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소해진이 잠시 고민했다.
‘어떻게 알아본 걸까? 그동안 아무도 몰랐는데?’
심지어 다른 S등급인 부국장과 협업한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때도 전혀 들키지 않았었다.
다른 검을 주 무기로 쓰고, 이건 비장의 무기로 남겨둔 거였으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절대 검으로 보이지도 않았고.
‘이자가 이미 알고 있다면 숨기는 의미가 없다.’
또한, 그녀는 오산역에서 엄청난 활약을 보인 그에게 존경심을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끄덕.
마음을 정한 그녀가 박민준을 향해 작게 고개를 움직였다.
“검을 직접 구경해도 되나? 정말 보기 드문 명검인 것 같아서.”
자길 똑바로 바라보는 그를 향해, 소해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왼팔을 내밀었다.
그걸 본 방 부장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자네 지금 뭐 하는 거야? 우린 일을 하러 지금 온 거야. 자네의 무기 같은 건 나중에…….”
“더럽게 시끄럽네.”
탁!
박민준이 손가락 끝으로 그의 몸을 집었다.
말을 하던 모습 그대로 움직임이 멈춘 그였다.
놀란 토끼 눈이 된 소해진이었다.
그녀를 향해 박민준이 싱긋 웃어 보였다.
“아프게 한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하지만 조용하니까 좋지 않나? 저놈은 원래 저렇게 수다쟁이인가?”
끄덕끄덕.
“그랬군. 그럼 이제 내가 검을 구경해도 되겠지?”
끄덕끄덕.
“고맙군. 그럼 어디.”
그가 소해진의 팔찌를 빼냈다.
은과 진주로 꾸며진 게 제법 묵직했다.
잠시 살핀 박민준이 그대로 내공을 주입하자.
촤르르르르륵!
가벼운 쇳소리와 함께 검으로 바뀐 팔찌였다.
검날이 상상 이상으로 가늘었다.
“팔찌로 위장한 연검이라. 이런 걸 여기서도 볼 수 있다니.”
지구로 돌아오면 이런 걸 다신 구경할 수 없을 줄 알았다.
검을 마저 살피던 박민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거실 넓은 곳으로 향한 그를 어리둥절한 시선으로 바라본 소해진이었다.
적당히 자리를 잡은 박민준이 검을 들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에는 검 끝의 궤적이 나비의 움직임처럼 보였다.
힘없이 파르르 검날이 떨리면서도 그 방향을 잃지 않았고, 무척 가벼우면서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력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연검과 하나가 되어 검무를 추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다.
박민준이 첫눈에 보기에는 엄청난 미남은 아니었다.
그저 호감 가는 얼굴 정도?
하지만 지금 소해진의 눈에는 그가 세상에서 제일 멋있는 남자처럼 보였으니.
그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내가 꿈꾸던 경지야. 아름답고 강해.’
한바탕 검무를 춘 그가 마지막 동작까지 마쳤다.
땀 한 방울 나지 않았지만, 습관처럼 손으로 이마를 쓸어내며 물었다.
“어땠어? 거칠고 드센 곤륜산맥 사이를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나비가 보였지?”
소해진이 방긋 웃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곤륜산맥이 어딘지는 모르지만, 분명 산 위를 자유롭게 나는 나비의 모습이 그녀의 눈에도 그려졌었다.
“마음에 들었나? 그럼 내게도 너의 검을 보여주겠어?”
끄덕.
소해진이 그에게서 검을 건네받았다.
그녀는 검무를 추지 않았다.
대신 부드러워서 자유롭게 움직이는 검날을 이용한 검술을 선보였다.
자칫 잘못하면 스스로 몸을 찌를 듯 위태로워 보였지만, 정작 그 검을 다루는 소해진의 얼굴은 무척 평온했다.
좁은 거실도 상관없다는 듯, 마음껏 기량을 펼치는 그녀였으니.
가구나 집을 망가뜨릴까 봐 두려운 누나와는 달리.
박민준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헉헉.
한바탕 검술을 펼친 소해진이 거친 숨을 몰아 내쉬었다.
