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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자가 힘을 안 숨김-38화 (38/175)

38화

박민준이 한차례 검무를 마쳤다.

멍한 얼굴을 한 그녀에게 검을 돌려주며 말했다.

“연검은 겨우 한 가지 방법으로 수련하는 게 아니야. 물론 내가 전에 보여준 것이 네 검술보다 더 좋아 보였겠지만, 그렇다고 그동안 네가 쌓아온 걸 몽땅 버리란 말은 아니었어.”

그래서 이번엔 그가 다른 방식의 연검술을 그녀에게 보여줬다.

마치 그녀의 검술을 계속 수련해나가면, 그 끝이 어디인지 알려주기라도 하겠다는 듯.

연검임에도 부드러움보다는 절도가 돋보였고, 여유보다는 한시도 쉴 틈이 없이 몰아붙이는 벌과도 같았다.

알 듯 말 듯.

그런 표정을 보인 소해진을 향해, 그가 마지막 말을 건넸다.

“네 검을 버리지 마. 그렇다고 너무 거기에 매몰되지도 말고. 새로운 걸 받아들이고, 개선해. 발전해. 그게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조언이야.”

평소답지 않게 많은 말을 한 박민준이었다.

그녀의 소개 덕분에 아주 좋은 검을 구했으니.

나름대로 박민준다운 보답 방식이라고 할까?

“그리고 더는 날 귀찮게 하지 마. 이 정도 했으면 나도 더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끄덕끄덕.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몸을 숙였다.

박민준을 스승처럼 대하겠다는 태도였다.

“아. 그러지 말라고. 난 네 스승이 될 마음이 없어.”

그때.

거실에 나타난 그의 조카였다.

아까 박민준이 만든 날카로운 검의 소리 때문에 나왔다.

“외삼촌. 뭐 하세요? 저분은 또 왜 절을 하고 있어요?”

조카의 말을 들은 박민준이 대답하면서 손을 내저었다.

“잠시 검술을 봐줬더니. 그냥 저 애 혼자 감동하고 저러는 모양이야.”

“검술을 봐줬다고요? 나는요? 저도 가르쳐 주세요. 네?”

“안 그래도 그럴 참이었다.”

“정말요?”

다만, 시스템의 한계 때문에 무공을 직접 전수할 수는 없다.

박민준이 익힌 무공은, 이곳 지구의 베타 시스템에선 특성이라고 불렸다.

알파에서 베타로 데이터가 넘어가긴 했지만, 그걸 다른 사람에게 전수할 수 없었다.

일부라도 직접 적용하도록 가르칠 수도 없었고.

대신 박민준이 조카를 훈련할 순 있다.

실전 감각을 끌어올리고, 장점을 강화하고, 단점을 최소화하는 과정을 반복하면 된다.

그것만으로도 이전보다 훨씬 강해질 수 있으리라.

한편, 소해진은 외부의 힘으로 자신의 몸이 강제로 펴지면서 바로 서는 걸 느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내 몸이 저절로 움직여?’

잔뜩 의아하다는 시선을 받은 박민준이었다.

“뭘 그렇게 봐? 그냥 잡 기술일 뿐인데.”

허공섭물의 응용이 박민준에 의해 잡 기술로 변했지만, 그걸 걸고넘어질 사람은 여기 아무도 없었다.

고개를 든 소해진을 보고, 김채영이 눈을 크게 떴다.

“소해진이 우리 집에?”

박민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조카가 저 여자를 어떻게 아는 걸까?

“네가 저 사람을 어떻게 알아?”

“저분을 왜 몰라요? A등급 헌터 소해진이잖아요.”

“그렇게 유명해?”

“네. 침묵의 검이라고. 한때 한국에서 여자 헌터 중에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강자였는데. 아! 삼촌은 잘 모르겠구나.”

한때는 현장에서 크게 활약했던 소해진이었다.

심지어 그땐 연검술을 쓰지도 않았었는데도 여성 헌터 중에서 뛰어남을 자랑하는 실력자였고.

지금은 S등급 헌터 이지원의 인기에 밀리기도 했고, 연차가 쌓이면서 현장보다는 사무 쪽에 더 많은 일을 하고 있었다.

본인의 성격도 싸움보다는 그쪽이 더 잘 맞았고.

다만, 욕심이 너무 없어서 여태 차장일 뿐이었는데.

“어쩐지. 제법 쓸만하다고 느끼긴 했었는데.”

“그 정도가 아니에요.”

김채영의 말을 듣고 그가 잠시 고민했다.

소해진과 조카를 번갈아 보더니.

“둘이 대련을 해보겠어?”

“여기서요? 거기다 이렇게 갑자기?”

말을 할 수 있는 조카는 물론이고, 소해진도 의문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앞으로 널 훈련할 생각이거든.”

