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여관 앞이 인파로 가득했다.
대충 세 봐도 최소 100명은 훌쩍 넘어 보였다.
‘설마? 어젯밤 일 때문에 단체로 항의하러 온 건가? 아니면 식량을 노리고?’
리오 소령은 사람들이 아직 여관 앞에 잔뜩 쌓여 있는 식량을 노리고 왔거나, 박민준에 항의하려고 단체로 몰려온 줄 알았다.
‘미친! 그분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데. 다 죽으려고 잔뜩 몰려온 건가?!’
얼굴을 찌푸린 리오 소령이 재빨리 제복을 차려입었다.
권총까지 챙겨 들었다.
말이 통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무력을 쓰는 수밖에.
꿀꺽.
침을 삼킨 그가 조심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 순간.
와~!
엄청난 함성이 들렸다.
항의하러 오거나, 싸우려는 소리는 절대 아니었다.
“뭐…. 뭐야?!”
뜻밖의 상황에 당황한 그가 뒷걸음질 쳤다.
덥석.
소령은 자기 어깨를 잡는 손길을 느꼈다.
“어떻게 알고 나왔냐?”
“네?!”
“마침 널 부르려던 참이었거든. 방수열이 필리핀 말을 못 해서 주민들과 영어로만 대화했는데 너무 답답하더라.”
예전의 필리핀은 영어를 상당히 잘 쓰는 나라 중 하나였다.
하지만 게이트가 열린 지난 20년 동안 사정이 달라졌다.
필리핀 경제가 무너지고, 인구가 급속하게 줄었다.
그나마 수도인 마닐라에서는 지금도 영어를 쓰는 사람을 곧잘 만날 수 있지만, 이곳 바기오 같은 지방은 필리핀어만 쓸 줄 알 뿐. 영어를 그리 잘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 사정을 잘 아는 리오 소령이다.
“저를 진작 부르시지 않고요? 여기 사람들은 영어도 거의 못 할 텐데요.”
“네가 너무 잘 자고 있길래, 그냥 깨우지 않았었어. 이런 줄 알았으면 깨웠을 텐데.”
“아. 죄송합니다.”
“죄송은 무슨. 이제 네가 왔으니까. 통역이나 열심히 해라.”
“알겠습니다.”
박민준이 말하고 리오 소령이 그걸 시민들에게 전했다.
“너희를 괴롭히던 괴물은 나 박민준이 확실히 처리했다.”
와!
사람들의 함성이 쏟아졌다.
필리핀어로 말했기 때문에 여기 모인 모두가 바로 알아들었다.
그래서 아까 리오 소령이 들었던 것보다 더 큰 소리가 들렸다.
“이제 걱정 없이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여기 있는 식량 또한 마음껏 가져가도 좋다. 서로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나눠라.”
어차피 여기 쌓아둔 밀 포대는 박민준의 물건이 아니었다.
주인도 딱히 없는 상황인 것 같고, 괴물이 죽은 걸 알고 그가 돌아온다고 해도, 박민준은 이미 한국으로 떠난 뒤일 터.
그래서 선심을 쓴 거였는데.
그런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감동해서 목놓아 소리쳤다.
“팍민쭌! 팍민쭌!”
시민들이 어설픈 발음으로 그의 이름을 환호했다.
“앞으로 이 도시에 강한 괴물이 또 나타나면 내가 너희를 돕기 위해 돌아오겠다. 반드시!”
그 말을 듣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생겼다.
무릎을 꿇고 손 모아 울부짖는 사람들도 있었다.
“와! 바기오의 영웅! 당신이 내 가족을 구했습니다.”
“당신은 신의 아들이 분명합니다! 신이시여. 우리를 위해 저분을 보내주셨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괴물이 없어져도, 당분간 어떻게 먹고 사나 걱정했었는데. 이런 은혜를 또 베푸시다니. 고맙습니다.”
한편, 마지막 말을 끝으로 통역을 마친 리오 소령이었다.
그가 갑자기 박민준 앞에 무릎을 꿇었다.
“넌 또 왜 그래?”
“당신에게 진심으로 감사해서 이러는 겁니다.”
“네가 왜?”
“넌 여기 사람도 아니잖아? 네 고향은 삼보앙가라면서?”
“그건 그렇지요. 하지만 이곳 사람들도 저와 같은 민족입니다. 필리핀 국민이지요.”
