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박민준도 처음엔 홍나은의 집을 노린 게 악당일 거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가 상대한 투명화 특성을 가진 녀석들 말이다.
하지만, 속절없이 무너지는 백호 길드를 보고, 아니라는 걸 알았다.
박민준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것들이 홍나은을 안아 들고, 창문을 나오려는 순간.
그가 나서려고 했는데.
마침 주희철이 나타났다.
‘저 녀석도 한 가닥 하던데. 실력 좀 볼까?’
그의 눈에도 보이지 않았는지, 허공을 향해 혼자 지랄하더니.
기어이 뭔가를 찌른 모양새였다.
‘역시 제법이야.’
천장에서 노린 공격은 막지 못했다.
그가 쓰러지고.
드디어, 박민준이 나섰다.
내공을 담아 검을 던졌고, 뭔가가 거기에 맞고 사라졌다.
피도 흘리지 않고, 말 그대로 그냥 존재 자체가 없어졌으니.
‘재밌는 놈들이네? 투명화는 그렇다 쳐도, 저건 또 뭐지?’
그걸 이제 다크 엘프에게 물어보니.
“제가 소환한 바람의 정령입니다.”
“정령? 그런 게 진짜 있어?”
“당연하지 않습니까? 정령이 없으면 바람이 어떻게 불겠습니까? 물은 또 어떻게 흐르고. 땅은.”
“그만. 네가 하는 말은 지구에는 맞지 않아. 전혀 과학적이지 않다고.”
“과학은 악마의 기술입니다. 그런 걸 믿으면, 세상이 멸망할 겁니다.”
대화가 되지 않았다.
박민준이 다시 자기가 원하는 걸 말했다.
“아무튼, 내가 너희를 도와줄 테니까, 너희도 내가 원하는 걸 들어줘야겠어.”
“정녕, 우리와 거래 하길 원한다는 겁니까?”
“그래. 참고로 거절은 없어.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여기서 너희를 전부 죽일 거니까.”
그 말을 들은 젊은 다크 엘프들이 발끈했다.
“아니. 드래곤도 아닌 인간 주제에. 긍지 높은 전사인 우리를 협박하는 건가?”
“그래. 긍지 높은 놈들도 죽는 건 마찬가지잖아? 지금 너부터 죽여볼까?”
“그만!”
족장이 나서서 동족을 뒤로 물렸다.
지도력이 있었는지.
곧장 고개를 숙이고 뒷걸음질 쳤다.
“그래서 당신은 우리에게 뭘 해줄 수 있습니까? 그리고 대가로 원하는 게 뭡니까?”
“너희가 찾는 물건을 내가 가져다주지.”
“그럼 그 대가는?”
“그건 내가 돌아와서 말해줄게.”
“뭔지 알아야, 우리가 들어줄지 말지, 결정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대답하지 않고.
휙!
순식간에 사라진 박민준이었다.
그걸 본 다크 엘프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인간이 어찌 저렇게 빠를 수가?”
“세상에. 벌써 내 감각에서 사라졌어.”
“정령도 그 인간의 종적을 놓쳤다는데?”
“진짜 드래곤이 아닐까? 혹시 우릴 가지고 노는 거일 수도 있잖아?”
“눈빛이 다르잖아.”
모습을 바꾼 드래곤이 유일하게 감추지 못하는 건 바로 눈빛이었다.
최상위 포식자의 눈빛.
보는 이의 몸을 움츠러들게 만드는 강렬한 파충류의 눈.
하지만 그들이 본 박민준의 눈은 아주 맑고 깨끗했다.
다만, 그 안에 광기와 죽음이 엿보였으니.
그게 걱정되는 족장이었다.
‘그 인간이 약속을 제대로 지킬까? 자신이 원하는 걸 얻으면 우릴 죽이진 않을지.’
남자의 동족인 인간을 마구 죽였다.
물론, 방어를 위해서였지만, 복수를 당해도 할 말이 없다.
그렇다고 도망쳐?
그건 안 될 말이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물건이 저곳에 있었으니.
그걸 얻지 못할 거면, 차라리 죽는 게 더 낫다.
‘이곳의 환경은 너무 더럽게 오염되어 있다. 동족은 물론이고, 정령들마저 제힘을 내지 못할 정도로.’
어차피 이런 환경에서는 건강하게 오래 살아남을 수 없다.
족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홍 회장의 집이 있는 방향을 지그시 바라봤다.
‘이렇게 된 이상, 그 인간 남자를 믿는 수밖에.’
인간을 11명이나 죽였으니.
이제 한 번의 기회만 남았다고 봐도 된다.
그것도 죽음을 각오하고 덤벼야 할 테고.
족장은 박민준을 만난 게 오히려 행운이라고 여겼다.
그가 자신이 믿는 신에게 기도했다.
‘부디, 우리 어둠의 자식들을 다시 당신의 품에 안아주소서. 그러기 위해 그 인간 남자를 보내주신 거라 믿겠나이다.’
***
홍 회장의 집 주변을 마저 수색한 경찰이 철수했다.
“밤도 늦었고, 더는 위험도 없는 것 같으니.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수고들 했네.”
