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방수열이 패드를 꺼냈다.
“미국에서 보내온 파견 대상 국가 목록입니다.”
박민준의 눈치를 보며, 화면을 슬쩍 그에게 돌렸다.
“세계 지도로 한눈에 바로 알아보기 쉽게 표시해놨습니다.”
위성 지도 위에 드문드문 붉은 점이 찍혀있었다.
“괴물이 뭐 이렇게 많아?”
“경제적으로 능력 있는 강대국이 아니면, 제때 괴물을 처리하지 못하는 게 현실입니다.”
“그렇군.”
박민준이 보기에도 붉은 점이 주로 아프리카 대륙과 아시아 동남쪽 쪽에 몰려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반면에, 북미와 동북아시아는 점 하나 없이 깨끗했으니.
“한국이나 일본은 그렇다 쳐도, 중국 쪽은 왜 괴물이 하나도 없어? 게이트가 잘 안 열리나?”
“그럴 리가요? 게이트는 무작위로 열리지만, 평균을 내보면 아주 공평하게 생깁니다.”
“그래? 그럼 괴물이 나오는 족족 다 처리했다는 거야? 중국이 그럴 힘이 있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중국은 현재 미국을 위협할 수 있는 강국인데?”
박민준이 알던 중국은 2002년 당시 세계 경쟁력 순위 49위에 불과한 나라였다.
“나 때만 해도 향후 잠재력이 우수한 나라였지, 미국을 위협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많이 컸네.”
“네. 우리나라의 경제와 안보를 크게 위협할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20년 전의 중국을 생각하시면 절대 안 됩니다.”
“그럼, 거기도 S등급 헌터가 한국보다 많나? 강자들이 많냐고.”
“그건 또 아닙니다. 헌터의 절대 숫자는 많지만, 의외로 S등급 헌터는 4명밖에 없습니다.”
“겨우 4명?”
“네. 그래서 한국이 헌터 강국이라고 불리는 겁니다. 박민준 씨 덕분에 중국을 견제할 만큼의 S등급 헌터가 존재하게 되었으니까요.”
방수열은 전혀 몰랐지만.
사실, 박민준이 중국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가 20년 동안 다녀온 다른 차원의 세상은 흔히, 무림이라고 부르는 가상의 고대 중국과 비슷한 배경이었으니.
‘무림에서는 천마 같은 엄청난 녀석도 있었고, 혈마, 검존 같이 나만큼 강한 인간들이 수두룩했는데. 지구의 중국은 그렇지 못하구나.’
애초에 지구에서 무공은 무림에서의 무공과 천지 차이로 위력이 달랐다.
천마 같은 존재가 지구에도 있을까?
존재한다면 아마 중국에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왔었는데.
“중국의 S등급은 모두 엄청나게 강한가?”
박민준의 질문에 대한 방수열의 대답은 NO였다.
“아닙니다. 이지원 부국장님이 그 나라의 S등급들보다 더 강할 겁니다.”
“그 여자보다 약하다고?”
“네. 거의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나도 더는 그쪽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네.”
“신경 쓰고 계셨습니까?”
“응? 조금 그랬지. 하지만 이젠 아니야.”
대화를 나누면서도 패드 화면을 끊임없이 확인했다.
그리고 괴물이 전부 6등급 이상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전부 6등급이나 7등급뿐이네?”
그 말을 듣고.
방수열은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그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렇습니다. 미국에서는 자잘한 괴물보다 강력하고 쉽게 처리가 곤란한 괴물들만 추려서 우리에게 보내왔습니다.”
“나라마다 주권이라는 게 있는데. 그쪽에서 마음대로 우리나라에 그래도 되는 거야? 좀 갑질 같은데?”
한국에서 자체적으로 판단해서 파견국가를 선정하는 게 아니라, 미국에서 미리 선정한 나라 중에 골라서 인력을 보내란 말이었으니.
갑질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올 수밖에.
방수열도 그걸 부정하지 않았다.
“강대국의 갑질이 맞습니다.”
“우리나라도 강국이라면서?”
“여느 나라에 비해서 강국이라는 겁니다. 아직은 미국에 비교할 수조차 없습니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미국이 짱이구나.”
“짱이요?”
“어. 짱. 이거라고 이거.”
박민준이 엄지를 치켜세웠다.
“아. 저도 무슨 의미인지는 압니다. 어릴 때 듣고, 하도 오랜만에 다시 들어봐서 그랬을 뿐입니다.”
“아무튼, 그럼, 난 여기로 갈게.”
