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늙은이. 세상엔 돈으로도 안 되는 게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나야. 난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아.”
박민준이 그 말만 남기고 여관을 먼저 나가버렸다.
리오 소령이 아직 통역하지 않았다.
하지만 노인과 손녀는 자신들이 거절당했다는 걸 미리 알 수 있었다.
흑! 엉엉!
소녀의 상체가 탁자 위로 엎어졌다.
세상 서럽다는 듯.
울음을 터트리는 손녀의 등을 토닥이는 노인의 표정은 생각보다 담담했다.
오히려, 제삼자인 소령이 더 안타까운 얼굴이었다.
“어르신. 제가 당장 가서 저분을 다시 설득해 볼까요?”
“아닙니다. 인연이라는 게 원래 억지로 이뤄지지 않으니. 지금은 그냥 이대로 두는 편이 낫겠군요.”
“그래도 정말 괜찮겠습니까? 손녀분이 엄청나게 실망한 것 같은데요? 너무 서럽게 울고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저러다 말겠지요.”
“아네.”
“그나저나 갑자기 왜 저를 어르신이라고 부르는 겁니까?”
노인의 재산을 알고 그를 부르는 호칭이 노인장에서 어르신으로 바뀐 리오 소령이었다.
그걸 꼬집어 말한 노인의 얘기를 듣고, 그의 마음이 뜨끔했다.
겉으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네? 그거야 어르신께서 저보다 나이가 많으니까? 그렇게 부르는 게 맞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알겠습니다. 나도 그만 일어나봐야겠군요.”
“손녀분은 어쩌고 말입니까?”
“울 만큼 울면 알아서 그치고 집으로 돌아오겠지요.”
그렇게 노인도 여관을 떠났다.
리오 소령도 혼자 계속 울고 있는 소녀를 그냥 모른 척하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혼자 있는 소녀 옆으로 여관 주인 할머니가 다가갔다.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계속했는데.
나중에 가서는 소녀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
더는 울지 않는 소녀였다.
***
뜬금없이 결혼 얘기를 들어서인지 몰라도.
박민준이 바기오를 떠나는 걸 서둘렀다.
바기오 시민들이 그가 떠나지 않기를 애원했다.
“벌써 가시려고요?”
“부디 며칠 더 머물러 주세요.”
“도시 재건을 위해 힘쓰기 전에 축제를 열겁니다. 그러니. 참석해주세요.”
“아직 은혜도 제대로 못 갚았는데 지금 떠나시겠다니요?”
폐허가 된 도시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생겼다.
그래서 축제를 열었다.
괴물을 죽이고 도시를 구한 박민준을 위해서 열린 큰 축제였는데, 정작 당사자는 그 자리에 없었다.
박민준 그때 이미 바기오를 벗어난 뒤였다.
그렇게 지방을 벗어나 수도인 마닐라에 도착한 일행은 자신들을 반기는 엄청난 인파에 깜짝 놀랐다.
앞서 그가 필리핀에 도착할 때와는 달리.
정말 많은 사람이 자발적으로 도로에 나와 박민준을 환호하고 있었다.
“박민준! 박민준!”
“필리핀을 구한 한국의 영웅!”
“신이 보내준 괴물 사냥꾼.”
“저분은 신의 자식임이 분명해!”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혼자 해내셨어.”
이와 비슷한 소리가 얼마나 크게 들리는지.
지금 타고 있는 차가 오픈카가 아님에도 그들의 외침을 전부 들을 수 있었다.
놀랍다는 얼굴을 한 리오 소령이 일행에게 말했다.
“출발하기 전에 제가 대통령님께 직접 연락을 드리긴 했지만, 대체 시민들은 어떻게 알고 나온 걸까요?”
방수열이 스마트폰을 확인하고 답했다.
“당신의 전화를 받은 대통령이 TV 방송에서 바로 대국민 연설을 한 모양입니다.”
그 말을 들은 국장의 한쪽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흥! 그런 건 또 놓치지 않고, 재빨리 하는군. 바기오에서 자기네 시민들이 굶어 죽을 뻔한 건 관심도 없었으면서 말이야.”
자국의 대통령을 욕하는 외국인을 보면서도, 소령은 화가 나지 않았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었으니까.
오히려 리오 소령도 그와 같이 화를 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굳이 나까지 나서서 욕할 필요는 없지.’
그래 봤자, 상대가 자기 나라 대통령이었으니.
누워서 침 뱉기나 마찬가지였다.
아무튼, 그렇게 필리핀 국민의 열렬한 환호와 독설 속에서.
박민준을 태운 차량이 대통령 궁에 도착했다.
조니파 대통령과 고위급 인사들이 모두 나와 그를 반겼다.
주변에는 필리핀 공영방송을 비롯한 다수의 언론사 기사들도 몰려와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우리의 영웅 박민준 씨. 필리핀의 영웅이여! 이렇게 무사한 걸 보니. 정말 기쁩니다.”
리오 소령의 통역을 듣고 박민준이 대놓고 비웃었다.
“내가 왜 당신한테 우리야? 필리핀의 영웅은 또 뭐냐?”
