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저건 바람의 정령 왕자 프노에스입니다.”
족장의 대답에 박민준이 어리둥절했다.
“뭐? 왕자?”
“네. 전에도 본 적이 있어서 확신할 수 있습니다. 지금 봐도 정말 굉장하군요.”
눈을 떼지 못하며 감탄하는 족장과는 달리, 박민준은 그냥 그러려니 했다.
“아무튼, 좋은 놈이 소환된 거라 이거지?”
“그걸 말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박민준의 대답에 그가 격한 반응을 보였다.
“갑자기 왜 목소리를 높이는 건데?”
“정령술에 대해 몰라서 그러시나 본데, 소환할 수 있는 정령 중에서 가장 최상급에 있는 존재를 불러낸 겁니다.”
박민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정령 왕자가 소환 가능한 최상급이라고? 왕자가 있으면, 그 위에는 왕도 있다는 거 아니야?”
“물론 정령 왕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절대 소환에 응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왜?”
“정령 왕이 정령계를 벗어나면 세상이 멸망할 수도 있으니까요.”
“세상이 멸망한다니? 그렇게 강한 존재인가?”
“네. 바람의 정령 왕이 소환되면, 세계 곳곳에 태풍이 멈추지 않고 생겨날 겁니다.”
만약 물의 정령 왕이 소환되면, 전 세계가 물로 뒤덮여 버릴 것이다.
땅의 정령 왕이 직접 나타나면, 세상의 지진이 일어나면서 땅이 마구 뒤집힌다고 했다.
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한 박민준이었다.
“정령 왕이 소환되는 것만으로 너무 강력해서 자연재해가 일어난다는 거구나.”
“정확합니다.”
“그럼 정령 왕자는 소환할 수 있는 걸 보면, 정령 왕보다는 많이 약한가?”
“정령 왕에 비하면 그렇지요.”
박민준이 조금 실망했다.
그걸 본 족장이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실망하시면 안 됩니다.”
“실망도 내 마음대로 못하냐?”
“제 설명을 듣고 오해를 하셨나 본데. 정령 왕자는 같은 속성을 가진 모든 정령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습니다.”
정령 왕이 절대로 소환에 응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일반 정령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존재는 정령 왕자뿐이었다.
그제야 박민준도 족장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구나. 그럼 또 얘기가 달라지지.”
“다만, 바람의 정령 왕자 프노에스는 태풍급 바람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강하기 때문에 마나 소모가 엄청나게 클 겁니다.”
“난 지금 아무렇지 않은데?”
“그건 당신이 아직 프노에스와 계약을 하지 않으셨으니까.”
박민준과 계약하지 않은 상태라, 프노에스가 자기 힘으로 소환을 계속 유지하는 중이었다.
“아. 그렇네.”
“네. 빨리 계약을 하지 않으면 금방 사라져 버릴 겁니다.”
“그럼 빨리 계약을 진행해야지. 왜 설명이나 하고 있었어?”
“질문하시길래. 답을 해 드린 것뿐입니다.”
“어떻게 계약하면 되는 건데. 어서 시작해봐.”
“그건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당신이 직접 바람의 정령 왕자 프노에스에게 계약을 하자고 말하면 됩니다.”
허락하면 계약이 완료된다.
물론 거절해도 계약은 실패로 완료되고, 정령은 다시 자신이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족장은 소환진을 그리고 다크 엘프 언어로 줄곧 주문을 외웠는데.
박민준은 그 말을 할 줄 몰랐다.
“내가 그냥 한국말로 하면 돼?”
“네. 정령에게는 물질세계의 언어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소환되는 순간부터는, 그 세계의 언어를 전부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정령 언어와 지구 언어의 번역 같은 개념이 아니었다.
한 존재가 다른 존재에게 어떤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러므로 기본 원소로서 세계를 구성하는 정령들 또한, 다른 존재가 표현한 의지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알아들을 수 있다는 얘기였고.
그게 너무 어려운 개념이라, 박민준이 알 필요도 없고 설명하기도 어려웠으니.
족장이 간단하게 축약해서 박민준에게 설명했다.
“내 말을 그냥 알아들을 수 있다니. 그것참 편하네.”
박민준이 바람의 정령 왕자 빤히 바라봤다.
정령 왕자답게 압도적인 크기의 존재.
눈코입이 따로 없지만, 프노에스 또한 자신을 마주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든 그였다.
싱긋 웃은 박민준이 소리쳤다.
“야! 나랑 계약하자. 너도 내가 좋으니까 소환에 응한 거잖아? 그렇지 않냐?”