이마에도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가 보여준 검무에 감동한 나머지 그녀가 가진 능력 이상의 모습을 잠시 선보일 수 있었다.
‘최고야. 이렇게도 할 수 있었구나.’
그녀는 각성하면서 특성으로 연검술이 생겼다.
그에 걸맞은 무기인 팔찌 변형 연검을 얻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 뒤로 매일 수련해왔다.
휙!
박민준이 손을 한 번 휘젓자, 시원한 바람이 그녀의 이마를 스치고 지나갔다.
“역시. 넌 좀 다르구나. 각성한 후에도 따로 연검술을 계속 수련하고 있었지? 그렇지?”
끄덕.
각성해도 단순히 시스템에 기대서는 성장하기 어렵다.
박민준도 목숨을 건 실전을 통해, 곤륜파의 무공을 완벽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너 같은 인재를 이렇게 만나다니. 앞으로 계속 수련하면 대성할 수 있을 거야. 각성했다고 수련을 게을리하면 안 돼. 그럼 다른 놈들처럼 반쪽짜리 고수밖에 될 수 없다고.”
끄덕끄덕.
“손목의 힘을 더 빼야 해. 검을 지금처럼 너무 강하게 쥘 필요도 없어. 그럼 변화를 추구하기 어렵거든. 무슨 말인지 알겠어?”
박민준도 뜻밖의 장소에서 좋은 인재를 만났으니.
여느 때와는 다르게 조언을 길게 해줬다.
그는 실제로 헌터들을 보고 크게 실망했던 것과는 달리, 지금 기분이 좋았다.
아직은 그녀의 경지가 높지는 않지만, 저런 검술을 노력해서 익히고 있으니.
더 성장할 수 있다.
실제 전투에서도 상당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
이번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자기에게 조언을 해준 걸 깨달았다.
그녀가 박민준을 향해 손등이 위로 보이도록 손바닥을 펴더니.
다른 손을 곧게 펴서 손등 위를 두 번 톡톡 쳤다.
‘뭐지? 조언을 해줘서 고맙다는 건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 박민준은 그녀의 눈빛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런 좋은 검은 어디서 난 거야? 가보인가? 검법도 가문의 검법?”
소해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질문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해서 뭐가 아니라는 건지 몰랐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가보가 아니야?”
끄덕.
“그렇구나. 그럼 어디서 구한 건데. 그걸 말해줄 수 있어?”
잠시 고민한 그녀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촤르륵!
소리를 내면서 다시 팔찌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팔찌로 변한 연검을 손목에 찬 그녀가 자리에 앉았다.
손으로 큰 네모를 그리고, 뭔가를 쓰는 것 같은 모습을 보였다.
고개를 끄덕인 박민준이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누나! 여기 볼펜하고 종이.”
“알았어.”
잠시 후. 박미희가 가져온 종이와 펜을 소해진에게 내밀었다.
그녀가 작성하는 걸 보고 박민준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검법은 각성하면서 얻은 특성으로 익히던 거고, 연검은 따로 구한 거라고? 거기가 어디야? 알려 줄 수 있어?”
끄덕.
상세하게 약도 그려가면서 검을 구한 장소를 그에게 알려줬다.
“한국에 이상한 곳이 생겼네. 나도 한번 가봐야겠다.”
소해진이 종이를 그에게 건넸다.
그걸 품에 넣은 박민준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만 쉬어. 난 이제 저자와 마저 대화를 나누도록 하지. 일해야지, 너도 곤란하지 않을 거 아냐?”
끄덕.
박민준이 방수열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팍!
다시 움직일 수 있게 된 그가 눈치부터 봤다.
몸을 움직이지 못해서 자기 뒤에서 일어난 광경은 보지 못했다. 대신 그간의 소리는 전부 듣고 상황파악을 끝냈다.
‘정말 미친놈이다. 부국장님 말로는 제멋대로 군다더니. 정말 무슨 짓을 할지 예상할 수가 없어.’
대화를 나누다 말고 부하의 검을 구경하고 한바탕 난리까지 피우다니.
