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박민준은 제일 먼저 대통령을 다시 만나기 위해 찾아갔다.
“어서 오십시오. 신체 검색에 앞서서 무기를 저에게 제출해 주시기 바랍니다.”
고개를 끄덕인 그였다.
경호실장에게 바로 검을 내줘서 맡겼다.
이번에도 딴지를 걸까 봐 염려했던 경호실장이었다.
‘다행이다. 이자가 또 멋대로 굴면 그땐 어쩌나 싶었는데.’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그나저나 지난번에 내가 잡은 녀석은 잘 데리고 있나?”
“서태준 말입니까? 그자는 살인죄와 각하 암살 혐의로 독방에 갇혀있습니다.”
“내가 그놈을 따로 만날 수 있겠지?”
“그건 제가 말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그가 대통령 경호실장이지만, 서태준 같은 대형 범죄자를 아무나 만나게 해줄 수는 없었다.
박민준도 그걸 이해하고 그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렇겠지. 대통령에게 직접 말해봐야겠다.”
“각하에게 존칭을 써주셨으면 합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하지. 내 검이나 잘 가지고 있어.”
꾸벅 인사하는 그를 뒤로하고, 대통령 집무실로 향했다.
비서실장이 먼저 박민준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안 그래도 제가 먼저 연락을 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래? 그럼 진작 전화했어야지. 내가 귀찮게 여기까지 와야겠어?”
그는 진심이 아니라 그냥 격식을 차리고자 한 말이었는데.
상대가 대놓고 툴툴거리자 크게 당황했다.
“그런데 이번엔 어떤 일로 찾아오신 겁니까?”
“그건 대통령을 직접 만나서 얘기하도록 하지.”
“저에게 먼저 말해주시면 원하시는 일을 해결하는 게 더 빠를 겁니다.”
“어차피 결정은 네가 아니라 저 안에 있는 사람이 하는 거잖아?”
그렇다면 귀찮게 두 번 말할 필요가 없다.
비서실장을 무시한 박민준이 그대로 집무실로 들어갔다.
노크도 없이 들어온 그를 보고, 대통령이 흠칫 놀랐다.
“자네! 그게 무슨 무례한 행동인가?”
평소 다른 사람에게 하듯 호통을 쳤다.
하지만 박민준은 그가 평소에 겪던 사람이 아니었다.
“닥치고. 내 가족이 마음 놓고 지낼 안전가옥은 언제 주고, 경호원은 또 언제 붙여 줄 건데. 그것부터 말해봐.”
갑작스러운 요구에 대통령이 황당하다는 얼굴을 보였다.
“갑자기 찾아와서 겨우 그런 소리를 하는 건가? 이럴 줄 알았으면 괜히 자네를 만나겠다고 한 것 같군.”
“겨우? 내 가족의 안전과 평온이 달린 일인데, 뭐, 겨우? 너 죽고 싶냐?”
쾅!
“감히! 지금 날 협박하는 건가?”
“아니, 이건 그냥 대화하는 거지, 정 원하면, 진짜 협박이 뭔지 지금 바로 보여줘?”
박민준의 눈빛이 순간 달라지는 게 보였다.
대통령의 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뒷목이 싸늘해지는 기분도 들었다.
‘이건 무슨 기분이지?’
평생 처음 느껴본 감정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죽음.
‘내가 내 집무실에서 이런 감정을 느꼈단 말인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상대를 보고, 박민준이 살기를 거뒀다.
그러면서 코웃음을 쳤다.
“겨우 이 정도로 그 난리를 피우는 건가? 내가 조금만 더 했으면 아예 기절했겠는데?”
그 말을 듣고 얼마나 화가 났는지.
얼굴에 핏기가 가셨던 대통령이 이번엔 거꾸로 빨갛게 달아오르는 걸 볼 수 있었다.
“자네는 정녕, 위아래도 없나? 내가 이 나라의 최고 권력자이고, 그전에 자네보다 더 나이도 많다는 걸 모르나?”
상대를 권력과 나이로 누를 생각이었다면 그건 그의 큰 오산이었다.
박민준은 애초에 그런 걸 따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두 사람 옆에 있는 비서실장만 죽을 맛이었다.
‘젠장, 나까지 괜히 불안하네. 그냥 좋게 대화를 하면 안 되나?’
눈치를 살피던 그의 눈에 박민준의 모습이 흐릿해졌다.
‘요즘 내가 피곤했나?’
그런 게 아니었다.
그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박민준이 탁자 너머 대통령 옆으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한편, 대통령은 자기 정면에 있던 박민준이 사라진 걸 알고, 놀라 두리번거렸다.
“갑자기 어디 갔어?”
“난 여기 있다.”
갑자기 옆에서 들린 목소리에 그가 깜짝 놀랐다.
헉!
