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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자가 힘을 안 숨김-90화 (90/175)

90화

필리핀 대통령궁.

이전 대통령궁 건물은 괴물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래서 이곳은 새롭게 지어진 지 얼마 안 되었다.

규모가 상당히 컸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별로 화려하지 않았다.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는지.

인근에 사람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무척이나 조용한 이곳에 큰 소리가 들려왔다.

박민준 일행과 대통령궁 사람이 대치하고 있었다.

그도 전에 대통령과 뒤에 서 있는 걸 본 적이 있었는데.

방수열의 말로는 비서실장이라고 했다.

“어허. 대통령님께서 지금 바쁘시다니까요.”

“아무리 바빠도 필리핀을 도와주기 위해 온 우리를 만날 시간조차 없단 말입니까?”

“그건 감사합니다만, 지금은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던 비서실장이 박민준 일행과 함께 서 있던 리오 소령을 뒤늦게 발견했다.

“자네는 어디 소속이지? 왜 외국인인 그들과 함께 있는 건가?”

행정부와 군은 엄연히 소속이 다른데.

비서실장은 처음 보는 리오를 대놓고 하대했다.

또 그게 당연하다는 듯.

소령은 그에게 존대하는 모습이었다.

“저는 삼보앙가 정규군 소속 리오 소령입니다. 비서실장님.”

“그래. 리오 소령. 어서 이쪽으로 오게. 그리고 무슨 일인지 나에게 어서 설명하면 좋겠네.”

“그건 좀 곤란합니다.”

자기 명령을 생각하지도 않고 거절하는 소령을 보고 비서실장이 눈을 부라렸다.

“뭐라고? 자네 미쳤나? 겨우 소령 주제에 지금 누구 말을 거역해?”

“죄송합니다만. 저는 대통령님을 직접 만나서 전후 사정을 설명해 드릴 겁니다.”

“그분은 바쁘시다니까. 그리고 자네 누구의 편인가? 외국인인가? 아니면 조국인가?”

“당연히 조국입니다. 필리핀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런 행동을 하는 건가?”

“네. 저는 조국에 충성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의미 없는 개죽음을 당할 생각까지는 없었으니까요.”

“도대체 다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정말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건지.

국장과 방수열은 무척이나 헷갈렸다.

리오 소령도 마찬가지였고.

하지만 박민준은 그가 거짓말을 한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살짝 억누르고 있던 화를 더는 참지 않았다.

“그딴 소리나 들을 거면 더는 너와 할 말이 없다. 난 이미 충분히 참았으니까.”

박민준을 이곳으로 데려오면서 방수열과 국장이 간곡히 부탁했었다.

처음부터 무턱대고 화를 내거나 폭력을 쓰지 말고, 대화로 천천히 풀어보자고.

하지만 대통령을 만나기는커녕, 벌써 저런 태도로 오리발을 내밀고 있으니.

박민준이 방수열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 이런 상황이라면 내가 나서도 되겠지?”

“아…. 그게….”

방수열이 머릿속으로는 절대 안 된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박민준이 이미 충분히 참아줬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박민준도 딱히 그의 대답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그냥 일방적인 통보였을 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가 정면을 향해 가볍게 손을 내밀었다.

쾅!

굉음과 함께 문이 박살 났다.

놀란 비서실장이 그저 말없이.

눈을 동그랗게 입을 떡 벌렸다.

역시나 박민준의 돌발행동에 리오 소령이었는데.

그도 비서실장처럼 그저 눈만 동그랗게 뜰 뿐.

어찌할 바를 잊은 듯 보였다.

국장은 애써 담담한 척 굴었지만,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여기 있는 한국인 중에 그가 제일 높은 직급을 가졌으니.

아마 사고가 터지면 그 책임을 면하지 못할 터.

‘망했다. 결국, 저자가 일을 저질러 버렸구나.’

다만 그는 자기 때문이 아니라, 한국에 있는 대통령에게 피해가 갈까. 그게 걱정되고 있었다.

방수열은 박민준에 대해 제일 잘 알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라, 그가 이런 일을 벌였음에도 크게 흔들림이 없었다.

오히려 박민준에게 이런 말까지 했다.

