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언덕에서 내리막으로 변하는 순간.
거대한 구덩이가 나타났다.
‘길 한가운데 갑자기 싱크홀이라니?’
박민준도 그걸 보고 서둘러 경고했다.
“어서 멈춰!”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너무 늦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닥이 쑥 꺼지면서 차량이 추락했다.
구덩이가 얼마나 깊었던 걸까?
몇 초나 계속 떨어지더니.
엔진 때문에 앞이 무거웠는지.
범퍼 부위가 땅에 닿으며, 쾅!
강하게 수직으로 충돌했다.
동시에.
파 박!
에어백이 터지면서. 운전석에 앉은 송하영의 머리가 충돌했다.
그녀가 그대로 정신을 잃고 기절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으음.”
송하영이 신음을 흘리며 깨어났다.
천천히 눈을 뜨고 주위를 살폈다.
차 안이 아니었다.
도로 옆 숲인 걸 알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은?’
근처에 기절한 모습의 남길영이 보였다.
아저씨와 소해진 차장님은?
부스럭.
뭔가 움직이는 소리에 깜짝 놀란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아이고.
온몸이 쑤셨지만, 상대가 적인지부터 확인해야 했다.
“소 차장님.”
연검을 빼든 그녀가 기절한 두 사람을 지키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럼 박민준은?
다시 빠르게 주위를 살폈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차장님. 아저씨, 아니 박민준 씨는 어디 있나요? 설마 아직 차에 있는 건 아니죠?”
고개를 저은 소해진이 손을 들어 한 곳을 가리켰다.
시선을 따라가 보니.
정신병원이 있는 방향이었다.
“아저씨 혼자 거기에 갔다고요?”
끄덕끄덕.
“그럼 우리도 가서 도와줘야지요.”
송하영이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그걸 본 소해진이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상대의 어깨를 손으로 지그시 누르며 일어나지 말라고 했다.
“왜요? 우리가 가면 오히려 방해가 될까 봐요?”
끄덕.
정말 분하다는 표정으로 다시 주저앉은 그녀였다.
아마 자신을 구해준 사람도 앞에 있는 소 자장이 아니라, 박민준이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을 차례로 구해주고.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소해진 차장님에게 우릴 지키라고 말한 거겠지.’
그리고 혼자 저 불길을 향해 움직였을 거다.
‘세상에. B등급인 내가 다른 사람의 짐이 될 줄이야.’
평소에도 간혹 자기 실력이 부족하다고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강하게 부끄러움을 느끼진 않았었다.
아직 어려서 앞길이 창창한 자신이었으니까.
레벨도 올리고, 실력도 점차 올라갈 거로 믿었다.
하지만 박민준을 만나고 자신이 너무 초라해졌다.
지금도 겨우 운전이나 했을 뿐.
그마저도 전방을 제대로 못 봐서, 이런 사고까지 내버렸다.
자책하는 그녀의 어깨를 누군가 토닥여줬다.
고개를 돌려보니.
소해진이 다 안다는 얼굴로 옆에 서 있었다.
‘하긴, 내가 이런 느낌이 들 정도면, 소 차장님은 더 심하겠지.’
억지로 힘을 낸 그녀가 지원 요청을 생각했다.
“이상하네? 아주 깊은 산 속도 아닌데, 전화가 안 터져요.”
방해전파가 있는지.
왔던 길을 걸어서 되돌아간 뒤에야 사무실과 통화가 가능했다.
“선배님. 저 하영인데요.”
“그래. 본부에 도착했어?”
“아니요. 지금 다른 곳에 있어요.”
“뭐라고? 그럼 남길영은? 설마 놓친 거야?”
“그게 아니라, 그자가 배후가 숨어있는 장소를 불었어요. 그래서 지금 그 근방에 있거든요.”
“너 미쳤어? 거길 보고도 없이 그냥 갔어?”
“죄송해요. 아무튼, 지금 제가 있는 위치에서 서쪽에 정신병원이 있거든요. 거기로 지원을 보내주세요. 어서요.”
“알았어. 인마. 금방 갈 테니까. 조심해,”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나중에 크게 혼날 줄 알아. 알았어?!”
그녀는 혹시 몰라서 병원의 이름과 주소도 선배에게 보냈다.
그렇게 지원을 요청한 그녀는 소해진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박민준을 멋대로 따라나섰다.
‘지원이 올 때까지 멍청하게 가만있을 순 없어.’
***
박민준은 일행을 구한 뒤.
소해진에게 뒤를 맡기고 혼자 정신병원으로 향했다.
