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이는 그들 앞에서.
마법 같은 일이 벌어졌다.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 사람이 불쑥 나타났으니.
“저건 사람이잖아?”
“방금까지 분명 아무도 없었는데.”
“어디서 나타난 거지?”
괴물의 죽음을 확인하고, 투명화를 푼 박민준이었다.
그가 모습을 드러냈지만, 여전히 문제가 있었다.
박민준이 어설픈 영어로 띄엄띄엄 말했지만, 저들은 오직 필리핀어로만 떠드는 통에 소통이 되지 않았다.
“에휴. 나도 모르겠다. 풀어주면 알아서 집에 찾아가겠지.”
박민준이 철창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길에 맞춰서.
탱!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리고는.
잘려나간 창살 부위가 통째로 떨어져 나갔다.
그걸 본 늙은 남자가 멍청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자는 사람이 아닌가? 어떻게 저런 일이 가능한 거지?”
“할아버지. 저 사람은 헌터잖아요. 딱 보면 몰라요?”
“헌터?”
“각성자 몰라요? 아까 갑자기 나타난 것도 그렇고, 지금도 저런 짓을 할 수 있는 걸 보면 헌터가 분명해요.”
“아무리 그래도 저 거대한 괴물을 단숨에 죽일 수 있는 건가?”
“아무리 크고 강해도 별수 있나요?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막을 수도 없었겠지요.”
“그렇군. 오래 살다 보니. 별일을 다 겪네.”
노인과 손녀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
다른 사람들이 슬금슬금 창살 밖으로 걸어 나왔다.
하지만, 금방 박민준의 눈치를 보면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눈치였다.
그대로 떠나도 되는지.
아니면 저 남자의 명령을 기다렸다가 따라야 하는지.
말도 통하지 않고.
자기 눈치만 보는 그들을 향해.
박민준이 떠나라는 손짓을 했다.
그걸 알아본 사람들이 꾸벅 인사를 하고, 감사를 전하며 떠났다.
그렇게 한두 명씩 나가기 시작하면서 나머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인사를 건넸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못된 괴물에게 꼼짝없이 잡아먹히는 줄 알았어요. 구해주신 것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우리에게 큰 은혜를 베풀었으니. 신께서도 당신에게 축복을 내릴 겁니다.”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덕분에 가족 곁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혼자 움직일 힘이 남은 사람들이 떠나고.
이젠 세 사람만 남았다.
아까의 늙은 남자와 그를 돌보기 위해 남은 손녀.
그리고 중년 여인 한 명이었다.
‘저 여자는 분명, 여관 주인의 며느리잖아? 남편을 찾으려고 남은 건가?’
박민준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흠칫.
놀란 여자가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러다 박민준이 꺼낸 사진을 보더니.
“저건. 우리 집에 있던 사진인데?”
다시 빠르게 그를 향해 다가왔다.
박민준이 여자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손가락으로 남자를 가리켰다.
여자가 고개를 빠르게 내저으며 소리쳤다.
“남편은 죽었어요. 저는 시체라도 찾아보려고 남은 거예요.”
이번에도 박민준은 그녀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리오를 데리고 오는 건데.’
아쉬움을 느낀 그가 여자에게 사진은 넘겨줬다.
그걸 받아든 여인이 고개 숙여 감사를 전하고, 사진을 품속에 넣었다.
노인을 부축한 소녀가 그에게 다가왔지만, 이번에도 말이 통하지 않았다.
박민준이 머리를 긁적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 둘은 왜 남아서 날 귀찮게 하는 거지? 집에 돌아갈 힘이 없나?”
대충 때려잡은 그가 프노에스를 불렀다.
휘~잉
돌풍이 불면서 바람의 정령 왕자가 나타났다.
“여기 세 사람을 아까 그 포대를 쌓았던 건물 앞으로 데려가. 그걸 끝내면 너도 알아서 돌아가고.”
휙!
알겠다는 듯.
바람이 세게 불더니.
노인과 손녀. 여관 주인의 며느리를 감싸 안았다.
“할아버지! 바람이 이상해요.”
“애니야. 난 멀리 못가니. 너라도 도망치거라.”
“그럴 순 없어요.”
두 사람이 뭐라 떠들든 정령 왕자는 관심이 없었다.
이젠 과부가 된 여인은 벌벌 떨면서도 비명은 지르지 않았다.
그저.
“남편의 시체를 찾아야 하는데.”
라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바람이 그대로 세 사람을 안아 들고 하늘로 높이 사라졌다.
혼자 남은 박민준이 건물 주변을 본격적으로 수색하기 시작했다.
혹시 자신이 놓친 생존자가 또 있는지.