얼마나 크게 그의 마음이 흔들렸는지, 앉아 있던 의자에서 벌떡 일어날 정도였다.
“뭘 또 그렇게까지 놀라는 건데?”
탁!
박민준이 그의 어깨를 잡고, 강제로 다시 자리에 앉혔다.
털썩.
얼떨결에 주저앉은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경호실장!”
집무실 바로 앞에서 대기 중이던 그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박민준이 대통령 옆에 서 있는 게 보였다.
‘저자가 결국, 각하에게 함부로 굴었단 말인가?’
최근 그의 활약 때문에라도 박민준을 내심 존경하긴 했지만, 그래도 저런 짓을 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빠르게 판단을 내린 그가 두 사람 사이로 뛰어들었다.
거대한 덩치에 파워를 자랑하는 그였다.
대신 스피드가 느렸기 때문에, 박민준의 눈에는 그가 슬로우모션으로 다가오는 것처럼 보였다.
훌쩍.
몸을 던진 그를 향해, 박민준이 발길질했다.
퍽! 우당탕탕.
경호실장이 달려든 속도보다 더 빠르게 뒤로 나가떨어졌다.
기절했는지, 다신 일어나지 못했다.
박민준이 아무렇게나 찬 듯 보였지만, 실제로는 점혈의 수법을 섞은 발차기였다.
자신을 지켜줄 거라고 굳게 믿었던 경호실장이었는데.
순식간에 제압당한 그를 봤으니.
대통령이 몸을 작게 떨며, 박민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눈치를 보더니.
“우리 지성인답게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세. 자네도 그게 좋지 않나?”
“누가 뭐래? 난 원래부터 너와 대화를 하려고 온 거였어.”
“그렇다면 계속 내 옆에 서 있지 말고, 어서 자리로 돌아가게.”
“좋아. 너도 이젠 제대로 대화를 나눌 자세가 된 것 같군.”
끄덕끄덕.
빠르게 고개를 끄덕인 그를 보고, 피식 웃은 박민준이 자리로 돌아왔다.
한바탕 소란이 벌어진 탓에 경호실에서 잔뜩 몰려왔다.
집무실 안으로 우르르 밀고 들어오면서 한마디씩 떠들었다.
“문이 박살 나 있다?”
“괜찮으십니까?”
“실장님이 여기 쓰러져 계신다.”
“야! 각하를 먼저 보호한다. 실장님은 그다음이야.”
넓은 집무실이 좁아 보일 정도로 사람이 들어섰지만, 대통령은 오히려 마음이 더 불편했다.
아무리 경호원의 숫자가 많아도, 박민준을 어찌할 수 없을 거란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경호실장도 한 방에 보내 버린 놈인데. 겨우 저 정도로 되겠어?’
괜히 상대를 자극하지는 않았는지.
박민준의 눈치를 살폈다.
그가 미소만 지을 뿐.
전혀 움직이지 않는 걸 보고, 속으로 안도했다.
‘다행이군.’
대통령이 경호원들에게 말했다.
“난 괜찮네. 그러니까 경호실장이나 데리고, 모두 어서 나가게.”
대답하기 전.
경호원들이 대통령과 비서실장을 번갈아 보며, 상황파악에 나섰다.
혹시 위협에 의해 거짓말을 하는 거일 수도 있으니까.
두 사람 모두 불편한 기색이긴 하지만, 딱히 몸을 제압당한 상황은 아니었다.
유일한 외부인은 혼자 팔짱을 끼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판단을 마친 경호원이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질질.
덩치가 큰 경호실장을 두 사람이 끌고 나갔다.
그 뒤로.
몇십 초간 정적이 흘렀다.
크크흠.
어색한 헛기침을 한 대통령이 비서실장에게 말했다.
“조용히 대화를 나눠야 하니까, 자네는 나가 보게.”
“제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저 사람과 단둘이 할 말이 있어서 그래.”
“알겠습니다.”
집무실을 나간 그가 주변에 아직도 서 있던 경호원 두 명까지 데리고 떠났다.
그렇게 둘만 남게 되자, 대통령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가 울상이 된 얼굴로 박민준에게 다가갔다.
“내가 자네에게 잘못한 일이 있나?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건가? 응?”
“그런 건 딱히 없는데?”
“그럼 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꾸 날 망신 주는 건가?”
“내가?”
“그래. 네가.”
“흠. 솔직히 말하면 그냥 네가 마음에 안 들어. 처음부터 인상이 별로였다고.”
그 말이 충격이었는지.
대통령이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입을 살짝 벌리고, 자길 바라보는 그를 향해 박민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네 눈빛도 어딘가 마음에 안 들고, 목소리도 듣기 별로야.”
“아니~그게 내 잘못인가? 그냥 이렇게 태어난 걸 나보고 어쩌라고? 어?”
“듣고 보니, 그렇긴 하네.”
