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응. 내가 좀 급해서. 조카가 위험한 상황일지도 몰라.”
“아. 그렇다고 지금 이렇게 가시면…….”
잠시 눈치를 보던 그녀가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났다.
“그럼 내가 직접 데려다줄게요. 길이 복잡하니까. 그게 더 좋겠어요.”
이지원의 말을 들은 국장이 이때다 싶어 나섰다.
크게 목소리를 높여 꾸짖었다.
“자네 지금 뭐 하는 건가? 대통령님과 식사 중인 걸 잊었나? 그런데 저자와 어딜 가겠다고?”
“이미 먹을 만큼 먹어서 배불러요. 감사히 잘 먹었으니까. 일찍 일어날게요. 이해해 주세요. 대통령님.”
솔직히 지금 대통령의 심정은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새로 떠오르는 오산역의 영웅이자 S등급 박민준을 국가의 품으로 끌어들일 생각에 저녁 자리를 마련한 거였는데.
그런 그의 야무진 꿈이 산산조각이 났다.
‘아무리 대통령인 나라고 해도 별수가 있나? 젠장.’
대한민국 전체에서 겨우 3명밖에 없는 S등급 헌터 가운데 두 명이 저렇게 나오는데?
짜증 나고 싫어도 그냥 이해하는 척 구는 수밖에.
“당연히 이해하지. 가족이 위험할지 모르는데. 이깟 식사가 문제인가?”
“역시 대통령님이세요. 고맙습니다.”
“이지원 양. 자네가 박민준 씨를 잘 돕도록 하게. 아니지. 혹시 내가 도울 일은 없나?”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눈을 반짝였다.
“한 가지 있기는 해요.”
“뭔가 어서 말해 보게.”
“위치 추적을 좀 부탁드려요.”
“박민준 씨의 조카가 있는 곳 말인가?”
“네. 그 사람이 어디 있는지, 추적하면 알 수 있잖아요?”
“추적장치를 달고 다닌다면 모를까? 갑자기 그런 게 가능할는지? 난 잘 모르겠는데?”
도와줄 듯 굴다가, 슬쩍 발뺌하는 대통령을 보고 이지원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가능해요. 대통령님.”
“그래? 통신사에게 요청하면 되나?”
“네. 그러면 될 것 같아요. 그 정도는 가능하시죠?”
“그렇긴 한데. 그건 국가 안보에 준하는 상황에서만 특별히 허락하는 거고. 평시에는 불법이라…….”
“에이. 도와주신다면서요?”
“알았네. 내가 따로 힘 좀 쓰겠네.”
혼자 식은땀을 흘린 국장이었다.
‘아직 부국장에게 말해주지 않은 게 다행이군. 하마터면 여기서 우리 게이트 관리국의 기밀을 다 까발릴 기세잖아?’
사실 게이트 관리국에서는 국내 통신 회사들과 비밀리에 계약한 상태였다.
비정규 게이트가 열리는 걸 최대한 빠르게 파악하거나, 범죄를 저지른 빌런을 추적한다는 명목으로.
국내의 모든 통화를 마음대로 조회할 수 있었다.
통화 시간, 대상, 지역, 심지어 문자 내용까지도.
그런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면?
‘정말 난리가 나겠지.’
그 일은 심지어 대통령도 모르고 있었다.
국장과 통신사 사장, 그곳의 극히 일부의 직원만 공익이라는 이유로 비밀리에 진행한 일이었으니.
아니지, 지금 보면, 대통령님도 게이트 관리국의 사정을 이미 알고 있는데,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것 같기도 하고.
한편, 박민준은 시간을 계속 끌고 싶지 않았다.
“그만 가야겠다. 여기서 더 이럴 시간이 없어.”
“알았어요. 그럼 어서 나가요.”
박민준과 이지원이 나가고.
어색하면서 썰렁한 분위기가 감도는 만찬장이었다.
오늘 저녁의 주인공인 박민준이 떠나버렸으니.
크크 흠.
슬쩍 주위를 돌아본 대통령이 헛기침하고 말했다.
“나도 그렇고, 여러분들도 식사를 다 한 것 같은데. 우리도 그만 일어납시다.”
이때가 기회다 싶었던 걸까?
게이트 관리국장이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각하.”
“자네가 왜 죄송한가? 일이 그냥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을.”
“그래도. 박민준 저자가 저런 인간인 걸 미리 알고, 제가 컨트롤했어야 했는데.”
“그 사람이 자네 부하도 아닌데, 관리가 가능하겠나? 아니면 그를 영입할 수 있는 좋은 아이디어라도 따로 있는 건가?”
아이디어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그냥 자기가 싫은 박민준이 무례하게 굴었으니.
대통령의 비위나 맞춰주면서 점수를 딸 생각이었을 뿐.
그가 제대로 대답을 못 하자.
대통령이 실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무능한 인간. 저것도 언젠간 갈아치워야 할 텐데.’
게이트가 열리던 초기의 활약을 벌써 십 년 넘게 우려먹고 있었으니.
