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서울 백호 길드.
대회의실.
300명이 동시에 앉을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지금은 겨우 10명의 인원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정도면 다른 소회의실을 써야 마땅할 텐데.
지금 그걸 지적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백호의 길드장 주희철이 회의를 주최했다.
부길드장과 전략실장, 대외협력실장도 참석했다.
반대편에는 태백의 길드장 유민상, 부길드장 등 4명이 불편한 얼굴로 앉아 있었고
그걸 본 주희철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이렇게 일찍 오시라고 해서 조금 미안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유 길드장님도 이해할 거라 믿습니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태백 길드장이었다.
“긴히 할 말이 있다면서 우릴 불렀으니. 이제 허심탄회하게 말해보십시오.”
사실 그는 기분이 좋지 못했다.
태백 길드의 정예라 부를 수 있는 요원이 1명만 남고 전멸했고, 그걸 언제 다시 보강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더욱이 자신의 세력에서 일어난 사건을 서울에 와서 회의한다는 게 못마땅했다.
‘이번 일의 책임을 전적으로 우리 태백 길드에게 뒤집어씌울 생각인 건가? 아무리 백호 길드라고 해도 정말 너무하는군.’
그가 미리 그런 짐작을 하고 있는데.
백호 길드장의 입에서 예상 밖의 말이 나왔다.
“이번 일에 대해 먼저 사과하겠습니다. 도움을 청했는데, 내가 제대로 지원하지 못했습니다. 죽은 태백 길드 요원들의 명복을 빌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그를 보며, 당황한 태백 길드장이었다.
그가 자리에서 급히 일어나 마주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이번에 일어난 일이 어디 한쪽의 잘못이겠습니까? 놈들이 예상보다 많고 강해서 일어난 사고일 뿐이지요.”
“맞습니다. 예상을 벗어난 괴물들이 문제였지요. 혹시 현장에 가보셨습니까?”
“네. 어제 가봤습니다. 시체고 뭐고 전혀 남아 있지 않았더군요. 백호 길드 측에서 먼저 도착하셨다던데. 그쪽에서 치운 겁니까?”
주희철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우리는 아무것도 치우지 않았습니다.”
“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우리 측 요원은 물론이고, 백호 길드의 시체도 전혀 발견하지 못했으니까요.”
걸어 다니는 도마뱀은 다식(多食)하는 괴물이라 거기 있던 인원을 다 잡아 먹었다면 당연히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괴물의 시체도 보이지 않던데요? 그것도 백호 길드에서 먼저 수거해가지 않았단 말입니까?”
“물론입니다. 현장을 잘 보존할 생각이었는데. 그럴 필요도 없이 무척 깔끔하더군요.”
“그럴 수가.”
놀라는 유민상을 향해, 백호 길드장이 말했다.
“그 괴물 놈들이 우리 양쪽 요원들의 시체는 물론이고, 동족의 시체마저 모조리 회수해갔습니다. 이걸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배고픈 괴물이 동족을 잡아먹을지언정, 쓸데없이 수거해가진 않는다.
장례식을 치러줄 만큼 자비로운 놈들이 아니었으니까.
“정말 이상하군요.”
“맞습니다. 이번 일은 너무 수상합니다.”
죽은 요원들의 시체를 가져간 건, 비상식량으로 삼으려고 했다고 쳐도, 동족의 시체는 왜 전부 치운 걸까?
“그러고 보니. 살아남은 괴물들은 어디로 다 사라진 걸까요?”
일요일에 현장을 수색하는 동안, 단 한 마리의 괴물도 마주하지 못했다.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녀석들이 자취를 감췄다.
혹시 놈들도 다 죽어서?
그럼 시체는 누가 치웠는데?
뭐가 되어도 앞뒤가 안 맞았다.
대회의실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똑똑.
“김채영 요원과 박민준 씨가 도착했습니다.”
“많이 늦었군. 어서 들어오라고 하게.”
대회의실에 들어온 그녀는 이번 태백시 참사의 생존자였다.
그녀와 함께 구출된 태백 길드 남자 요원은 긴급 수술을 받고도 아직 의식이 없는 상태라, 이곳에 오지 못했다.
박민준은 외부인이지만, 관련된 사람이라 와 달고 부탁했다.
‘그나저나 저 여자는 다치지도 않았나?’
‘우리 쪽 사람은 지금 생사를 오간다고 하던데?’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김채영이 너무 멀쩡한 모습이었다.
조카를 구하러 온 박민준이 돕지 않았다면, 그녀도 실종된 상태였을 되었을 터.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김채영에게 오래 머물지 않았다.
옆에 서 있는 젊은 남자에게 향했다.
백호 길드는 당연히 그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김채영의 외삼촌.
다만, 그가 오산역의 영웅이라는 건 부길드장만 알고 있었다.
