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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자가 힘을 안 숨김-100화 (100/175)

100화

소령이 밀 포대가 쌓여있는 곳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기 저 포대들 말입니다. 어디서 구하신 겁니까?”

“저거? 재래시장 근처 지하 창고에서 발견한 건데. 그건 왜?”

“어휴. 저게 저 노인의 것이랍니다.”

주인이 나타났다.

‘내가 떠난 뒤에야 이곳으로 돌아올 줄 알았는데. 저 노인의 것이었을 줄이야.’

박민준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진짜야?”

“네. 수백 명이 몰려와 있으니. 감히 이런 거짓말을 함부로 하지 못할 겁니다.”

여관으로 몰려오는 인원이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아까는 100명이 조금 넘었었는데.

지금은 그 두 배가 훌쩍 넘은 듯 보였다.

괴물이 죽었다는 소식과 함께.

곡식을 다시 무료로 나눠준다는 말이 순식간에 퍼졌기 때문이었다.

박민준이 노인을 슬쩍 훔쳐보고, 소령에게 다시 물었다.

“어젯밤에는 아무 말도 없었잖아? 왜 그때 말하지 않고?”

“그때는 지치고 어두워서 제대로 못 봤다고 합니다. 지금 여기 다시 와서 포대에 찍힌 표식을 보고 알았답니다”

“그래서? 저 노인이 뭘 어떻게 하겠대?”

“당신을 만나서 직접 말하겠답니다.”

“그래? 그럼 여긴 시끄러우니까. 여관으로 데리고 들어와. 난 먼저 들어가 있을게.”

“알겠습니다.”

박민준은 돈이 없는 게 아니었다.

이미 가진 돈이 많으니.

그가 마음만 먹으면, 저까짓 밀 수백 포대 따위는 몽땅 물어줄 수 있다.

아니면, 마닐라로 돌아가서 필리핀 대통령에게 큰소리치고 대신 돈을 내라고 할 수도 있었다.

만약 박민준이 제때 오지 않았다면, 실제로 수십, 아니 수백 명이 아사(餓死)했을지도 모른다.

그걸 수장인 대통령인 전혀 모르고 있었으니.

박민준이 대신 나서서 국민을 살려준 거로 치고, 돈을 내라고 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박민준이 멋대로 공짜로 가져가라 말했는데, 정작 주인에게 아무 말도 없이, 자기 멋대로 생색냈던 게 알려지면?

‘그건 너무 쪽팔리지.’

다른 사람의 눈치를 거의 안 보는 박민준이라고 해도, 이번엔 조용히 일을 처리하고 싶었다.

그래서 노인을 따로 여관 안으로 불러들였다.

***

박민준이 식탁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 뒤에는 리오 소령이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맞은 편에는 노인과 손녀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는데.

두 사람이 그를 보는 눈빛이 확연히 달랐다.

노인은 뭔가 물건을 품평하는 것처럼 보였고.

소녀는 전에도 그렇듯, 그에게 마음을 빼앗긴 얼굴이었다.

박민준이 둘을 번갈아 봤다.

그리고 노인에게 먼저 말했다.

“노인장이 밖에 쌓아둔 식량의 주인이라고?”

“그렇습니다. 포대에 찍힌 표식이 그 증거입니다.”

“흠.”

“그것 때문에 나와 얘기를 나누고 싶다고 한 건가?”

“밖에 있는 물건은 내게 그리 큰 의미가 없습니다. ”

“의미가 없어? 그런데 왜 날 찾아온 거지?”

그의 질문에 답하기 전.

노인이 손녀를 잠시 바라봤다.

이 세상에 그녀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다는 듯.

애정 어린 눈빛이었다.

그리고 다시 박민준을 살폈다.

노인은 그의 얼굴이 아니라 손을 보고 있었다.

짧게 자른 손톱에 손가락이나 손목에는 그 흔한 반지나 시계도 보이지 않았다.

그게 마음에 들었는지.

노인이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박민준에게 질문했다.

“혹시 결혼은 하셨습니까? 아니면 지금 사귀는 사람이라도 있는지요?”

상대의 말을 듣고, 박민준이 순간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가 상상도 하지 못했을 만큼 뜬금없는 말이었으니.

“아니. 그런데 그건 왜 묻지? 그게 지금 상황하고 무슨 관계가 있다고?”

“아주 상관이 많지요. 당신은 혹시 제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알고 계십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어? 당연히 모르지.”

둘은 어제 처음 본 사이였을 뿐.

박민준의 결혼 여부도 모르는 노인의 재산 따위를 그가 알 턱이 없었다.

노인이 살짝 미소 지으며 자신의 재산을 먼저 밝혔다.