대중들도 더는 그에게 관심을 주거나 존경하는 것 같지도 않고.
‘다음엔 누굴 앉히지? 이지원은 너무 어리고. 그렇다고 마땅한 인물도 없고.’
박민준? 나이나 최근 인기로 따지면 그자가 적당하긴 하지만, 인성도 별로고, 날 대하는 태도도 최악이니.
그렇다고 그 인간을 앉혀?
아. 인재가 없네. 인재가 없어.
결국, 경호실장을 앉혀야 하나?
사람이 너무 우직하고 고지식하긴 해도.
나에게 목숨 걸고 충성하는 자이니.
대통령이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게이트 관리국장이 연신 박민준 욕을 하면서 대통령의 비위를 맞춰주기 바빴다.
그래 봤자, 대통령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으니.
아무 소용도 없었다.
경호실장에게 검을 돌려받은 박민준이 곧장 차에 올라탔다.
“백호 길드는 여기서 멀리 있나?”
“아니에요. 금방 도착할 수 있어요.”
“그럼 어서 출발하지.”
“알았어요.”
도와주는 사람에게 좀 친절하게 말할 수는 없나?
속으로 조금 아쉬우면서도 서둘러 액셀을 밟았다.
부 웅~
***
50층은 족히 되어 보이는 서울의 한 빌딩.
그곳이 바로 백호 길드 본사였다.
이미 저녁 7시가 넘어 해가 진 뒤였지만, 빌딩 안 곳곳에 불이 켜져 있었다.
제일 꼭대기 층도 마찬가지였고.
해외 출장을 나간 길드장을 대신해, 현장 상황실에 방문한
부길드장이었다.
그곳의 직원이 부길드장이 온 줄도 모르고,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아! 언제 오셨습니까? 지금쯤 퇴근하신 줄 알았습니다.”
“됐고. 내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잖아? 그거나 말해봐.”
“네. 태백 길드를 지원하러 간 오영식 팀과 연락이 전혀 닿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 지금 산속이라 그런가? 위성 전화 지급 안 했어?”
“작동되는 걸 확인하고 지급했습니다.”
“마지막 보고는?”
“6시간 전입니다. 태백 길드와 무사히 만났다는 보고였습니다.”
“그럼 지금 연락이 왔어야 하는 게 맞군.”
“네. 그래서 제가 태백 길드 쪽으로 문의했는데. 그곳도 현장에 나간 팀과 연락이 끊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닐 터.
주희준 부길드장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빌어먹을. 대체 무슨 일이야? 태백이 우리에게 4등급 괴물이라고 하지 않았나?”
“맞습니다.”
“그럼, 우릴 속였다는 건가?”
“아까 제가 통화할 때 들어보니. 그들도 당황한 듯싶었습니다.”
“알 수가 없군. 계속 연락해보고. 내 허락 없이 외부에 절대 이 사실을 알리지 마.”
“네. 알겠습니다.”
명성이 올라가고 있는 백호 길드다.
겨우 4등급 괴물을 처리하러 가서 실패했을지도 모른다고 소문이라도 돌면?
‘그런 망신이 또 어딨겠어?’
차라리 5등급이나 6등급 괴물이 나오는 편이 더 낫지.
그럼 당연히 파견 보낸 사람들이 대부분, 아마 거의 다 죽겠지만, 체면치레라는 할 수 있잖아?
엉터리 정보를 제공하고 도움을 청한, 태백 길드에 인명과 물적 피해에 대한 손해배상도 청구할 수 있고.
***
서울 시내 한복판을 빠르게 달리던 이지원의 차가 거대한 빌딩 앞에서 멈춰 섰다.
“도착했어요.”
“고맙다. 그럼 다음에 보도록 하지.”
혼자 내리려는 그에게 이지원이 말했다.
“나도 같이 가요.”
입구 앞에 선 박민준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입구에 손잡이도 없고, 그렇다고 회전문도 아니었으니까.
“어떻게 들어가지?”
“요즘 건물은 다 첨단보안으로 관리되고 있어서 아무나 못 들어가요. 낮이라면 혹시 모를까 특히 이런 밤에는 더욱요.”
부드럽게 설명한 그녀가 입구 옆에 있는 단추를 눌렀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게이트 관리국 이지원 부국장이에요. 문 좀 열어줄래요?”
“네? 네. 지금 바로 열어드리겠습니다.”
그녀가 자기 소속과 이름을 말하자, 굳게 닫혀있던 강화 유리문이 좌우로 열렸다.
“내가 함께 오길 잘했죠?”
“그런 것 같군.”
“그런 것 같은 게 아니라 그런 거죠. 내가 안 왔으면 이렇게 빨리 못 들어갔을걸요?”
“그래.”
박민준이었다면 아마 바로 문을 열어주지 않았을 거다.
그가 자기를 새로운 S등급이라고 먼저 소개할 리도 없었고, 만약 그렇다고 해도, 그걸 야간 경비원이 믿어 줬을까?