“화가 나신 건 이해하지만, 그래도 죽이지는 말아주십시오. 그럼 제가 최대한 수습해 보겠습니다.”

주어가 빠졌지만, 누굴 죽이지 말라는지.

한국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모두가 유추할 수 있었다.

‘대통령!’

박민준이 싱긋 웃으며 그를 돌아봤다.

“최대한 노력해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크게 허리 숙여 감사를 전한 그를 뒤로하고.

박민준이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국장이 뒤늦게 정신 차렸다.

어떻게든 안으로 들어가는 박민준을 막아볼 생각이었다.

덥석.

그런 그를 붙잡은 사람은 필리핀 쪽이 아니었다.

방수열이 허리를 펴며 말했다.

“국장님. 그냥 가만히 계십시오.”

“뭐야? 자네 미쳤어?”

“지금 국장님이 나선다고 저분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저도 돕겠습니다.”

“난…. 내 힘으로 그를 막을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두고 보자는 건가?”

“네. 국장님께서 들으시지 않았습니까?”

“내가 뭘?”

“제 부탁을 박민준 씨가 들어주실 것처럼 얘기했으니. 대통령을 죽이진 않을 겁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나?”

“상대를 죽일 생각이었으면, 우리가 뭘 해볼 틈도 없이 진작에 죽였을 겁니다. 저렇게 천천히 움직이지도 않았겠지요.”

그 말을 듣고.

국장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박민준이 엄청나게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는 걸.

경험을 통해,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갑자기 왜 이런 짓을 벌인 거지?

“뭐야? 그럼 저자가 지금 무력시위라고 하고 있다는 건가?”

“글쎄요. 그냥 두고 보면 알게 되겠지요.”

“좋아. 당장은 자네 말대로 하기로 하지.”

“감사합니다.”

결국, 국장이 부하의 말에 설득당했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것보다, 철저하게 방관하고, 뒷수습이나 잘할 생각으로 바뀌었다.

둘이 짧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

박민준이 필리핀 대통령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무척 넓고 화려한 실내였지만, 박민준은 시선을 주지 않았다.

대신 대통령의 경호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무려 20명 가까이 대기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박민준을 보고 동시에 달려들었다.

“테러다.”

“무단 침입자다.”

“저자를 신속히 제압해라.”

“대통령님을 보호해라.”

우르르.

자신을 향해 몰려드는 경호원을 보고 그가 콧방귀를 꼈다.

흥!

박민준이 가볍게 손을 내저을 때마다.

가까이 있던 경호원들이 뒤로 날아갔다.

쾅! 쾅! 쾅!

20번의 울림이 3면의 벽에서 울렸다.

단 한 명의 경호원도 남기지 않고 순식간에 처리했지만.

죽은 사람은 없었다.

그냥 단숨에 제압해서 기절시켰을 뿐.

하지만 박민준의 점혈 수법을 모르고 있는 대통령이었다.

그래서 그는 상대가 자기 경호원들을 모조리 죽인 거로 착각해 버렸다.

‘어떻게 저런 일이. 저들 중엔 A등급 헌터도 섞여 있었는데.’

그는 사전에 이런 일이 생길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엄청난 돈을 주고 자국과 타국의 헌터 몇 명을 급히 불러모았었다.

그렇게 구한 헌터들을 자기 경호원으로 위장.

그들 사이에 몰래 끼워 놨었다.

그들만으로 한국의 헌터를 잡기엔 충분할 줄 알았다.

괴물을 잡으면서 상처 입고 피곤할 것이 분명했으니까.

하지만 상대는 너무 멀쩡했다.

그리고 자신이 준비한 게 허무하다 느껴질 정도로 금방 무너져 버렸다.

최후의 수단으로 그가 뻔뻔하게 나서기로 작정했다.

“무엄하다. 내 집무실에 쳐들어온 것도 모자라, 사람들까지 무참히 살해하다니.”

대통령이 잔뜩 무게를 잡고 말하긴 했는데.

그의 다리는 보기 민망할 정도로 심하게 떨고 있었다.

대답하는 대신에.

피식.

박민준이 상대를 향해 비웃음을 날렸다.

입은 웃고 있는데, 눈빛은 싸늘했다.

그걸 본 필리핀 대통령이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벌벌 떨면서 뒤로 물러나던 그였는데.

