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80년까지만 해도, 필리핀이 한국보다 더 경제적으로 부유한 나라였다.
그 뒤로는 한국보다 뒤처지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빈민국으로 불릴 정도는 아니었는데.
게이트가 열리고 상황이 급악화되었다.
곳곳에서 괴물이 무작위로 튀어나와 사람을 해쳤으니.
내수와 관광으로 버티던 필리핀 경제가 무너져버렸다.
지금은 사람들이 괴물에 둔감해져서 관광이 조금 활발해지기는 했다.
하지만 필리핀은 대격변의 시기 초반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대가를 현재 혹독하게 치르는 중이었다.
미국이나 한국 같은 헌터 강대국이라면 괴물을 처리해서 경제 부흥을 다시 꾀할 수 있었겠지만, 정부의 미온적인 태도로 그마저도 힘들어졌다.
필리핀의 상급 헌터들도 자국에서 제대로 지원도 받지 못하며 괴물과 싸우는 것에 한계를 느끼고 대부분 해외로 가버렸다.
그런 상황에서 대한민국에서 S등급 헌터를 보내준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으니.
필리핀 국민의 관심과 기대가 그 어느 때보다 컸다.
“이번 기회를 놓칠 수 없다. 그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괴물 문제도 해결하고, 국민의 인기도 다시 얻는 거다.”
박민준이 도착할 공항에 직접 모습을 드러낸 필리핀의 조니파 대통령이었다.
게이트가 열린 뒤에 새로 대통령으로 선출된 그는, 과거 올림픽 대표 농구선수 출신으로 필리핀 국민의 영웅이었다.
운동선수의 이미지인 강인하고 성실한 태도를 앞세워 최고 권력자가 되었지만, 그가 집권한 뒤에도 나라의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역시나 고질적인 문제인 헌터의 절대적인 숫자 부족과 더불어 최상위권 각성자의 부재 때문이었다.
***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 공항.
자동소총을 든 군인과 경찰이 공항 주변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각하. 한국의 헌터를 태운 비행기가 지금 막 착륙했다고 합니다.”
“그럼, 슬슬 가봐야겠군.”
“네. 지금 가시면 출국장에서 나오는 그와 마주할 수 있을 겁니다.”
대통령이 자신의 방탄차에서 내렸다.
한편, 미리 얘기가 되어 있었는지.
입국 절차를 아주 편하고 빠르게 마친 박민준이었다.
제일 먼저 공항을 나오게 되었는데.
멀리서 잠자리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군복까지 입은 중년 남자가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그 뒤로 수십 명의 군인과 정장을 입은 중, 노년 남자들이 차렷 자세로 서 있었다.
조니파 대통령과 수행원들이었다.
‘뭐야? 설마 나한테 저러는 건가?’
박민준은 상대가 군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필리핀의 대통령일 거란 생각을 하지 못했다.
“박민준 씨. 안 나가고 여기서 뭘 하십니까?”
“아니. 저기서 웬 사람들이 나가는 길을 꽉 막고 어색하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고 있길래. 잠깐 구경 좀 했지.”
“아! 저분이 필리핀의 조니파 대통령이십니다. 밖에서 기다리실 줄 알았는데. 여기까지 들어와 계셨군요.”
“그래? 저 아저씨가 대통령이구나. 군인 출신인가?”
“그건 아닙니다. 운동선수 출신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왜 군복을 입고 있냐?”
“그냥 저 복장을 좋아한다고 알려졌을 뿐입니다. 강인한 이미지에 부합된다나요?”
뒤늦게 국장과 방수열이 나온 뒤에야 상대가 대통령 일행이라는 걸 알았다.
박민준 일행도 모두 나오고, 필리핀의 대통령과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국적은 다르지만, 상대가 높은 위치였기 때문에 국장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조니파 대통령님. 제가 바로 한국 게이트 관리국의 수장 강인표입니다.”
물론 그는 영어를 할 줄 몰랐기 때문에 옆에 있는 방수열이 실시간 통역을 해줘야 했다.
“반갑소. 나는 필리핀의 대통령 조니파 키오라고 하오.”
“조니파 대통령님께서 이렇게 직접 마중을 나와주시다니. 이거 참으로 영광입니다.”
엘리트답게 그는 국장의 말을 듣자마자, 아주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모습을 보였다.
제대로 알아들은 조니파 대통령이 크게 미소 지었다.
“현 필리핀의 아주 중요한 손님이 멀리서 오는 자리인데, 당연히 대통령인 내가 직접 환영하러 와야 하지 않겠소?”
“다시 한번 환영에 감사드립니다.”
고개를 끄덕인 대통령이 박민준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걸 본 국장이 방수열에게 눈치를 줬다.
