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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자가 힘을 안 숨김-44화 (44/175)

44화

“요즘 내 조카 녀석을 훈련하고 있거든. 좋은 보조 훈련교재로 쓰일 수 있었는데. 너무 쉽게 죽였네.”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하지 못한 중년인이었다.

하지만 뭐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가 의도한 바는 이뤘으니까.

“네놈의 개소리는 잘 들었다. 그 덕분에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네가 일부러 시간을 끌었다는 거야?”

“그래.”

그가 남길영이 있는 병실 쪽을 바라보며 웃었다.

정문으로 들어온 여섯 명 말고, 두 명이 더 있었다.

그들은 외벽을 타고, 병실 창문으로 진입하기로 되어 있었다.

안에서 별다른 소리가 나지 않았지만, 원래 조용하게 일을 처리하는 동료들이었으니.

지금쯤.

남길영을 구출하고, 그를 지키던 놈들을 전부 제거했을 터.

죽어가면서도 결국, 자신이 이겼다는 표정의 중년인을 향해, 박민준이 대놓고 비웃음을 날렸다.

“근데 어쩌지. 난 이미 다 알고 있었는데.”

“그게 무슨 소리냐? 설마?”

“아까 네놈들과 싸우면서 다 느꼈어. 외벽을 슬금슬금 기어 올라오는 두 명의 인기척을 말이지.”

“거짓말! 그걸 알면서 왜 여기서 나와 대화를 나눈 거지?”

“굳이 내가 나서지 않아도, 안에서 대신 처리해줄 사람이 있으니까?”

상대가 알아서 정보를 푸는데, 굳이 입을 막을 이유가 없었다.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중년인이 작게 중얼거리며 쓰러졌다.

“그럼, 복도에 있다가 사라진 여자가?”

털썩.

눈을 부릅뜨고 죽은 그를 뒤로하고.

손목이 잘린 상태로 쓰러져 있는 적에게 다가갔다.

수염을 잔뜩 기른 삼십 대 남자.

기절한 그에게 박민준이 손을 뻗었다. 툭. 툭툭.

남자의 몸을 몇 번 건드리자.

피가 단번에 멎었다. 고통도 확 줄어들었는지.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평온한 얼굴이 된 게 보였다.

그가 살려둔 적은 두 명이었다.

맨 처음 장풍을 맞고, 허리가 꺾이면서 벽에 처박힌 여자.

상처가 심하지만, 기절만 했을 뿐, 아직 살아있다.

그렇게 기절한 두 명을 살려서 배후를 캘 생각이었다.

‘어떤 놈이 뒤에 있는지 몰라도, 이런 자들을 부리다니. 제법 돈과 권력을 손에 쥐고 있다는 거겠지?’

이들은 전원 각성자로 이루어진 암살단이었다.

다만, 실전 능력이 형편없다고 느낀 헌터들과는 달리, 죽음과 아주 가까운 기술을 가진 진짜 암살자들이었다.

‘살인을 여러 번은 경험한 베테랑들이었다.’

사람을 죽이는 일은 어지간해서는 적응하지 못한다.

제정신으로 다른 사람의 생명을 거둔다는 건,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박민준도 죽여야 할 놈은 반드시 죽여왔다.

하지만,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억지 핑계를 만들진 않았다.

선을 넘으면, 그때부턴 살육에 미친 사파나 마도가 되는 거다.

여기선 그런 놈들을 빌런이라고 불렀고.

병실에 찾아온 놈들은 박민준을 공격하면서 눈에 희열이 번뜩였다. 살인에 중독된 눈.

‘살인에 미친 놈들. 죽어 마땅했다.’

복도에 있던 적, 2명을 확실히 제압하고, 남길영이 있는 병실로 들어간 박민준이었다.

휙!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뭔가가 그를 찔러왔다.

덥석.

그걸 손으로 잡아챈 그였고.

상대가 놀라서 눈을 토끼처럼 뜨고 있었다.