경신법을 펼쳐서, 금방 도착하긴 했다.
본관 건물을 중심으로 높은 철조망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작은 건물이 두 개 더 있었고, 한 곳은 1층에 입구만 있을 뿐, 창문이 없었다.
자동 소총을 들고 그 앞을 지키는 사람들도 보였는데.
모두 검은색 옷을 입고 있었다.
앞서 종합병원과 경기지부를 습격한 자들과 같은 복장.
‘내가 제대로 찾아온 것 같군.’
그때, 오른쪽 숲속에서 아주 미약한 기운을 느꼈다.
박민준도 자칫 놓칠뻔했을 정도로 뛰어난 은신 수법이었다.
‘병실 복도에서 만난 놈과 같은 부류인 건가?’
각성자 특성을 여러 명이 겹칠 수도 있는 건가?
아직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다.
그는 굳이 자신이 모르는 일로 고민하지 않았다.
‘잡아보면 알겠지.’
박민준의 몸이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휙! 하고 사라졌다.
그를 몰래 감시하고 있던 남자가 깜짝 놀랐다.
미리 연락도 없이 온 차량이 함정에 빠진 걸 알고, 급히 그걸 확인하러 나온 참이었다.
그렇게 은둔 특성을 발휘해서 박민준을 살피고 있었는데.
‘사라졌어? 투명화 특성이라도 가졌나? 아니면 순간이동?’
엄청나게 빨리 움직였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고속 특성을 가진 각성자여도 저렇게 빠르진 못할 테니까.
‘갑자기 뭐야?’
그는 누군가 자신의 목을 강하게 움켜쥐는 걸 느꼈다.
“컥!”
목이 막히면서 작게 탁한 소리를 낸 상대를 박민준이 한 손에 들어 올렸다.
자신의 손을 따라 대롱대롱.
위태롭게 흔들리는 사내를 끌고, 그가 수풀을 빠져나왔다.
박민준의 얼굴을 본 상대가 눈을 크게 떴다.
‘아직 어리잖아? 내가 이런 놈에게 잡히다니?’
우당탕.
바닥에 몸이 내던져진 그였다.
‘멍청한 놈. 역시 어려서 경험이 없는 건가?’
이렇게 쉽게 놓아주다니.
모습을 감춰서 도망치려고 했다.
그렇게 특성을 사용하려고 했는데.
몸이 전혀 움직이지 않고, 마력도 꿈쩍하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당황해서 눈만 끔뻑거리는 그에게 박민준이 말했다.
“안에 들어갔다 나올 테니까. 여기 가만있어.”
훌쩍 몸을 날리려던 그가 상대에게 경고했다.
“쓸데없이 내 점혈을 풀려고 시도하지 마라. 그러다 평생 불구의 몸이 되는 수가 있어. 알겠나?”
어차피 입을 열 수도 없으니.
남자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떠난 박민준이었다.
한편, 제압당한 남자는 갑자기 또 사라져 버린 상대를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대체 뭐야? 내가 귀신이라도 상대한 건가?’
***
“실패라니?”
“죄송합니다.”
“지금 죄송하다는 말로 해결될 일인가?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너무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여기 남은 부하들과 제 인맥을 총동원해서라도 남길영과 그의 동생을 확보하겠습니다.”
“자네. 태백 연구소가 어떻게 사라졌는지 들었나?”
괴물 실험을 하다가 상부의 허락도 받지 않고, 외부 실전을 진행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 결과, 연구하던 괴물 대다수가 죽고, 태백 연구소는 폐쇄. 책임자는 그 일의 문책으로 죽었다고 들었다.
“물론입니다. 여긴 제가 책임지고 지켜낼 겁니다. 그쪽 같은 실수는 하지 않습니다.”
“그래. 자네의 손에 인류의 미래가 달려있네.”
인류의 미래라는 말을 듣고 그의 표정이 달라졌다.
앞서서 굽신거리던 모습이 사라졌다.
대신 자부심이 얼굴에 가득했다.
“맞습니다. 인류는 게이트와 괴물 따위에게 절대 굴복하지 않을 겁니다. 제가 반드시 연구에 성공해 보이겠습니다.”
“좋아. 그럼 내일 해가 뜨기 전까지 모든 연구자료를 백업하고, 철수를 마치도록.”
“여기서 철수하라고요?”
“그곳은 이미 외부에 노출되었다.”
“그걸 어떻게?”
정체불명의 차량이 함정에 빠진 게 불과 몇 분 전인데.
아직 보고도 하지 않은 사항을 멀리 있는 그가 어떻게 알았을까?
