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이럴 수가.”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박진석이 입을 반쯤 벌리고, 눈을 흐리멍덩하게 떴다.
그의 손에는 여전히 양손 검이 들려있었는데, 검날의 절반이 사라져서 무척이나 초라해 보였다.
“재밌었다. 하지만 역시나 너도 약하군.”
얼핏 들으면, 상대가 박진석을 대놓고 조롱한 것 같았다.
하지만 당사자인 그는 박민준의 말을 사실로 받아들였다.
사실, 싸움 초반만 해도 박진석은 상대를 이길 수 있을 거라 착각했다.
어째서인지, 박민준이 수비만 할 뿐 반격을 하지 않았으니까.
‘S등급이라고 하더니. 별거 아닌데? 내 공격을 막기에만 급급하잖아?’
박진석은 이전에 서태준을 직접 만난 적이 있었다.
짧은 시간 동안 승부를 내지 못하고 놈이 도망쳤기 때문에 실력이 서로 비슷하다고 봐도 무방했다.
한마디로 막상막하.
그래서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날 상대로 겨우 이정도라니? 서태준을 운으로 이겼나?’
하지만, 박민준이 단 한 번 반격했을 때.
그는 깨달았다.
상대가 결코, 자신의 공격 때문에 수비만 한 게 아니라는 걸.
심지어.
‘단 일 검이었는데.’
박민준의 반격 한 번에 그 두꺼운 자신의 검날이 작살 났다.
‘마력까지 가득 머금고 있어서 정말 강한 상태였는데. 대체 어떻게?’
모든 마력을 다한 공격을 아주 가볍게 반격해 놓고도, 박민준은 지친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당신. 진짜 대단하군. 직접 당해놓고도,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해.”
박진석이 여유를 부릴 땐.
상대에게 존댓말을 했다.
지금은 스스로 존댓말을 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물론 박민준은 그걸 알면서도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도 처음부터 줄곧, 상대에게 반말하고 있었으니까.
“너도 제법 재밌는 검술을 사용하더군.”
박민준 나름대로 칭찬한 거였다.
하지만 듣는 상대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목숨을 걸고, 모든 마력을 더해서 싸움에 임한 거였는데.
겨우 재밌는 검술이라니.
박진석은 실로 처참한 마음이 들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그가 잘려나간 검날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박민준에게 하소연하듯 말했다.
“그렇게 강한 사람이면서 내 검을 왜 잘라낸 거지? 이렇게 하지 않아도 충분히 막을 수 있었을 텐데?”
“그냥. 갑자기 내 검의 성능을 시험해 보고 싶었거든.”
“검의 성능을 시험하다니? 갑자기 그건 무슨 소리지?”
“내가 반격할 때, 마력을 쓰지 않고 순수하게 이 검이 얼마나 단단한지만 알아보고 싶었단 말이었다.”
“뭐? 마력도 쓰지 않고 내 검을 이렇게 잘라냈다고?!”
“그래. 내가 굳이 거짓말할 이유가 있나?”
“이런 미친.”
상대가 욕을 했지만, 박민준은 발끈하지 않았다.
자신을 향한 말이 아니라.
그냥 놀라서 내뱉은 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검이 생각보다 더 단단하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기분이 좋았다.
‘이정도로 튼튼하다면, 다른 무기는 필요 없겠어.’
혼자 흡족해서 미소 짓고 있는 박민준에게 상대가 작별을 고했다. 어차피, 자신이 싸움에서 졌으니.
더는 영입을 제안하지도 못할 터.
더는 이곳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다음에 만나면……. 아닙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원래 박진석은 이렇게 말할 참이었다.
다음에 만나면, 나하고 다시 한번 겨뤄봅시다. 라고.
하지만 그때도 검이 또 망가질 것 같아서 중간에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에휴. 이걸 고치려면, 독일까지 보내야 할 텐데. 얼마나 오래 걸릴까?’
혹시 수리할 수 없는 건 아니겠지?
아니면, 수리해도 예전 같지 않다거나?
정말 마음에 드는 검이었는데, 내 검술에도 딱 맞았고.
검을 내려다보는 박진석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자신이 잘라버린 검 때문에, 설마 상대가 저렇게 슬퍼할 줄은 몰랐다.
‘제법 대담해 보이더니. 아예 질질 짜려고 하네.’