“이곳 바기오 시내의 땅, 3분의 1이 내 것입니다.”

“도시의 30%가 넘는 땅이 노인장 거라고?”

박민준은 괴물을 찾아다니면서 바기오를 열심히 뛰어다녔다.

그래서 그 크기가 얼마나 큰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엄청나게 큰 도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작은 도시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중 3분의 1이 이 노인 소유라고? 별로 그렇게 보이지도 않는데?’

말로만 듣던 전설의 땅 부자가 바로 그의 앞에 있었다.

“그렇습니다. 또한, 다른 나라의 휴양지에도 토지를 제법 소유하고 있지요.”

한편, 박민준과는 별개로 리오 소령은 더 큰 충격을 받았다.

다른 동남아시아와는 달리.

필리핀은 땅값이 선진국과 비교해도 그리 싼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유명 관광지는 여느 나라보다 더 비쌌다.

이곳이 수도에서 떨어진 지방이라고 해도, 나름대로 관광지로 알려진 지역.

그래서 보통의 다른 지역보다는 땅값이 비싼 편이었다.

필리핀에서 태어난 리오 소령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노인이 대체 얼마나 부자라는 거지? 보유한 땅값만 해도 몇천억. 아니, 겨우 그 정도가 아니지. 몇조는 되려나?’

다른 나라의 휴양지 땅까지 포함하면 조 단위 재산도 결코 허언이 아닐 터.

그런 어마어마한 부자가 왜 괴물에게 잡혀있었던 걸까?

진작 도시에서 도망치거나 저택에서 숨어있지 않고?

그의 의문은 바로 풀렸다.

“그리고 지금은 아마 대부분 많이 무너졌겠지만, 도시에 지어진 리조트와 호텔의 2분의 1이 내 소유입니다.”

“50%가 당신 거란 말입니까?”

“네. 아까 말씀드린 토지와 마찬가지로 해외 쪽에도 호텔을 몇 개 가지고 있습니다.”

땅도 값지지만, 그 위가 개발되어 호텔이 지어지면 그 가치가 더욱 상승하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특히나, 거대한 원숭이 괴물이 몸을 숨길 정도의 큰 호텔이라면, 더욱 비싼 건물이었을 것이다.

박민준이 노인을 발견한 호텔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럼 마지막에 괴물이 죽은 호텔도 노인장 거였겠군?”

“맞습니다.”

바기오에 괴물이 나타나고, 도시 중심부가 제일 먼저 점령당했다.

그래서 노인은 유일하게 남은 혈육인 손녀를 데리고, 자신 소유의 도시 외곽 호텔에 숨어 지냈다.

먹을 것이 떨어지고, 더는 사람도 보이지 않자.

괴물이 도시 외곽으로 이동했고, 하필 그게 노인이 머물고 있던 호텔이었으니.

늙고 병든 몸을 이끌고, 도망치지 못한 노인과 그를 버리고 떠나지 못한 손녀가 함께 붙잡혔었다.

그 뒤로 박민준이 나타나서 괴물을 죽이고, 그들을 풀어줬다.

“그런데 왜 갑자기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거지? 재산을 자랑하려면 다른 사람을 찾아봐. 난 그런 것에 관심이 없어.”

그 말을 들은 노인이 크게 미소 지었다.

이제껏 본 중에 제일 큰 반응이었다.

한편, 둘의 대화를 통역하던 리오 소령은 뭔가 알아차린 눈치였다.

그가 설마? 하는 얼굴로 노인에게 물었다.

“당신 혹시 이분과 저 아이를 서로 맺어주려는 겁니까?”

“맞습니다. 나는 저분을 내 손녀사위로 삼고 싶습니다.”

“이제 겨우 이틀 정도 본 사이인데?”

“시간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손녀에게 어울리는 좋은 사람이 나타났으니. 놓치지 말고 잡아야지요.”

“손녀분의 나이도 너무 어리지 않습니까? 이제 겨우 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데?”

“체구가 좀 작아서 그렇지. 벌써 18살입니다. 내년이면 성인이 되지요.”

노인의 말을 소령이 아직 통역하지 않았다.

‘둘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왜 갑자기 나한테 알려주지 않고 자기들끼리 말하는 거야?’

박민준이 살짝 불쾌함을 느꼈다.

눈살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는데.

노인의 손녀는 그의 그런 모습조차 반할 지경이었다.

감수성이 풍부한 나이.

죽음을 앞두고 있었는데.

뽀얀 피부의 외국인이 백마 탄 기사처럼 나타났다.

괴물을 죽이고, 자신과 유일한 가족인 할아버지를 구해줬으니.

소녀는 그에게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하면, 저런 눈가의 주름까지 멋있을 수 있는 거지?’