“저분이 바로 세계 최고라고 알려진 51레벨을 달성한 대한민국의 S등급 헌터 박민준 씨입니다.”
“하하. 역시. 아까 멀리서 봤을 때부터 저자가 보통 사람이 아닌 걸 한눈에 알았소.”
“역시 대통령님답게 안목이 좋으시군요. 한 번에 박민준 씨를 알아보시다니.”
한편, 박민준은 여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영어를 거의 못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자기 대신에 스스로 알아서 영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방수열의 존재가 내심 반가웠다.
‘다행이네. 보면 볼수록 저놈이 진짜 똑똑하다니까. 완전 원어민 발음으로 말하고 있네.’
그렇게 가벼운 인사가 오가고.
대통령과 함께 공항을 빠져나온 박민준이었다.
그를 위해 준비된 차를 보고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오픈 스포츠카였으니까.
“저기에 타라고?”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저거 스포츠카잖아?”
그것도 아주 새빨간 색이었다.
“네. 최신형 람보르기니 뉴게이트 로드스터 같군요.”
차에도 관심이 많은지.
방수열이 한눈에 차 기종을 알아보고 박민준에게 말해줬다.
차에 올라타려는 박민준에게 사람들이 꽃다발로 만든 목걸이를 들고 다가왔다.
“이건 또 뭐야?”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그걸 목에 걸고 차에 타라는 것 같군요.”
그렇게 대답한 그가 다른 차에 먼저 올라탔다.
혼자 남은 박민준의 목에 사람들이 꽃다발 목걸이를 걸어주기 시작했다.
하나. 둘. 세 개.
그의 아랫입술까지 가릴 정도로 두툼하게 목에 걸고는 차에 어서 타라는 손짓을 했다.
거추장스러운 꽃목걸이를 빼버리고, 타에 오르려는데.
그걸 중간에 주워든 사람들이 다급한 표정을 지었다.
박민준을 향해 서둘러 꽃목걸이를 걸어주고, 손을 마구 내저었다.
어휴.
말이 잘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체념하고, 꽃목걸이를 한 개만 남기고 빼서 그들에서 돌려줬다.
그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했는지.
그들이 미소를 지으며 차 문을 열어줬다.
차가 출발하고.
도착할 때까지 이젠 방해 없이 쉴 수 있나 싶었는데.
주변이 엄청나게 시끄러웠다.
“또 뭐야?”
도로변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어색한 발음으로 그의 이름을 환호하고 있었다.
“팍민준! 팍민준!”
“알러뷰~팍미인주운.”
바로 앞에서 달리는 대통령의 차였는데.
박민준이 봐서는 차 이름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것도 오픈 스포츠카였다.
뒤를 돌아본 대통령이 순간 박민준과 눈을 마주쳤다.
멍하니 앉아 있는 걸 보고, 그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통령이 시민들을 향해 손을 흔들자, 큰 함성이 터져 나왔다.
잘 봤냐는 듯.
다시 박민준을 바라본 그가 일어나라는 손짓을 했다.
계속 무시했는데.
멈추지 않고 서서 손짓을 반복하자, 에휴.
한숨을 내쉰 그가 대충 장단을 맞춰주고 다시 쉴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우와~!”
“와와!”
앞서 소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함성이 박민준을 향해 쏟아졌다.
‘이것 참. 다들 나에 대해 뭘 알고 저러는 건가?’
조금 떨떠름하면서도, 전혀 모르는 나라의 사람들이 자길 보며 열광하는 모습에 기분이 좋아지긴 했다.
그가 열정적인 환호성에 보답하고자 손을 들어 흔들었다.
그러자, 거짓말을 조금 보태서, 하늘을 날던 새가 놀라서 땅으로 떨어질 정도의 함성이 다시 쏟아졌다.
‘이런 열광적인 광경이라니. 옛날 생각도 나고 좋긴 하네.’
과거 박민준이 무림 맹주가 되었을 때도 이 정도로 큰 함성은 듣지 못했던 것 같았다.
심지어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고.
그런데 얼마 못 가서 차가 멈췄다.
열광하던 사람들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왜 벌써 서는 거지?”
대신 주변을 돌아본 그는 이곳이 아까와는 또 다른 공항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다른 차에서 내린 방수열이 그에게 다가왔다.
“뭐 하십니까? 어서 내리시지 않고?”
“왜 공항에서 공항으로 또 온 거야?”
“진짜 목적지로 갈 비행기가 이곳에 있습니다.”
“진짜 목적지?”
“네. 한국의 공항과는 다르게 여긴 차를 타고 이동해야 우리가 타고 갈 비행기가 있는 공항에 도착할 수 있거든요.”