아니면, 사람들의 시체를 발견하고, 돌아가서 리오 소령에게 그 위치를 알려줄 생각이었다.
그가 눈을 부릅뜨고, 빠르게 주변을 돌아다녔다.
결국, 생존자는 찾지 못했다.
‘아까 철창에 갇혀있던 사람들이 전부였군.’
대신 사람의 뼈를 무더기로 발견할 수 있었는데.
일전에 폐허가 된 호텔에서 봤던 배설물 사이에 박혀 있었다.
이번에 처음 본 것도 아닌데.
경험이 풍부한 박민준조차 적응하지 못할 광경이었다.
‘아까 그 사람들을 먼저 돌려보내길 잘했다. 이걸 봤으면 소리를 꽥꽥 지르면서 기절했겠는데.’
무섭거나 두렵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더럽고 역겨웠다.
화도 치밀어 올랐다.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괴물을 너무 쉽게 죽였어. 잔뜩 괴롭혀 주고 천천히 죽여버렸어야 했는데.’
그는 끔찍한 배설물 산에서 따로 시체와 뼈를 추려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어차피 모르는 사람들이니.
아까 생각했던 대로 이곳의 위치만 소령에게 알려주기로 했다.
***
박민준이 여관으로 돌아왔다.
그가 원숭이 괴물의 보금자리에서 구해준 사람들은 정작, 아직 돌아오지 못했다.
박민준의 이동속도가 워낙 빨랐기 때문에.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그들은 아직 도시 외곽에 있었다.
바람의 정령 왕자가 데려오는 세 사람도 아직 오고 있었고.
한편, 박민준이 돌아온 걸 알아본 일행이 서둘러 밖으로 뛰쳐나왔다.
“무사히 돌아오셨군요. 그런데 생각보다 오래 걸리셨습니다?”
리오 소령의 말을 듣고, 박민준이 대답하기 전에.
방수열이 먼저 목소리를 높였다.
“오래 걸리다니요? 그게 지금 막 괴물과 싸우고 돌아온 저분에게 할 말입니까?”
“난 그냥 쉽게 죽이고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는 말이었습니다.”
“금방 끝내다니? 제가 본 그 원숭이 괴물은 분명, 7등급이었습니다. 녀석의 크기, 빠르기, 이곳의 피해 정도를 따졌을 때 말이지요.”
“네. 그건 저도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직접 봤기도 했고. 군에서 미리 이곳의 괴물에 대해 정보를 들었으니까요.”
“그런데도 박민준 씨에게 그런 말을 한 겁니까? 감사하다고만 말해도 모자랄 판이거늘?”
“감사 인사를 하지 못한 건 내가 잘못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저분에 대해 너무 모르는 것 같군요.”
리오 소령의 말을 듣고, 그가 눈알을 부라렸다.
방수열은 괴물이 나타나고 태도가 돌변한 이곳 사람들 때문에 화가 많이 난 상태였다.
그는 박민준이 너무 착하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저런 사람들인 줄 알았으면, 절대 도와주지 말자고 했을 텐데. 박민준 씨는 한국에선 안 그러더니. 왜 여기와 갑자기 착해진 거지?’
짜증 난 그가 리오 소령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말했다.
“내가 뭘 모릅니까? 박민준 씨에 대해서는 아마 내가 세계에서 제일 잘 아는 사람일 텐데?”
“그런가요? 내가 보기에는 전혀 아닌데.”
“지금 나랑 싸우자는 겁니까? 아까 그 배은망덕한 마을 주민들도 그렇고, 당신도 참 뻔뻔하군요.”
“글쎄요. 당사자인 저분이 가만있는데, 제삼자인 당신이 버럭버럭하는 게 더 뻔뻔한 것 같습니다.”
둘의 말싸움이 길어지자, 국장이 나섰다.
“자네. 미쳤나? 지금 왜 갑자기 싸우는 건가? 어서 이쪽으로 오게.”
“아니. 국장님. 정말 뻔뻔한 인간들이지 않습니까? 도와주러 와서 식량까지 찾아서 나눠줬는데. 오히려 욕을 하면서 도망치다니요.”
“그때 그게 욕이었나? 난 전혀 몰랐지.”
“제가 필리핀어는 잘 몰라도, 이곳에 오기 전에 간단하게 공부는 하고 왔습니다.”
국장도 표정이 험악해졌다.
그가 부하를 대신해 리오 소령에게 다가가 윽박지르려는데.
박민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이 새끼들이 단체로 미쳤어? 고생은 내가 했는데. 왜 여기서 놀고먹은 너희들이 싸우냐? 진짜 나한테 다 죽어볼래?”
