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모르는 번호.
애초에 박민준은 가족의 연락처만 저장했으니.
그게 당연하긴 했다.
어차피 전화를 건 상대가 누구인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받아보면 알 수 있으니까.
만약 불순한 의도의 전화라면, 상대를 추적해서 박살 낼 거다.
“누구냐? 이 번호를 어떻게 알고 전화한 거지?”
전화를 받자마자, 그렇게 대뜸 답변할 줄 몰랐던 걸까?
잠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박민준은 상대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다시 전화가 울리고.
이번엔 그가 받자마자 목소리가 들렸다.
“박민준 씨. 게이트 관리국 방수열 부장입니다. 댁에 방문했는데. 안 계시다고 이 번호를 알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용건이 뭐지?”
“국장님과 대통령님께서 박민준 씨를 오늘 저녁에 다시 뵙고자 하십니다.”
“이유는?”
“원래 새로운 S등급이 탄생하면, 국장님과 대통령님이 공식적으로 언론과 대중에 발표하는 관행이 있습니다.”
“그런 귀찮은 일은 누가 정한 거지? 내 앞으로 S등급이 두 명밖에 없었다면서?”
“귀찮은 일이라니요. 영광스러운 일이지요. 박민준 씨의 인기와 명예를 드높이고, 국격도 올릴 수 있는 일이지 않겠습니까?”
“그건 네 생각이지. 거길 또 가서 쓸데없는 말이나 듣고 싶지 않다.”
“네? 설마 거절하시는 겁니까?”
“그래. 다신 그자들을 만날 생각이 없다.”
뚝.
대답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옆에 있던 김채영이 의아한 얼굴이었다.
“무슨 전화를 그렇게 받으세요?”
“뭐가?”
“게이트 관리국 국장님과 대통령님을 만날 거라고 들은 것 같아서요.”
“그래. 그런 시답지 않은 놈들을 만나느라, 내가 널 영영 잃어버릴 뻔했지.”
대통령이 조카의 위치추적을 해줬지만, 결국,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김채영을 구한 건, 오로지 박민준 개인의 능력이었다.
만약, 조카가 조금만 더 약했다면, 그가 30초만 더 늦었다면.
조카의 시체만 발견할 뻔했다.
‘애를 훈련이라도 좀 시켜야 하나?’
이대로는 너무 약해서, 그가 안심하고 밖에 내놓을 수가 없다.
“그럼 당장 네 무기부터 바꿔줘야겠군.”
“갑자기, 무슨 소리세요?”
“그런 조잡한 검 말고 진짜 쓸만한 검을 써야 하지 않겠어?”
“이 검도 내가 얼마나 비싸게 주고 산 건데요.”
“돈을 낭비했다는 말을 그렇게 할 수도 있겠지.”
“나한테 검이라도 사주고 그런 말이라도 하든지. 정말 너무 하시는 거 아니에요?”
“안 그래도 지금 네 검을 사러 갈 참이었다.”
“정말요?”
“그래. 네가 쓸 만한 검이 있는 곳을 한 군데 알고 있지.”
“거기가 어딘데요?”
***
그가 조카와 함께 도착한 곳은 인사동이었다.
이지현의 가게.
“여긴 수공예품가게잖아요?”
“그래.”
“이런 곳에서 검을 만든다고요?”
창을 통해 안을 슬쩍 훔쳐본 그녀였다.
역시나 보이는 건 무기가 아니라 아기자기한 장식품과 생활용품뿐이었다.
“잘못 온 것 같은데요?”
“아니. 여기가 맞다.”
딸랑.
여전한 방울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주인 이지현이 밝은 목소리로 손님을 맞이했다.
처음엔 젊은 커플이 온 줄 알았는데.
박민준의 얼굴을 보고 오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당신!”
“당신?”
“그래요. 당신. 왜 여길 또 왔죠?”
“당연히 무기를 사러 왔지.”
“그때 당신이 그런 식으로 말을 하고 떠나서. 내가 그날 한숨도 못 잤다고요. 알겠어요?”
“아니. 모르겠는데. 내가 준 황금이 부족했나?”
“그건 아니에요.”
무려 금 1kg짜리 3개를 받았다.
금 시세가 그때보다 또 올라서 현재 2억 5천만 원은 되었고.
다만, 그가 떠나면서 금 100kg을 줘도 안 바꿀 검을 얻었다고 말하는 바람에.
그녀가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던가?
“그럼 뭐가 문제지?”
“내가 손해 본 기분이 들었다는 게 문제지요.”
박민준이 피식 웃으며 검을 들어 보였다.