리오 소령은 필리핀과 전혀 상관없는 한국의 헌터 박민준이 시민들을 구해준 걸 진심으로 감사하게 여겼다.
또한, 괴물이 또 나타나서 지금 같은 어려움이 생기면 돌아오겠다는 약속까지 하다니.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애초에 군인정신이 투철한 리오 소령은 딱히 종교를 믿지 않았다.
하지만 삼보앙가에 이어 바기오까지.
파괴를 일삼던 괴물을 죽이고, 또한 고통받던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며, 그들의 마음마저 사로잡았으니.
리오 소령은 진심으로 박민준만큼은 정말 신이 보낸 사자. 신의 아들일 거라고 생각했다.
지난번 삼보앙가 때도 이런 느낌을 받았지만, 이번엔 확신했다.
‘나 같은 보통사람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분이시다. 정말 신께서 우리 필리핀을 위해 이분을 보내주신 것 같다.’
한편, 국장은 박민준이 멋대로 약속한 걸 듣고 당황했다.
이미 두 마리의 괴물을 처리한 이상.
한동안 필리핀에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곳 말고도 박민준과 한국의 도움이 필요한 나라가 줄을 서고 있었으니.
그가 정색하고 박민준에게 말했다.
“어째서 그런 약속을 혼자 멋대로 하신 겁니까?”
“뭐가?”
“괴물이 나타나면 이곳에 다시 도우러 오겠다니요? 여기서 할 일이 끝났지만, 당신이 가야 할 나라가 아직 많이 남아있습니다.”
“내가 어딜 가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인데?”
“네?”
“난 네 부하가 아니야. 한국이든 외국이든, 그 어디든 간에 내가 원할 때 어디든 갈 수 있어.”
그걸 듣고, 방수열이 그의 말을 거들었다.
“국장님. 죄송하지만, 박민준 씨 말이 맞습니다.”
“뭐?”
“우리가 저분과 함께 움직이는 건, 저분에게 명령을 내리거나, 돕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게 무슨 헛소리인가? 그럼 우리가 왜 여기까지 같이 온 건데?”
“저분이 허락하셨기 때문에 함께 올 수 있었던 거지요. 그 덕분에 우리도 덩달아 생색내고 있는 거고.”
부하의 말을 듣고, 국장이 뒤늦게 현실을 깨달았다.
‘그렇구나. 내가 짧게 생각하고, 큰 실수를 했어. 함께 움직였지만, 저자는 게이트 관리국 소속이 아니야. 대통령님의 말을 듣는 존재도 아니었지.’
국장이 고개 숙여 박민준에게 사과했다.
그걸 쿨하게 받아준 그였다.
‘애초에 똑똑한 인간도 아니고, 힘만 센 단순한 녀석인 걸 알았으니. 그냥 사과를 받고, 마음이 넓은 내가 이해하자.’
방수열이 그의 편을 들긴 했지만, 속으로 박민준을 제어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저렇게 멋대로 굴면, 미리 세운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
박민준이 해외의 다른 나라에 방문하는 일은, 단순히 개인 자격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었다.
한국 정부와 해외 정부 사이에 헌터 원조 협약을 맺고, 괴물을 처리한 뒤. 그에 따른 철저한 보상과 보답을 얻어내는 일이었다.
아까 그의 말처럼 고생은 박민준이 하고, 한국 정부가 생색을 내며 약간의 이득도 가져가는 꿀 빠는 일이란 말이었다.
박민준이 일방적으로 가지려는 괴물 사체의 소유권과는 별개로, 꽤 많은 돈과 조건들이 양국 사이에 오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제멋대로 필리핀이고 어디고 괴물을 따라 막 움직이면, 그것만큼 곤란한 일도 없었으니.
국익을 위해서라도 방수열은 지금 바로 박민준에게 확실히 말하려고 했다.
그가 조용히 박민준 옆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왜? 무슨 할 말 있어?”
“네. 방금은 제가 당신 편을 들었지만, 사실 국장님의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어째서? 내가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한다는 거야? 누가 날 막을 건데?”
“그런 말이 아닙니다. 당장 필리핀에 오는 일도 박민준 씨 당신이 선택한 걸 제가 따르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그러니까요. 당신이 원하는 나라의 괴물을 잡으러 가는 일은 앞으로도 계속될 겁니다. 그건 제가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당연하지. 내가 방문할 나라와 사냥할 괴물은 항상 내가 고를 거야.”
