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급히 박민준의 방으로 뛰어 들어온 리오 소령이었다.
그가 노파를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분은 누구입니까?”
“나도 몰라.”
“모르는 사람이라고요? 그런데 왜 여기 있는 겁니까?”
“그래서 널 부른 거야. 무슨 얘기를 하는지 들어보려고.”
“아. 네.”
쉬지도 못하고 통역 일을 하게 된 터라.
박민준에게 공손하게 말한 것과는 달리.
노파에게는 퉁명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어이. 당신. 여관 주인이 아닙니까? 대체 이 방에 왜 들어온 겁니까? 예?!”
살짝 윽박지르듯 말하는 군인 복장의 리오를 향해.
늙은 여인이 가뜩이나 굽은 등을 더욱 아래로 낮췄다.
“죄송합니다. 저는 그냥….”
박민준은 노파의 말을 알아듣지는 못해도, 그녀가 사과하고 있다는 건 알아볼 수 있었다.
미간을 찌푸린 그가 리오의 종아리를 걷어찼다.
퍽!
“아이고. 아파라. 갑자기 왜 때리시는 겁니까?”
“야. 좀 좋게 말해. 내가 너를 화나 내라고 부른 줄 알아? 왜 쓸데없이 저 노인에게 겁을 주고 있어?”
“죄송합니다.”
맞은 부위가 정말 아픈 듯.
다리를 손으로 연신 비비는 그였다.
리오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노파에게 다시 물었다.
“화를 내려는 게 아니니까. 다신 나한테 빌지 마십시오.”
“네. 죄송합니다.”
“아. 제발. 날 맞아 죽게 할 생각이 아니라면, 그냥 무슨 일인지 얘기나 하라니까요?”
노파가 끄덕이고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여관 주인이었다.
먼저 죽은 남편이 남긴 유일한 재산이었고, 지금은 아들 내외와 함께 이곳을 운영하고 있었다.
나름대로 장사가 잘돼서 먹고 살 수 있었다.
이곳에 관광을 오거나, 어학연수를 오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하지만, 게이트가 열리고, 괴물이 나오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녀석은 거대한 덩치에도 불구하고, 민첩하게 움직이며, 자기 눈에 보이는 사람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었으니.
바기오의 거리에서 점점 사람이 사라졌다.
당연히 외국인의 방문이 뚝 끊어졌고, 수입도 없어졌다.
죽음의 땅으로 변한 것이다.
그리고 최근엔 도시 중심에 있는 재래시장에 다녀오겠다던 노파의 아들 내외마저 돌아오지 못했다.
그게 벌써 일주일 전이었고.
먹을 것을 사러 갔다가 괴물에게 잡아먹힌 것이 분명했다.
가족을 모두 잃고 혼자가 된 노파는 죽지 못해 살고 있었는데.
검은 머리의 외국인들이 그녀의 여관을 찾아왔다.
“혹시 뉴스로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저분들은 한국에서 왔습니다. 바기오에 출몰한 괴물을 잡기 위해서 말이지요.”
방수열과 함께 있던 리오 소령의 말을 듣고, 그녀는 희망을 찾았다.
아직 살아있을지 모를 아들 내외의 생사를 대신 확인해 달라 말하기 위해서.
“제일 큰방에 있는 이분을 무작정 찾아왔다는 겁니까? 아니. 그런 건 나한테 찾아와서 부탁하면 되지 않습니까?”
“텔레비전으로 보니, 저분이 S등급 헌터라고 하셔서. 이왕이면 직접 부탁드리려고 그랬지요.”
노파의 말을 듣고, 리오 소령이 한숨을 내쉬었다.
단 한 번뿐이었지만, 안타까움과 짜증이 동시에 섞여 있었다.
‘어휴.’
그녀의 손에 들린 상자를 뒤늦게 보고 물었다.
“그런데 손에 들고 있는 건 뭡니까?”
“이건…. 말로만 부탁하면 들어주지 않으실까 봐. 제가 평생 모아둔 걸 가져온 거랍니다.”
노파가 내민 상자를 리오가 받았다.
안을 열어보지 않고, 그걸 다시 박민준에게 건넸다.
“그게 뭔데? 왜 날 주는 거야?”
“이 노파가 자기 자식과 며느리를 찾아달랍니다. 그 대가로 상자에 든 걸 당신에게 드린다는 겁니다.”
“사람을 찾을 거면 여기 경찰에게 부탁하면 되잖아? 왜 오늘 처음 본 나한테 저러는 건데?”
“바기오의 괴물이 아들 내외를 잡아간 것 같다고 하는군요.”
“음. 그럼 경찰도 소용없긴 하겠네.”
고개를 끄덕인 그가 상자를 열어봤다.
진주 목걸이와 금반지 등이 몇 개 들어있었다.
박민준은 한국에서 벌어놓은 재산도 많지만, 이곳에 와서 7등급 괴물을 잡았기 때문에 이미 재산이 차고 넘칠 정도였다.