눈에서 하트를 뿜어내는 소녀를 보면서, 박민준이 조금 껄끄러움을 느꼈다.

‘저 아이는 어제부터 왜 저렇게 날 보는 거야?’

자신의 조카보다 더 어린 소녀의 관심에 부담을 느꼈다.

어색함을 이기지 못한 그가 리오 소령을 돌아봤다.

“야!”

노인과 심각한 대화를 나누느라.

잠시 늦게 반응한 그였다.

“야!”

“네?”

“갑자기 왜 날 빼돌리고 둘만 대화를 나누는 거야? 내가 들으면 안 되는 일이라도 있나?”

“그럴 리가요. 박민준 씨께서 당사자이신걸요.”

“내가 당사자라니?”

“실은 저 노인이 자기 손녀와 당신을 이어주고 싶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박민준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노인과 소녀를 슬쩍 봤다.

그걸 본 소령이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상당히 놀라신 모양이군요. 그런 표정은 처음 봅니다.”

“놀라지 않을 수가 있냐? 네가 당사자였으면 더 놀랐을걸.”

“맞습니다. 실은 그래서 저도 통역하길 잠시 까먹었던 겁니다.”

박민준이 다시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노인을 바라봤다.

“그나저나 저 할아버지는 내가 몇 살인지도 모르고 그런 말을 한 거겠지? 저런 어린애와 내가 결혼이라니? 말도 안 되지.”

소령은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제 겨우 20대 초반인 것 같은데? 그럼 저 소녀랑 네다섯 살 차이밖에 나지 않잖아?’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박민준에게 물었다.

“네? 당신과 저 소녀의 나이 차이가 조금 나긴 해도 아예 결혼을 못 할 정도는 아니지 않습니까?”

“너 내가 몇 살이라고 알고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많이 먹어봤자 22살 정도 아니겠습니까?”

“22살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내가 인마 지금 42살이야.”

“네?!”

리오 소령은 아까 노인이 결혼 얘기를 꺼냈을 때보다 몇 배는 더 놀란 표정이었다.

그의 나이를 아무리 높게 봐도 절대 42살은 아니었다.

‘30대라고 해도 거짓말이라고 할 텐데.’

“이런 상황에서 지금 절 놀리시는 겁니까?”

빡!

박민준이 눈을 부라리며, 소령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야! 내가 장난치게 생겼냐? 나 진짜 마흔두 살이라고. 못 믿겠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되잖아.”

“아니. 세상에. 어딜 봐서 당신이 40대입니까? 나보다도 한참 어려 보이는데.”

“그럼 여태 내가 너보다 나이도 더 어리면서 반말하는 줄 알았냐?”

“네.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속으로 아주 억울했겠다?”

“아니요. 처음엔 조금 억울했는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소령이 옆에서 본 박민준의 업적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일들은 겨우 한 사람이 며칠 만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걸 몸에 상처 하나 없이 해낸 사람이라 박민준이라.

그래서 자신보다 어려 보이는 그가 반말해도 오히려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한편, 노인과 손녀는 한국말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둘의 대화를 알아듣지 못했다.

“할아버지. 저분들이 대체 뭐라고 하는 걸까요?”

“글쎄다. 하지만 거절하긴 쉽지 않을 거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네요. 내년에 성년이 되면, 저분하고 꼭 결혼하고 싶어요.”

“이 할아버지만 믿으렴. 내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주마.”

둘의 바람과는 달리.

박민준은 소녀와 결혼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누군가와 사귈 마음도 없는 상태인데, 심지어 결혼이라니?

그것도 겨우 이틀 전에 만난 외국인 소녀하고?

박민준이 노인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난 당분간 결혼 같은 걸 마음이 없으니. 허튼 생각 하지 말고, 손녀를 다른 좋은 사람하고 연결해주길 바란다.”

리오가 그의 말을 통역하면서 진심으로 아까워했다.

‘아니. 나이 차이가 뭐가 중요해?! 저 노인이 죽으면 그 재산을 모두 손녀가 물려받을 텐데. 그럼 사위 재산이나 마찬가지인 거 아닌가?’

거절한다는 말을 듣고 노인이 눈을 부릅떴다.

‘설마 내 재산에 대해 듣고도 제안을 거절할 줄이야?’

노인이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되물었다.

“왜 싫다는 겁니까? 결혼만 하면, 내 당장 모든 재산을 손녀와 사위인 당신 앞으로 돌려줄 수 있습니다.”

그걸 들은 리오 소령이 자기 일처럼 흥분했다.

“저 노인이 자기 손녀와 결혼만 해주면, 그 즉시 공동명의로 전 재산을 물려주겠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박민준이 고민도 하지 않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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