박민준에게 자신이 당했던 모욕감 때문에, 그에 대한 말을 상당히 아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자기 형인 길드장에게도 자세히 말하지 않은 상태였다.
태백 길드에서도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생존자가 우리 측과 백호에서 2명이라고 들었는데?’
‘저 남자는 누구지? 뭔데 여기 들어오는 거야?’
백호 길드에서 박민준을 부른다는 걸 전혀 몰랐다.
다만, 알 듯 말 듯.
어디서 본 듯도 한데? 라는 의문만 떠올랐다.
백호 길드장도 마찬가지였고.
‘내가 저자를 어디서 봤었지? 이상하게 낯이 익군.’
박민준과 김채영이 백호 길드와 태백 길드 양측 사이에 섰다.
순간, 모두의 시선을 받은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동료들이 다 죽고 자신만 살아남아서 그런 걸까?
아니면, 그냥?
그녀의 모습을 본 박민준이 목소리를 높였다.
“왜 저놈들에게 고개를 숙이는 거지? 당장 고개를 들고 당당하게 행동해라. 네 옆에는 내가 있으니. 널 지켜줄 것이다.”
그 말을 듣고, 김채영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녀가 외삼촌에게 뭔가 말하려는데.
백호 길드장이 그녀에게 먼저 질문했다.
“저분 말이 맞습니다. 잘못한 게 없으면 고개를 숙이지 마십시오. 혹시 우리에게 말하지 않은 게 있어서 그런 겁니까?”
“아닙니다. 제가 아는 사실은 전부 말씀드렸습니다. 절대 속이거나 말하지 않은 건 없습니다.”
“그럼 우리가 하는 질문에 대답하면 잘하면 됩니다. 아셨습니까? 김채영 씨?”
“네. 길드장님.”
“좋습니다. 그럼, 내가 먼저 질문하지요. 아, 그래도 되겠습니까? 유 길드장님?”
태백 길드장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네. 먼저 질문하십시오. 나는 나중에 질문하겠습니다.”
어차피 그는 아는 게 별로 없다.
오히려, 멀리 떨어진 곳에 있던 백호 길드에서 뭔가 더 많이 알고 있는 듯 보였으니.
이번 기회에 그가 무슨 질문을 하는지, 잘 들어볼 참이었다.
주희철이 김채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어제 올린 보고서를 읽기는 했는데, 대체 왜 그렇게 빨리 베이스캠프가 무너진 겁니까? 아무리 봐도 난 이해가 안 돼서.”
“저도 몰라요. 그냥 저녁을 먹고 잠깐 쉬고 있는데. 녀석들에게 습격을 당했어요.”
“보초는? 동료들도 모두 한꺼번에 당했다는 겁니까? 우리 측은 물론이고, 저기 태백 길드 요원들이 수십 명이나 더 있었는데?”
“네. 처음엔 비명도 들리지 않았어요. 캠프가 아수라장이 된 뒤에야 놈들이 쳐들어온 걸 알고 싸웠으니까요.”
사건의 생존자가 직접 말했지만, 양쪽 길드 사람들은 아무도 믿지 않았다.
각성해서 감각이 뛰어난 사람들인데.
괴물들이 일부러 기척을 숨기지 않는 이상은 절대 그럴 수 없다.
“그럼 괴물이 조직적으로 존재를 감추고 일시에 캠프를 기습했다는 겁니까? 그것도 저녁을 먹고 쉬는 시간을 일부러 노려서?”
“제가 그걸 어떻게 알겠어요? 그냥 사실대로 말한 것뿐인데.”
백호의 부길드장 주희준이 끼어들었다.
그녀를 노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보세요. 김채영 사원. 지금 그곳에서 멀쩡하게 살아남은 사람이 당신뿐입니다. 여기가 어디라고 그렇게 화를 내는 겁니까? 제발 잘 생각하고 더 자세히 상황을 설명해 주길 바랍니다. 아셨습니까?”
“내가 뭘 어쨌다고요. 이미 아는 건 다 보고서로 작성했고. 지금 같은 걸 말로 물어볼 뿐이잖아요?”
“정말 그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올 겁니까? 혼자 멀쩡히 살아남았으면 책임감을 느껴야지. 나 원 참.”
순간. 박민준의 모습이 흐릿해지더니.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휙!
짝!
뺨을 얻어맞고, 거칠게 옆으로 돌아간 주희준의 얼굴이었다.
“아! 갑자기 뭐야?”
놀란 그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다시.
짝!
이번엔 반대편 뺨을 얻어맞고, 고개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주희준이 서둘러 정면을 바라봤지만, 자길 때린 사람을 보지 못했다.
“누구야? 어떤 놈이야?”
대답 대신 모두의 시선이 박민준에게 향했다.
태백 길드 측에서는 놀랍다는 반응이었다.
자기들끼리 속닥거렸다.