“제 부탁을 들어주시려고요?”

“그래. 그러려면 네가 약한 사람과 싸우는 걸 한 번 보는 게 좋겠어. 네 화염 검 때문에 실내에서는 좀 그렇고. 밖으로 나갈까?”

약한 사람이라.

A급 헌터인 소해진을 약하다고 대놓고 말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정작 당사자인 소해진은 별로 기분 나쁜 얼굴이 아니었다.

김채영은 당장이라도 나가서 소해진과 싸워보고 싶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한때 한국 최강의 여성 헌터 중 한 명.

“괜찮으시겠어요? 혹시 제 외삼촌 때문에 눈치를 보시는 거라면, 그냥 무시해도 돼요. 제가 잘 알아서 말해볼게요.”

“채영아.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이 외삼촌을 저들이 어떻게 보겠어?”

“어떻게 보긴요. 남에게 싫은 걸 강요하는 사람이지요.”

“그게 맞는데. 저 여자도 아주 싫은 건 아닐걸?”

“정말요?”

끄덕끄덕.

박민준 같은 사람의 조카라.

과연 어떤 실력을 갖추고 있을까?

소해진은 그게 무척 궁금했다.

그렇게 밖으로 나와서 작은 마당에 섰다.

“단독주택이 이래서 좋다니까. 마당에서 고기도 구워 먹고, 이렇게 대련도 할 수 있고 말이야.”

어이가 없다는 표정의 방수열을 무시하고.

그가 두 여자에게 말했다.

“그럼 마음껏 겨뤄봐. 여파는 내가 알아서 잘 처리할게.”

“좋아요. 그럼 외삼촌만 믿어요.”

“그럼, 두 사람 모두 준비됐으면 바로 시작.”

화르르.

검에 불을 붙인 김채영이 먼저 선공을 가했다.

차르르르륵.

소해진도 팔찌를 풀어서 연검을 만들었다.

다른 사람에게 꼭꼭 숨겨두었던 연검술로 상대의 공격을 막았다.

어설프게 박민준을 따라 하려는 모습을 버리고, 자신의 검술을 마음껏 펼쳤다.

그 진가가 바로 보였으니.

소해진이 작정하고 검을 쓰자, 기세 좋게 덤빈 김채영이 몇 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배해 버렸다.

‘이대로 무력하게 질 순 없어.’

끝났다고 생각한 소해진을 향해, 그녀가 다시 화염 검을 펼쳤다.

이번엔 자신의 모든 마력을 단번에 다 소모하겠다는 듯.

이전보다 더 크고 강렬하게 타올랐다.

박민준의 조카라 나름 손속에 사정을 두었던 그녀였지만, 이번엔 그럴 수 없었다.

최선을 다해서 검술을 펼쳤고.

맹렬하게 불타는 김채영의 검과 부딪혔다.

쾅!

폭발음과 함께 불길이 사방으로 튀었다.

금방이라도 번져서 주변에 대형 화재가 일어날 듯 보였다.

당황한 두 여자가 검을 회수했다.

어차피 김채영은 더 싸울 힘도 없었다.

그녀는 물론이고, 소해진도 자신들 때문에 일어난 주변 상황으로 무척이나 당황한 얼굴이었는데.

그때, 박민준이 나섰다.

허공을 박차고 허공에 몸을 띄운 그가 맨손을 이리저리 뻗었다.

그때마다 사방으로 퍼져나가려던 불길이 공중에서 한곳으로 이끌려오기 시작했다.

하늘에 수 놓인 수많은 불덩이.

공중으로 날아오른 박민준을 중심으로 길게 불의 꼬리를 만들면서 모여들었다.

처음엔 작았던 중심의 불덩이가 점점 커졌다.

완벽히 하나로 모인 구형의 불꽃.

박민준이 머리 위로 손을 올리자.

화르르르르르!

용트림하듯 더 높이 하늘을 뚫고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가 천천히 땅으로 내려섰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방수열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엄청난 범위라 도저히 한 사람이 손쓸 수 없을 것 같았는데.

몇 초가 지나기도 전에.

박민준이 전부 수습해버렸으니.

‘어떻게? 사람이 하늘을 자유롭게 뛰어다니면서 맨손으로 멀리 있는 불길들을 동시에 꺼버릴 수가 있지? 저게 가능한 건가? 진짜 사람이 맞는 건가?’

영상으로 이미 봤었다.

실제로 보니, 그 충격의 차원이 달랐다.

화면에선 영화를 보는 기분이었는데.

지금은 엄연한 현실이지 않은가.

여태 몇 번이나 박민준이 인간이 맞는지 의심했었지만, 지금 같은 충격은 없었다.