소령은 박민준이 비꼬며 한 말을 어떻게 통역할까 고민하지 않았다.
그대로 자기 대통령에게 전했다.
당황한 대통령이 다른 말은 못 하고, 그저 눈만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주위의 눈치를 살짝 보더니.
“하하하. 농담도 참 잘하시는군요. 그게 한국식 농담인 모양입니다.”
억지로 웃으며 상황을 모면하려고 했다.
“아니. 농담이 아닌데. 그냥 너한테 개수작 부리지 말라는 의미로 한 얘기였을 뿐이야.”
이번에도 박민준의 말을 여과 없이 그대로 대통령에게 전했다.
그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하고, 주위의 고위직들도 상당히 불편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들이 그러든 말든.
박민준은 다시 자기 할 말만 했다.
“괴물 때문에 바기오라는 도시가 완전 폐허처럼 변했어. 나중에 다시 돌아올 거니까. 부지런히 복원 사업에 신경 써라. 그리고 다들 식량이 부족해서 굶주리고 있으니까. 당장 그것부터 해결하고. 알았냐?”
오지랖이 넓은 발언이긴 했지만, 듣는 그의 일행은 속이 다 시원했다.
특히, 리오 소령은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박민준이 대신해준 것에 크게 감동했다.
‘이렇게 속이 시원할 수가 있나?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고 마음대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 몇이나 될까?’
그래서 그가 남몰래 박민준만 볼 수 있도록 엄지를 치켜세웠다.
한편, 박민준이 그런 말을 한 이유는 대통령에게 망신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구한 바기오의 시민들이 다시 평화로운 일상을 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 말이었다.
‘기껏 괴물을 죽이고 사람들을 구해냈는데. 또 굶겨 죽일 순 없지.’
그가 멋대로 사람들에게 뿌린 식량이 많지만, 그래 봤자, 며칠 못 갈 터.
국가에서 나서서 도와줘야 하는 상황인 건 분명했다.
대통령 궁에 와 있던 필리핀 언론에서는 맨 처음 박민준이 자국의 대통령에게 막말할 때만 해도 방송사고라고 생각했다.
‘망했다. 이미 방송이 나갔으니. 나중에 징계를 받겠네.’
하지만 뒤에 이어진 바기오에 관한 그의 말을 듣고, 언론인으로서 제 일을 하지 못한 부끄러움과 함께 통쾌함이 밀려왔다.
‘정작 필리핀 언론을 대표하는 우리 방송조차, 대통령의 눈치를 보느라, 폐허가 된 바기오의 실태를 제대로 TV에 내보내지 않았었는데. 저 외국인이 대신 말해줬구나.’
조니파 대통령은 박민준에게 그런 말들을 듣고도, 제대로 화를 내지 못했다.
이전에 그에게 당한 기억이 아직 또렷하게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색한 웃음을 보이며 말하는 게 고작 그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당연한 말입니다. 바기오뿐 아니라, 삼보앙가 또한 특별 재난 재건구역으로 선포할 겁니다. 시민들의 식생활도 책임질 거고요. 그게 대통령인 내가 할 일이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대통령 궁에서 박민준을 위한 축하 파티가 열렸다.
그가 떠나기 전에 벌인 것보다 두 배는 더 화려했다.
그때 모인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참석자가 보였고, 음식도 더 고급스러워졌다.
조니파 대통령이 박민준에게 잘 보이기 위해 꾸민 일이었는데.
정작 그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볍게 술 몇 잔을 마시고, 방수열을 불렀다.
“귀국을 서둘러줘.”
“네? 박민준 씨께서 괴물을 예정보다 빨리 처리하셔서 아직 며칠 더 머물러도 괜찮습니다.”
“그럼 넌 남아. 난 먼저 한국으로 돌아갈 테니.”
“무슨 급한 용무라도 생긴 겁니까?”
“응. 수문이 때문에.”
“수문이는 또 누굽니까?”
“내가 삼보앙가에서 데려온 녀석의 이름이야.”
“아니. 괴물에게 이름을 붙여준 겁니까? 그것도 왜 꼭 사람 이름처럼?”
“물에 사는 문어라 수문이야. 그리고 내 집을 잘 지키라는 뜻도 담겨있고.”
“아! 그 수문(守門). 게이트키퍼라는 뜻도 있는 거였군요.”
“그래.”
“아무리 그게 새끼라고 해도 괴물인데. 정말 박민준 씨 집에서 기를 겁니까?”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고. 넌 어서 귀국 일정이나 서둘러 잡아.”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다음 날 오전.
필리핀 대통령의 협조를 얻은 방수열이 바로 한국행 비행기를 구했다.
***
인천공항.
필리핀에서 돌아온 박민준이 입국장에 들어섰다.
방수열이 급하게 잡은 귀국 일정이었는데.
그걸 또 어떻게 알았는지.
박민준을 보기 위해, 대한민국 전역에서 구름처럼 많은 사람이 몰려왔다.
필리핀에서는 그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몰려와 하도 시끌벅적 난리가 났으니.