박민준이 살짝 미소 지으며 연검을 손에서 놓았다.

“상대를 확인도 안 하고 공격을 하면 쓰나? 다른 놈 같았으면 목에 구멍이 뚫렸을걸?”

사과하기 위해 고개를 꾸벅 숙인 그녀였다.

소해진의 등 뒤로 죽어 나자빠진 시체 3구가 있었다.

두 명은 밖에 있는 여섯 명과 한패로 보였다.

기껏, 벽을 타고 기어 올라와서 소해진에게 죽은 것이다.

다른 하나는 기동 2팀의 요원이었고.

상처 입은 요원 두 명이 침대 사이에 숨어있는 것도 보였다.

박민준과 눈이 마주치고, 뻘쭘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그의 옷 곳곳에 묻은 피를 보고, 남자가 말했다.

“창문으로만 쳐들어온 줄 알았는데. 밖에도 많이 몰려왔던 모양입니다.”

“그런 소리 할 시간 있으면, 네 상사에게 보고하는 게 좋지 않을까? 지부장이나 방 부장에게 아직 보고도 안 한 것 같은데.”

이미 병실 안의 상황을 다 알고 있다는 듯한 그의 말에 요원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걸 어떻게 알고?”

직접 보지는 못했어도, 전부 엿듣고, 안에서 벌이지는 일을 하나도 놓치지 않은 그였다.

사실, 복도에서도 더 빨리, 쉽게 적들을 처리할 수 있었는데.

오랜만에 제대로 된 싸움을 하게 되었다는 생각에 즐기고 싶은 마음이 컸었다.

병실 안에 침입한 외부인 정도는 소해진과 기동 2팀 요원들이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판단했고.

덕분에 한동안 느끼지 못했던 손맛도 봤다.

살을 가르고, 뼈를 자르고, 목을 베는 감각.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않겠다고 말했었지만, 그는 암살자들에게까지 그걸 적용할 생각 따윈 전혀 없었다.

박민준이 보는 앞에서 보고를 시작한 기동 2 팀원이었다.

팀장 김철진의 부재로, 그 위의 상관 황 부장에게 연락했다.

“병원에서 남길영을 감시하던 중에 기습당했습니다.”

“뭐? 기습?! 적이 몇 명이야?”

“우선은 둘이 창을 통해 들어왔고, 복도에는…….”

눈치를 살피던 요원이 박민준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오른손을 쫙 펴고, 왼손가락을 한 개 펴 보였다.

‘전화를 다 엿듣고 있었나?’

아무튼, 그 덕분에 적의 숫자는 파악할 수 있었으니.

지금은 그걸로 충분했다.

“확인된 적은 8명입니다. 우리 쪽은 요원 1명이 실종되고, 1명이 사망, 저와 동료 한 명이 다쳤습니다.”

“실종은 뭐야?”

“박동인 선배가 밑에 내려가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마 이미 적에게 당했거나 어딘가에 다친 채 쓰러져있을 겁니다.”

“남길영은? 그자는 어떻게 됐어?”

“적들이 놈을 데려가려고 했지만, 저지했습니다.”

“남길영이 깨어나긴 한 거야?”

“아닙니다. 아직 의식이 없습니다.”

“그럼, 거길 어떻게 알고 놈들이 찾아온 건데?”

잠시 망설이던 그가 사실대로 말했다.

“실은 사무실에 있던 강인석이 문자를 보내왔었습니다. 사건이 터지기 1시간 전이었는데. 조심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걸 왜 이제 보고해? 다들 빠져서. 팀장이 없다고 일을 대충하는 거야, 뭐야?”

“저는 그냥 인석이가 우리랑 함께 현장에 못 나와서 괜히 하는 말인 줄 알았습니다.”

“습격한 놈들 정체가 뭐야? 블루 썬더 쪽이야?”

자기네 길드장을 구하려고 왔을 줄 알았다.

