의 방문을 환영한다는군요.”
“내가 영어로 대화를 잘 못해서 그렇지. 저 정도는 나도 읽을 수 있어.”
박민준이 조금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방수열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도 조금은 기분이 상한 상태였으니까.
“아. 네. 그럼 제가 필요할 때 말씀하십시오.”
방수열이 다시 수리남 측 사람들을 훑어봤다.
50대 여성 둘과 60대 남성 둘로 구성된 환영단이었다.
필리핀처럼 대규모의 환영식을 바란 건 아니었는데.
‘하지만, 겨우 네 명만 보내다니? 아무리 우리가 장관급이 안 왔다고 해도, 자기네 나라를 돕기 위해 멀고 먼 길을 날아왔거늘.’
4명만 온 주제에 그마저도 생기 없는 표정과 눈빛이어서 그런가?
환영한다는 영어 문구가 그다지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오히려 조롱으로 느껴졌다.
표정이 좋지 않은 한국 측을 향해, 제일 연장자로 보이는 수리남 측 남자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한국인을 맞이하러 온 일행이면서 한국말을 할 줄 모르는지.
그가 영어로 말했다.
“대규모 환영 인사를 구성하지 못해서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지금 우리나라 상황이 너무 좋지 않은지라.”
정곡을 찔린 방수열이 억지 미소를 지었다.
그가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영어로 답했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누구십니까?”
“아. 저희 소개를 아직 하지 않았군요. 저는 수리남 공화국의 국방부 장관 아이울입니다. 이쪽은 경제부 장관 젤린입니다.”
“그럼, 저기 두 여성분은?”
“국도교통부장관 에밀리 그리고 국회의원 보싱 여사입니다. 여당 총재이시기도 하지요.”
겨우 4명이지만, 구성을 듣고 보니.
알짜배기인 걸 알 수 있었다.
‘장관급 인사에 여당 총재가 수행원 하나 없이 자기들끼리 오다니?’
방수열이 상당히 당황했을 만큼.
한국에서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이렇게 그들만 나온 이유를 질문하려고 했는데.
국방부 장관 아이울이 먼저 나서서 손을 내밀었다.
“여긴 위험합니다. 어서 차로 이동하시지요. 가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방수열이 공항을 둘러봤다.
절반 넘게 무너졌지만, 남은 지역도 그리 안전해 보이지 않았다.
금이 잔뜩 가거나 나무로 대충 버팀목을 만들어 지탱하는 모습이었으니까.
빠르게 고개를 끄덕인 그가 박민준을 향해 몸을 돌렸다.
“알고 보니. 수리남에서 장관들과 여당 총재가 마중을 나왔군요.”
“그래서?”
이 정도면 인원이 너무 적지만, 격식은 간신히 갖췄다고 볼 수 있었다.
대통령이 오는 대신 박민준을 위해 전용기도 보내줬고.
하지만, 맨 처음 경험이 중요하다는 말처럼.
‘전에 갔던 나라에서는 대통령까지 나왔었는데. 날 겨우 이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는다는 건가?’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나라를 갈 걸 그랬다.
표정이 좋지 않은 그를 향해 방수열이 말했다.
“바로 차로 안내한다고 하니. 어서 가시지요. 이동하면서 자신들의 상황을 설명해주겠다고 했습니다.”
반파된 공항에서 대통령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
비포장도로까지는 아니었지만, 길이 아주 엉망이었다.
곳곳에 포탄이 터져서 움푹 파이고, 깨진 도로 때문에 지그재그로 운전하는 걸 반복하고 있었다.
도로 주변의 건물도 멀쩡한 게 거의 없었고.
사람은커녕,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조차 거의 보이지 않았다.
밖을 살피는 그를 향해 국방부 장관이 말했다.
“지금 보시다시피, 우리 수리남은 국가 존폐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가늠조차 할 수 없습니다.”
“7등급 괴물은 한 마리라고 하지 않았나?”
“네. 그렇긴 한데. 왜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시는 겁니까?”
“파괴된 흔적을 보면 큰놈 한 마리가 아니라 작은놈들 수백 마리랑 싸운 것 같아서.”
