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몸이 전혀 움직이지 않는 걸 깨달은 서태준이었다.
‘내가 왜 이러는 거지?’
그가 당황한 눈빛을 숨기지 못했다.
탁!
피식 웃은 박민준이 그의 멱살을 잡아끌었다.
동시에 귀와 턱 사이를 건드렸다.
자신이 다시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모르고 있던, 서태준이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내가 대체 왜 이러는 거냐고! 어라? 말은 할 수 있잖아?”
그가 선글라스를 착용해서 여태 누군지 몰랐는데.
목소리를 들었으니.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서태준의 정체를 깨닫기 시작했다.
“가만, 이거 서태준 목소리 아니야? 너튜브에서 들은 것과 똑같은데?”
“설마? 얼마나 간이 크다고, 이런 곳에 혼자 나타나겠어?”
“아니야. 저 하관을 봐. 그가 분명하다고.”
“그래. 맞아.”
박민준도 자신이 제압한 상대가 제법이라는 건 미리 알고 있었다.
‘어쩐지, 제법 유명한 놈이었던 건가? 그런데 왜 날 노렸지?’
그가 다시 상대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너 혹시 그놈들하고 한패냐?”
정곡을 찌르는 말을 듣고, 서태준이 오히려 입을 꾹 다물었다.
대답이 없자 다시 흔들었는데.
그가 쓰고 있던 선글라스가 벗어졌다.
그걸 본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서태준이 맞네.”
“저자가 왜 여기에?”
“설마 대통령님을 죽이려고?”
“아니면, 새로운 S등급을 노린 걸 수도 있지.”
그때, 대통령을 호위하며 이동하던 경호실에서도 드디어 이곳에 주목했다.
“저긴 뭔데 저렇게 사람들이 따로 모여서 시끄러운 거지?”
“글쎄요. 제가 알아볼까요?”
“그래. 난 우선 대통령님을 계속 모시고 이동할 테니까. 네가 먼저 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봐.”
“알겠습니다. 실장님.”
차까지 이동 경로가 겹쳤기 때문에 서둘러야 했다.
경호실 소속 요원이 인파를 밀치며 간신히 도착하고 보니.
“지나가겠습니다. 어서 비켜주십시오. 어? 박민준 씨?”
인터뷰 석에서 사라진 박민준이 누군가의 멱살을 쥐고 있는 게 보였다.
선글라스가 벗겨진 남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서태준? 설마 저자가 여기 숨어있는 걸 알고 붙잡으신 겁니까?”
“뭐야? 너도 아는 놈이야?”
“당연하지요. 지명수배범입니다. 저자 목에 걸린 현상금만 해도 무려 100억이 넘습니다.”
“잘됐네. 그럼 네가 데려가라.”
“저에게 맡기신 다고요?”
“아니, 너 말고 네 두목.”
“경호실장님 말씀입니까?”
“그래. 내가 봐도 그놈은 믿을 만하거든.”
그는 자기 상사인 경호실장을 두목이니, 그놈이니 부르는 것에 살짝 화가 나면서도, 감히 대들 수가 없었다.
그 유명한 빌런 서태준이 쪽도 못 쓰고 멱살 잡혀 있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가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고, 수갑을 꺼냈다.
“감사합니다. 제가 이자를 책임지겠습니다.”
“현상금도 잊지 말고 받아서 전부 나한테 가져와.”
“알겠습니다.”
“중간에 장난치면 재미없을 거야.”
“아니, 절 뭐로 보시고? 절대 그런 일 없을 겁니다.”
평소의 그라면 절대 이렇게 쉽게 용의자를 넘겨주지 않았을 것이다.
극한의 고문을 가하고, 강제로 입을 열도록 만들고도 남았다.
그럼 이번에 박민준이 서태준을 넘겨준 이유는?
그가 방송에서 존댓말을 했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지금 이 자리에 와 있는 방송사와 수많은 구경꾼 앞에서 이미지 메이킹을 했으니.
자신감 넘치고 강한 S등급 헌터이자, 법을 잘 수호하고 국가와 협력하는 모습을 대놓고 보여줬다.
‘자유롭게 살기 위해 오히려 조금은 가면을 쓸 필요가 있다.’
실상은 그가 계속해서 대통령이나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굴었더라도, 이번 일을 통해 대중이나 언론이 보는 박민준의 모습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될 것이 분명했다.
좋은 이미지가 언제고 박민준의 방패막이가 되어줄 거란 믿음.
그가 다른 세계에서 무림 맹주를 하며 체득한 처세술이었다.
