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오히려 순수한 에너지로 된 먹이를 받아먹었다는 듯.
검은 구멍의 크기가 더욱 빠르게 커지기 시작했다.
짜증 난 박민준이 검으로 강기를 발출했다.
“아주 박살을 내주마.”
멈출 수 없다면, 차라리 깨뜨려 버리겠다며 차원의 문을 공격했는데.
기로 된 벽을 잡아먹었듯이, 강기의 기운마저 흡수해버렸다.
그리고 순식간에 더 커졌다.
‘이런 미친!’
그 광경을 본 박민준이 입을 떡 벌렸다.
마법이란 걸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그였지만, 같은 실수를 반복하진 않았다.
‘과연 두 개의 차원을 넘나들 수 있는 마법답구나. 내 무공도 통하지 않는다니.’
검을 도로 집어넣은 그가 방법을 바꿨다.
‘마법엔 마법의 힘으로 상대한다.’
강력한 힘을 가진 바람의 정령 왕자 프노에스.
태풍급 바람도 만들 수 있다고 했으니.
녀석의 힘으로 내 가족과 집을 지켜줄 수 있지 않을까?
만약 다크 엘프 족장이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면, 정령술이 마법은 아니라고 할 테지만.
그는 지금 원래 차원으로 떠나버렸다.
하지만, 박민준이 늦게라도 정령을 소환한 걸 알았다면, 훌륭하다고 손뼉을 쳤을 터.
정작 정령을 소환하려던 박민준이 낭패한 얼굴을 내비쳤다.
‘정령을 어떻게 부르지?’
아까 소환해제만 물어봤을 뿐.
그걸 다시 불러내는 방법까진 미처 몰랐다.
그가 잠시 망설이는 동안.
차원의 문이 만든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더 넓어졌다.
이젠 박민준뿐 아니라, 주변의 모든 사람이 그걸 보고 있었다.
“저기 하늘을 봐!”
“대체 저게 뭐지?”
“블랙홀인가? 주변을 빨아들이고 있는 것 같아.”
“저 밑이 혹시 홍 회장님 댁 아니야?”
박민준의 바로 옆집이 GI 그룹 홍 회장의 집이라.
주변의 관심이 더욱 커졌다.
실제로 차원의 문이 박민준의 집과 홍 회장의 집 사이에서 커지는 상황.
두 집의 경계벽이 무너지고, 그 잔해가 빨려 들어가는 모습도 보였다.
출근한 홍 회장 부부와는 달리.
그들의 딸 홍나은은 아직 집에 있었다.
그녀도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창밖을 바라봤다.
“밖이 왜 갑자기 어두워졌지? 바람은 또 왜 이렇게 강하고.”
홍나은이 하늘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하늘에 구멍이 뚫렸어?”
무너진 담장 너머로 서 있는 사람도 볼 수 있었다.
“어머. 민준 오빠잖아? 저기 지금 뭐 하는 거지?”
그는 아직 정령을 소환하지 못했다.
“프노에스 나와라.”
“바람의 정령 왕자. 내가 널 필요로 한다. 어서 나와.”
그렇게 여러 번 소리쳤지만, 그저 공허한 외침일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잔뜩 짜증이 난 박민준이 바람의 정령 왕자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너 이 자식. 정작 필요할 때 안 나오다가 나중에 소환되면 가만 안 둔다. 그러니까 당장 내 눈앞에 튀어나와! 어서!”
그 순간.
박민준의 앞에서 거센 바람이 일었다.
차원의 문이 만든 바람과는 느낌이 달랐다.
그건 차원의 문이 사물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힘 때문에 생긴 바람이라면, 지금은 박민준을 중심으로 부는 소형 태풍과도 같았다.
그것 말고도 소환의 다른 증거를 찾을 수 있었다.
‘성공이다. 정령을 소환할 때 내공이 이 정도로 줄어드는구나.’
박민준 앞에 3m 크기의 프노에스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차원의 문을 손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 기운이 더는 확장하지 못하도록 막아. 우리 집을 지켜줘. 할 수 있지?”
대답 대신 그의 주변에 휘몰아치던 바람이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원의 문 중심으로 향한 프노에스가 점점 커지더니.
이내 검은 구멍보다 더 크게 변했다.
‘크기를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거였나?’
크기가 어마어마하게 커진 대신 박민준의 내공이 이전보다 훨씬 빠르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진작 기운이 바닥났을 텐데.
박민준은 아직 여유가 있었다.
앞서 무공의 힘이 차원의 문을 감당하지 못했던 것과 달리.
바람의 정령 왕자 푸노에스는 제대로 실력 발휘를 했다.
박민준의 집 쪽에서 차원의 문이 있는 하늘을 향해 맹렬하게 빨려 들어가던 바람이 단박에 멈췄다.