한참 동안 멍하니, 입을 떡 벌리고 있는 그를 소해진이 깨웠다.

톡톡.

“어? 소 차장 왜? …… 그만 가자고? 알았어.”

정신이 딴 데 팔려서, 박민준을 저녁 만찬에 데려가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게이트 관리국에서 온 사람들이 떠나고.

김채영이 자기 외삼촌 옆에 꼭 붙었다.

“굉장해요. 사방에 퍼지던 불꽃을 어떻게 한곳으로 끌어모을 수 있는 거죠? 마지막은 또 어떻게 하신 거고요?”

참새처럼 쫑알거리는 조카를 보고 그가 작게 미소 지었다.

“그것도 역시 무공의 응용이지.”

“무공이요?”

“그래. 뭘 배우더라도 그대로 사용만 할 줄 알면 발전이 없어. 끊임없이 개발하고 발전시켜야 해.”

“그럼 저도 가르쳐 주세요. 무공을 배우고 싶어요.”

“그건 안 돼.”

“왜요? 아까워서 그래요?”

“아니. 내 무공은 네 특성과도 같아.”

“아!”

박민준의 추가 설명을 듣고 그제야 자신이 오해했다는 걸 깨달았다.

김채영의 인챈트 특성을 다른 누구에게 설명해 줄 수는 있어도, 그걸 상대도 사용하도록 가르쳐 줄 수는 없다.

“대신, 내가 널 지금보다 훨씬 강하게 만들어 줄 수는 있지.”

“어떻게요?”

“반복훈련, 죽음을 불사하는 실전 같은 연습. 장점을 극대화하고, 네 전투 습관 중 좋지 않은 걸 최대한 버리려는 노력 같은 것들이지.”

“훈련은 여태 계속 받아왔는데요?”

백호 길드는 결코, 어설픈 헌터 길드가 아니다.

한국 10대 길드, 세계 100위 권 안에 든다는 건, 그만큼 체계적이고 강도 높은 인적자원관리 시스템이 있다는 말과도 같다.

길드원이 되는 일도 어렵지만, 들어와서 훈련을 받는 것도 상당히 힘들다.

김채영은 그걸 말한 거였지만, 박민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 길드장이고 뭐고, 여태 내가 본 헌터들은 전부 약해 빠졌어. 내 조카인 네가 겨우 그 정도에 만족할 건가? 정말 그래?”

그 말을 듣고, 그녀의 가슴에 뭔가가 끓어올랐다.

지난 태백시, 대덕산에서 무기력하게 도망치던 자신을 바꿀 기회를 얻었다는 기쁨.

자신이 A급 헌터인 길드장보다 더 강해질 수 있을 거란 기대감까지.

김채영이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제가 뭘 어떻게 하면 되죠?”

***

게이트 관리국으로 돌아가는 중.

국장에게 전화 보고를 한 방수열이었다.

“박민준 씨를 설득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안 만나겠답니다.”

“뭐야? 그놈이 정말 대통령님을 안 만나겠다고 말했어?”

“네. 그렇습니다. 귀찮아서 싫다고 하더군요.”

“정말 미친 거야? 뭐야? 감히 그게 어떤 자리라고 그딴 식으로 거절을 해?”

“그러게 말입니다.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네는?”

“네?”

“그렇다고 그냥 돌아와? 다리라도 잡고 매달렸어야지.”

“그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긴? 그럼 내가 자네 말을 곧이곧대로 대통령님께 전해야겠어? 대통령님이 불렀다고 말했는데 귀찮다고 안 온답니다.”

“그건 아니지요. 대신 잘 둘러대시면 괜찮지 않겠습니까?”

“아니야. 그게 아니라고. 당장 차를 돌려서 그자를 설득해. 뭐라도 해주면서 말해보라고.”

“뭘 말입니까?”

“그것까지 내가 알려줘야 해? 자네 그 정도밖에 안 되나?”

“아닙니다. 제가 알아서 다시 잘 해보겠습니다.”

“그럼 다음엔 이런 보고는 듣지 않았으면 좋겠군. 다른 걸 기대해 보도록 하지.”

“네. 제가 그자를 만나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뚝.

대답도 없이 먼저 전화를 끊어버린 국장이었다.

방수열이 한숨을 푹푹 내쉬더니.

운전석을 향해 말했다.

“그자의 집으로 다시 차를 돌리십시오. 어딜 또 나갈지 모르니. 서둘러 주시고.”

“네. 부장님.”

그렇게 박민준의 집 앞에 다시 도착했는데.

은색 외제 차가 먼저 보였다.

“저건 또 누구 차지?”

최신 모델.

돈이 있어도 쉽게 구할 수 없는 인기 있는 차였고.

그걸 타고 다니는 거로 보아, 주인이 보통 사람은 아닌 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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