애초에 별로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저 급한 마음에 불렀을 뿐.
홍 회장이 진짜 필요한 건 게이트 관리국의 요원들이었다.
‘아무리 봐도 빌런들의 짓이야. 그렇다면 경찰은 쓸모도 없지.’
소치원이 떠나는 경찰을 보며, 부러워했다.
‘젠장. 본부의 명령만 아니었으면, 우리도 철수했을 텐데. 꼼짝없이 밤을 새워야겠구나.’
게이트 관리국장이 새로 부임한 이후로 인사개편도 뒤따랐다.
기존 국장의 인물들.
그리니까 연봉은 높은데, 실적은 거의 없는 임원급 중에 사 분의 일이 명예퇴직 당했다.
반발이 심했지만, 전 국장의 비리 때문에 강한 개혁이 필요하다는 게 대통령의 입장이었고.
새로운 국장은 철저하게 그의 명령을 따랐으니.
그런 뒤숭숭한 상황에서 GI 그룹 회장이 요청한 수사 의뢰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
‘우리 빌런 전담팀도 박살이 나겠지.’
아직 덜 끝난 조직개편 안에 추가될지도 모른다.
“자자. 두 눈 부릅뜨고, 졸리면 커피를 마시든가, 얼굴에 들이부어서라도 참아.”
소치원이 요란스럽게 부하들을 닦달하는 사이.
홍 회장은 지금 난감함을 감추지 못했다.
검을 든 젊은 남자가 불쑥 안방에 나타났으니.
그의 손짓 한 번에 홍 회장의 아내가 잠들어버렸다.
샷 건도 어느새 빼앗겨 버렸고.
“넌 또 누구야? 대체 뭐 하는 놈인데 자꾸 날 괴롭히는 거냐?”
“내가 누군지는 알 거 없고. 그거 내놔.”
“뭘? 내놓으라는 거지?”
“연구실에 있던 물건을 당신이 집에 가져와 숨겼다면서?”
흠칫 놀란 그가 빠르게 되물었다.
“아니. 그걸 어떻게?”
자신이 말해놓고, 실수한 걸 뒤늦게 깨달았다.
이런, 끝까지 모른 척했어야…….
“좋게 말해라. 그것 때문에 사람이 11명이나 죽었다던데.”
“그전에 넌 누구냐?”
“날 몰라? 요즘엔 다들 날 한눈에 알아보던데?”
그의 말을 듣고 홍 회장이 눈을 가늘게 떴다.
빤히 상대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얼빠진 표정으로 변했다.
“설마 박민준?”
“그래. 그게 내 이름이지.”
한숨을 내쉰 홍 회장이 속으로 게이트 관리국과 소치원을 욕했다.
‘망할 놈들. 날 지켜준다더니. 이자가 내 안방에 있는데도 여태 모르고 있네.’
그래도 근처에 있으니.
창문을 열고 소리를 지를 참이었다.
피식.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알겠다는 듯.
박민준이 말했다.
“쓸데없이 누굴 부를 생각하지 마. 누가 오기 전에 죽는다.”
원래 협박 따위에 크게 굴하지 않는 사람이지만, 그것도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달랐다.
S등급 각성자가 저런 말을 하면, 일반인인 그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휴.
한숨을 내쉰 홍 회장이 자포자기하며 말했다.
“그걸 주면 더는 나와 가족을 괴롭히지 않을 건가?”
“그래. 어차피 난 그게 뭔지도 잘 몰라. 그냥 놈들을 도와주고 싶어서 이러는 것뿐이지.”
“놈들? 네 뒤에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건가?”
“흥. 감히 누가 날 조종하고 명령할 수 있지? 난 내 의지대로 움직인다.”
“좋아 그럼. 내가 100억을 주겠네. 물건을 받는 대신 그 돈을 가지고, 그놈들을 죽여주게. 아니, 내 앞에 데려와 줘.”
“거절.”
“돈이 부족한가? 그럼 200억을 주지.”
“200억도 부족하다고?”
“돈이 문제가 아니야.”
“돈이 문제가 아니면?”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마음이 불쌍해서. 그래서 돕는 거니까.”
그 마음은 돈으로 절대 채울 수 없다.
미인으로도 대신할 수 없고.
친구나 엄청난 무공으로도 매울 수 없다.
오직 고향으로 돌아가는 희망만이 공허함과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되었다.
그게 무려 20년이나 다른 세상에서 홀로 살아남았던 박민준의 경험이자 생각이었고.
고향에 돌아가길 간절히 원하는 그들을 도우려는 이유였다.
홍 회장은 그 물건을 절대 주고 싶지 않았다.
게이트가 열리고 괴물 대신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보석만 발견되었다.
그때 얻은 그 보석은 기존 마력석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에너지를 품고 있었다.
GI에서 연구한 결과.
기존 지구에서 제일 뛰어난 마력석보다 무려 100배의 힘을 가진 걸 알 수 있었다.
획기적인 발견.
‘이 보석의 구조를 파악하면, 복제도 가능할 터.’