“이 검이 가치가 있다고 해도, 네가 스스로 그걸 못 느끼면 똥을 안고 있었던 거나 마찬가지다.”
그의 말에 바로 수긍할 수밖에 없는 이지현이었다.
누구에게 팔지도 못하는 애물단지였던 검이다.
그걸 무려 금덩어리 3개나 받아놓고 손해 봤다고 생각하다니.
‘내가 미쳤지.’
가치는 상대적이다.
이지현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엔 어떤 무기를 원해서 온 거예요? 그 검은 멀쩡해 보이는데?”
당연하다.
어지간한 힘으로는 절대 부러지지 않을 검이었으니까.
그럼 혹시 옆에 있는 여자?
나이가 엇비슷한 거로 보아선 여자친구이려나?
‘저 여자도 예쁘지만, 나도 외모라면….’
그녀의 얼굴이 자신도 모르게 달아올랐다.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한 이지현이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그와 거래를 한 번 했을 뿐.
딱히 박민준과 아무 사이도 아닌데.
이상하게 부럽고 화가 났다.
박민준이 좀 생기긴 했지만, 그렇다고 엄청난 외모는 아니다.
다만, 몇억을 대수롭지 않게 쓰는 재력과 항상 자신감 넘치는 태도가 매력적이었나 보다.
거기에 무기를 볼 줄 아는 안목도 가지고 있었고.
그걸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던 박민준이 말했다.
“그럼 이제 검을 보여줘. 이번에도 값을 제대로 치르겠다.”
“저 여자가 쓸 검이겠죠?”
“그래. 내 조카 녀석에게 선물해주려고.”
“조카요? 저 여자, 아니 저분이 조카였어요? 진작 말을 하시지.”
“그럼 뭐가 달라지나? 내가 왜 너에게 그런 것까지 미리 말해줘야 하지?”
“그러네요. 그럴 이유가 없지요.”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어서 안내해라.”
“알았어요. 근데 좀 좋게 말해주면 안 돼요?”
“여기서 더 뭘 어떻게?”
“됐어요. 손님하고 길게 말한 내 잘못이지 뭐.”
가게 깊숙한 곳.
이지현의 작업실에 들었다.
여태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김채영이 눈을 빛내며 감탄했다.
“우와. 이게 다 주인 언니가 만든 무기예요?”
“언니?”
“아. 제가 그렇게 부르면 안 되는 거였나요? 외삼촌하고 친해 보여서.”
“아니. 듣기 좋네요. 앞으로 그렇게 불러주세요. 그런데 아가씨는 이름이?”
“저는 김채영이에요. 한국에 이런 곳이 있을 줄이야. 외삼촌 덕분에 이번에 처음 알았네요.”
“하나도 빠짐없이 내가 만들고, 개조한 것들이에요. 마음껏 구경하고 골라봐요.”
“고맙습니다.”
“고맙긴요. 어차피 계산은 저분이 하실 건데. 그렇죠?”
두 여자의 시선을 받은 그가 고개를 까닥했다.
“마음껏 골라라. 대신 내 마음에도 들어야 한다.”
“외삼촌 마음에도 들어야 한다고요? 내 선물이라면서요?”
“네가 무기 보는 안목이 있을 것 같진 않아서.”
“두고 보세요. 내가 엄마를 닮아서 얼마나 꼼꼼하고 똑 부러지는데.”
“그럼 더 걱정이고.”
“엄마한테 다 이를 거예요.”
“그럼 두 번 다신 선물은 없다.”
입을 삐죽인 그녀가 벽에 걸린 무기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인챈트는 정말 좋은 특성이다.
C등급에 불과한 김채영을 백호 길드에 합격시킬 정도였으니.
화염 검을 쓰면 괴물과 싸움에서도 나름대로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고.
다만. 마력 소모가 너무 크다.
그리고.
‘무기가 빨리 망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내 인챈트에도 무난히 견딜만한 검이 여기 있을까?’
외삼촌에게 자신만만하게 말은 했지만.
그녀는 무기를 볼 줄 몰랐다.
여태 검을 고를 때도 별로 선택권이 없었다.
백호 길드의 무기고에서 검을 골랐을 뿐.
‘포항 공장에서 만들었다고 했었지?’
그때도 그냥 흠집 없이 멀쩡하게 생기고, 자신의 손에 적당히 맞으면 그만이었으니까.
이번에도 그녀가 적당히 보기 좋고, 손에 들었을 때 가벼운 걸 선택했다.
“이걸로 할까 봐요.”
“벌써? 골랐다고? 아직 절반도 안 봤는데?”