방수열이 순간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가 보기에는 박민준이 대충 아무 나라를 손가락으로 가리킨 듯 보였다.
괴물의 등급이나 숫자를 확인하지도 않고, 그냥 바로 선택해버렸으니.
“필리핀이요?”
“거기가 필리핀이었어?”
“그럼 어딘지도 정확히 모르고 선택하신 겁니까?”
“어. 왜 그러면 안 돼? 여기 붉은 점이 보이는 나라 중에서 내가 선택하면 된다는 거잖아?”
“당연히 안 되지요. 거긴 7등급 괴물이 무려 2마리나 있는 나라이지 않습니까?”
“그럼 더 잘된 거네. 막 고른 것 치고는 운이 좋은걸?”
“네?”
방수열은 박민준의 생각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7등급 괴물이 두 마리나 있다고 분명히 경고했는데.
오히려 운이 좋다는 말을 하다니.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말을 하는 거지?’
그가 눈을 꽉 감았다가 다시 뜨고, 박민준에게 질문했다.
“아니, 대체 왜 필리핀을 고르신 겁니까? 바꾸실 생각은 없는 겁니까?”
“난 바꿀 생각이 없는데.”
“그러니까, 왜요?”
“거기가 한국에서 제일 가까워 보이니까? 처음부터 멀리 가면 좀 피곤하잖아? 비행기에서도 심심할 테고.”
“아……. 겨우 그런 이유라니.”
“겨우? 난 심각하게 고민해서 선택한 건데.”
“가까워서 골랐다고 해놓고, 심각하게 고민했다니요?”
“응. 어차피 어딜 가든 괴물과 싸울 사람은 나잖아? 그럼 가까운 곳에 가는 게 제일 좋지 않나?”
“그래서 더 신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너 설마 내가 괴물 따위에게 당할까 봐, 지금 그러는 거야?”
“그럼 아닙니까? 6등급 이상의 괴물은 S등급 헌터에게도 무척 위험한 존재입니다.”
“난 그냥 어이가 없네. 아직도 날 그 정도밖에 안 봤단 말이야?”
“박민준 씨가 강하다는 건 저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는 다른 세상에서 온 괴물입니다.”
“나도 다른 세상에 갔다가 이렇게 무사히 살아서 돌아왔어.”
“그건 좀 얘기가 다르지 않습니까?”
“아니. 더는 날 귀찮게 하지 말고, 출국 일정이나 잡아.”
방수열은 그에게 더 뭐라고 말하며 설득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말고 제 말을 조금 더 들어보십시오. 제가 미리 생각해둔 나라들이 있습니다.”
“됐어. 내가 선택한 곳으로 갈 거니까. 너도 그만 나가.”
그가 더 듣지 않겠다며 먼저 일어났다.
어쩔 수 없이, 방수열도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망할. 기껏 우리에게 유리한 나라와 괴물을 선정해서 찾아왔는데. 하필 7등급이 두 마리나 있는 필리핀을 고르다니.’
물론, 그 두 마리의 괴물이 같은 장소에 있는 건 아니었다.
이계의 괴물이라고 해도, 결국엔 동물과 같은 습성을 보였다.
포식자로서 서로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고.
자기 사냥 구역을 확정한 이후로는 그곳을 벗어나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필리핀의 두 마리 중 먼저 공략할 녀석을 고르는 편이 더 낫겠군.’
박민준이 강하다고 해도, 여태껏 6등급 괴물까지만 싸워봤다.
7등급 괴물은 그도 처음 상대하는 거였으니.
‘저렇게 자신만만하다 허무하게 골로 간 헌터가 부지기수인데. 결국, 내가 또 고생하는 수밖에 없겠군.’
방수열은 자신이라도 자만하는 박민준을 대신해서 신중하게 처음 싸울 상대를 골라야겠다고 다짐했다.
***
그렇게 손님이 떠나고.
박민준의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그가 해외 파견을 나간다는 사실을 가족들에게 미리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니. 어떻게 그런 결정을 네 멋대로 할 수가 있어?”
“엄마 말이 맞아. 너 정말 이기적이구나?”
“20년 만에 돌아왔는데. 또 어딜 가겠다고?”
“필리핀이래요. 쟤가 미쳐도 아주 단단히 미친 게 분명해요.”
“그래. 그렇지 않고서야, 또 가족을 버리고 해외 파견을 다니겠다는 결정을 하지 않았겠지.”
장미령과 박민희가 그를 쉴 새 없이 몰아붙였다.
