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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자가 힘을 안 숨김-21화 (21/175)

21화

그가 작은 플라스틱 카드를 꺼냈다.

“그게 뭔데?”

“박민준 씨의 헌터 등록증입니다.”

“그래? 참 빨리도 주네.”

그 여자가 중간에 뛰쳐나가지 않았으면 진작 받았을 텐데.

게이트 관리국과 계약도 안 할 생각인데, 굳이 거길 다시 찾아가서 빨리 처리해 주길 요구하기도 좀 뭐했다.

‘그렇다고 이걸 이제야 받다니.’

등록증 앞면에는 한글과 영어로 박민준이란 이름이 크고 굵게 적혀 있었다. 옆에는 그의 사진이 있었고.

제일 밑에는 각성 등급 S라는 글자가 작게 보였다.

“마음에 드십니까?”

“마음에 들고 아니고가 어딨어? 그냥 필요하다니까 만든 거지.”

“그러셨군요. 아무튼, 축하드립니다.”

“고마워. 이제 끝이야?”

“아닙니다. 제일 중요한 일이 남았습니다.”

보상금과 헌터 등록증 말고 더 중요한 게 뭘까?

의문 어린 시선을 받은 방 부장이 그에게 초대장을 건넸다.

“그건 또 뭐야? 누구 결혼해?”

“아닙니다. 잘 보십시오. 대통령님께서 박민준 씨를 초청하셨습니다.”

“나 혼자? 그건 아니겠지?”

“우리 국장님과 부국장님도 함께 들어가실 겁니다.”

“날짜가 이번 주말이네?”

“네. 토요일 저녁 대통령님과 만찬을 하고, 대화를 나누시게 될 겁니다.”

무척 영광이라는 듯.

남의 일에도 자랑스러워하는 방 부장이었다.

그런 그와는 달리, 박민준은 시큰둥했다.

“원래는 조카가 집에 오는 날이라 안 되는데. 운이 좋네.”

“네? 그게 무슨 말씀인지요?”

“조카가 출장 가서 여기에 갈 수 있게 됐다고.”

“아니. 겨우 조카분이 온다고 대통령님과의 저녁 만찬을 안 가시려 했단 말입니까?”

“겨우? 나한테는 대통령보다 우리 가족이 더 소중해. 한 번만 더 그딴 식으로 말하면 너 가만 안 둬.”

“죄송합니다. 제가 큰 실수를 했습니다.”

“알았으면 조심해. 두 번은 용서하지 않아.”

“알겠습니다. 그럼 오실 거라 믿고 토요일 날 뵙겠습니다.”

“내가 널 또 왜 만나?”

“당연히 우리 국장님과 부국장님을 먼저 만나고 함께 들어가셔야지요. 그때 저도 수행할 겁니다.”

“내가 왜?”

“왜라니요? 그럼 따로 들어가실 생각이셨습니까?”

“어. 나 혼자 지하철 타고 가려고 했는데. 경복궁역에서 내리면 되지 않나?”

아마 거기 가는 길만 알았으면 직접 뛰어서 갔을 거다.

말이 있으면 말을 탔을 거고.

“그렇긴 한데. 우리가 그날 박민준 씨를 태우러 오겠습니다. 그러니, 함께 들어가시지요?”

“태우러 오겠다고? 난 또 나 보고 게이트 관리국까지 미리 오라는 줄 알았네.”

“그럴 리가요. 대한민국 3번째, S등급 헌터 박민준 씨를 우리가 모셔야지요.”

“그걸 너도 알긴 아는구나. 나 보고 강제로 게이트 관리국으로 오라고 하면 다신 너희랑 상종도 안 하려고 했거든.”

“아. 네. 그것참 다행이군요.”

고개를 숙인 그가 속으로 욕했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정말 보면 볼수록 제멋대로네.’

“왜 갑자기 고개를 숙여? 나한테 뭐 잘못했어? 설마 속으로 내 욕했나?”

“아닙니다.”

“맞나 본데?”

“절대 아닙니다.”

“그래. 속으로라도 몰래 욕하지 마. 걸리면 가만 안 둬.”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이제 끝이지?”