“알았으니까. 어서 이 검이나 확인해 보세요.”
조카가 건넨 검을 받더니.
그가 금방 고개를 저었다.
“이런 검의 재질로는 네 화염 검을 견딜 수 없을 거다.”
“그걸 외삼촌이 어떻게 알아요? 직접 본 적도 없잖아요?”
“멀리서 검에 피어올랐던 불꽃을 봤었다.”
“겨우 그걸로 제가 고른 무기를 판단한다고요?”
“그래. 그거면 충분해.”
너무 터무니없는 확신이었다.
그래도 그를 무시할 수는 없는 게.
‘외삼촌이 보통 사람이 아닌 건 확실하니까. 이번에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닐 거야.’
대덕산이나 백호 길드장 앞에서 그가 보인 실력이 너무 압도적이었다.
“좋아요. 그럼 다시 골라볼게요.”
그렇게 몇 번 그녀가 검을 골랐는데.
그때마다 박민준이 모두 퇴짜 놨다.
“아. 진짜! 계속 이럴 거예요?”
“네가 제대로 된 검을 직접 못 고르겠다면, 내가 골라주마.”
검을 나름대로 꼼꼼히 살피느라.
그녀도 은근히 지친 터였다.
“알았어요. 그럼 어디 외삼촌 마음대로 골라보세요.”
고개를 끄덕이는 조카를 두고 박민준이 직접 나섰다.
얼마나 좋은 검을 고르는지, 그걸 지켜보겠다는 듯.
김채영이 돌연,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살폈다.
하지만, 정작 박민준은 그냥 한쪽 벽으로 곧장 다가서더니.
검 한 자루를 집어 들고 바로 돌아왔다.
“이걸로 하지.”
“네?”
“이 검이 너에게 제일 적당할 듯싶다.”
“다른 것들은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으셨잖아요?”
“내 검을 고르면서 이미 다 둘러봤었다.”
“그때 본 걸 여태 전부 기억하고 있다고요?”
“그래. 내가 익힌 무공 때문인지 기억력이 조금 좋은 편이거든.”
옆에서 대화를 엿듣던 이지현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그건 말도 안 돼요.”
“뭐가?”
“여기 있는 무기는 내가 정성을 다해서 만든 것들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대충 고른다고요?”
겨우 예전에 한 번 본 기억으로 조카에게 줄 검을 막 고르다니.
자신이 만든 무기를 무시당했다고 느낀 그녀였다.
반면, 박민준은 전혀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대충이라니. 내 조카가 쓸 검인데.”
“어디 줘봐요. 내가 직접 봐야겠어요.”
“여기 있다.”
검을 건네받은 그녀가 빠르게 살피기 시작했다.
‘이 검은 내가 가장 최신 개발된 합금으로 만든 거야.’
열에 엄청나게 강한 금속으로 2500도의 온도를 견딜 수 있다.
특제 약품을 더해서 간신히 검으로 만들었다.
‘용암에 넣어도 아무렇지 않게 견딘다고 했었지. 아마?’
용암 온도는 대략 700에서 1200도.
생각보다 그렇게 엄청 뜨겁지 않다.
반면, 그녀가 쓰는 화덕의 열기는 1500도.
그 정도 온도가 되면 쇠가 녹는다.
저 여자의 화염 검은 얼마나 뜨거울까?
“저기요. 제가 한 번 화염 검이라는 걸 직접 볼 수 있을까요?”
자신의 무기를 고르는 일이라.
김채영도 바로 나섰다.
“알았어요.”
검을 받은 그녀가 화염 검을 선보였다.
조금 어두웠던 작업실이 김채영을 중심으로 환해졌다.
그때를 놓치지 않은 이지현이 온도 측정을 마쳤다.
‘1100도’
무척 뜨거운 온도지만, 쇠를 바로 녹일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반복해서 저 정도 자극을 보통의 검에 가하면 얼마 사용하지 못하고 깨지거나 부러질 거야.’
그럼 박민준이 고른 검은?
2000도를 견딜 수 있으니.
당연히 1100도의 화염의 온도 또한 이겨낼 수 있다.
그것도 아주 오래 무난히.
검증을 마친 이지현이 질렸다는 얼굴을 보였다.
저 남자, 지난번에도 남들이 쓰지 않는 검을 고르더니.
사실은 굉장한 검이었지만.
이번엔 여기 남아 있는 무기 중에서 고온에 가장 잘 견딜 수 있는 검을 단번에 골라냈다.
“당신. 이 검을 정말 왜 골랐어요? 뭘 알고 선택한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