리오 소령과 방수열이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거지 같은 동네에 계속 있어서 신경이 곤두서 있었나 봅니다. 다신 안 그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싸울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요즘 스트레스가 쌓였습니다. 여기 사람들에게 실망하기도 했고.”
국장도 뻘쭘해졌는지.
슬쩍 헛기침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때.
바람의 정령 왕자가 세 사람을 데리고 나타났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모습의 노인과 중년 여인이었다.
반면 노인의 손녀는 잔뜩 신이 난 표정이었다.
실제로 그녀는 흥분한 목소리를 감추지 못했다.
“할아버지. 너무 재미있었지요? 또 타면 좋겠지요? 마치 놀이동산의 롤러코스터를 탄 것 같았어요. 실제로 타면 이런 기분이지 않을까요?”
자기 손을 잡고 이리저리 흔들면서 떠드는 손녀를 향해 노인이 고개를 천천히 좌우로 저었다.
중년 여인이 웩! 토하고 주변을 살폈다.
“여긴! 우리 집이잖아?”
반갑고 기쁜 마음이 들어서 건물로 뛰어가려다가, 입구에 서 있던 박민준을 발견했다.
노인도 그를 보고, 손녀와 함께 다가갔다.
세 사람이 박민준을 향해 연신 굽신거리면서 감사를 전했다.
앞서 괴물로부터 자신을 구해준 것과 더불어 바람을 부려서 자신들을 안고, 하늘을 날도록 만들었으니.
그들은 박민준이 사람이 아닐 거라고 믿었다.
‘아무리 각성한 헌터라고 해도 절대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
‘역시 저분은 신의 자식임이 분명해.’
이번에도 철없는 손녀는 그저 박민준의 외모에 더 관심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아주 뛰어난 외모까지는 아니었는데.
이곳의 소녀는 그의 뽀얀 피부와 동네 청년들을 뛰어넘는 큰 키가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피부도 하얗고, 너무 멋있어. 내 이상형이야.’
눈에서 하트를 날리며 박민준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리오 소령은 갑자기 나타난 세 사람을 보고 당황했다.
이전에 박민준이 바람을 부려서 포대를 들고 온 걸 보긴 했지만, 그건 물건이었을 뿐.
이번엔 무려 사람이었으니.
“이분들은 또 누구입니까?”
“저 둘은 모르고, 저 여자는 여관 주인 할머니의 며느리 같아.”
“아! 그럼, 괴물과 싸우면서 동시에 그 노파의 아들 내외를 찾아내신 거군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절대 빈말이 아니었다.
무려 7등급 괴물과 싸우면서, 다른 일에 신경 쓸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
그것도 다른 사람의 도움도 받지 않고, 그 혼자 싸웠어야 했는데 말이다.
리오가 존경을 가득 담아 그를 뚫어지라 바라봤다.
박민준은 소녀와 소령이 동시에 자길 주목하는 걸 알고 조금 민망했다.
‘아니. 저 애는 그렇다고 해도, 저놈은 또 왜 저래?’
크흠.
헛기침한 그가 리오 소령에게 말했다.
“뭘 봐. 쓸데없이 날 보고 있지 말고, 저 여자를 주인 할머니에게 데려가기나 해.”
원래는 박민준도 함께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들이 죽은 걸 들은 뒤에 보일 주인 할머니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소령에게 일을 떠넘겼다.
“아. 네.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래.”
그가 노파의 며느리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남은 노인과 소녀는 박민준에게 다가와 손짓과 표정으로 여러 번 감사를 표현했다.
박민준이 대충 알았다는 손짓을 하고, 그들을 돌려보냈다.
그제야 혼자 있게 된 박민준에게 방수열과 국장이 다가갔다.
“괴물의 시체는 어디 있습니까?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시면 제가 조치하겠습니다.”
“여기서 남서쪽 무너진 건물 안에 있어. 산맥과 연결된 도시 외곽.”
“그렇게 멀리 갔다 오신 겁니까?”
“어. 아무튼, 내가 리오에게 대략적인 위치를 설명할 테니까. 둘이 잘해서 찾아봐.”
“알겠습니다.”
그렇게 필리핀에서의 7등급 괴물 사냥이 끝났다.
바로 한국에 돌아가고 싶지만, 지금은 밤이 깊은 시간.
조금이라도 자고, 내일 오전에 출발하기로 했다.
***
다음 날 아침.
피곤해서 그런지.
평소 절대 하지 않았던 늦잠을 자버렸다.
덕분에 피로가 풀릴 정도로 푹 잘 수 있었는데.
밖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잠에서 깬 리오 소령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지? 왜 이렇게 어수선한 거야?’
졸린 눈을 하고 커튼을 연 그였다.
밖에서 뭔가를 본 소령이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