평소엔 그 둘을 진정시키는 위치였던 아버지조차 말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도 말은 안 했지만, 아들에게 크게 실망한 눈치였다.
박민준이 모녀의 온갖 말들을 가만히 앉아 들었다.
거의 한 시간가량을 둘이서만 떠들었는데도, 여전히 화가 안 풀린 듯.
씩씩거리는 모습을 보며, 박민준이 속으로 감탄했다.
‘이번엔 내가 생각해도 좀 잘못하긴 했지만, 저렇게 계속 말하고도 지치지 않는 건가?’
박민준이 제 딴에는 참아준 거였는데.
그게 또 마음에 들지 않은 두 여자였다.
“아니, 왜 아무 말도 없어?”
“우리 말을 듣고 그냥 무시하겠다는 거야?”
목과 귀를 번갈아 긁적인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내가 잘못했어. 하지만 해외에는 나갈 거야. 그러니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줘.”
“뭐! 해외에 갈 거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너 지금 그게 엄마한테 할 소리야?”
박민준이 기어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나름대로 생각해서 내린 결정이에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저를 믿고 그냥 보내주세요.”
“안 돼. 네가 해외에 나가는 것도 갑작스러운데, 거기다 괴물과 싸우기까지 할 거라면서? 어떻게 걱정을 안 하니? 우리가 남이야?”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하게 돌아올 테니까. 진짜로 걱정하지 마세요.”
“그걸 어떻게 장담해? 괴물이 사람 가려가면서 봐주기라도 하겠대?”
“둘이 아무리 뭐라고 해도 난 계획을 취소할 생각이 없어요.”
“왜? 계약을 파기하면 위약금이라도 있어?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든 마련해볼게.”
“돈 때문이 아니에요.”
“그럼 왜?”
“그건……. 말할 수 없어요.”
박민준은 사실 레벨업에 크게 목말라 있지 않았다.
지금도 자신이 지구 최강인 걸 확신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구로 돌아와서 기뻤던 처음과는 달리.
그는 현재 그다지 즐겁지가 않았다.
20년 동안 다른 차원의 세상에서 매일 살얼음판을 걷듯이 목숨을 걸고, 치열하게 살다가 무척이나 평화로운? 지구로 돌아왔으니.
일상이 심심하다 못해 지루하기까지 했고, 무척이나 어색했다.
‘내가 살아있다는 걸 느낄 만한 자극이 필요해.’
그리고 그게 바로 싸움을 통한 레벨업이었다.
다른 차원의 무림인을 대신할 수 있는 엄청난 크기의 괴물들.
그 거대한 존재들은 박민준이 아닌 다른 인간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괴물이었으니.
‘놈들을 사냥해서 경험치를 쌓고, 레벨업한다. 그렇게 해야 내가 살아있다는 걸 느낄 수 있을 듯싶다.’
박민준의 지금 상태는 전쟁에서 복귀한 병사와도 같았다.
생존을 확신할 수 없는 전투나 전쟁을 경험한 병사들이 일상으로 돌아온 후, 평범한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해하거나 스스로 목숨까지 끊는 현상 말이다.
그가 잠시 혼자 생각하는 사이에, 두 여자의 잔소리가 또 시작되었다.
“우리가 대통령을 직접 만나서라도 널 못 가게 막을 거야.”
“맞아요. 왜 우리 민준이가 한국 대표로 해외에 가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건데요?”
더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이번에 내가 다녀와서 손톱만큼이라도 다치면 해외 파견 같은 건 두 번 다시 나가지 않을게요. 그럼 되잖아요?”
그 말을 듣고, 여태 화를 내던 두 여자도 숨소리가 잦아졌다.
“너. 그 말 정말이지? 이번에 나가서 조금이라도 다치면, 두 번 다시 이번 같은 짓을 하지 않는 거다?”
“알았어요. 엄마. 내가 약속할게요.”
그제야 그의 아버지도 한마디 거들었다.
“여보. 그만하시구려. 우리 아들의 선택을 믿어줍시다. 당신도 알다시피 민준이가 아무 생각 없이 행동할 아이는 아니지 않소.”
장미령이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흘렸다.
박철수가 다가가 아내를 꽉 안아주었다.
박미희는 동생을 째려보고, 자기 부모를 안았다.
속으로 한숨을 내쉰 박민준이 슬쩍 자리를 피했다.
‘이렇게 마무리돼서 다행인 건가? 차라리 빨리 출국했으면 좋겠군.’
그가 바란 것처럼.
방수열이 출국 날짜를 알려왔다.
“박민준 씨? 출국 날짜가 잡혀서 연락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