연신 한숨을 푹푹 내쉬며 부러진 검을 내려다보는 그를 향해,
박민준이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그 검. 고치려면 외국에 보내야 하나?”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아까 외국에서 구했다고 네 입으로 말했었잖아. 그러니까 수리도 외국에서 할 것 같았지.”
“맞습니다. 독일까지 보내서 수리를 맡겨야 합니다.”
“역시.”
고개를 끄덕인 박민준이 그에게 조언했다.
“내가 아주 솜씨가 좋은 대장장이를 하나 알고 있는데. 어떻게, 누군지 가르쳐줘?”
“그자는 어느 나라 사람입니까? 어차피 외국으로 보내야 한다면, 그냥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남자가 아니고 여자야. 그리고 외국이 아니라 한국에 있지.”
“한국? 이 무기를 고칠 수 있는 사람이 한국에 있단 말입니까? 그것도 여자라니요?”
“왜 여자라니까 마음에 안 들어?”
“그럴 리가요? 솜씨만 좋다면 그런 건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더욱이 한국이라면 더 빠른 수리가 가능하겠군요.”
“좋아. 그럼 내가 알려주지.”
허리를 깊이 숙이며 감사를 전한 박진석이었다.
근데 정작 박민준이 알려준 건 수공예품 상점이었다.
“인사동에 있는 수공예품 상점으로 가라고요?”
“어. 거기 주인 솜씨가 정말 굉장해. 아마 한국뿐 아니라, 세계를 따져봐도 한 손 안에 들어갈걸.”
“설마요?”
“왜 내 말을 못 믿겠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장장이라니.
뻥이 너무 심한데?
‘그렇게 실력 좋은 사람이 한국에 있었다면, 청룡 길드장인 내가 진작 알고 있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다면, 굳이 뭐 하러 그가 독일까지 직접 가서 이 검을 구해왔겠는가?
불신의 눈빛이 가득한 상대를 향해.
박민준이 검을 들어 보였다.
“이 검도 거기서 구한 거야. 주인이 직접 만든 거라고.”
“그게 정말입니까?”
자신의 검을 잘라낸 상대의 무기를 수공예품이나 만드는 사람이 제작했다니.
실로 놀라울 따름이었다.
‘저렇게 말할 정도면 거짓말이 아닐 거야. 어서 가봐야겠다.’
마음이 급해진 그가 다시 한번 허리 숙여 감사를 전하고 급히 떠났다.
그런 그를 향해 박민준이 말했다.
“원래는 아무에게나 알려주지 않는 거야. 그러니까 너도 거기 위치를 막 떠벌리고 다니지 마라.”
“잘 알겠습니다.”
“혹시라도, 나중에 내가 거기 주인을 만났을 때, 싫은 소리라도 나오면 널 죽여버릴 거야.”
“설마요?”
“왜 못 믿겠어? 그럼 목숨을 걸고 시험해 보든가?”
“아닙니다. 절대 비밀을 지키겠습니다.”
***
또 며칠 뒤.
혼자서 천천히 움직일 수 있게 된 족장이었다.
한쪽 팔이 잘리고 복부가 관통되는 큰 상처였는데.
정말 굉장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회복력이었다.
박민준이 놀란 눈을 하고 말했다.
“신기하네. 그 정도 회복력이면, 나중에 잘려나간 왼팔도 다시 자라는 거 아니야?”
족장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다크 엘프 족의 회복력이 인간보다 월등하긴 하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그래? 아무튼, 이젠 혼자 움직이는 걸 보니. 나한테 정령술을 가르쳐 줄 수도 있겠네? 아닌가?”
“맞습니다. 지금 바로 가르쳐 드리지요.”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다크 엘프들은 속으로 내심 박민준을 비웃고 있었다.
그들은 기절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가 다크 엘프 종족만 익힐 수 있는 투명화와 탐지 불가 기술을 배웠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정령술과는 달리, 투명화와 탐지 불가 기술은 다른 종족에게 절대 전수하지 않는 것이 오래된 전통이었으니까.
족장도 굳이 어린 다크 엘프들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저 아이들이 알아봤자, 굳이 좋을 게 없다. 오히려 반발만 사게 될 터.’
아무튼, 그래서 그들은 박민준이 정령술 또한 익히지 못할 거라고 예상했다.