그게 아니었다.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무슨 대답이 그래? 확실히 말해.”

“블루 썬더 쪽은 아닙니다. 제가 그쪽 길드원을 아는데, 이런 자들은 없었습니다.”

“알았어. 그럼 지금 바로 지원을 보내줄게. 그나저나 다른 병원으로 옮기지 않아도 괜찮겠어?”

남자 요원이 박민준과 소해진을 번갈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본부에서 보내준 인원이 있습니다. 덕분에 위기도 넘겼고, 계속 안전할 것 같으니. 지원이 올 때까지 대기하겠습니다.”

“알았어. 금방 도착할 거니까, 조심하고.”

“네. 알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요원에게 박민준이 바로 물었다.

“강인석의 문자는 뭐지? 왜 내게 그걸 말하지 않은 거야?”

박민준이 대화나 통화를 엿들을 수는 있지만, 눈에 보이지도 않는 문자를 엿볼 수는 없다.

그가 만약 미리 알았다면, 아무도 다치지 않고, 죽지도 않았을 거였다.

죽거나 실종된 사람만 억울하게 된 상황이었다.

뭐 자기들이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 잘못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사무실에 있던 강인석도 책임을 회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럼 강인석이 있는 게이트 관리국 경기지부는?

***

“씨발. 다들 어서 출동 준비해.”

“곧 있으면 퇴근 시간인데, 갑자기 뭡니까?”

“퇴근은 개뿔. 지금 기동 2팀이 있는 병원이 습격당했단다. 지원 가야 하니까 모두 일어나.”

“아 놔. 오늘 집이 가긴 글렀네.”

지부 건물에 남은 현장 요원에게 긴급 출동 명령이 떨어졌다.

목적지는 인근 대형병원.

헌터 공무원 납치 용의자를 지키고, 동료를 지원하는 임무였다.

“투덜거리지 말고, 다들 움직여!”

“알겠습니다.”

“가까운 곳이니까, 빠르게 처리하고, 상황 봐서 퇴근시켜줄게.”

최소 인원을 남기고 모조리 현장으로 출동했다.

상당히 어수선해진 상황.

송하영과 함께 있던 강인석도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현장에 나간 선배 박동인에게 연락했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 사이.

사무실을 나간 송하영이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선배. 큰일 났어요. 남길영을 노린 적들이 병원을 습격했대요.”

“진짜야? 이런 젠장.”

그게 자기 잘못이라는 걸 깨닫고, 갑자기 두통을 느낀 그였다.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은 선배를 보고, 송하영이 말했다.

“지금 그러고 계실 때가 아니에요.”

“그럼 뭘 어쩌자고? 우리도 현장에 나가자는 거야?”

“아니요. 그 반대예요.”

“반대라니?”

“여기도 위험할지 몰라요. 병원을 습격한 자들이 지하에 있는 남길영을 노릴지도 몰라요.”

“너 미쳤어? 거긴 병원이니까 가능한 거지. 여기가 어디라고.”

“선배가 가지 않으면, 내가 지하에 내려가서 지킬게요. 당연히 다른 팀에 지원도 좀 받을 거예요.”

“설마, 다른 사람에게 다 말하겠다는 거야?”

“당연하지요. 선배가 아까 제대로 보고하고 대처했으면, 지금 이 지경까지 안 됐을 거잖아요.”

지금이라도 바로 잡아야 했다.

그녀가 무기를 챙겨 들고, 사무실을 나가려 했다.

그걸 본 강인석이 자신도 모르게 손을 썼다.

퍽!

뒤통수를 얻어맞은 송하영이었다.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지더니.

머리에서 피까지 흘렸다.

‘설마 죽었나?’

놀란 강인석이 후배에게 다가갔다.

맥박이 뛰는 걸 느끼고 크게 안도했다.

‘다행히 살아있구나.’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잠시 자기 잘못이 퍼지는 건 막았지만, 오래가진 못할 거다.