그런 그에게 이 정도 보석은 딱히 의미가 없었다.
다시 노파에게 돌려줄 줄 알았는데.
그가 품속에 넣고 노파를 향해 말했다.
“내가 괴물을 죽이면서 당신의 가족도 함께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진이나 주고 가십시오.”
리오가 밝은 표정을 지으며, 그의 말을 노파에게 통역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직 아들 내외를 발견한 것도 아니고.
그냥 찾아보겠다고 답했을 뿐인데.
여관 주인 할머니가 연신 굽신거렸다.
사진도 미리 가지고 왔는지.
직접 박민준의 손에 쥐여 줬다.
아들은 늙은 여인을 똑 닮았다.
그의 아내는 반려자가 아니라, 여동생처럼 남편을 닮아있었고.
그가 살피는 사진을 옆에서 같이 보고, 노파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몇 번 훌쩍거리더니.
“부디 잘 부탁드릴게요. 제 아들과 며느리를 꼭 찾아주세요. 제게 남은 가족은 그 둘뿐이랍니다.”
박민준과 리오 소령에게 당부와 감사를 전하며 떠났다.
그 뒤로 통역이 필요 없어졌기 때문에 그는 리오를 방에서 내보냈다.
“너도 그만 가봐.”
“네.”
“저녁 식사가 준비되면 날 부르고 아니면 방해하지 마.”
“알겠습니다.”
***
여관 1층 식당.
박민준 일행이 다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이곳의 사정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에.
식사라고 해봐야, 흰쌀밥에 연유를 뿌리고, 상하기 직전의 과일을 소량 곁들인 게 전부였다.
고기 같은 단백질은 전혀 없었다.
식사하러 온 국장과 방수열은 물론이고, 리오 소령도 식단에 불만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내색을 전혀 할 수 없었다.
박민준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릇 바닥까지 싹싹 비웠으니까.
한편, 그는 저녁을 먹는 중간에도 창밖을 살피길 멈추지 않았다.
워낙 거대한 녀석이니.
혹시라도 발견하면 즉시 튀어 나갈 준비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식사 시간 동안 그의 눈에 보인 거라고는 무너진 건물들과 낡은 도시의 모습뿐이었다.
‘조금 시원한 동네긴 해도 필리핀인 것 맞네. 이 시간에도 아직 밖이 밝아.’
이곳도 삼보앙가처럼 해가 늦게 질 것 같았다.
식사를 마치고 나면, 굳이 여관에 남아서 할 일이 없다.
그렇다면.
‘해가 완전히 질 때까지 바기오 시내를 돌아다녀 봐야겠군.’
노파의 가족이 재래시장을 갔다가 실종되었다고 했으니.
맨 처음으로 그곳에 괴물을 찾아 나설 계획이었다.
그는 괴물을 단서도 없이 무작정 추적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노파가 찾아와 이렇게라도 정보를 얻게 되었으니.
‘내가 운이 좋은 건가?’
별 볼 일 없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박민준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와 가까이 있던 리오 소령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이 층에 있는 자기 방이 아니라, 입구 쪽으로 가는 거지?’
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아닐 텐데?
“어디 가십니까?”
“잠깐 나가서 산책할 겸 주변을 돌아다녀 보려고.”
“이 시간에 말입니까? 한두 시간 뒤면 해가 질 텐데요?”
“아직 이렇게 밝은데?”
“여기는 고지대에, 도시를 둘러싼 산맥이 높고 험해서, 해가 갑자기 진다고 합니다.”
“그래? 그럼 짧게 돌고 돌아올게.”
나갈 생각을 굽히지 않는 박민준을 향해.
그가 고개를 숙였다.
“그럼 다녀오십시오.”
그가 나가더라도 자신은 따라가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박민준도 굳이 그를 데리고 나갈 생각이 없었다.
딱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를 보며, 리오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오늘 저녁은 좀 느긋하게 쉴 수 있겠군.’
그가 박민준보다 앞서서 문을 향해 뛰어갔다.
“그럼 제가 문을 열어드리겠습니다.”
최근엔 삼보앙가의 바다 괴물 때문에 제대로 잠을 못 잤다.
어제는 대통령궁에 가서 또 난리가 났었고.
그러니.
참으로 오랜만에 편히 쉴 기회라며 기뻐한 거였는데.
그가 문을 열기 전에.
박민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밖에 손님들이 온 모양인데.”
“네?”
“주변에 멀쩡한 여관이 여기밖에 없는 모양이야. 정말 잔뜩 몰려왔어.”
“그럴 리가요?”
“직접 열어보면 알 거 아니야?”
리오가 설마 하는 표정으로 문을 발칵 열었다.
노인부터 어린아이까지.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여관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이게 다 무슨?”
바기오에 온 뒤로 길거리에서 사람을 본 기억이 없었다.