그와 더불어, 세력을 빠르게 확장하던 검은 색 구멍 역시 크기가 커지지 않고 있었다.
‘역시. 정령이 다른 차원의 존재라 마법 같은 것도 효과적으로 상대할 수 있는 건가?’
시간이 흐르면 차원의 문이 알아서 사라질 거라고 했으니.
박민준은 이제 버티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일이 발생했다.
박민준의 집이 있는 방향으로 오는 걸 프노에스가 강제로 틀어막았기 때문에, 차원의 문이 그 반대편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로 홍나은의 집 바로 위였다.
그녀는 자기 방에서 창을 통해 밖을 살피고 있었다.
‘민준 오빠네 쪽에서 불던 바람이 갑자기 멈췄어?’
그녀도 바람의 정령을 봤지만, 그건 그냥 우연히 먼지가 뭉쳐서 어떤 형태를 띠었던 거라고 여겼다.
박민준의 명령을 받고 엄청난 크기로 커진 탓에 그 뒤엔 그저 태풍처럼 보였으니까.
더는 커지지 않는 하늘의 까만 구멍을 보며, 그녀가 안도하던 그때.
‘어! 갑자기 왜 이쪽으로 오는 건데?’
태풍에 밀리듯이, 자기 집으로 오는 검은색 구멍을 보고 당황한 홍나은이었다.
서둘러서 집을 빠져나가려고 했는데.
차원의 문이 다가오는 속도가 더 빨랐다.
그녀가 자기 방을 채 벗어나기도 전에, 와장창.
창문과 벽이 박살 나면서 엄청난 바람과 맞닥뜨렸다.
휘이익!
근처 화병과 액자가 먼저 빨려 들어가고, 뒤이어 창문 아래 있던 서랍장과 홍나은의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어머머! 꺅!”
놀란 그녀가 버둥거렸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자기 몸이 그대로 하늘 높이 날아가자, 홍나은이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계속해서 꺅꺅 소리치던 그때.
“저거 옆집 여자잖아? 마법이 저 집까지 박살을 냈네.”
박민준이 그 광경을 목격했다.
무너진 집이야 보상해주면 되지만, 사람이 다치거나 죽으면 그건 큰일이었다.
그가 하늘을 향해 훌쩍 몸을 던졌다.
그런 그녀를 구하기 위해 운룡대팔식을 펼쳐가며 허공을 계단처럼 밟고 뛰었다.
박민준이 서둘렀음에도.
홍나은의 몸은 아주 높은 하늘까지 올라간 상황이었고, 빠르게 검은색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사람의 몸엔 날개가 없다.
아무리 박민준이 경공의 대가라고 해도, 결국엔 그도 사람이다.
‘이런. 아직 모자라잖아.’
홍나은에게 손이 닿으려면 더 높은 하늘로는 올라가야 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대로 다시 땅에 내려왔다가 더 높이 도약해볼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시도를 하는 사이에, 홍나은의 몸이 차원의 문으로 먼저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박민준이 결국, 프노에스를 불렀다.
“프노에스! 많은 도움은 필요 없어, 그냥 내가 저 여자를 잡을 때까지 한두 번만 발밑을 받쳐주면 돼.”
역시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박민준은 프노에스가 자신의 명령에 따를 거라고 믿었다.
계약으로 맺어진 사이이고, 또 자기 말을 절대 거역하지 않을 거란 강한 느낌이 들었다.
핫!
그가 짧은 기합과 함께 몸을 날렸다.
운룡대팔식을 펼칠 때와는 다른 감각이 발바닥에서 느껴졌다.
바람이 부드럽게 밑에서부터 떠받들어주는 것 같다고 할까?
그렇게 두 번의 도약을 더 하고.
바닥의 건물이 장난감처럼 보일 높게 도달했다.
너무 놀라고 무서운 나머지.
이미 반쯤 정신이 나간 홍나은이라.
갑자기 나타난 박민준을 보고도 자기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이젠 헛것도 보이네. 그렇지 않고서야 민준 오빠가 왜 올라와 여기 있겠어?’
자길 구하기 위해 주기 위해서, 맨몸으로 이 높은 곳까지 사람이 올라올 수 있다는 건 상식에 맞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덥석.
자기 몸을 꽉 끌어안은 다른 사람의 체온을 느낀 순간.
‘이건 내 환상이나 착각이 아니야.’
안도감을 느끼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박민준이 그런 그녀에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울 정도로 많이 무서웠나 보네. 미안하다.”
그로서는 이번 사건이 완전히 그와 무관하지 않았다.
다크 엘프 족장에게 마신의 구슬을 준 것도 그였고, 마법을 구현할 장소를 빌려준 것도 그였으니까.