병원의 동료에게 보낸 문자 내용이 버젓이 남아있을 테니까.

‘이젠 그 수밖에 없어.’

그 혼자서 남길석을 지킨다.

적들이 오지 않으면, 다행이고.

만약 습격해오면, 그걸 막은 공로로 잘못을 없던 일로 하면 되는 거였다.

평상시라면 혼자서 무리하지 않았을 텐데.

그는 지금 자기 잘못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렇게 혼자 지하 유치장을 향해 내려갔는데.

입구의 데스크를 지키는 요원이 보이지 않았다.

싸한 느낌이 든 그가 걸음을 서둘렀다.

바닥에 쓰러진 동료의 시체가 보였다.

그럼 유치장에 있는 남길석은?

‘뭐야? 아직 안에 있잖아?’

그가 안도하는 순간.

푹!

강인석의 가슴을 뚫고 나온 검 끝이었다.

“이 새끼는 뭔데, 갑자기 여길 내려온 거지?”

“그게 무슨 상관이야. 이미 뒤졌는데.”

“그럼 어서 목표물을 데리고 여길 빠져나가자.”

유치장에서 남길석을 꺼낸 복면인들이었다.

병원을 습격한 자들처럼 암살에 특화된 각성자들.

“형님의 동료들인 겁니까? 혹시 연구소란 곳에서 온 겁니까?”

“너 쓸데없이 괜한 소리를 하는군.”

“네?”

“너 때문에 또 사람을 죽여야 하잖아. 나야 좋긴 한데. 시간이 별로 없어.”

어리둥절한 남길석을 두고.

복면인들이 안에 아직 갇혀있는 사람들을 풀어주는가 싶더니.

“너희도 어서 밖으로 나와라.”

“누군지 모르겠지만 정말 고맙군. 덕분에 탈출했어.”

“고맙긴 무슨.”

쓱!

유치장을 벗어난 그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

놀란 남길석이 소리쳤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왜 갑자기?”

“입 닥쳐. 여기서 빠져나갈 때까지 입도 뻥끗하지마. 알았어.”

긴장한 남길석이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복면을 써서 보이지는 않았지만, 근육의 움직임을 보아 상대가 웃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걸 본 남길석은 몸에 소름이 돋았다.

‘사람을 이렇게 많이 죽여놓고, 웃다니. 대체 형은 누구하고 무슨 짓을 벌였던 거야?’

뒤늦게 정신을 차린 송하영이었다.

뒤통수에 피가 났지만, 다행히, 피는 멈춘 상태였다.

그녀가 병원으로 가지 않고, 지하로 향했다.

죽은 요원들의 시체 사이에서 선배 강인석을 발견했다.

“선배…….”

죽은 그의 눈을 감겨주고, 유치장으로 향했다.

역시나 그곳도 피바다였다.

지하에 살아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병원을 먼저 기습하고, 그쪽에 인력이 몰리자, 다시 이쪽을 노린 게 분명해.”

빠르게 상황판단을 마친 그녀가 빠르게 어딘가로 연락했다.

***

병원에 있던 기동 2팀 김호진이 핸드폰이 울렸다.

“막내잖아? 이런 상황에서 얘는 왜 갑자기 전화지?”

“혹시 모르니까. 어서 받아봐.”

김호진이 전화를 받고 매우 놀랐다.

“뭐야? 거기도 기습당해? 넌 괜찮아?”

통화를 마친 그가 병원에 막 도착한 요원들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고 소해진과 박민준에게도 알릴 생각이었는데.

둘 다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다.

“아니. 그 두 사람은 또 어디 간 거야?”

“아까 선배님이 전화 받은 뒤, 곧장 건물 밖으로 나가던데요?”

김호진이 창문으로 향했다.

경기지부를 향해 뛰어가는 소해진이 보였다.

박민준은 보이지 않았고, 그냥 그녀 앞으로 길게 뻗은, 선 같은 것만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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