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어차피 내가 괴물을 금방 잡아버리면 다 해결될 일이잖아?”
“그건 그렇지요. 하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당장 저들을 전부 먹여 살릴 방법이 없고.”
리오 소령은 박민준이 괴물을 만나기만 하면 당연히 이길 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녀석을 언제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하루가 될지, 일주일이 될지. 아무도 몰랐으니.
그걸 알 수 없는 게 문제였다.
더욱이 도시에 남겨진 또는 남은 사람들은 여기 모인 18명이 전부가 아니었다.
“더 많은 사람이 숨어있습니다. 지금은 그저 여관과 가까이 있던 우리만 이곳으로 왔을 뿐입니다.”
“그 숫자가 얼마나 됩니까?”
“우리와 서로 연락이 닿는 이웃만 해도 100명은 족히 될 겁니다. 아마 다 모으면 300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리오 소령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이들도 많은데. 300명이라니. 그렇다면 보호해야 할 인원이 너무 많아지는데. 그 많은 사람을 다 어찌한단 말인가?’
한숨을 내쉰 그가 억지로 힘을 내서 물었다.
“다들 식량은 넉넉하게 가지고 있는 겁니까?”
먹을 것이라도 부족하지 않다면, 박민준이 괴물을 사냥해주길 기다리면 된다.
그렇게 어떻게든 버티면 될 듯싶었다.
하지만 대답을 듣고 절망했다.
“아쉽게도 식량이 모자란 상황입니다. 최대한 아껴먹고 있지만, 그것도 조만간….”
이곳에 오기 전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심각한 상황이었다.
‘대체 정부에서는 이런 상황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던 건가?’
어젯밤 그는 대통령궁에서 충분히 사치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의 음식과 술을 실컷 먹고 즐겼다.
같은 동족인 바기오의 시민이 굶주림과 싸우는 것도 모르고 있었단 사실에 화가 났다.
심지어 어제 대통령궁에는 언론인이 엄청나게 많이 모여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우리에게 이곳의 열악한 사정을 말해준 이가 없었다.’
정말 몰랐던 걸까?
아니면 알고도 관심이 없었던 걸까?
두 가지 모두 자국의 현실이 얼마나 추악하고 어려운지 잘 말해주는 일인 건 분명했다.
그의 어깨가 축 처졌다.
혼자 생각에 빠진 까닭에 사람들과의 대화도 끊어졌다.
팍!
박민준이 그의 등을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진심으로 쳤으면 즉사했겠지만, 지금은 그저 정신 차리라는 의도를 담았을 뿐이었다.
“야! 무슨 일인데 그렇게 힘이 없어? 그렇게 상황이 안 좋아?”
“네.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최악입니다.”
“그럼 해결 방법은? 네가 생각했을 때. 저 들을 도울 방법이 있을 것 아냐?”
“글쎄요. 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나설 일도 아닌 것 같고.”
“어째서? 저들은 너희 나라 사람이잖아? 이렇게 노력도 안 해보고 바로 포기하겠다는 거야?”
박민준의 말을 듣고.
에휴.
그가 대놓고 큰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이들을 돕고 그러고 싶습니다. 하지만, 제 임무는 당신을 도와서 괴물을 처리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 일이 제일 중요합니다.”
군인으로서.
자국의 대통령에게 명령받은 일을 최우선으로 수행하겠다는 그의 말이었다.
제 딴에는 의지를 다지며 한 말이었는데.
박민준은 전혀 감동하지 않았다.
“아니. 넌 그냥 통역이나 하라고 널 데려온 것뿐이야. 그걸 제외하면 네 마음대로 해도 돼.”
“정말입니까?”
“그러니까. 살고 싶어서 온 사람들인데 너무 뭐라 하지 마.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서 스스로 상처받지 말라고.”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
리오 소령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을 어디에 모아 보호하고, 식량은 또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군에서 여러 소대를 이끌어본 그였지만.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아직 어떠한 대책도 마련하지 못했다.
‘허락을 받아 좋기는 하지만, 답답하군. 생각지도 않게 갑자기 이런 일이 생기다니.’
박민준이 풀이 죽은 소령에게 다가가 말했다.
“내가 괴물을 찾아서 재래시장부터 가볼 생각이거든.”
“그게 정말입니까?”
“어. 그곳에 가서 식량이라든가 다른 쓸만한 게 있으면 다녀와서 너에게 말해줄게.”
“감사합니다.”