“맞습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잘 가. 아! 토요일 몇 시에 올 거야?”

“1시입니다.”

“알았어. 그럼 그날 봐.”

“네. 편히 쉬십시오.”

집 밖으로 나온 그가 박민준의 욕을 하려 했다.

“정말 뭐 저런 놈이 다 있지. 마음 같아서는 내가 응? 왜 그래?”

소해진이 그런 그를 말렸다.

“하지 말라고? 설마 여기서 듣겠어?”

끄덕끄덕.

“정말? 그럼 큰일이지. 어서 돌아가자고.”

안에 있던 박민준이 혼자 중얼거렸다.

‘운이 좋은 놈이네. 거기서 한마디만 더 했으면 팔, 다리를 하나씩 부러뜨려 버리려고 했는데.’

***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마친 박민준이 외출준비를 했다.

보석과 금, 보상금으로 받은 현금까지 가방에 적당히 넣었다.

전부 넣기에는 액수가 너무 많아서 가득 채우는 거로 만족해야 했다.

‘그나저나 5만 원권이 생겼구나. 신기하네. 이젠 다들 수표를 덜 쓰겠네.’

2002년에는 5만 원권 지폐가 없었다.

지갑이 두꺼워지도록 지폐를 뭉치로 넣고 다니지 않아도 되고.

좋다고 생각했다.

‘만 원짜리로 35억을 다 받았으면, 내 방을 가득 채울 수 있었으려나?’

잠시 엉뚱한 상상을 했지만, 한번 해 보고 싶기는 했다.

돈을 더 많이 벌면 해봐야겠다.

부지런히 집을 나서는 그를 보고, 박미희가 물었다.

“아침부터 어딜 가려고?”

“은행도 들르고 쇼핑도 하려고.”

“쇼핑? 나도 그거 엄청나게 좋아하는데.”

“당연히 그러시겠지. 누나는 원래 예전부터 대책 없이 돈을 썼잖아. 과소비가 취미였지.”

“내가 언제? 그리고 너 말투가 그게 뭐야? 아침부터 나랑 싸우자는 거야?”

“아니. 이거나 받아.”

척!

박민준이 뭔가를 꺼내서 누나에게 건넸다.

손가락 한 마디 만한 크기의 검은색 돌멩이?

“이게 뭐야? 장난감? 넌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이런 걸 가지고 놀아? 나한테 이걸 왜 주는 건데?”

“그거 보석이야.”

“이 검은 돌이 보석이라고?”

“그래. 팔아서 부모님하고 누나에게 필요한 거 사.”

“진짜? 이게 얼마짜리인데?”

“그건 나도 모르지.”

어깨를 으쓱하는 동생을, 그녀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다.

“너…. 설마, 이거 훔친 거야?”

“아니야. 아는 사람한테 받은 거야. 문제없는 물건이니까 걱정하지 마.”

문제가 생기면 그를 찾아가서 박살 내 버릴 생각이었다.

‘그땐, 광교산에 살아있는 상태로 묻어버려야지.’

박민준이 무시무시한 상상을 하는 것도 모르고, 박민희가 다시 따지고 물었다.

“얼마인지 가치도 모르는 보석을 누가 너한테 선물로 줘? 네가 돌아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대답 대신.

자꾸 캐묻는 누나를 향해 그가 손을 뻗었다.

“왜? 뭐 어쩌라고?”

“갖기 싫으면 그냥 돌려줘. 좋은 마음으로 준 건데. 기분 나빠서 안 되겠어.”

“얘는 줬다가 뺏는 게 어딨어? 그냥 걱정되어서 물어본 거지.”

“치. 그러시겠지.”

이번엔 그녀가 대꾸하지 않았다.

진짜 보석이라는 말을 듣고, 눈이 빠지라 살피고 있었으니까.

“네 말을 들으니까. 뭔가 갑자기 비싸 보이긴 한다. 고마워. 잘 받을게.”

“혼자 다 쓰지 말고, 아버지, 엄마도 챙겨드려.”