점혈되어 몸이 마비된 상태로 끌려가는 서태준이었다.
그런 그를 향해 박민준이 해혈법을 써서 몸을 풀어주었다.
‘어차피 능력 제한 수갑을 채웠으니. 더는 점혈이 필요 없겠지.’
순간 기이한 기운과 함께 몸이 다시 움직이는 걸 느낀 그가 놀라서 박민준을 바라봤다.
서로 눈이 마주치고.
[여기선 잠시 널 놓아주지만, 조만간 네가 있는 곳으로 찾아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선사해 주마. 그때까지 날 두려워해라.]
전음을 들은 서태준이 눈을 부릅떴다.
“방금 아무도 못 들었어? 저놈이 날 협박하고 있다고. 난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
실제로 그는 박민준에게 살기만 흘렸다.
그러니, 자신이 무죄라고 바락바락 우길 참이었다.
하지만, 경호원과 주변 인물들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박민준이 전음으로 말했기 때문에 그의 목소리를 들은 건 오직 서태준 혼자뿐이었다.
거기다 서태준이 평소 죽인 게 같은 빌런뿐 아니라, 선한 헌터도 제법 있었기 때문에 그 죗값만 해도 사형을 받기 충분했다.
경호원이 떠드는 그의 입을 주먹으로 갈겼다.
“닥쳐. 어디서 감히 그 더러운 입으로 무죄를 주장하는 거냐?”
“넌 뭔데? 나같이 죄 없는 사람에게 폭력을 써도 되는 거야?”
“나? 너에게 죽은 사람 중에 친구가 있었다. 당장 널 죽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내게 고마워해야 할 거다.”
“쳇. 지랄하고 있네. 저놈만 아니었으면, 나한테 한주먹거리도 안 됐을 놈이.”
“뭐야?”
경호실장의 무전이 왔다.
대통령은 이미 방탄차에 태워서 이동을 시작했고, 그는 차 옆을 천천히 뛰어가는 중이었다.
부하가 돌아오지 않자, 그를 불러서 떠나려고 무전을 한 거였는데.
“야! 거기서 계속 뭐 하는 거야?”
“죄송합니다. 실장님. 그런데 여기 서태준이 있어서 말입니다.”
“뭐? 그자가 왜 여깄어?”
“각하를 노렸던 것 같습니다. 그걸 박민준 씨가 잡았고요.”
“이런 젠장. 그래서 내가 갑작스러운 일정은 절대 안 된다고 했던 건데. 제대로 제압한 거야?”
“네. 제가 최신형 수갑을 채워 놨습니다.”
“잘했어. 그럼 그놈을 여기 지원 온 게이트 관리국에 우선 넘기고, 넌 바로 팀에 합류해.”
“박민준 씨가 이자를 반드시 경호실장님에게 넘기라고 했습니다.”
“야! 각하를 수행하고 있는데, 그런 놈을 여기 데려오겠다고? 너 미쳤어?”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럼 바로 게이트 관리국 요원에게 이자를 넘기고 팀에 합류하겠습니다.”
무전을 마친 경호원이 박민준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하지만, 이자를 제가 데려갈 수 없겠습니다. 마침 저기 게이트 관리국 요원이 보이니. 제가 떠나면서 넘기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
게이트 관리국 국장과 그의 부하들이 서태준을 넘겨받았다.
“박민준 씨가 잡은 빌런 서태준입니다. 조만간 따로 연락할 테니. 특별히 잘 부탁드립니다.”
“걱정하지 말게. 내가 책임지고 데려가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국장님.”
대통령 경호원이 떠나고.
게이트 관리국 국장이 언론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기자님들. 모두 주목해 주십시오. 수배 현상금 100억이 넘는 빌런 서태준이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혼란을 틈탄 국장이 자기 공적처럼 보도를 낼 생각이었는데.
이미 박민준 근처에서 모든 과정을 지켜본 기자들이 있었다.
“그자는 저기 있는 박민준 씨가 잡지 않았습니까?”
똥 씹은 표정이 된 국장이 억지로 미소 지었다.
“그게 맞습니다만, 어쨌든 이자가 제 손에 들어왔으니.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자자, 사진이나 찍도록 합시다.”
어느새 나타난 박민준이 국장의 손에서 서태준을 빼앗았다.
그도 국장의 의도를 눈치챘으니.
박민준은 자기 공을 놓칠 정도의 멍청이가 아니었다.
국장이 했던 것처럼 그도 언론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이자는 제 옆에 계신 대통령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걸 발견하고 급히 잡았으니. 여기 계신 분들은 이제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그 말을 듣고 잔뜩 억울한 표정의 서태준이었다.