“아직 뭘 찾은 것도 아닌데. 왜 벌써 감사하다는 거야?”
“당신은 외국인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나라를 위해 이렇게 힘써 주시다니. 당연히 고맙고 또 고마울 수밖에 없지요.”
“그런가?”
괴물을 잡는 스릴을 즐기면서 경험치를 얻어 레벨도 올릴 수 있어서, 이번 외국행을 결심한 그였다.
외국의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서라거나, 다른 숭고한 희생이나 봉사 정신 때문에 온 게 아니란 말이었다.
그래서 리오 소령의 말을 듣고, 내심 뜨끔하긴 했다.
방수열이 나서서 소령을 거드는 말을 했다.
“이유가 어떻든, 당신이 괴물을 사냥해주면, 그걸로 다수가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가?”
“네. 더는 괴물로부터 죽음의 공포를 느끼거나, 가족을 잃는 고통이 발생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결과가 좋으면 다 좋은 거라고.
박민준도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래. 서로 도움이 되고 좋으면 그만이지 뭐.’
사실 일방적으로 도움을 주는 쪽이 박민준 본인이지만.
그는 딱히 불만이 없었다.
“더 늦기 전에 다녀올게. 다들 잘 숨어있어.”
홀로 여관을 나서는 박민준을 향해, 안에 있던 모두가 고개를 숙였다.
필리핀어로 떠들어서.
시민들이 뭐라 말했는지 모르지만, 그도 대충은 알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라거나, 조심하세요. 같은 말이겠지.’
리오 소령이 나서서 통역하면서 상상 이상으로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잠시만요.”
“왜?”
“이 사람들 말로는 재래시장에도 먹을 것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고 합니다.”
“그럼 마트나 백화점은? 나름대로 큰 도시니까 그 정도는 있을 것 아니야?”
“그것도 이미 전부 털었다고 합니다.”
군인인 리오와 외국인인 자신들 앞에서.
대놓고 마트를 털었다고 말하다니.
속으로 잠깐 웃음이 나왔지만, 워낙 사람들의 표정이 심각했다.
‘하긴 나라도 먹을 것이 없으면 수단 방법 가리지 않았겠지. 굶어 죽을 순 없잖아?’
재래시장과 마트에 먹을 것이 없다면, 도시에 남은 식량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박민준은 낙담하지 않았다.
그저 이렇게 말하고, 사라졌다.
“걱정하지 마. 내가 어떻게든 먹을 걸 찾아볼 테니까. 아니면, 괴물을 먼저 찾아서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르고.”
***
바기오의 재래시장.
어느 도시나 그렇겠지만 중심부에 있는 시장은 평소 유동인구가 가장 많았다.
그러나 괴물이 나타난 지금은 개미 한 마리 찾아보기 어려웠으니.
살아있는 존재는 오직 하나.
박민준만이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지금 길이 아니라, 건물 위를 뛰어다니는 중이었다.
높은 곳에 올라가야, 어디 있을지 모를 괴물을 발견할 수 있을 테니까.
노을을 받으며 날아다니듯.
건물 사이를 가볍게 훌쩍 뛰어넘는 그의 모습은 그림과도 같았다.
겉으로 보기에 무척 멋있고, 심지어 낭만적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괴물을 찾지 못한 그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바기오에 왔다.
그저 괴물을 잡아 죽일 생각일 뿐이었는데.
지금은 다른 이유도 생겼다.
여관에 모여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그가 입을 일자로 굳게 다물었다.
‘괴물은 보이지 않는군.’
그가 확인 한 건 무너진 큰 건물의 잔해와 괴물의 똥으로 이뤄진 작은 산뿐이었다.
‘설마 시장에 남은 음식을 괴물이 다 먹어치우고, 다른 곳으로 간 건 아니겠지?’
괴물은 보통, 사람보다 예민한 후각을 지녔으니.
여기 남은 시민들이 찾지 못한 식량을 먼저 찾아 먹었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시장 주변을 다 돌아본 그가 땅으로 내려섰다.
괴물을 발견하지 못했으니.
이제부터는 식량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부디 건물 어딘가에 다수가 먹을 음식 재료가 남아 있기를.
무너진 건물을 제외하고.
나름대로 멀쩡해 보이는 곳을 들어가 확인하기 시작했다.
열심히 뒤졌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은 건가?’
실망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강제로 이 세계에 끌려간 이후부터 지금까지.
그는 단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었다.