그것 말고도 다른 보석이 많이 있지만, 함부로 쓸 생각은 없었다. 돈이란 가지면 가질수록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법이었으니.

그래서 가족을 믿으면서도 적당히 돈을 풀 생각이었다.

가족들이 박민준에게만 너무 기대지 않으면서, 적당히 사치 부리면서 편히 먹고 살 정도로.

“다녀올게.”

“그래. 우리 동생. 조심히 다녀와.”

“그거 하나 받았다고 목소리가 달라져?”

“무슨 소리니? 내가 널 얼마나 끔찍이 여기는데.”

그가 낯간지럽다는 얼굴로 대답하지 않고 집을 나섰다.

먼저 찾아간 곳은 은행이었다.

거래 정지된 계좌를 풀고, 통장도 새로 받았다.

“앱을 설치하시면 종이 통장을 안 쓰셔도 되세요.”

“앱? 그게 뭐지? 새로 나온 통장인가?”

“네? 혹시 스마트폰 안 가지고 있으세요?”

액정이 엄청나게 큰 휴대폰을 따로 스마트폰이라 부르는 걸 이젠 그도 잘 안다.

“그 대형 화면을 가진 휴대폰이라면 이제 곧 은행을 나가서 살 생각이야. 제일 비싸고 좋은 거로.”

“아! 지금은 없으시구나. 그래도 젊은 고객님이라 앱을 잘 사용하실 수 있으실 텐데. 평소에 사용 많이 하시죠?”

“젊긴 무슨. 신원 확인하면서 내 신분증을 봤을 텐데? 설마 아직 안 봤나?”

방금 헌터 등록증을 주민등록증 대신 제출했다.

워낙 각성한 헌터의 숫자가 많아서 전 세계 어딜 가도 공식 신분증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박민준의 나이와 사진을 확인한 은행원이 눈을 부릅떴다.

정말 놀란 듯.

손에 든 등록증과 그를 빠르게 번갈아 봤다.

“네. 그러니까 고객님 나이가 42세? 어머머. 이게 웬일이야. 세상에 이런 일이. 엄청 동안이시네요.”

“알았으니까. 그만하고. 아무튼, 이제 다 끝난 건가?”

그가 호들갑을 떠는 직원을 진정시켰다.

“죄송합니다. 고객님. 지금부터 그 계좌를 가지고, 정상적으로 은행거래를 하실 수 있으세요.”

“그럼. 돈을 입금하도록 하지.”

“아까 돈도 먼저 주셨어도 됐는데.”

“그래? 액수가 좀 많은데?”

“얼마나 되시는데요?”

질문하던 직원이 슬쩍 박민준을 위아래로 살폈다.

고객이 나름 헌터이긴 한데, 입고 있는 옷이 굉장히 수수했다.

‘많아 봤자, 몇백만 원 되겠지. 아니, 꼴에 헌터니까 조금 더 많으려나?’

그녀는 엄청 동안인 박민준과 실제 나이 차이 때문에 놀란 나머지, 그 밑에 작게 쓰여 있는 S등급을 미처 보지 못했다.

알았으면 그런 생각도 안 하고 질문조차 하지 않았을 텐데.

탁!

박민준이 가방을 데스크 위에 올렸다.

“죄송하지만, 고객님. 가방을 거기 올리면 안 되는데요?”

“돈을 꺼내야 입금을 하지?”

“아. 네.”

치. 요란도 하네.

은행에서 일하는 사람이라 어지간한 액수는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박민준이 가방 가득 들어 있던 5만 원 지폐를 꺼내자.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다 얼마야? 5억? 아니지, 10억은 되려나?’

직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시만요. 고객님. 제가 잘못했어요.”

“응?”

“돈을 그냥 그렇게, 거기 다 막 쏟아놓으시면 안 돼요. 제가 따로 모실게요.”

돈이 얼마인지 계산도 해야 하지만, 저 정도 액수의 현금을 아무렇지 않게 은행에 맡기는 고객이라면, 당연히 이 지점의 특별한 고객이 될 가능성이 크다.

‘능력 있는 헌터였네.’