“지금 내가 제대로 본 건가?”
“사람이 저렇게 빠를 수가 있나?”
“저 정도면 그냥 순간이동 아니야?”
반면, 백호 길드에서는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부길드장은 두 볼을 손으로 비비고 있었고.
나머지 전략실장, 대외협력실장은 놀란 얼굴로, 부길드장의 눈치만 봤다.
주희철 길드장은?
말없이 박민준을 노려보며, 얼굴만 잔뜩 찌푸렸다.
‘이런 미친. 내가 반응하기도 전에 희준이 뺨을 후려치고 돌아간 건가?’
자기 동생이 얻어맞은 걸 막지 못했다는 자괴감보다 상대가 사람이 아닌 것처럼 빨랐다는 것에 충격이 더 컸다.
‘만약 동생이 아니라 날 노렸다면? 그땐 막을 수 있을까?’
그런 확신이 있다면,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동생을 때린 저자를 가만두지 않았을 거였다.
2대를 맞았으니.
4대를 때려줬을 터.
‘지금이라도 저놈과 붙어? 흠.’
그가 복잡한 마음을 표정으로 드러내고 있을 때.
박민준이 입을 열었다.
“내 조카를 핍박하는 놈들은 용서하지 않겠다. 이번엔 겨우 싸대기였지만, 다음엔 팔을 부러뜨려주마.”
“외삼촌!”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김채영이었다.
자기 상사를 때린 그를 향해 놀라서 소리쳤다.
“왜?”
“그렇게 갑자기 손을 쓰시면 어떻게 해요? 그럼 제가 뭐가 되겠어요?”
“뭐가 되긴? 이딴 곳에서 계속 일하다간 또 죽을 위기에 처하겠지.”
“외삼촌! 제발요.”
울상이 된 조카를 보고, 그가 입을 일자로 꾹 다물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크크 흠.
헛기침한 주희준이 얼굴에서 손을 내렸다.
그의 두 볼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손자국도 선명하게 남은 게 보였다.
“나도 감정이 격했으니. 이해하고 넘어가지요. 하지만….”
말을 하던 그가 박민준의 눈치를 봤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다시 말했다.
“나와 길드장님은 이번 일을 중대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차분하고 좀 더 세심하게 대답해 주길 바랍니다.”
“알았어요.”
그 뒤로 질문이 몇 번 오갔지만, 딱히 그녀가 올린 보고서에 있는 내용을 뛰어넘지는 못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만 접한 백호 길드장이었고.
이젠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질문하려 했다.
“김채영 씨에 대한 질문은 여기까지 하고. 그럼 지금부터 박민준 씨에게 묻지요.”
“말해봐라. 여기서 뭐가 또 궁금하지?”
“주작 길드와는 무슨 관계인 겁니까?”
대덕산 현장에 대해 질문할 줄 알았는데.
전혀 엉뚱한 걸 먼저 물어본 그였다.
박민준도 의외였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제일 먼저 궁금했다고?”
“그렇습니다. 우리 부길드장의 패드를 빼앗은 뒤에 곧장 주작 길드를 찾아간 이유가 뭡니까?”
모종의 거래가 있지 않았을까?
주요 정보가 담긴 패드를 들고 경쟁 길드로 가다니.
다행히, 돌려받은 패드를 검색한 결과.
해킹의 흔적을 찾지는 못했다.
그래도 찜찜한 건 마찬가지.
“그건 내 마음이지. 내가 이런 것까지 답해줘야 하나? 이딴 식으로 나오면 그냥 돌아가겠다.”
말뿐이 아니었는지.
그가 정말 문을 열고 나가려 했다.
모두가 황당한 상황에서 김채영이 외삼촌을 말렸다.
“제발요. 여기 오기 전에 저하고 약속하셨잖아요.”
“그랬지.”
박민준도 조카를 위해 함께 온 거였고.
그땐 백호 길드의 질문에 간단히 대답만 하면 된다고 했었다.
이렇게 죄인처럼 심문을 받는 게 아니라.
“그럼, 잠시만 협조해 주세요. 부탁드려요.”
조카의 부탁에 그가 잠시 저들에게 아량을 베풀기로 했다.
다시 자리로 돌아온 박민준이 백호 길드장을 똑바로 바라봤다.
“거기 아는 사람이 있어서 태백까지 헬기를 빌려 타려고 했다.”
“단지 그뿐입니까? 혹시 일부러 부길드장의 패드를 노린 건 아닌 겁니까?”
“흥. 개소리. 계속 그딴 식으로 말할 거면, 조카네 상사고 뭐고, 너도 가만두지 않겠다. 옆의 놈처럼 맞으면 정신을 차리려나?”
“뭐가 어쩌고 어째?!”
콰당!
의자가 뒤로 넘어가면서 큰 소리가 났다.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백호 길드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