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누구세요?”
인터폰을 확인한 박미희의 입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나왔다.
며칠 전, 그 난리가 난 터라.
자신도 모르게 긴장한 탓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박진석이라고 합니다. 청룡 길드에서 나왔습니다.”
“청룡 길드요? 거기서 왜 우릴 찾아오신 건데요?”
아주 유명한 헌터 길드라 바로 안심하긴 했지만, 그녀는 아직 상대를 믿을 수가 없었다.
이유를 묻는 상대의 말에 남자가 인터폰 카메라를 향해 미소를 보여줬다.
“박민준 씨에게 감사를 전하기 위해서 온 겁니다. 그러니, 그렇게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목소리만 듣고도 박민희의 상태를 잘 알고 있다는 말투였다.
미소가 보기 좋고, 목소리도 중후한지라.
상대를 향해 살짝 믿음이 간 그녀였다.
“알았어요. 마침 동생이 집에 있으니, 문을 열어드릴게요.”
“감사합니다.”
털컥.
안으로 들어선 박진석이 안 그러는 척 굴면서, 집안을 빠르게 훑어보며 살폈다.
‘딱히 사치스러운 성격은 아닌가 보군.’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실용적인 성격인가?
아니면, 이곳으로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었다고 했으니.
아직, 짐을 다 옮기지 않은 걸까?
박진석은 상대를 파악하는 일을 좋아했다.
그리고 자신이 파악한 정보를 이용하는 건 더욱 좋아했다.
박민준에게 감사를 전하기 위해 왔지만, 단순히 그 이유만으로 청룡 길드의 길드장인 그가 직접 온 건 아니었다.
“어서 오세요. 앉아서 기다리시면 곧 내려올 거예요.”
“감사합니다.”
“커피 좀 드릴까요?”
“아닙니다. 오기 전에 미리 마셨습니다.”
“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모르는 사람이 불쑥 찾아오는 게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서요.”
“죄송합니다.”
불편한 티를 감추지 않은 박민희가 떠나고.
박민준이 아주 편한 복장으로 계단을 내려왔다.
상대가 흰 민소매 상의에 낡은 반바지를 입고 자신을 만났지만, 박진석은 전혀 불쾌한 티를 내지 않았다.
감사를 전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제멋대로 불쑥 찾아온 사람이 자신이었고, 아쉬운 사람도 자신이었으니.
‘소문에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이라고 하더니. 집도 안 꾸미고, 평소에도 저렇게 지내는 건가?’
반면 박진석은 2천만 원짜리 정장을 입고, 10억짜리 시계를 찼다.
심지어 무늬 없는 넥타이도 특별해 보이지 않았지만, 백만 원짜리 명품으로 매고 있었다.
박민준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복장이었다.
‘남들이 보는 내가 곧 청룡 길드의 이미지다.’
그는 자신이 청룡 길드를 대표하는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미지 메이킹에 철저했다.
하지만, 정작 박민준은 온몸을 잔뜩 명품으로 도배한 상대를 보고도,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한참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귀찮게 왜 찾아온 거지?’
그저 귀찮을 따름이었다.
하품하는 박민준을 향해 그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청룡 길드에서 온 박진석이라고 합니다.”
보통 이 정도만 말해도 상대는 그가 길드장인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박민준은 직함도 얘기하지 않은 그를 청룡 길드에서 보낸 심부름꾼 정도로 생각했다.
제법 강해 보이긴 했지만, 그래 봤자 그의 기준에서는 한주먹거리였으니까.
“그래서 날 왜 찾아온 건데. 할 말이 있으면 빨리하고 가라.”
“박민준 씨께서 서두르는 걸 보니. 뭔가 급한 일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아니. 나 오늘 아무 일도 없는데.”
“그런데 왜 저에게 빨리 말하고 가라고 하신 겁니까?”
“내가 자다 나왔거든. 30분쯤 더 낮잠을 자고 싶어서 말이야.”
“아......”
박진석이 할 말을 잃었다.
대(大)청룡 길드의 길드장인 자신이 직접 만나러 온 건데.
‘겨우 낮잠 때문에 빨리 말하고 가라는 건가?’
만약, 상대에 대한 소문을 미리 듣지 못했다면, 박진석은 당장 화가 났을 것이다.
‘다른 때 같으면, 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겠지.’
하지만 다행히, 박민준에 대한 말을 제법 많이 주워들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면서도.
그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박민준에게 말했다.
“당신이 서태준을 직접 잡아 죽이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운이 좋았지.”
“운이 좋았다고요?”
박진석은 운이 좋다는 말을 달리 받아들였다.
‘서태준을 이긴 게 운 때문이었다는 건가? 실력이 아니라?’