그렇게 되면, GI 그룹이 세계 제일의 회사가 될 수도 있었다.
아니, 확실하게 세계를 지배하는 그룹이 될 터였다.
그래서 사람이 계속 죽어 나가도,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숨겨왔는데.
‘결국, 일이 이렇게 되다니.’
홍 회장이 끙끙거리며 침대를 옆을 살짝 밀었다,
바닥을 열더니. 사람 머리 크기의 상자를 꺼냈다.
금속으로 만든 상자였는데.
박민준이 보기에는 납인 것 같았다.
‘크립토인지 뭔지도 아니고, 왜 납으로 감싸서 숨긴 거지?’
그의 의문은 금방 풀렸다.
홍 회장이 상자를 열자마자.
정제되지 않아서, 거칠고 강한 기운이 느껴졌으니.
별별 경험을 다 했다고 자부하는 박민준조차 처음 느껴보는 물체였다.
“그거였군.”
“그래. 이게 바로 우리 GI 그룹의 미래는 물론이고, 어쩌면 인류의 미래를 바꿔줄 희망이라네.”
“하지만, 네 것이 아니지.”
그렇게 말한 박민준이 상자를 통째로 낚아챘다.
다시 뚜껑을 닫더니.
그대로 사라졌다.
세상을 다 잃은 표정을 한 홍 회장에게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깜빡 졸았었나 봐요. 그 사이에 별일 없었죠?”
“어? 어. 아무 일도 없었어.”
지금도 마음속으로 다시 그 물건을 되찾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수십 번도 더 고민했을 거다.
하지만 그가 내린 결론은 결국, 포기였다.
‘만약 그자의 마지막 눈빛을 보지 못했다면, 분명 막대한 돈을 풀어서라도, 물건을 되찾았겠지.’
하지만 그런 시도를 하면, 내가 죽는 건 물론이고, GI마저 망할 것 같은 기분이 강렬하게 들었다.
그를 지금의 위치로 만들어준 감각이 절대로 상대를 건들지 말라고 외치고 있었다.
‘이미 너무 많이 죽었어. 그리고 가족까지 위험하게 만들었고. 이젠 놓아줄 때가 된 거야.’
짐을 덜어 놓아서일까?
그도 이젠 마음 놓고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
다크 엘프들 앞에 박민준이 다시 나타났다.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찾던 보석이 아닌, 금속으로 된 상자를 들고 있는 모습에 실망했다.
“저건 뭐야? 우리 구슬은?”
“제대로 가져온 게 맞을까?”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데?”
그들도 몰랐지만, 일전에 딱 한 번 느낀 그 기운은 홍 회장이 검은 보석을 납 상자에 옮기면서 외부에 노출한 것이었다.
아까는 박민준이 자신의 기로 방 안의 소리와 기운이 나가는 걸 차단했다.
지금은 또 온전히 납 상자 안에 있었으니.
당연히 모를 수밖에.
오직 한 인물.
족장만이 박민준이 들고 온 물건을 보고 감격하고 있었다.
그가 잔뜩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드디어! 마신의 구슬을 다시 우리 품에.”
“족장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자. 보아라. 저 인간이 가져온 상자에 보물이 담겨 있으니.”
족장이 박민준에게 다가가 상자로 손을 뻗었다.
“어딜.”
그가 족장의 손길을 뿌리치고 상자를 뒤로 감췄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족장이 그에게 물었다.
“어째서?”
“내가 언제 그냥 준다고 했지?”
“아! 어서 말해보시오. 우리에게 원하는 것을. 뭐든 말해보시오.”
이미 족장의 마음은 고향에 가 있었다.
그걸 박민준도 느낄 수 있었다.
“네놈들의 기술을 나에게 가르쳐줘.”
“우리의 기술? 정확히 뭘 말하는 것이오?”
“인기척을 완벽하게 숨기는 것하고, 정령인지 하는 그걸 가르쳐 달란 말이야.”
그의 말을 듣고, 젊은 다크 엘프들이 비웃기 시작했다.
“정말 드래곤이 아니었어. 인간이었다고.”
“아니. 인간 주제에 지금 뭘 가르쳐 달라는 거지?”
“인간이 정령을 다룰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박민준이 그들을 돌아봤다.
그가 제일 먼저 비웃었던 젊은이에게 물었다.
“인간이 익히지 못하는 기술이라고? 만약 내가 익히면 그때 넌 어떻게 할 건가?”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인간은 당연히 익힐 수 없는데.”
짝.
짜증이 난 박민준이 상대의 뺨을 후려쳤다.
짝.
그러고도 화가 안 풀려서 반대편도 때렸다.
이잇!
발끈해서 대들려는 젊은 동족을 향해 족장이 소리쳤다.
“그에게 함부로 대들지 마라. 넌 절대 그를 이길 수 없다.”
그 말을 듣고, 젊은 다크 엘프가 다시 바닥에 주저앉았다.
작게 한숨을 박민준이 다시 족장에게 말했다.
“넌 어때? 이걸 받고, 나에게 너희 기술을 가르쳐 줄 결심이 선 건가? 아니면, 저놈과 같은 생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