“자네는 똑똑하고 야망이 넘치지만, 아직 어려. 내 밑에서 많이 배워야 해.”
“알겠습니다. 그럼 최대한 빨리 연구 결과를 챙기고 여길 폐쇄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다음엔 직접 얼굴을 보도록 하지.”
연구소장 노길상이 화면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픽!
화상 연결이 종료되고, 그가 다시 목을 빳빳이 들었다.
‘망할 늙은이. 여길 폐쇄하라고? 내가 어떻게 이만큼 여길 성장시켰는데.’
그는 각성자가 아니었다. 부자도 아니었다.
하지만 무려 IQ 160의 천재였고, 지금은 30대 초반의 나이에 이곳의 책임자가 되었다.
자신감이 넘치는 사내였고, 자신이 끌어들인 각성자들의 몸에 폭탄을 심었다.
그걸 빌미로 자신의 동료로 만들거나 부하로 삼았고.
‘자신의 노력이나 의지로 이룬 것도 아니었으면서, 그까짓 각성 좀 했다고 잘난 척하는 멍청이들.’
한편, 보고를 마친 그가 CCTV 화면을 응시했다.
함정에 처박힌 자동차.
그리고 잠시 후.
세 명을 구해내고 사라진 남자.
오산역 동영상에서 본 영웅이란 놈과 동일인인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놈이라고 해도 어떻게 여길 알고 온 걸까?
‘남길영이나 내 부하들이 배신했다는 건 말도 안 돼. 일 번을 제외하고 모두 액체화 피 폭탄(fluid blood bomb)을 몸에 심어놨으니까.’
일 번은 그가 영입한 사람이 아니다.
연구소를 지원하는 남자가 보낸 감시자라고 봐도 무방했다.
아마 다른 방식으로 그의 생각과 행동을 제한하고 있을 터.
아무튼, 이곳에 있는 사람 중 실력이 제일 뛰어났으니.
그간 노길상이 내린 명령을 항상 100% 달성해왔다.
다만, 오늘은 일이 잘 안 풀렸다.
여태 돌아오지 않고, 보고도 없었으니까.
아마 방송을 통해 뉴스를 보지 않았다면, 지금도 실패한 걸 모르고 있을 뻔했다.
그가 부하에게 버럭 소리쳤다.
“외부에 나가 있는 인원을 모두 복귀시키고, 당장 경비를 두 배로 늘려.”
“네. 이미 몇 분이 자청해서 주변을 살피러 나가셨습니다.”
“좋아. 조금이라도 수상하면 바로 보고해.”
그가 컴퓨터로 향했다.
열심히 자료를 백업하고, 연구물을 옮길 계획을 세우던 그때.
부하의 보고가 바로 이어졌다.
“소장님. 외부 침입자가 있습니다.”
“몇 명이지? 설마 그 남자인가?”
“맞습니다. 함정 근처 CCTV에서 사라진 남자입니다.”
“빌어먹을. 총출동해서 놈을 막으라고 해. 최대한 시간을 벌어야 한다.”
여기서 진행한 연구를 절대 포기할 순 없었다.
다른 사람의 목숨을 갈아 넣어서라도 반드시 자료를 백업해서 도망쳐야 한다고 다짐했다.
‘희생 없이는 성공도 없다.’
부하들에게 침입자를 막으라고 명령한 그가 서둘러 키보드를 두들겼다.
연구소에 들어온 박민준은 CCTV가 너무 많아서 몰래 다니길 포기했다.
‘가는 곳마다 카메라가 달려있군.’
20년 전에도 CCTV는 있었지만, 이렇지는 않았는데.
세상이 너무 바뀌었다.
‘차라리 잘됐어.’
그 덕분에 적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어졌다.
알아서 그가 있는 곳으로 올 테니까.
마침 저기 무장한 병력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자신 있다는 듯, 검을 든 사람 두 명과 소총을 든 떨거지들.
박민준은 적에게 먼저 살상을 목적으로 자신이 공격받은 이상, 상대를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더욱이 이곳은 사람의 몸에 폭탄을 심어두는 암살자 족속들의 본거지였으니.
‘저런 놈들이 여기서 살아남으면, 다시 다른 사람을 해치고 다닐 거다.’
그렇다면 여기서 전부 끝장내버리겠다.
“침입자가 저기 있다. 발사!”
탕! 따다 다다.
단발 총성을 시작으로, 총을 연사한 적이었다.
보통의 헌터 같으면 총알을 피해서 도망치거나 뒤로 숨었겠지만, 박민준은 달랐다.
그가 검을 앞세워 적을 향해 돌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