하지만 이어지는 상대의 말을 듣고, 바로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그놈이 겁도 없이 스스로 날 찾아왔거든. 만나면 바로 죽일 생각이었는데. 잘됐지 뭐.”
“아. 그렇군요. 제가 괜한 오해를 했습니다.”
“오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나저나 내가 서태준을 죽인 게 너랑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야? 혹시 돈이라도 떼 먹혔나?”
“네? 겨우 그런 일이 아닙니다. 그자가 제 친척을 죽였습니다. 저는 이미 알고 계신 줄 알았는데요?”
“내가? 그런 걸 내가 어떻게 알아?”
쳥룡 길드 소속으로 활약하던 헌터 박용탁을 서태준이 죽였다.
헌터계에서는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사실인데.
설마 그걸 박민준이 모르고 있을 줄이야.
“박용탁이라고, 제 사촌 녀석을 서태준이 살해했습니다. 그래서 현상금을 걸어둔 상태였지요. 지난번에 그 돈도 받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뭔가 여기저기서 돈이 많이 들어오긴 했는데. 그중에 네 돈도 있었구나.”
“네. 그렇습니다.”
대답을 마친 그가 입을 일자로 꾹 다물었다.
박진석은 상대와 대화를 할수록 자신이 힘들어지는 걸 느꼈다.
청룡 길드장인 자신을 직접 만나는 자리임에도, 예의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박민준이 일부러 자신의 정체를 알고도 저러는 거라고 믿고 있었으니.
거기다 누구나 알법한 얘기를 해도 처음 듣는다는 표정으로 잠깐 보이는 게 전부.
그마저도 관심이 없다는 투로 말해버렸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인간이군. 이것 참 곤란한데.’
조금 이르긴 하지만, 그가 품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주먹보다 작은 상자였다.
“감사의 의미로 드리는 겁니다. 받아주십시오.”
“주면 당연히 받지.”
박민준은 누가 자신에게 선물 주는 걸 마다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주면 받고, 나중에 엉뚱한 소리를 하면 무시한다.
그걸 빌미로 계속 수작을 부리면 죽여버리면 되고.
‘그럼 그만이지 뭐.’
그게 억울하면 박민준보다 더 강하면 되지만, 그런 사람이 과연 지구에 있을까?
다른 세상에는 천마가 있었지만, 그도 박민준의 손에 죽었고, 지구에서는 아직 그만한 적을 만나지 못했다.
한편, 상자를 받아 든 박민준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변했다.
“시계잖아?”
“왜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당연하지. 난 시계 같은 거 불편해서 못 차.”
“그렇습니까?”
“응. 여름엔 땀이 차고, 겨울엔 차갑지. 결정적으로 손목을 감싸고 있는 갑갑함을 참을 수가 없거든.”
“하지만 제가 드린 시계는 보통 물건이 아닙니다.”
“보통 물건이 아니라니? 설마 마법 아이템인가?”
“그건 아닙니다. 대신 한국에는 단 하나밖에 들어오지 않은 시계입니다.”
“그게 뭐 대수야? 시계가 시간만 잘 맞으면 그만인 거지. 그리고 애초에 난 시계를 차지 않는다니까.”
그 말을 듣고, 박진석이 속으로 크게 낭패했다.
‘빌어먹을.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보통 명품시계를 주면, 100명 중 99명은 좋아한다.
그 나머지 1명을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이야.
원래는 상대가 물어보면, 가격을 말해줄 생각이었는데.
다급해진 그가 먼저 말해버렸다.
“그래도 그게 10억짜리입니다.”
“이게 그렇게 비싸? 세상에 10억짜리 시계도 있었나?”
“네. 더 비싼 것도 있긴 하지만, 그 물건만 해도 한국에서 절대로 쉽게 구할 수 있는 시계가 아닙니다.”
“그렇군. 좋아. 그럼 인터넷 중고장터에 팔면 되겠네.”
“네? 그걸 파신다고요?”
“왜 안 돼?”
“제 설명을 제대로 들으신 겁니까?”
“응. 들었지. 구하기 힘든 시계라면서. 그럼 중고도 거의 제값을 받을 수 있겠네. 다행이야.”
전혀 다행이 아니었다.
그 시계는 박진석이 아끼는 물건이었다.
스위스 장인이 직접 손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한국에는 오직 한 개뿐이었고, 전 세계도 몇 개 없었다.
‘그런 물건을 겨우 인터넷 중고장터에 팔겠다니? 미친놈이야 뭐야?’
그가 박민준에게 사정하기 시작했다.
“그걸 진짜 인터넷에서 팔아 버릴 생각이라면, 차라리 지금 바로 저에게 돌려주십시오.”
박민준이 싸늘한 표정으로 변했다.