딱히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정령 왕자가 그냥 그 자리에 계속 존재할 뿐이었다.
그걸 본 족장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대단합니다. 프노에스와 계약에 성공하다니.”
박민준이 족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뭐야? 이거 성공한 거 맞아? 별다른 변화가 없는데.”
말을 마친 순간.
박민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구나. 내 내공이 줄어들고 있었어.”
그의 내공이 인간의 한계를 벗어날 정도로 광대한지라.
정령 왕자가 인간계에서 형태를 유지하면서 사용한 기운을 그제야 느낀 터였다.
보통 사람 같으면, 1분도 제대로 못 버티고 기절하거나, 피를 토했을 것이니.
그걸 잘 알고 있는 족장이 그를 새삼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놀랍구나. 정령 왕자 프노에스에게 흘러 들어가는 기운이 만만치 않을 텐데.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버티다니.’
경이롭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족장을 향해, 박민준이 물었다.
“이거 어떻게 돌려보내? 그냥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라고 말하면 되나?”
“그렇게 말 하시면 됩니다.”
“좋아. 알았어.”
박민준이 바람의 정령 왕자에게 외쳤다.
“이제, 그만. 내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 내가 나중에 필요하면 널 다시 부르겠다.”
소환될 때는 무척이나 요란하더니.
사라질 때는 너무 조용해서,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한바탕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창고 내부는 엉망진창이 되었다.
이사 오면서 미처 정리하지 못한 짐을 구석에 쌓아놨었다.
그게 정령 왕자의 소환 때 사방으로 날아갔으니.
짐이 든 상자고 뭐고 간에, 전부 박살이 나서 새로 사야 할 지경이 되었다.
‘엄마랑 누나가 아끼는 물건이 저 안에 없기를 바라야겠네.’
아니면 이젠 돈도 많은데, 새 걸로 사주면 되고.
엉망이 된 짐을 보는 박민준보다 더욱 마음이 심란한 이들이 있었다.
바로 젊은 다크 엘프들이었다.
“바람의 정령 왕자 프노에스가 소환되었다니?!”
“정녕 저 인간이 프노에스와 계약까지 맺었다는 건가?”
“정령 왕자를 소환 유지하면서 저렇게 평온할 수가 있나?”
“그러게 말이야. 힘들어하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잖아?”
“대체 얼마나 많은 기운을 몸에 지닌 거지?”
“설마 드래곤 하트만큼 되는 기운을 가졌다는 건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은데.”
처음엔 작게 자기들끼리 중얼거리더니.
점점 흥분해서 목소리가 커졌다.
“모두 조용.”
족장이 나서서 젊은 다크 엘프들을 조용히 시켰다.
그들이 동시에 입을 다물자, 사방이 다시 고요해졌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본 족장이 박민준에게 다가갔다.
“당신이 원하는 걸 이뤘으니. 이젠 약속을 지킬 시간입니다.”
“그래. 생각보다 시간이 훨씬 오래 걸리긴 했지만, 넌 나와 한 약속을 충실히 이행했다.”
“그럼 이제 마신의 구슬을 돌려주십시오.”
“그렇게 하지.”
박민준이 구슬이 든 상자를 통째로 그에게 건넸다.
“자 여기.”
“드디어!”
이 순간이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족장이 떨리는 손으로 아주 조심스럽게 상자를 받아들었다.
잠시 조용하나 싶었는데.
고향에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기뻤나?
“우와~!”
“드디어 집에 갈 수 있겠구나.”
“이제 곧, 부모님과 친구들을 다시 만날 수 있겠지?”
젊은 다크 엘프들의 환호성과 들뜬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족장이 그들을 말리지 않았다.
체면 때문에 담담한 척 굴었지만, 그도 속으로는 무척 기뻤다.
‘저렇게 좋아하는 건가? 하긴 나도…….’
다크 엘프들을 보며 박민준이 말했다.
“지금 바로 돌아갈 건가?”
“물론입니다.”
“좋아. 그럼, 잘 가라.”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작별인사는 무척 짧았다.
그에게 몇 가지 기술을 배우긴 했지만, 사실 계약에 의한 관계일 뿐. 딱히 친한 사이도 아니었으니.
족장이 동족들을 불러 모았다.
그래 봤자, 몇 명 되지 않았지만.
‘겨우 이게 전부구나. 그래도 다행이다. 마신님. 감사합니다.’
그 소수라도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에 그는 진심으로 감사했다.