“그 말이 맞습니다. 7등급 괴물은 하나지만, 녀석의 새끼가 수천 마리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전부 놈들과 싸우느라 우리 늙은이들만 마중을 나온 겁니다.”
방수열이 통역하다 말고 눈을 크게 떴다.
이곳에 오기 전엔 지금의 정보를 전혀 듣지 못했었다.
“아니. 곤충형 7등급 괴물 한 마리 퇴치가 우리 한국에 한 의뢰이지 않았습니까?”
“그게 맞습니다.”
“왜 갑자기 전쟁 규모로 확장되는 겁니까? 이거 사기 아닙니까? 수천 마리의 괴물이 더 있다니?”
아이울이 고개를 숙였다.
“속일 생각은 없었습니다. 우리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대형 괴물이라도 한국에서 대신 처리해 주신다면, 나머진 우리 수리남에서 알아서 감당하겠다는 대통령님의 말씀이셨습니다.”
“그렇습니까? 저는 수리남에서 그럴 만한 능력이 안 되는 거로 아는데요? 제가 틀렸습니까?”
작은 괴물이라고 해도, 저 정도 흔적을 남긴 보면, 전투력이 상당할 터.
인구수가 작은 데다, 헌터도 별로 없는 수리남에서 제대로 싸워 이길 리가 없었다.
한편, 외국인으로부터 대놓고 자국을 무시하는 말을 들었지만, 국방부 장관은 무척이나 담담했다.
이미 자존심 따위는 상관없다는 얼굴이었다.
“그 말도 맞습니다. 하지만, 괴물 때문에 나라가 망하진 않게 되겠지요. 그저 그걸 바랄 뿐.”
감당하지 못할 7등급 괴물의 등장 때문에 나라가 망하기 직전이니.
당장은 그 건만 해결되면 된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수도 중심부가 파괴되었으면, 여기 살던 시민들은 다 어디로 이동한 겁니까?”
“하필이면 게이트가 수도에서 열리는 바람에, 대부분 대피하지 못하고, 많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그렇군요. 정말 안타깝습니다.”
이전 정부의 부패 때문에, 강력한 괴물과 제대로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이 근방에 살던 사람들의 피해가 제일 컸다고 했다.
“그 괴물이 혼자 우리 공화국의 수도를 초토화하고, 갑자기 모습을 감췄습니다.”
“그럼 작은 괴물은 언제 나타난 겁니까?”
“녀석이 사라지고, 1개월 뒤입니다.”
“괴물이 새끼를 친다는 것처럼 들리는군요?”
“확신할 수 없지만, 아마 그럴 겁니다. 7등급보다 크기만 아주 작은 소형 버전의 괴물이니까요.”
겨우 1개월 사이에 작은 크기의 괴물이 수천 마리가 생겨났다.
그나마 군대가 싸울 수 있는 녀석들이라, 나라가 완전히 망하는 게 보류된 상태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작은 괴물이 늘어나는 숫자가 너무 빨랐다.
그런 상황에서 다시 7등급 괴물이 나타나면 정말 끝장날 테니.
모습을 숨기고 작은 괴물을 만들어내는 녀석을 한국에서 온 박민준이 찾아내 최대한 빨리 처리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그 큰 녀석이 어디에 숨었는지.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까?”
“그렇습니다. 녀석을 보고 살아남은 사람은 모두 도망친 자들뿐. 맞서 싸운 용감한 사람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그래서 녀석이 언제 어디로 모습을 감췄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는 얘기였다.
방수열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박민준 씨가 괴물의 위치만 자신에게 정확히 알려주면 된다고 다른 건 전혀 필요 없다고 했는데. 정작 위치를 모르다니. 이거 시작부터 일이 꼬였군.’
그렇게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고.
방수열에게 내용을 전달받은 박민준이었다.
“큰 놈만 처리한다고 될 일이 아닐 것 같은데? 정말 다른 도움은 주지 않아도 되는 건가?”
“네. 분명 그렇게 말했습니다.”
“나야 좋지만, 이 나라 사람들이 엄청나게 죽어 나가겠군. 어떤 멍청한 놈이 대통령이어서 그런 말을 한 걸까?”
“놈이 아니라 여자입니다. 수리남 최초이자 최연소 여성 대통령이지요.”