“그런 건 좀 미리 말해주지.”
“깜빡했습니다.”
조니파 대통령이 박민준에게 다가왔다.
“삼보앙가로 갈 초음속 소형비행기가 기다리고 있소.”
“초음속 소형비행기요?”
“박민준이란 사람만 출발한다고 하던데. 그게 맞소? 그래서 2인용 초음속 비행기를 미리 준비했소만?”
그 말을 듣고 방수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긴 한데. 우리가 그걸 먼저 말씀드린 적이 있었던가요?”
한국에서는 박민준만 보낸다는 말을 필리핀에 미리 전하지 않았다.
도움을 받는 나라들 쪽에서는 최대한 많은 헌터를 보내주길 원하겠지만, 박민준이 그걸 사전에 모두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는?
“몬스터를 사냥하는데 약한 놈들이 옆에 있으면 내가 마음 놓고 싸울 수가 없잖아.”
“네?”
“다른 놈들을 지켜줘야 할 테니. 옆에 아무도 없는 게 더 좋아. 걸리적거리기만 할 거라고.”
“아. 정 원하신다면, 박민준 씨 뜻대로 해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한국에서만 결정된 사안이었다.
나중에 그걸 따지고 들면, 양해를 구할 생각이었고.
그런데, 필리핀의 조니파 대통령이 미리 알았다는 듯.
박민준 혼자 갈 거라고 말했으니.
“대체 어디서 그걸 들으신 겁니까?”
“나야 당연히 미국 쪽에서 먼저 들었는데. 한국과 미국이 미리 상의한 게 아니었소?”
“아……. 네. 아무튼, 박민준 씨가 혼자 가서 괴물을 처리하는 게 맞습니다. 그럼 바로 출발하면 되는 겁니까?”
미국이 수작을 부렸다는 생각을 속으로 하면서도, 당장 그걸 드러내면 한국만 바보가 되는지라.
슬쩍 다른 주제로 바꾼 방수열이었다.
한편, 박민준도 영어라 잘 못 알아듣긴 하지만, 방수열의 표정을 보고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쟤는 또 왜 당황했냐?’
표정 관리를 나름대로 잘한 방수열이지만, 이미 여러 차례 그를 겪은 박민준이라, 한눈에 변화를 알아볼 수 있었다.
“왜 무슨 문제 있어?”
“아무것도 아닙니다. 박민준 씨께서 타고 갈 비행기가 2인용이라고 해서 조금 놀랐을 뿐입니다.”
“내가 혼자 갈 거니까, 2인용을 준비한 거 아니야?”
“우리가 먼저 알려준 적이 없습니다.”
“그럼 뭐야? 스파이라도 심어놨나?”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 제가 돌아오시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우선은 출발하시지요.”
“중요한 게 아니긴. 저걸 나 혼자 조종사랑 타고 갔다가, 만약 뒤통수를 맞으면, 그땐 나도 안 참을 건데?”
“참지 마십시오.”
“뭐?”
“필리핀에서 수작을 부리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만약 엉뚱한 짓을 하면, 박민준 씨 마음대로 하십시오.”
“정말 그래도 돼?”
“네. 대한민국 정부에서 책임지겠습니다.”
한국도 이번에 헌터 파견을 그냥 동의한 건 아니었다.
다른 나라에 가서 괴물 사냥을 할 때 생기는 모든 피해를 해당 괴물이 속한 나라에서 전부 감당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므로 박민준이 무슨 일을 해도, 그 모든 걸 괴물 사냥 때문에 생긴 거로 해버리면 그만이었다.
거기다, 만약 이곳에서 뒤통수를 때리면, 남은 괴물은 처리하지 않고, 박민준을 데리고 떠날 생각인 방수열이었으니.
‘굳이 이 나라 말고도 박민준 씨를 기다리는 나라가 널리고 널렸다.’
뜻밖의 대답을 들은 박민준이 히죽 웃으며 비행기에 올라탔다.
게이트에서 나온 기술과 지구의 기술을 접목해서 전투기를 개조한 초음속 2인용 소형비행기였다.
실제로 얼마나 빠른지.
비행기를 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목적지인 삼보앙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 왔습니다.”
어설프게 한국말을 하는 조종사였는지.
그가 박민준에게 도착을 알렸다.
“벌써 도착했어?”
“네. 어서 내리십시오.”
비행기에서 내린 그를 총을 든 무장 군인들이 맞이했다.
하나같이 눈빛이 형형하고 인상이 무척 강했다.
살인에 익숙한 사람들인 걸 박민준이 바로 알아봤다.
“이건 또 뭐야? 설마 안내인이 아니라 암살단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