족장이 상자를 열자 강한 기운이 분출되기 시작했다.
“자, 이제 차원의 문을 열 것이니. 너희 모두 내 곁에 가까이 서 있어야 한다.”
“알겠습니다. 족장님.”
고개를 끄덕인 족장이 구슬을 맨손으로 잡았다.
엄청난 에너지를 가진 물건이라,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는데.
‘저래도 되는 거였나?’
박민준의 예상과는 달리.
의외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신의 구슬에 정신을 집중한 족장이 주문을 외우고 잠시 후.
아까 정령을 소환할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기운이 창고 내부에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는 작은 크기의 검은색 구멍이 생겨나고 있었다.
주문을 마친 족장도 너무나 엄청난 기운이 폭발적으로 주변에 감돌자, 매우 당황한 눈치였다.
“야! 너무 위험한 거 아니야? 이러다 창고는 물론이고, 내 집까지 날아가게 생겼는데?”
박민준의 말에 족장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죄송합니다. 저도 이번에 처음 사용해보는 주문이라. 여파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그가 말하고 있는 사이에도 검은색 구멍은 점점 커져만 갔다.
처음엔 주먹만 했는데, 지금은 사람 몇 명이 동시에 들어가도 충분할 정도의 크기였다.
“야. 그만하고. 어서 돌아가.”
“죄송하지만 멈추는 방법은 따로 없습니다.”
“뭐야? 너 죽을래?”
“하지만 주문을 외운 제가 돌아가면, 저 기운도 금방 사라질 겁니다.”
“확신할 수 있어?”
“네. 이 주문을 제게 가르쳐준 분이 분명, 그렇게 말했습니다.”
“좋아. 그럼 저게 더 커지기 전에 어서 들어가.”
“알겠습니다. 함께한 건 잠시뿐이지만, 정말 감사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족장이 제일 먼저 검은색 구멍을 향해 다가갔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가 뒤돌아보며 소리쳤다.
“내가 들어가고 나면, 너희도 서둘러서 들어와야 한다.”
“네. 족장님.”
“반드시 서둘러. 언제 차원의 문이 닫힐지 모른다.”
충고한 족장이 마른침을 삼키더니.
휙!
그대로 몸을 날렸다.
“우리도 가자.”
“그래.”
젊은 다크 엘프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모든 다크 엘프가 떠났다.
하지만 족장의 말과는 달리.
검은색 구멍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커지기까지 했으니.
“설마 그놈이 나한테 거짓말을 한 건가?”
그가 아까 족장과의 대화를 되짚어봤다.
‘녀석의 눈빛과 목소리는 절대 거짓이 아니었어.’
그렇다면 족장도 모르는 일이 지금 여기서 벌어지고 있다는 말이었다.
문제는 또 있었다.
차원의 문을 연 당사자가 사라져버렸으니.
저걸 다시 닫는 방법을 아는 이도 여기 없었다.
박민준이 잠시 생각하는 사이에, 검은색 구멍은 또 커졌다.
이젠 사람 수십 명이 동시에 나란히 들어가도 될 정도였고.
와장창.
기어이 박민준의 집 창고 지붕에 구멍이 뚫려버렸다.
지붕을 삼킨 검은색 구멍이 이젠 주변의 모든 걸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마치 진공청소기 같은 모습에 박민준도 조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고 했으니. 버티는 수밖에 없는 건가?’
하지만 무슨 수로?
거대한 창고만큼 커진 검은색 구멍이 모든 걸 빨아들이고 있지만, 딱히 손쓸 방법이 없었다.
그가 내공을 써서 창고를 지키려고 했지만, 그도 사람인지라 당연히 한계가 있었다.
‘이건 완전히 자연재해나 마찬가지잖아? 무공도 이럴 땐 도움이 안 되네.’
내공으로 감당할 수 있는 범위와 위력이 아니었다.
검은색 구멍이 더 커졌다.
이젠 창고 벽까지 박살 났다.
박민준이 잔해를 피하는 사이.
외부에까지 세력을 키웠다.
그리고 박민준의 집까지 노리기 시작했다.
‘젠장. 언제 없어지는 거야? 저러다 우리 집까지 삼켜 버리겠는데?’
가족들도 아직 안에 있으니.
집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 앞을 막아섰다.
박민준이 기로 무형의 장막을 만들었다.
집을 완벽하게 보호할 정도로 큰 기의 벽이었는데.
검은색 구멍이 그마저도 흡수하기 시작했다.
어이가 없는 박민준이 눈을 크게 떴다.
‘내 기를 삼켰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