이번에 한국에 돌아와서는 조용히 집에 가길 기대했었다.
하지만.
“박민준 씨! 여기 좀 봐주세요!”
“필리핀에서의 활약에 대해 본인이 직접 말해 주시겠습니까?”
“박민준 씨가 다녀온 곳에 정말 7등급 괴물이 있었습니까? 혹시 6등급이나 그 이하의 괴물은 아니었습니까?”
“현지 음식은 입에 잘 맞았습니까?”
“마닐라 공항에서 박민준 씨를 보기 위해 현지 주민 수만 명이 몰려왔다던데. 느낌이 어떠셨습니까?”
박민준을 향해 질문이 끝도 없이 쏟아졌다.
그가 대답하지 않고 미소 지으며 손만 흔들어줬다.
대신, 천천히 걸음을 옮겨 국장 일행 쪽으로 다가갔다.
“이 사람들 전부 네가 불렀냐?”
“제가요? 전 절대 아닙니다. 괜히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렇다면 방수열이?
“그럼 너야? 네가 기자들을 불렀어?”
“저도 아닙니다. 대체 어떻게 알고 이렇게 많이 몰려온 건지. 오히려 제가 더 궁금합니다.”
그들도 이럴 줄은 전혀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박민준이 둘을 빤히 바라봤다.
‘저 녀석들도 당황하는 걸 보니. 날 속이는 것 같지는 않군.’
그렇게 기자와 팬으로 구성된 인파를 뚫고 입국장을 벗어났다.
그리고 누가 저들을 불렀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하하하. 박민준 씨. 정말 고생 많았습니다. 필리핀에서의 굉장한 활약을 하셨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나니. 저도 이곳에 오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대통령이 박민준을 향해 랩을 하듯 빠르게 긴말을 내뱉었다.
박민준이 대답을 하지 않고, 눈만 위아래로 흘겼다.
찔끔 놀란 대통령이 더욱 과장되게 웃었다.
그를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리며 다가갔다.
“엄청난 괴물과 연이어 싸우고 돌아와서 그런지. 아직 눈매가 날카로우시군요. 한국에서 편히 쉬면서 긴장을 푸시길 바랍니다. 하하하.”
박민준과 한 걸음 거리를 두고 멈춰선 대통령이었다.
그가 목소리를 잔뜩 낮추고 애걸하듯 말했다.
“친구야. 딱 한 번만 안아보자. 제발. 그대로 사진만 찍히면 돼. 내가 네 애완동물도 몰래 입국시켜줬잖아. 응?”
그가 박민준의 대답을 듣지 않고 그대로 꽉 끌어안았다.
박민준도 대통령을 밀쳐내지 않고, 그냥 안겼다.
대한민국 법에는 해외 야생 동물을 입국을 철저하게 금지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박민준이 이번에 함께 데리고 들어온 건 겨우 야생 동물 따위가 아니었다.
괴물의 새끼였으니.
그것도 무려 7등급 어미의 몸에서 나온 것이었고.
대통령의 협조와 허락이 없었으면, 절대 한국에 들어오지 못했을 터였다.
대통령은 사진이 잘 찍혔다는 보좌관의 사인을 보고, 바로 박민준의 몸에서 뒤로 두 걸음 떨어졌다.
딱딱하게 굳은 박민준의 얼굴을 보고, 그가 기자들을 돌아보며 과장되게 목소리를 높였다.
“이야. 방금은 마치 돌덩이를 안은 기분이었습니다. 우리 박민준 씨는 몸이 정만 단단하군요. 과연 세계최강의 S등급 각성자답습니다. 하하하.”
하하 호호.
대통령의 말을 듣고, 사방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혼자 긴장한 사람이 있었으니.
대통령에게 박민준의 전음이 들렸다.
[적당히 해라. 여기서 더 귀찮게 하면 진짜 가만 안 둬.]
움찔.
놀란 그가 서둘러 행사를 마무리했다.
“자자. 우리 영웅 박민준 씨가 피곤할 것 같으니. 오늘은 그만 집으로 보내주도록 합시다.”
***
집으로 돌아온 박민준을 가족들이 크게 반겼다.
“어디 다친 곳은? 몸은 괜찮은 거야?”
“밥은 잘 챙겨 먹었어?”
“아들. 자주 연락을 준다더니. 어떻게 전화 한 번을 안 주니?”
“그래. 엄마가 네 걱정 때문에 그때부터 한숨도 못 주무셨어. 대체 왜 전화를 하지 않은 거야?”
“아들아. 그건 나도 그게 궁금하구나. 대체 필리핀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정말 7등급 괴물이 있긴 했었니?”
“아빠. 정말 그랬으면 얘가 이렇게 일찍 귀국했겠어요? 내 말이 맞지?”
걱정을 가득 담은 질문이 폭풍처럼 쏟아졌다.
“미안 피곤해서 내일 다시 얘기하자.”
일일이 대답하기 귀찮았는지.
피곤하다는 말로 넘긴 박민준이었다.
그렇게 방으로 돌아온 그가 짐을 대충 던져놓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