“너. 내가 생각하는 세상에서 제일 나쁜 짓 중 하나가 뭔 줄 아나? 어?”
시계를 돌려달라고 했을 뿐인데.
왜 갑자기 저런 질문을 하는 걸까?
어쨌든 대답은 해야 하니.
“당연히 살인이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맞지. 하지만 정답이 아니야.”
“그럼 뭡니까?”
“줬던 물건을 도로 뺏는 거. 그게 제일 양아치 같은 짓이지.”
박진석이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제가 언제 뺏는다고 했습니까? 그냥 돌려달라고 했지.”
“그게 그거지 임마. 내가 이걸 팔든, 박살 내든 네가 무슨 상관인데.”
“전 그냥 그 시계의 가치를 몰라보는 게 너무 아쉬워서.”
“몰라보긴 누가 몰라봐? 이거 비싼 거라면서. 그러니까 비싸게 팔 거라니까.”
너무 당당하게 저런 말을 하는지라.
박진석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생각보다 훨씬 더 또라이다. 내가 저자를 너무 쉽게 봤어.’
결국, 그가 고심 끝에 준비한 선물은 인터넷 중고장터로 바로 팔려나갈 물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게 되어 버렸다.
자신도 모르게 크게 한숨을 내쉰 그에게 박민준이 말했다.
“뭐해? 볼일 다 봤으면 그만 가지 않고?”
선물을 줬으니.
그만 꺼지라는 건가?
그걸 저렇게 당당하게 말하다니.
어금니를 꽉 깨문 그가 속으로 화를 삼켰다.
그리고 다시 애써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일어나기 전에 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또 할 말이 남아 있었구나. 그럼 빨리해 봐.”
“우리 길드에 들어오실 생각이 있으십니까? 이미 잘 알고 계시겠지만, 우리 청룡 길드는 한국뿐 아니라,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헌터 길드입니다. 그러니.”
열심히 말하는 그였는데.
박민준이 중간에 말을 잘랐다.
“거절한다.”
칼 같은 대답을 듣고, 얼빠진 표정이 된 박진석이었다.
“네? 방금 뭐라고?”
“너 지금 날 영입하고 싶은 거잖아?”
“그렇습니다. 박민준 씨가 청룡 길드에 들어와 주기만 하면, 세계 제일의 헌터 길드로 만들 자신이 있습니다.”
“너 당연한 소리를 하면서 무슨 폼을 그렇게 잡냐?”
“제가요?”
“그래. 내가 소속된 곳이 세계 제일의 집단이 되는 건 당연한 거잖아. 그런 걸 네가 만드네, 마네 그딴 소리를 하고 있어?”
“아......”
또 할 말을 잃었다.
아무리 자신이 S등급 각성자이고, 서태준을 죽인 강자라고 하지만, 저런 말을 표정 하나 안 바꾸고 남에게 하다니.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건가? 아니면 미친놈인가?’
박진석은 어쩌면 그 둘 다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여기서 포기했을 텐데.
역시나 서태준을 죽인 실력은 진짜인지라.
그가 한 번 더 박민준에게 제안했다.
“더는 권유하지 않을 테니.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제가 아직 조건도 자세히 말하지 않았는데, 그렇게 거절하시다니.”
“조건이고 뭐고 난 누구 밑에서 일할 생각이 없어.”
“아예 생각이 없으신 겁니까? 제가 아니라, 다른 누가 영입 제의를 해도 말입니까?”
“그래. 다른 놈들에게도 말했지만, 난 나보다 약한 놈 밑에서 일하지 않을 거야.”
“그럼 제가 당신보다 강하면 된다는 겁니까?”
“말이 그렇게 되나?”
“당연하지요.”
박진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박민준을 향해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말했다.
“당장 밖으로 나가실까요?”
***
진심으로 상대할 생각이었는지.
자기 차로 돌아가서 검까지 들고 온 박진석이었다.
보통의 검보다 날이 훨씬 두껍고, 넓었다.
길이도 1.5배는 족히 되어 보였고.
검날 중간을 손으로 잡을 수 있게 만들었다.
손잡이 또한, 양손으로 잡아도 넉넉할 정도로 길었다.
그의 검을 본 박민준이 호기심을 내비쳤다.
“검이 좀 특이하게 생겼네?”
“네. 이건 서양에서 구한 양손 검입니다.”
“그렇구나. 근데 그거 사용하기에 너무 무겁지 않냐?”
실제로 무게가 2.5kg에 육박했다.
휙휙!
그런 검을 가볍게 휘두른 박진석이 싱긋 웃으며 답했다.
“보시다시피,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좋아. 그럼 시작해볼까? 네가 먼저 마음껏 공격해봐.”
“네. 그럼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