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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자가 힘을 안 숨김-93화 (93/175)

93화

보통은 원숭이가 나무 위에서 생활한다고 생각한다.

아마 지구에 사는 동물인 원숭이를 말하는 거라면 그 말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세상에서 온 녀석이라면?

꼬리까지 치면 몸의 길이가 무려 건물 7~8층 높이인 25m이며, 그런 거대한 원숭이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는 나무가 지구엔 없었으니.

녀석이 선택한 지구에서의 새로운 보금자리는 바로 인간이 만든 인공 건축물이었다.

그것도 오래 머물지 않았고, 며칠에 한 번씩 잠자리를 옮겨가며, 자기 몸에 맞게 건물을 박살 내고 있었다.

또한, 놈이 식량으로 삼은 건 바나나가 아니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었고.

군대도 소용없는 상황에서 시민들은 목숨을 걸고 도망치거나, 두려움에 떨면서 숨어다녀야 했다.

***

박민준 일행은 대통령궁을 떠난 뒤로, 차를 타고 무려 4시간을 달렸다.

“아니. 이렇게 오래 차를 탈 거면, 차라리 비행기를 타지?”

“죄송합니다. 우리가 가려는 곳엔 공항이 없습니다.”

“전혀?”

“다른 때 같으면 전용기를 타고 갈 수 있긴 하지만, 지금은 괴물 때문에 사용이 곤란합니다.”

그렇게 필리핀 북부 도시 바기오에 도착한 박민준이었다.

차에서 내린 그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도착했군. 그런데 여기는 좀 시원하네?”

그를 따라서 내린 리오 소령이 살짝 기지개 켜며 답했다.

“네. 해발 1500m의 고지대라서 우리나라에서도 제법 시원한 지역에 속합니다.”

“그나마 다행이네. 아무리 나라고 해도 삼보앙가는 덥고 습해서 좀 찝찝했거든.”

고수가 되면 외부 환경에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다.

그렇다고 완전히 환경으로부터 자유로운 건 또 아니었으니.

박민준은 한국의 가을 날씨를 닮은 바기오가 마음에 들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다른 일행도 하나둘 도착했다.

이전과는 달리.

국장과 그의 수행원, 방수열과 리오 소령까지.

제법 많은 인원이 함께하고 있었기 때문에.

방수열이 나서서 호텔 건물 하나를 숙소로 정하고 독점했다.

그가 박민준에게 다가가 말했다.

“제가 한국에서 출발하기 전에 미리 숙소를 잡아 놨습니다. 이 근처이니, 저를 따라오십시오.”

“왜?”

“필리핀 정부에서 제공한 숙소는 바기오 중심부에서 너무 외각으로 떨어져 있는 곳이었습니다.”

관광하러 왔다면 그곳이 정말 괜찮은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괴물을 사냥하러 온 상황이었으니.

‘괴물을 추적하기에는 너무 구석에 있어. 이동하다가 시간을 많이 낭비하게 될 거다.’

그 위치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일부러 따로 숙소를 잡았다.

설명을 들은 박민준이 짧게 감탄했다.

“역시!”

그리고 뒷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속으로.

‘이놈 보면 볼수록 참 똘똘하다니까. 앞으로도 해외에 나갈 때마다 이 녀석을 데리고 다녀야겠다.’

라는 생각을 했다.

방수열이 뭔가 찜찜하다는 표정을 하고 빠르게 물었다.

“네? 뭐가 역시입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어서 안내해. 좀 쉬었다가 바로 사냥하러 나갈 거니까.”

“알겠습니다.”

일행을 안내하려던 방수열이 뭔가를 보고 제자리에 멈춰 섰다.

“왜 그래?”

“아…. 죄송합니다.”

“뭐가?”

“숙소를 옮겨야 할 듯싶습니다.”

“왜?”

“저기가 바로 제가 정한 숙소였거든요.”

그가 손끝으로 어딘가를 지목하자, 박민준을 포함한 일행의 시선이 모두 따라갔다.

그리고 박민준을 뺀 모두가 거의 같은 표정을 지었다.

“저건 폐허잖아? 자네, 다 무너진 건물을 우리가 머물 숙소로 잡은 건가?”

국장의 질책을 받고, 방수열이 억울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도 변명으로 할 말이 있었다.

“제가 한국에서 예약할 때만 해도 멀쩡히 운영하는 곳이었습니다.”