박민준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 그가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
“앞으로 다른 사람 앞에서 내 체면 좀 봐줘. 부탁이다. 응?”
피식 웃은 박민준이었다.
“그래서 내가 얻는 게 뭐지? 너만 좋은 일이잖아?”
“그건 아니지. 내가 누구야?”
“내 마음에 안 들고 그냥 재수 없는 인간?”
“아니지. 난 대한민국 대통령이야. 국민들이 뽑아준 지도자라고. 그런데 자꾸 네가 이런 식으로 대하면 국격이 떨어져요. 응? 그걸 알아야지.”
“국격?”
“그래. 국격. 네가 20년 동안 다른 세상에 다녀와서 잘 모르나 본데, 이제 우리나라도 무시할 수 없는 강국이야.”
명실상부한 경제 대국.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군사 강국.
그리고 게이트가 열린 세상의 헌터 강국이었다.
그런 나라의 대통령인 자신이 박민준을 세 번 만나고, 모두 무시당하거나, 이상한 일을 겪었으니.
솔직히 힘만 있으면 박민준을 죽이고 싶었다.
그럴 수가 없는 걸 알았으니.
좋게 구슬릴 생각이었고.
지금 열심히 상대를 설득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뭘 어떻게 해 줄까? 다른 사람이 볼 때라도 널 무시하지 않으면 되나?”
“그래. 바로 그거야. 이제야 말이 통하네.”
진심으로 기뻐하는 상대를 보고 박민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내가 원하는 것들을 네가 들어줘야겠어.”
“뭘 원하는데. 안전가옥? 경호원. 그런 거라면 내가 다 해줄게. 걱정하지 마.”
“진작 이랬으면 얼마나 좋아? 다들 꼭 날 경험해봐야 알 수 있는 건가?”
“아 참. 네가 날 죽이려던 서태준을 잡아줬는데. 그 감사 인사도 아직 하지 않았네.”
“그럼 어서 해. 받아줄게.”
“정말 고맙다. 그날 서태준 같은 놈이 작정하고 날 노렸으니. 네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무사하지 못했을 거다.”
사실은 그자가 대통령이 아닌 박민준을 노린 거였지만.
정황상 누가 보더라도, 박민준은 암살의 대상이 아니었다.
국민과 세계에 알려진 대통령이 표적이라면 모를까?
그날 대중에게 정식으로 공개된 지 몇십 분 되지 않은 박민준이 목표일 거란 생각은 상식에 맞지 않았다.
“그놈이 따로 무슨 말은 하지 않았어?”
“날 죽일 생각이 없었다며 억울함을 호소하더군.”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당연히 개소리지. 그놈이 허튼 소리하지 못하도록 입을 막아놨다.”
“그럼 내가 따로 만나도 될까?”
어차피 허락을 안 해도 억지로 뚫고 가서 대화할 참이었다.
대통령도 이젠 박민준의 성격을 어느 정도 알게 된 까닭에 바로 승낙했다.
“당연히 만나봐도 되지. 네가 잡은 녀석이니. 가벼운 심문 정도는 허락하마.”
“그래. 그럼 마지막으로 서태준 그놈에게 걸린 현상금을 내가 언제 받을 수 있나?”
“국가에서 지급하기로 한 돈은 바로 줄 수 있다. 하지만 민간에서 건 현상금은 시간이 좀 걸릴 거야.”
“왜?”
“현상금이 무려 몇백억인데. 그런 거액을 주기 전에 서태준을 직접 대면하고 진짜 녀석이 맞는지 확인은 해야 하지 않겠어?”
“그러네. 그럼 그자들이 만나는 건 네가 알아서 하고, 난 바로 가서 만나도 되는 거지?”
“그렇게 해. 내가 따로 비서실장에게 말해 놓을게.”
“근데 너 언제부터 그렇게 나한테 반말했냐? 우리가 친구야?”
“그럼 아닌가? 거기다 너도 처음부터 반말했잖아. 내가 나이도 더 많은데. 솔직히 내가 손해지.”
“그건 그렇지. 서로 반말하자.”
단,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대통령을 무시하지 않기로 했으니.
서로 존댓말을 해주기로 했다.
그렇게 얼떨결에 대통령과 친구로 지내기로 한 그였다.
아직 자신에게 뭔가 숨기는 듯 하지만, 그건 나중에 알았을 때 바로 해결하면 되니.
박민준은 충분히 그럴 만한 힘이 있었다.
“그럼 나 이사는 언제 하지? 최대한 서둘렀으면 좋겠는데?”
“내일 당장 할 수 있도록 조치할게.”
“그럼 더 볼일도 없고. 이제 서태준이나 만나야겠다.”
대통령 집무실을 벗어난 그가 서태준을 만나기 위해 이동했다.
비서실장이 따로 붙여준 안내인이 박민준을 차에 태웠다.
“그럼 게이트 관리국으로 모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