순간 엉덩이가 집무실 의자에 닿았다.

다리 힘이 풀리면서 뒤로 넘어갔다.

빙글.

회전의자였는지.

그의 몸을 버텨주지 못하고, 대통령을 피해 옆으로 돌아갔다.

우당탕!

그렇게 바닥을 나뒹군 대통령이었다.

엉덩이와 허리에 통증을 느끼면서도 그는 가만히 누워있을 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상대가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그것도 아주 천천히.

대통령의 앞에선 박민준이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정말 꼴불견이군.”

평소라면 그런 모욕적인 말에 발끈해서 소리라도 질렀을 텐데.

대통령은 지금 그럴 정신이 없었다.

그는 그저 박민준에게 압도당해 있었다.

심지어 상대가 자길 죽인다는 말은 꺼내지도 않았는데,

(아까 방수열이 돌려서 말했지만, 그건 한국말이었고. 리오 소령은 놀란 상태라 통역을 멈춘 지 오래였다.)

‘날 피 말려서 죽이려는 건가?’

그는 지금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덥석.

박민준에게 달려들었다.

공격하려는 게 아니었다.

상대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려고 한 행동이었다.

살기를 느끼지 못한 박민준이다.

반격하지는 않고, 대통령이 다가오는 걸, 발을 들어서 막았다.

“어이구!”

어정쩡한 자세로 일어나 달려들던 그가 박민준의 발길질에 당해서 뒤로 발라당 넘어갔다.

박민준이 눈앞에 민망한 자세로 있는 그를 무시하고.

고개를 뒤로 돌렸다.

“리오 소령. 당장 이쪽으로 튀어 와.”

“넵!”

누구 말이라고 거역할까.

연이은 상황에 굉장히 놀란 상태임에도, 무의식적으로 반응해서 대답한 그였다.

젖먹던 힘까지 다해서 대통령 집무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내가 하는 말을 저놈에게 통역 좀 해라.”

자기 나라 대통령에게 이놈 저놈 하는 외국인에게, 리오 소령은 감히 항변하지 못했다.

애초에 그는 그럴 마음이 생기지도 않았다.

삼보앙가의 고향 마을에서 정부 소속인 자신은 물론이고, 부하와 주민들까지 모조리, 미사일을 맞아 죽을 뻔했으니까.

주민들도 어디 보통 사람들인가?

리오 소령의 어릴 적 친구부터, 돌아가신 부모님의 친구와 이웃까지, 보통 인연이 아니었다.

그래서 대통령이 죽어도 싸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으로는 내심.

‘흠. 저자가 저렇게 당해도 싸긴 한데. 외국인의 손에 죽는 건 좀 아닌 것 같다.’

그가 잠시 딴생각하는 사이.

박민준이 자기 할 말을 했다.

그걸 못들은 리오 소령이 멍청히 있었고.

박민준이 그의 종아리를 걷어찼다.

“야. 뭘 그리 멍청하게 있어?”

“죄송합니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저놈에게 미사일을 왜 쐈냐고 물었다.”

그건 리오 소령도 무척 궁금했던 일이다.

고개를 끄덕인 그가 바로 통역했다.

조금 떨리긴 했지만, 나름대로 차분하려고 노력했는지.

목소리가 낮았다.

“대통령님. 저분이 당신에게 미사일을 쏜 배경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제가 통역할 테니. 솔직히 답변해 주셨으면 합니다.”

박민준이 말한 건 짧은데.

통역은 무척이나 길었다.

뭐, 그러든 말든 그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영어가 아닌, 필리핀 원어로 하는 대화라 그러려니 했다.

한편, 질문을 받은 대통령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그걸 누가 알아볼세라 아예 질끈 감아 버렸다.

입을 꾹 다물고, 눈까지 감아버린 그를 향해, 소령이 다시 물었다.

이번엔 아까보다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하지만, 역시나 이번에도 대답을 듣지 못했다.

소령이 더 크게 소리쳐서 질문하려 했는데.

그전에 박민준이 나섰다.

“저리 비켜.”

리오 소령을 밀치고 대통령에게 다가갔다.

“네?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는데요?”

“그러니까. 대답하게 만들어야지.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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