무엇이 되었든 간에, 자신이 원하는 건 반드시 이뤄냈다.
지금 같은 상황은 그가 예전에 맞이했던 최악에 비하면 진짜 아무것도 아니었다.
‘괴물만 찾으면 돼. 그럼 내가 처리할 수 있으니까. 더는 문제가 되지 않아.’
그렇게 다시 식량을 찾아 나서려던 그때.
줄지어 이동하는 개미를 발견했다.
이미 날이 어둑해지고 있는 터라.
보통 사람 같으면 절대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더욱이 박민준이 어린아이가 아니었으니.
더욱 무시하고 그냥 지나쳤을 텐데.
이번엔 가만 서서 눈여겨봤다.
개미가 등에 뭔가를 짊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쌀? 밀?
뭐든 개미가 가져가는 걸 보면, 식량임이 분명했다.
그렇게 녀석들의 흔적을 따라가 보니.
반쯤 무너진 건물이 나왔다.
박민준을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 모두 멀쩡한 장소만 찾아 헤맸기 때문에 이곳을 놓친 모양이다.
잔뜩 녹슨 철문 아래로 개미들이 들어가고 나오는 게 보였다.
박민준이 두꺼워 보이는 문을 향해 검을 내밀었다.
저항을 느낄 틈도 없이.
검날이 아주 부드럽게 철문 깊이 박혔다.
그가 그대로 크게 검을 그어서 넉넉하게 입구를 만들어냈다.
쇠를 잘라냈음에도 검날에 흠집이 나긴커녕, 문에 붙어있던 녹이 묻어나지도 않았다.
‘역시 명검이다. 강철 문도 무 자르듯 할 수 있구나.’
고개를 끄덕인 그가 철문 한가운데를 살짝 건드렸다.
쾅!
사방이 잘려서 지탱할 곳이 없어진 철문이 뒤로 넘어갔다.
지하로 통하는 입구였는지.
들어서자마자 엘리베이터 시설도 보였다.
딸깍.
버튼을 찾아 눌렀지만, 문이 열리지 않았다.
‘역시, 전기가 없어서 작동하지 않는군.’
대신 옆에 있는 계단을 통해 한참을 내려갔다.
불도 켜지지 않는 게 문제였다.
아무리 고수라고 해도.
달빛조차 없는 지하에선 제대로 볼 수 없었으니까.
찌~익!
박민준이 대충 자기 옷가지를 찢었다.
그걸 뭉쳐서 손에 들고 몸의 기운을 일으켰다.
화르륵!
옷조각에 불이 붙었다.
삼매 진화라 불리는 무공의 일종이었다.
그가 타오르는 옷을 허공에 띄웠다.
이번엔 허공섭물이었다.
연이어 펼쳐진 상승 무공을 아무도 볼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긴 하지만, 박민준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계단을 내려가고, 내부를 확인한 뒤에 미소를 지었다.
보관 창고를 발견한 것이다.
밀 포대가 잔뜩 쌓여 있었다.
족히 500개는 되어 보였기 때문에.
도시에 남은 300명의 인원이 당분간 식량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싶었다.
더욱이 개미 정도만 간신히 드나들 정도로 잘 보관된 상태였다.
그 흔한 쥐가 파먹은 흔적조차 없었다.
처음엔 그가 사람들을 이곳으로 부를까 생각했다.
하지만 박민준에게 더 좋은 방법이 있었다.
“프노에스!”
그가 바람의 정령 왕자를 불러냈다.
***
박민준이 떠나고.
여관에 남은 사람들은 무척이나 초조했다.
박민준을 아는 사람들은 그가 괴물을 빨리 찾기를 바랬다.
녀석이 7등급 괴물일 거로 예상되긴 하지만, 박민준은 그보다 더 강한 존재였으니까.
반면에, 이 마을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오로지 식량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동안 너무 굶주렸기 때문이기도 하고, 겨우 한 사람이 그 무서운 괴물을 어찌할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다분했다.
‘대단한 사람이라고 듣긴 했지만, 괴물과 만나서 죽지 않으면 다행이지.’
‘군대도 어찌하지 못한 괴물을 인간이 어떻게 이겨?’
‘그냥 우리가 먹을 식량이라도 제대로 찾아주면 좋겠네.
그렇게 서로가 상반된 생각을 하며 박민준을 기다리던 그때.
창밖을 보던 리오 소령이 뭔가를 보고 깜짝 놀라 소리쳤다.
“여러분! 모두 창밖을 좀 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