살아있는 주민은 모두 꼭꼭 숨어있거나 대피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수십 명의 사람이 여관으로 몰려오고 있었으니.
‘이렇게 많은 사람이 다 어디서 나온 거지?’
리오 소령도 그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여관 주인인 노파가 슬그머니 입구로 다가왔다.
“제가 이웃에 사는 딱 한 사람에게만 아까 일을 말했었는데. 그게 벌써 소문이 난 모양입니다.”
“아까? 저분의 방에서 있었던 일을 그새 떠벌렸단 말입니까?”
“죄송합니다. 그냥 어쩌다 말실수를 하는 바람에.”
“아니. 그렇다고 해도, 왜 저들이 여기로 몰려오는 건지?”
뒤에서 대답이 들렸다.
“보호받길 원하는 게 아닐까요?”
리오 소령이 돌아보니.
방수열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가 박민준과 모두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 사정이 제 예상보다 훨씬 좋지 않았습니다. 경찰은커녕 군대도 이미 모두 다른 도시로 후퇴한 상황이었지요.”
바기오는 버림받았다.
괴물이 다른 도시로 떠나거나 죽기를 바라며 버티는 중.
새로운 희망을 발견했으니.
살기 위해 이곳으로 몰려온 거란 말이었다.
그가 잠깐 말하는 사이.
여관으로 몰려든 사람들이 전부 입구 앞에 옹기종기 모였다.
“앞에 뭘 하고 있어요?”
“괴물이 나타나기 전에 어서 안으로 들어갑시다.”
“이러다 놈이 우릴 발견하면 다 죽어요. 어서 들어가요.”
“나도 그러고 싶은데.”
제복을 입고.
입구를 막는 듯 서 있는 리오 소령 때문에.
제일 앞에 서 있는 남녀가 함부로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그들의 대화를 들은 리오 소령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오라는 말 대신.
입구에서 슬쩍 비켜섰다.
사람들도 그걸 들어가도 좋다는 신호로 받아들였다.
“들어가도 좋다는 것 같으니. 어서 들어갑시다.”
“무서우니까. 빨리 좀 들어가요.”
그리 크지 않은 건물이라.
식당과 연결된 복도가 순식간에 발 디딜 틈도 없이 꽉 차버렸다.
그렇게 여관에 모인 민간인이 여관 주인을 빼고도 총 18명이었다.
그들 중 40대로 보이는 남자가 대표인 듯.
혼자 박민준을 향해 다가갔다.
“당신. 지금 어딜 가려고?”
리오 소령이 나서서 그의 앞길을 막았다.
당황한 남자가 그에게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저분에게 부탁드릴 말이 있습니다.”
“저분이 누군 줄 알고는 있나? 당신 같은 사람들을 상대할 만큼 한가한 분이 아니야.”
“당연히 그러시겠지요. 하지만, 저희의 입장을 딱 한 번만이라도 생각해 주십시오.”
“입장?”
“우리는 정부에 버림받았습니다. 먹을 것도 얼마 남지 않았고, 그렇다고 이곳을 떠날 수도 없습니다.”
그들 모두는 삶의 기반이 이곳에 있었다.
그걸 버리고 떠날 수 없어서 남은 이들이 대다수였고.
여관 주인인 노파처럼 가족이 실종되어 떠나지 못하거나.
늙거나 병들어서 남은 사람도 있었다.
너무 어린 고아라 달리 갈 곳도 없는 아이들도 일부 있었다.
“당신들의 사정이 딱한 걸 알지만, 우린 당신들을 보호하고 보살피기 위해 이곳에 온 게 아닙니다.”
그의 말을 듣고도, 남자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도 더는, 갈 곳이 없었다.
당장 이곳에서 나가, 자신들이 숨어있던 곳으로 돌아간다면.
그 결말을 죽음밖에 없을 테니까.
“당신은 우리나라의 군인이지 않습니까? 복장을 보면 높은 사람 같은데. 여기 온 동양의 영웅과 함께 제발 우릴 보호해 주십시오.”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군인은 외부의 적으로부터 국민을 지키는 사람이다.
평소라면 그게 외국의 군대였겠지만, 지금은 괴물로 그 대상이 바뀌었을 뿐.
사실 리오 소령도 박민준의 눈치를 봐서 방금 그런 말을 했을 뿐.
사실은 동족인 그들의 어려움을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아니. 가능하면 적극적으로 돕고 싶었다.
자신의 마음을 숨기고.
멋대로 몰려온 그들에게 계속 뭐라고 하려던 그때.
박민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너만 저들과 대화하지 말고 나한테도 좀 설명해봐.”
“알겠습니다.”
“저 사람들이 여기 왜 몰려온 거야?”
“보호받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했습니다.”
“그럼 그렇게 해주면 되잖아? 뭐가 문제인데?”
“네?”
박민준의 말이 뜻밖이었는지.
소령의 눈이 살짝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