자신에게 한 말이 아니었는데.

박민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요 며칠 사이에 저런 모습이 된 거라는 거군. 오히려 잘됐어.”

그 옆에 서 있던 리오 소령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는 박민준의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네? 오히려 잘됐다니요.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내가 사냥하려는 괴물이 저 호텔을 망가뜨렸다는 거잖아? 그것도 요 며칠 사이에.”

“아! 그럼 괴물이 이 근처에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맞아. 굳이 힘들게 찾아다닐 필요가 없을지도 몰라.”

“다행입니다. 바기오는 고산지대에 산맥이 은근히 험해서 괴물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고민이었는데.”

리오 소령도 놀면서 이곳에 오지 않았다.

정부군에 연락해서 레이더 탐지를 요청했다.

물론, 미리 대통령의 허락을 받고 한 일이었고.

이번엔 쉽게 찾을 줄 알았다.

‘실력이 확실한 사람이니. 괴물이 어딨는지만 알면 바로 끝장낼 수 있겠지. 그럼 나도 이 일에서 해방이다.’

하지만, 괴물이 거대하다고 해도, 산맥의 방해를 받아 제대로 그 위치를 알아낼 수 없었다.

그래서 속으로 몰래 낙담하고 있었는데.

일이 이렇게 풀리게 될 줄이야.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기뻐하는 리오 소령을 향해 박민준이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너 나랑 같이 있는 게 그렇게 싫었어?”

“그걸 말이라고…. 가 아니라.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내가 널 갈군 적도 딱히 없잖아?”

“그…. 그렇지요.”

“너 왜 자꾸 말을 더듬냐?”

“제가요? 갑자기 날씨가 서늘해져서 그런 것 같습니다.”

무척 더운 곳에 있다가 차가운 공기를 맞았으니.

그럴 수도 있었다.

물론 그게 아닌 걸 알았지만, 박민준이 리오를 봐주기로 했다.

어쨌거나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그의 요청 때문에 억지로 여기에 끌려온 녀석이었으니까.

“그래? 아무튼, 다른 숙소를 찾아야 한다니까. 네가 쟤를 도와줘.”

“제가요?”

“그래. 아무래도 네가 이곳 사정을 저 녀석보다 더 잘 알 거 아니야? 아닌가?”

“아니요. 저도 여긴 처음 오는 곳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숙소도 찾지 않고 저 녀석 혼자 고생하게 그냥 놀겠다고?”

“아닙니다. 제가 바로 나서서 저분을 돕겠습니다. 그리고 제일 좋은 숙소를 찾아내겠습니다.”

착!

그가 경례하고, 도망치듯 방수열 곁으로 가버렸다.

박민준은 무너진 호텔로 향했다.

그걸 본 국장이 그에게 물었다.

“거긴 왜 가시려는 겁니까? 다 무너져서 머물지도 못하는데?”

“괴물의 흔적을 보려고.”

“현장 조사원도 아니신데 본다고 도움이 되겠습니까?”

“너 나 무시하냐?”

“전혀 아닙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사원을 따로 데려올 걸 그랬다는 말이었습니다.”

“앞으로 나한테 말할 때 조심 해라.”

“네.”

고개 숙인 국장을 뒤로하고.

그가 훌쩍 몸을 날렸다.

경신법을 펼쳐서 날다시피 도착한 건물 잔해 꼭대기에 섰다.

그걸 본 국장이 음.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대단해. 저자가 아니면 그 누가 저런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

방금은 잠깐 말실수를 했지만, 그는 박민준을 내심 존경하고 있었다.

그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 되고자.

국장이 된 뒤로도 남몰래 수련하기를 멈추지 않는 그였다.

‘단순히 강한 것뿐 아니라, 이동하는 것마저 멋있군. 근데 저것도 수련하면 할 수 있는 건가?’

한편, 잔해 위에서 박민준이 천천히 주위를 살폈다.

호텔 중앙에 거대한 웅덩이가 있었다.

갈색의 크고 긴 털이 곳곳에 놓여 있는 걸 보아.

‘내가 찾는 놈이 저 정도 크기라는 거군. 거대 원숭이라더니. 몸통은 짧고 팔다리가 긴 건가?’

팔과 다리를 걸쳤던 것 같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웅덩이에서 길게 뻗어 나오며 꼬리가 눌린 자국도 선명했고.