모두의 앞에서 새로운 S등급 박민준을 죽일 생각이었는데.
졸지에 자국의 지도자를 암살하려 한 범죄자가 되었으니.
“아니. 내가 언제? 난 대통령.”
거기까지 말하고 더는 입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말을 못 하자 당황한 그를 보며, 박민준이 미소 지었다.
씨익.
그리고 전음을 또 보냈다.
[억울하지? 날 노린 이상, 네놈의 인생도 끝장난 거야. 앞으로 지금보다 더 괴로워질 거다. 그걸 알았어야지. 멍청한 놈.]
그렇게 언론에서 찍은 사진은 최악질 빌런의 목덜미를 잡은 박민준이 차지하게 되었다.
게이트 관리국 국장은 그 뒤에 병풍처럼 서서, 얼굴을 잔뜩 찌푸리는 모습이 다였다.
신문과 방송의 머리기사가 이런 식으로 나갔다.
[대한민국 세 번째 S등급 헌터 박민준. 대통령에게 감사패를 전달받는 경사 속에서 최악의 빌런 서태준을 검거하다]
[S등급 헌터에게 사각지대는 없다. 빌런들이여. 앞으로 나 박민준을 두려워해라.]
[내가 자타공인 최강 헌터다. 이름을 공개하자마자, 100억 수배범을 잡은 S등급 헌터 박민준]
그렇게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박민준을 죽이려 했던 서태준의 의도는 완벽하게 박살 났다.
대신 목표물이었던 박민준의 명성만 크게 드높이는 결과로 끝났다.
***
한편, 서태준을 보내서 박민준을 끝장내려고 했던 조직의 우두머리는?
실시간으로 방송을 보는 중이었다.
쾅!
화가 난 그가 팔걸이를 강하게 내리쳤다.
움찔 놀란 주변 사람들이 그의 눈치를 봤다.
“저럴 수가 있나? 자신 있다고 해서 허락하고 보냈더니. 저렇게 허무하게 잡혀? 거기다 뭐? 대통령을 노렸다는 오명을 써?”
그의 오른편에 앉아 있던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이에요. 평소에 너무 나대더니. 결국, 저런 꼴을 당하게 되었네요. 호호.”
다들 동의한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었다.
그걸 불만족스럽게 바라본 중년 남자가 상석에서 일어났다.
“다들 뭐가 좋다고 웃는 건가?”
“죄송합니다.”
다시 사람들이 눈치를 보며 말을 아꼈다.
아까 그 여자만 혼자 아무렇지 않게 중년 남자에게 말했다.
“서태준이 엉뚱한 말을 하기 전에, 제가 나서서 처리할까요? 겸사겸사 박민준도 처리하고?”
중년 남자가 고민도 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지금 저놈을 보니, 괜히 더 건들면 일만 커질 것 같아.”
“그럼 서태준이라도 죽이게 해주세요.”
“자네는 동료를 구출할 생각은 전혀 없나? 왜 자꾸 죽이자는 거지?”
“저런 인간이 뭐가 예쁘다고, 자꾸 감싸시는 거예요?”
퉁명스럽게 말하는 여자를 향해 중년 남자가 잘 타일렀다.
“최양. 우리가 왜 이 자리에 모였나?”
“그거야 당연히 지구와 인류를 위해서지요.”
“그래. 그러니, 같은 꿈을 꾸는 동료를 소중히 여겨야 하지 않겠나?”
그 말을 듣고, 작게 한숨을 내쉰 여자였다.
“그 말이 맞아요.”
중년 남자가 모두를 돌아봤다.
“그를 구하는 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다들 한동안 몸을 사리도록.”
“알겠습니다.”
***
대통령이 다녀간 뒤로도, 박민준의 집은 여전히 어수선했다.
매일같이 집 앞에 장사진을 이루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대한민국 세 번째 S등급 헌터를 인터뷰하기 위해 한국의 거의 모든 언론이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그걸 즐긴 그의 부모와 박민희였다.
하지만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질 정도로 관심이 쏟아지자, 점점 지쳐갔다.
“민준아. 내가 아무래도 잘못 생각한 모양이야.”
“왜? 이런 상황을 원했었잖아?”
“그건……. 이렇게까지 귀찮게 굴 줄은 몰랐지. 채영이에게 들으니까. 걔 직장까지 찾아온 사람도 있다더라.”
자기 유명세 때문에 가족들이 불편함을 호소하자.
그가 행동에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