그렇다면 다달이 막대한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않을까?

뒤로 따로 데려가서 차를 대접하고, 그 사이에 돈을 세야겠다.

그렇게 마음먹고 있었는데.

박민준의 얼굴 다시 본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그러고 보니, 고객님을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네요?”

“그런가? 얼마 전에 TV에 나오긴 했는데. 그때 봤나?”

“어쩐지. 근데 어디서 활약하셨어요? TV에 나오실 정도면 보통 일이 아니었을 텐데요?”

“오산역에서 촉수를 머리카락처럼 지닌 거대 괴물을 처리했다.”

“어머머! 고객님이 그때 그분이셨어요? 전 정말 몰랐어요. 세상에. 같이 사진 찍어도 돼요?”

“지금 이렇게 갑자기?”

“죄송해요. 제가 너무 흥분했지요. 하지만 너무 멋있으셔서.”

멋있다는 말을 듣고 그가 선심을 쓰기로 했다.

“뭐, 그렇다면야, 한 장쯤은 찍어줄 수 있는데.”

“정말요? 감사합니다.”

엄청난 속도로 은행 데스크를 가로지른 그녀였다.

박민준과 팔짱을 끼더니.

찰칵!

자기 폰으로 그와 사진을 찍었다.

“거기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설마 근무 중에 고객님과 사진을 찍은 겁니까?”

앞뒤 상황은 잘 모르지만, 자리를 벗어나서 고객과 저런 짓을 벌이다니.

뒤늦게 그녀를 본 은행 상사가 낮은 목소리로 호통쳤다.

“차장님. 그게 아니라.”

“아니긴. 당장 고객님께 사과하세요.”

“네.”

그녀가 박민준에게 허리 숙여 사과했다.

“고객님. 정말 죄송해요.”

차장도 박민준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직원 관리를 잘못했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괜찮다. 내가 허락한 건데. 뭐.”

그를 본 차장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죄송하지만, 혹시 연예인입니까? 제가 TV에서 뵌 것 같은데.”

“차장님. 그게 아니에요. 이분이 오산역에서 괴물을 처치한 그 영웅이래요.”

“그래? 그럼 진작 말을 하지.”

“제가 해명할 틈도 없이 몰아붙이셔서.”

“그런데 이 돈은 또 뭡니까? 왜 이렇게 쌓아뒀어요?”

“그건 고객님이 우리 지점에 맡기신다고 그렇게.”

“아니. 이걸 이렇게 두고 사진을 찍었단 말입니까?”

“죄송해요. 너무 마음이 급해서.”

“쯧. 어서 이것들 챙겨서 특실로 따라오세요.”

“네. 죄송합니다.”

그렇게 한바탕 소동이 끝나고, 박민준도 드디어 은행 업무를 마칠 수 있었다.

차장이 몰래 그와 사진을 찍은 건, 다른 은행직원들도 모르는 비밀이었고.

사실 박민준은, 다른 세계에서도 무림 맹주라는 굉장한 유명인이었으니, 사람들의 관심에 나름대로 상당히 익숙했다.

의외로 자길 알아봐 주는 사람에게 친절한 편이기도 했고.

다만, 너무 과한 거나 정신 사나운 건 싫었지만.

그건 누구나 꺼리지 않을까?

‘그때 오산역처럼 말이지. 단체로 떠드는 통에 시끄러워서 참을 수 있어야지. 배도 고팠고.’

은행 근처 통신사에서 스마트폰을 새로 사서 개통했다.

아까 그가 했던 말처럼 제일 비싸고 좋은 거로.

“이게 올해 나온 최신형입니다. 화면도 접을 수 있고, 배터리도 탈부착 가능이라 미리 충전된 거로 바로 교체할 수 있습니다.”

“배터리는 원래 탈부착 되잖아? 그게 무슨 장점이야?”

“네?”

폰을 손에 들고나온 박민준이다.

‘이건 좀 신기하군. 화면을 접었는데도 깨지지 않는다니.’

이제 집으로 가나 싶었는데.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지하철을 타더니.

품속에서 지니고 있던 뭔가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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