박민준이 흔적을 통해 확인한 괴물의 모습은 8층 높이 크기에 팔이 4개, 다리가 2개, 긴 꼬리가 달린 털북숭이였다.

확인을 마친 그가 일행에게 돌아가려 했는데.

한쪽에서 고약한 악취가 밀려왔다.

‘최악이군. 시체 썩는 냄새 같다.’

괴물이 잠을 자던 자리에서 몇십 미터 떨어진 장소.

놈이 싸지른 똥이 작은 산을 이루고 있었다.

‘땅이 아니었어.’

그걸 본 박민준이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더러울 뿐 아니라, 뭔가 다른 걸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괴물의 배설물 사이에 가시처럼 빼곡하게 박혀있는 인간의 뼈와 걸레 조각이 된 옷가지들이었다.

대체 얼마나 많은 인간을 잡아먹어야 저 정도 크기의 배설물 산을 이룰 수 있을까?

아직 녀석을 만나지 못했지만, 약간의 분노가 밀려왔다.

“박민준 씨. 어디 계십니까?”

새로운 숙소를 찾겠다던 방수열의 목소리였다.

“나는 여기 있다. 금방 내려가도록 하지.”

대답을 들은 그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박민준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듯.

아주 또렷하게 방수열의 귀에 박혔기 때문이었다.

‘정말 신기한 재주가 많은 사람이네. 이번엔 대체 어떻게 말한 거지?’

이것 역시 박민준이 다른 세상에서 익힌 무공의 일종이었지만, 그걸 방수열이 알 턱이 없었다.

잠시 후.

불쑥.

박민준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경신법을 펼친 거였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마치 순간이동 같았다.

이미 익숙한지.

박민준의 등장에 놀라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아주 태연한 얼굴을 한 방수열이었다.

그가 박민준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물었다.

“국장님 말로는 폐허가 된 호텔을 확인하고 오셨다고요?”

“그래.”

“뭐 좀 발견하신 게 있습니까?”

“크기, 식성 같은 것들이지. 이곳에 오면서 네가 말해준 것과 비슷해.”

“그렇군요. 전 또 새로운 걸 발견하신 줄 알았습니다.”

“전혀. 하지만 녀석을 빨리 찾아서 죽여야겠다는 마음이 들긴 했지.”

그의 대답을 듣고, 전혀 뜻밖이라는 표정의 방수열이었다.

“그렇습니까?”

“응. 그런데 새로운 숙소는?”

박민준이 추가로 설명해 주는 대신 주제를 바꿔 질문했다.

“아쉽게도 멀쩡한 호텔은 찾지 못했습니다.”

“됐어. 여기 놀러 온 것도 아니고. 굳이 호텔이 아니어도 상관없잖아?”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제가 찾은 숙소로 안내하겠습니다.”

“숙소를 찾긴 찾았나 보군.”

“네. 그나마 멀쩡한 건물을 발견했습니다.”

괴물은 자기 몸을 숨기거나 감쌀 수 있는 크기의 건물만 주로 박살 냈다.

그 대부분이 관공서나 호텔, 경기장 같은 거대 건물이었고.

방수열이 안내한다던 멀쩡한 건물은 역시나, 규모가 작은 2층짜리 여관이었다.

그것도 매우 낡아서 지은 지 30년은 족히 되어 보였다.

그마저도 일행에게 각방을 주지 못했고, 주요 인원만 박민준과 함께 머물기로 했다.

나머지 국장의 수행원들은 따로 머물 곳을 찾기로 했다.

박민준에게 제일 좋은 방을 내어주고, 국장과 방수열, 리오 소령이 작은 방에 짐을 풀었다.

저녁 식사를 기다리던 박민준이 침대에 누워서 잠시 쉬었다.

똑똑.

누군가 방문을 두들겼다.

낯선 인기척이라,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소리가 난 쪽을 바라봤다.

“누구지? 나한테 할 말이 있으면 들어와.”

늙은 여인이 문을 살짝 열고 들어왔다.

키가 140cm 정도 될까?

깡마르고 체구가 무척 작았다.

필리핀인 노파의 손에는 작은 상자가 들려 있었다.

그걸 본 박민준이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필리핀어로 알 수 없는 말을 자기에게 내뱉는 걸 듣고, 박민준이 다른 사람을 찾았다.

“리오! 당장 내 방으로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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