‘저자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결국엔 인간. 정령은 인간의 부름에 거의 응답하지 않는다.’
엄청난 정령 친화력이 있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랬다면, 저런 굉장한 검술을 익히지 않았을 터.
보통 정령술사들은 정령 친화력을 가진 대신, 신체 능력은 형편없었으니까.
그나마 전투 종족이라는 다크 엘프라서 정령을 다루면서도 수준급 검술을 지닐 수 있었다.
반면, 족장은 박민준이 건네준 마력석을 들고 내심 기대하는 마음이 컸다.
‘저자가 과연 이번에도 해낼 수 있을까?’
그도 이번엔 박민준이 실패할 거라고 예상했다.
그 이유도 젊은 엘프들이 생각한 것과 똑같았다.
“뭐해. 어서 시작하지 않고.”
“알겠습니다. 그럼 시작할 테니. 그 자리에 가만히 서 계십시오. 정령 소환진을 그리겠습니다.”
“알았어.”
박민준이 창고 중앙에 선 상태로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족장은 그의 발밑에 복잡한 형태의 정령 소환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한참 시간이 지나고.
“방금 제가 그린 정령 소환진과 이 마력석을 매개로 해서 정령을 소환하겠습니다. 대신에 이 마력석은 소환 의식 끝난 후에 쓸모없게 변할 겁니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말입니다.”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박민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족장이 그걸 신호로 알아듣고, 자신의 손에 들고 있던 마력석에 정신을 집중했다.
박민준도 발밑에 그려진 선들로부터 기운을 느끼기 시작했다.
‘신기하네. 눈이 어지러운 그림일 뿐인데. 이런 기운을 발하다니. 여기서 정령이 튀어나오는 건가?’
그가 잠시 딴생각을 하는 사이.
정령을 소환하는 데 성공한 족장이었다.
박민준이 정령술에 전혀 소질이 없다면, 한 마리도 소환되지 않았을 터.
‘이자가 정령술에도 소질을 보인다는 건가? 과연 어떤 정령이 저자의 향기를 맡고 찾아왔을까?’
정령 소환진은 정령을 정령계에서 끌어내는 입구이자, 임시 통로였으니.
번쩍!
바닥에서 초록색 빛을 발하더니.
휘~잉!
창고 내부에 거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얼마나 강하게 부는지.
넋 놓고 구경하고 있던 다크 엘프들의 몸이 들썩거렸으니.
순간 서로를 잡지 않았으면, 공중으로 날아갈 뻔했다.
“모두 느껴 봐. 이건 분명 바람의 정령이야.”
“정령이 소환된 것도 놀라운데. 이렇게 강한 반응이라니.”
“대체 어떤 등급이 튀어나온 거지?”
그칠 줄 모르던 강풍이 점점 잦아들었다.
그리고 박민준을 포함한 모두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거대한 바람의 정령이 위풍당당하게 허공에 떠 있었다.
대략 3m 크기였는데, 그냥 연기를 모아 놓은 것처럼 보일 뿐.
특별한 형태는 아니었다.
정령을 슬쩍 본 박민준이 족장에게 물었다.
“뭔가 좀 이상한데. 제대로 소환한 게 맞아?”
그의 질문에도 족장은 정령을 살피기 바빴다.
“야. 내 말 안 들려?”
“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너 제대로 한 거 맞냐고.”
“당연히 제대로 정령을 소환했습니다. 지금 당신도 저 바람의 정령을 보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긴 한데. 너희가 소환했던 녀석들하고 좀 다르잖아?”
“조금이 아니라 참 많이도 다르지요.”
“많이? 난 그냥 크기만 말한 건데. 네가 봐도 저건 너무 부담스럽지 않아?”
박민준이 의구심을 품은 건 정령의 크기였다.
기존에 다크 엘프들이 소환했던 정령을 박민준도 봤었다.
‘저놈들의 정령은 겨우 1m 크기 전후였는데. 왜 나는 3m나 되는 거지?’
저렇게 큰 놈은 부담스러워서 어떻게 매번 소환할까?
좁은 장소나 골목길에서는 엄두도 나지 않겠는데.
불만 섞인 그의 말을 듣고 족장이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아주 의미심장한 얼굴로 말했다.
“저건 보통 정령이 아니니까요. 저런 크기가 당연한 겁니다.”
“응? 보통 정령이 아니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