“맞습니다. 그러셔야지요.”
“그럼 저놈의 말이 뭐가 맞는 건데?”
“박민준 씨께서 원하는 대로 움직이겠지만, 어느 정도 양보해 주셔야 한다는 겁니다.”
“양보?”
“네. 어느 정도 우리가 정한 일정에 협조를 해 주셔야. 한국 정부도 그 나라와 미리 협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박민준이 바로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나도 한국이 잘되는 일이라면 굳이 반대하고 싶지 않아.”
“네.”
“그래서 지금도 적당히 양보하고 협조하고 있잖아.”
“훌륭하십니다. 그렇다면 아까처럼 재방문을 약속하시면 곤란하다는 것도 아시겠군요.”
“아니.”
“아니라고요?”
“응. 여기 다시 괴물을 잡으러 오더라도 겨우 하루 정도면 될 일인데. 그게 많이 어려운 일은 아니잖아?”
“어려운 일이 아니라…….”
말소리가 줄어든 방수열이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이내, 박민준이 괴물을 얼마나 빨리 사냥했는지, 깨달았다.
‘그래. 괴물을 발견할 수 없어서 시간이 오래 걸렸을 뿐. 일단 발견하면, 하루가 아니라 몇 시간 안에 처리했다. 그게 무려 7등급 괴물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지.’
7등급 괴물은 확실히, 각성한 헌터들이 함부로 상대할 수 없는 괴물 등급이었지만, 박민준에겐 아니었다.
크기는 무지막지하게 크지만, 그가 긴장할 필요도 없이 나약한 존재, 단검에 베어 죽일 수 있는 하찮은 것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으니.
또한, 필리핀에서 한국은 비행기로 4시간 정도 거리.
차로 이동하는 시간이 더 걸린다고 해도, 괴물의 위치만 확실하다면,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그럼, 박민준이 당일치기로 필리핀에 돌아와 괴물을 없애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계산이 선다.
생각을 정리한 방수열이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당신 말이 전부 맞습니다. 제가 너무 일반적으로 생각해버렸군요. 박민준 씨를 일반 헌터의 수준으로 비교하면 절대 안 되는 거였는데.”
“이제 깨달았냐? 똑똑한 놈인 줄 알았더니.”
“이건 전부 당신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나 때문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해서 무려 7등급 괴물을 쉽게 처리해 버렸으니. 세상 그 누가 이럴 줄 예상하고, 그걸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지금 나 칭찬한 거 맞지?”
“네. 맞습니다. 박민준 씨가 세계에서 제일 강한 사람이라는 말. 이젠 저뿐 아니라 다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겁니다.”
“당연하지. 내가 거짓말을 하는 줄 알았냐?”
“아니요. 세상 그 어느 헌터도 7등급 괴물을 혼자 이렇게 빨리 죽이지 못할 거란 말이었습니다.”
“그건 그렇지. 여태껏 내가 본 놈들의 수준을 생각하면, 여기서 만난 괴물을 절대 이길 수 없을 테니까.”
“그거 혹시 이지원 부국장님도 포함되는 말입니까?”
“당연하지. 그 애가 그렇게 강한 건 아니잖아? 오히려 약골에 속하지.”
“아……. 네.”
세상에.
세계 최연소 S등급 헌터 이지원이 약골에 속한다니?!
다른 사람이 말한 걸 들었으면, 방수열은 확실히 그를 미쳤다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박민준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저분의 말을 도저히 부정할 수가 없다.’
그들이 조용히 대화를 나누는 사이.
노인과 소녀가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저들은 어제 박민준 씨께서 구해준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왜 이쪽으로 오는 걸까요?”
“그냥 감사 인사를 또 하려는 거 아닐까?”
“노인의 표정을 보니. 전혀 그런 것 같지가 않은데요?”
그 말을 들은 박민준이 뒤늦게 노인의 표정을 살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 입을 일자로 꾹 다물고 있었다.
그를 향해 점점 다가오는 그 둘의 앞을 리오 소령이 먼저 막아섰다.
소령과 노인이 필리핀어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당황한 듯.
이마를 찌푸린 리오 소령이 박민준을 향해 뛰어왔다.
“저기……. 좀 곤란한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왜? 혹시 괴물이 또 나타난 거야?”
“다행히 그건 아닙니다.”
“그럼 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