물론 이런 일이 생길 거라는 예상은 하지 못했지만, 어쨌거나 불확실한 상황에 대비해야만 했다.
진작에 인적이 드문 곳으로 족장과 다크 엘프들을 데리고 가야 했지 않았을까?
그래서 차원의 문 때문에 집 일부가 망가지고, 본인도 하늘로 딸려 올라간 홍나은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던 건데.
그걸 홍나은은 다르게 받아들였다.
‘뭐가 미안하다는 거지? 날 늦게 구해줘서? 아니면 날 처음부터 지켜주지 못해서?’
그때부터 두려움이나 무서운 감정은 그녀의 머릿속에 없었다.
박민준과 관련된 온갖 상상이 대신 그 안을 꽉 채웠다.
정령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운룡대팔식을 펼쳐가며 바닥에 무사히 내려온 박민준이었다.
“내려줄게.”
그가 홍나은의 몸을 비스듬히 기울이며 발부터 땅에 닿도록 손을 놨다.
아쉬운 표정의 그녀가 천천히 땅을 디디며 홀로 섰다.
하지만, 팔은 여전히 박민준의 상체를 안고 있었다.
“이것 좀 치우지.”
“네?”
“이젠 몸이 하늘로 날아가지 않을 테니까. 날 좀 놓아달라고.”
“아. 네.”
박민준은 그녀가 다시 날아갈까 봐 두려워서 자길 안고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그의 오해였을 뿐.
홍나은이 진심으로 아쉬워하면서 그를 놓아줬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차원의 문도 사라졌다.
어두웠던 하늘이 맑아지고.
박민준도 바람의 정령 왕자 푸노에스를 소환 해제했다.
“수고했어. 그만 돌아가.”
“네? 제가 무슨 수고를 했겠어요. 오빠가 절 구해주셔서 고생하신 거지요.”
“너한테 한 말이 아닌데.”
“여기 오빠와 저 말고 또 누가 있는데요?”
그녀가 두리번거렸지만, 역시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푸노에스는 차원의 문과 가까운 하늘 높은 곳에 줄곧 떠 있었다. 또한, 그의 명령에 따라 정령계로 돌아가 버린 뒤였으니.
그런 그녀를 내버려 두고, 박민준이 집으로 돌아왔다.
나중에 그가 떠난 걸 안 홍나은이 무척 아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냥 가버렸네.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 했는데.”
박민준이 집에 돌아왔을 때.
그의 가족들도 마당에 나와 있었다.
“민준아! 너 어디 갔다 온 거야?”
“그래. 아들. 방금까지 하늘이 이상한데, 너도 갑자기 사라지고.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자길 앞에 두고 요란을 떠는 엄마와 누나를 향해 그가 볼을 긁으며 말했다.
“옆집 여자가 바람에 날아가길래, 도와주고 왔어.”
“나은 양? 아까 그 강풍에 날아갔었구나. 정말 잘했다.”
“어.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서. 잠시 다녀왔지.”
“너는?”
“나?”
“어디 다친 곳은 없어?”
“나는 당연히 멀쩡하지.”
“그럼 다행이고.”
“흠. 그럼 이제 집으로 들어가자.”
“불안해서 안 되겠어. 또 하늘이 이상해지면 어떡해?”
“그건 걱정하지 마. 절대 그럴 일 없어.”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확실히 말하지만, 다신 그럴 일 없어.”
이유를 말해주려면 또 한참 설명해야 하니.
그게 귀찮은 박민준이었다.
단호한 그의 태도에 가족들도 믿고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그날 저녁.
뉴스에서 난리가 날 법도 한데.
의외로 조용했다.
아주 폐쇄적인 무궁화 마을에서 일어난 기현상이고, 또 낮에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벌어진 일이라.
구경꾼은 제법 있었지만, 그걸 제대로 촬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마저도 아주 멀리서 찍은 거라.
그저 하늘이 어두워지고, 잠시 태풍이 불었던 자연현상처럼 보일 뿐이었다.
물론 가까이서 직접 본 사람들은 차원의 문을 제대로 봤지만, 증거가 없으니.
방송국에서 나와서 몇몇 마을 사람들과 인터뷰했지만, 금방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하늘에 거대한 구멍이 열렸다니까요.”
“게이트를 말하는 건가요?”
“아니요. 그거와 조금 달라 보였어요.”
“그래서요? 안에서 뭐가 나오는 것도 보셨나요?”
“아니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네. 그렇군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는 말만 반복되자 사람들의 관심이 빠르게 식었다.
하긴, 수시로 게이트가 열리고, 괴물까지 튀어나오는 세상이었으니. 그게 당연한 일이긴 했다.
***
반면, 일부에서는 이번 일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제일 먼저 반응한 곳은 죽은 서태준이 속해있던 모임이었다.
그곳의 수장이 보고를 받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