아마 강제로 입구를 부수거나 검으로 잘라내고 들어갔겠지.
하지만 이지원은 전 국민이 다 아는 유명인.
당연히 경비 직원도 그녀의 얼굴과 목소리를 다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이 로비에 들어섰다.
백호 길드 사람들이 급히 뛰어오는 게 보였다.
“아이고. 부국장님.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아! 부길드장님? 오랜만이네요.”
한국 10대 헌터 길드의 부국장 주희준이 직접 마중 나왔다.
길드장이 지금 건물에 없었을 뿐.
만약 그도 있었다면 밑으로 내려오지 않았을까?
국가기관과 민간이라 서로 소속은 다르지만, 이지원의 위치가 그 정도였다.
게이트 관리국 부국장. 세계 최연소 S등급.
말이 더 필요한가?
“옆에 계신 분은 누구신지요? 제가 처음 뵙는 분 같은데?”
“왜 오산역 사건 아시죠? 그때 괴물을 혼자 처리하셨는데.”
“아하! 오산역의 영웅이 이분이셨군요. 정말 반갑습니다. 혹시 성함이?”
“박민준이다.”
“박민준 씨 정말 반갑습니다. 오산역에서의 활약이 정말 대단했습니다. 혹시 계약은 하셨는지요? 두 분이 함께 오신 걸 보면 이미 게이트 관리국과?”
자신에게 칭찬과 함께 큰 관심을 보이는 부길드장이었다.
평소라면 모를까, 박민준은 지금 그걸 받아줄 기분이 아니었다.
“쓸데없는 말은 이제 정도면 된 것 같은데.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20년 만에 돌아와서 아직 만나지도 못한 조카가 위험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으니까.
“혹시 이지원 부국장님이 아니라, 여기 박민준 씨께서 우리 길드에 볼일이 있으신 겁니까?”
“맞아요. 이분의 조카가 백호 길드 소속 헌터라고 했어요. 아까 연락이 갑자기 끊어졌다고 했어요. 맞죠?”
“그래.”
고개를 끄덕인 주희준 부길드장이 패드를 꺼내며 물었다.
“혹시 그 사람의 이름과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
“이름은 김채영. 나이는…. 20대 초반?”
조카를 돕고자 왔으면서 정작 정확한 나이도 모르고 있었다.
조금 민망할 수도 있는데.
박민준은 떳떳했다.
‘그럴 수도 있지. 가끔 내 나이도 헷갈리는데.’
주희준이 이름을 검색했다.
“아. 김채영이란 직원이 세 명이나 있군요. 혹시 조카분의 등급도 알고 계십니까?”
“등급은 C라고 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다시 확인해보겠습니다.”
이번엔 다행히 한 명으로 압축되었다.
“C등급 김채영 사원은 지금 강원도 태백시에 있습니다.”
말을 하던 그가 중간에 눈살을 찌푸렸다.
금방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표정으로 바뀌었다.
제 딴엔 아무도 못 봤겠다고 생각했겠지만.
박민준은 이미 똑똑히 보았다.
“조카가 거기 있다는 건 나도 이미 안다.”
“그럼 뭐가 문제입니까?”
그곳에 문제가 생긴 걸,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연기하는 주희준이었다.
그런 그를 두고 이지원이 끼어들었다.
“연락이 갑자기 끊어졌다니까요. 자기 어머니에게 다신 못 볼 수도 있다는 듯 말했다고 했고. 내 말이 맞죠?”
“너 다 엿들은 거냐?”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통화 소리가 너무 커서 듣게 된 것뿐이에요.”
둘이 잠시 대화를 나누는 사이.
주희준이 패드를 다시 열심히 눌렀다.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긴 하군요. 김채영 사원이 속한 팀으로부터 본사가 보고받을 시간이 막 지났습니다. 하지만 가끔 이러한 일도 있긴 하니 절대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건 또 무슨 소리지?”
거짓말을 하려면 진실도 조금 섞어야 한다.
그게 더 자연스럽고, 남을 더 잘 속일 수 있는 비결이었다.
실제로 그녀가 있는 현장이 험한 산 지역이라, 연락이 잠시 늦어지는 걸 수도 있다는 생각이 상식에도 맞았고.
백호의 부길드장도 지금 후자에 무게를 두고 말했다.
물론 현 상황은 그게 아니지만.
‘문제가 생긴 걸 다른 사람이 알아서 절대 좋을 게 없다.’
그는 외부인들이 자신의 말을 믿어주길 바랐다.
“제가 보기에는 작전을 수행하다가 어디 동굴에라도 들어갔을지 모릅니다. 아니면 계곡이라 통신이 안 되는 거일 수도 있고.”
이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럴 수도 있겠네요.”
박민준은 고개를 저었다.
아주 의심스럽다는 듯 부길드장에게 물었다.
“네 말 확신할 수 있나? 그나저나, 내 조카가 어떤 임무 때문에 거기까지 간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