“최연소?”
“30살이랍니다.”
아주 어린 나이는 아니지만, 한 나라의 국정을 책임지는 대통령을 하기에는 무척 젊은 게 사실이었다.
박민준도 조금의 관심을 가질 정도였다.
“그렇게 어린 여자가 대통령을 해? 뭐가 특출난 게 있나?”
“네. 저도 이번에 알았는데. 각성자라고 하더군요.”
“아. 헌터라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는 거군.”
“맞습니다. 수리남에서 제일 강한 헌터라고 합니다.”
이전까지 수리남을 장기 집권하던 세력은 게이트가 열리면서 자연스럽게 몰락했다.
인구의 20%가 순식간에 죽고,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끼리 뽑은 게 바로 지금의 대통령이었다.
헌터라는 경력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어린 여성이지만, 수리남에 남은 마지막 희망이라고 했다.
“이 나라에는 S등급이 없다면서 그럼 A등급인가?”
“네. 그렇습니다.”
“흠. 그럼 별 볼 일 없겠네.”
갑자기 관심이 확 줄었다.
S등급도 아닌 헌터 따위.
“박민준 씨께서 보시기에는 그렇겠지요. 하지만 수리남에서는 그녀마저도 없으면 더는 희망도 없는 게 될 겁니다.”
고개를 끄덕인 그가 방수열에게 마지막 질문을 했다.
“혹시 괴물이 어디 있는지는 들었어?”
드디어 그 질문.
올 것이 왔구나.
그가 박민준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원래는 수도에 오면 바로 찾을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라는 건가?”
“네.
차를 타고 한참을 달려서 도착한 곳은 대통령의 집무실이나 거처가 아니었다.
산불이 지나가서 까맣게 변한 골짜기 입구였다.
“다 왔습니다. 여기서 내리시지요.”
“여기라고요?”
당황한 방수열을 두고, 국방부 장관이 말했다.
“네. 대통령님께서 지금 이곳에 계십니다.”
“어째서 말입니까? 혹시 대통령께서 직접 싸우기라도 한답니까?”
“맞습니다. 당분간 이곳의 전투 때문에, 관저로 가지 않을 거라고 하셔서 여기로 모신 겁니다.”
쾅! 쾅! 쾅!
포탄 터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보통은 중상급 괴물부터는 재래식 화력 무기가 거의 소용없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아쉬운 대로, 예전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모양이었다.
‘작은 괴물들은 중급 이하라는 말이 되는 건가? 아니면 공격력은 높고 방어력은 약하든지.’
방수열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건지.
아이울 국방부 장관이 말했다.
“포탄으로는 괴물을 잘 죽이지 못합니다. 날아오는 걸 보고 녀석들이 피해버리거든요.”
순식간에 땅을 파서 밑으로 숨어든다고 했다.
그게 반복되면 지반이 약해져서 싱크홀이 생기는 경우까지 있었으니.
여러모로 처치하기 곤란한 괴물임이 분명했다.
“그렇게 빠릅니까? 땅도 잘 파는 모양이군요.”
“네. 땅 위로만 다니면, 그나마 군대가 더욱 적극적으로 나설 텐데. 싸우다가 땅으로 숨어버리니.”
그리고 불쑥 군인들 발밑에 나타나서 기습하고 도망치기도 했다.
모든 설명을 들은 박민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쪽이 시끄러운 걸 보니. 대통령도 그곳에 있겠군.”
“맞습니다. 포탄은 괴물을 죽이기 위해서만 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 괴물을 몰기 위해서 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원하는 위치에 괴물이 모이면 집중 포격.
그리고 대통령과 그의 동료 헌터들이 나서서 살아남은 녀석들을 직접 처리한다는 전략이었다.
“지금까지 잘 통했고, 그렇게 제법 많은 새끼 괴물을 처리해왔지요.”
제법 자랑스럽다는 얼굴로 말하는 국방부장관이었다.
하지만 박민준은 그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지금은 전혀 아닌 것 같은데. 이대로 가면 저기 모여있는 사람들이 다 죽게 생겼어.”
“네?”
의문 가득한 아이울의 물음에 그가 답하지 않았다.
그대로 훌쩍 몸을 날리는 모습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