‘날 움직이지 못하게 한 기술은 또 뭐지? 특성인가? 대체 이자가 가진 진짜 특성이 뭐야?’
하늘을 나는 움직임?
손에서 나가는 장풍?
다른 사람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는 것?
눈알을 굴리던 그에게 박민준이 말했다.
“뭐해? 나한테 할 말이 있어서 온 거잖아?”
“이제 말해도 되는 겁니까? 또 이상한 걸 제 몸에 하진 않으시겠지요?”
“그래. 좋은 검을 봤으니. 이젠 네가 하는 말을 들어주지.”
새삼스럽다는 듯, 소해진을 슬쩍 훔쳐본 그였다.
‘그나저나 소 차장이 따로 검을 숨기고 있었던 건가? 어쩐지. 회식에서 일찍 빠지더니. 그 시간에 수련했었구나.’
살짝 고개를 끄덕거리고, 다시 박민준을 보며 말했다.
“부국장님께서 지난 오산역 사건의 보상금과 관련해 박민준 씨에게 직접 설명해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설명? 보상금을 그냥 주면 되잖아? 혹시 계좌번호가 필요해? 나 그거 아직 없는데.”
20년이나 실종된 사람의 계좌가 온전히 살아있을 리 없다.
은행에 가야 하지만, 아직 신분증도 없는 상황이었고.
헌터 등록증이 생기면 그때 갈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현금으로 드릴 수는 있는데. 그렇게 드리기에는 액수가 좀 큽니다.”
“얼마나 주는 건데?”
“35억입니다.”
액수를 알려준 그가 박민준의 얼굴을 살폈다.
마치 놀라길 기대하는 눈치.
“그렇군. 6등급이라더니. 그 정도를 받는 거였어.”
박민준은 그저 담담했다.
오히려 놀란 사람은 따로 있었다.
“35억! 어머머. 정말 35억을 준다고요?”
누나의 호들갑을 듣고 박민준이 목 뒤를 부여잡았다.
이때다 싶은 방수열이 그녀에게 말했다.
“맞습니다. 사실 더 드려야 맞지만, 법으로 정해놓은 상한 기준이 있어서 어쩔 수 없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당연히 이해하지요. 그런데 세금으로 도로 빼앗아가고 그런 건 아니겠지요?”
“따로 납부하실 세금은 없습니다. 공제도 없고 전액 드릴 겁니다.”
“세금이 없을 수가 있나요? 제 딸도 헌터인데 세금을 왕창 뜯어 가던데?”
“민간 헌터입니까?”
“네. 맞아요.”
“그럼 그분은 국가에서 세금을 많이 걷는 게 맞습니다.”
“우리 민준이는 뭐가 달라요?”
“원래는 박민준 씨도 세금이 있습니다만. 오산역의 공로를 크게 인정받아서 박민준 씨에게 전액 다 드리는 겁니다.”
헌터 공무원을 자발적으로 도우면, 프리랜서도 그 공로를 인정받을 수 있다.
그게 바로 세금감면이나 면제.
거대 다발 거미 사건 때는 헌터 공무원들의 목숨을 그가 구한 공로를 김 팀장이 보고해서 세금면제.
이번엔 오산역의 경우.
괴물에 의해 오산역 일대가 완전 폐허가 되었으니.
그 지역이 국가 재난 지역으로 선포되었다.
그때 많은 헌터들이 나서주긴 했지만, 더 큰 피해로 퍼질 뻔한 상황을 박민준이 혼자 막아주었다.
거기다 S등급 부국장의 강력한 추천까지 더해져서 세금면제 혜택을 주기로 했다.
“어머. 이게 웬일이야. 아빠! 엄마! 우리 민준이 대박 났어!”
그녀의 목소리가 집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한숨을 내쉰 박민준이 뒤를 돌아봤다.
“두 분은 지금 시장에 가셨는데. 그렇게 소리쳐서 들리겠어? 아예 밖에 나가서 소리치고 다니지? 그럼 들릴 거 아냐?”
“내가 너무 시끄러웠나?”
“그래. 그러니까 그만 침착해.”
“민준아. 너 그 돈 받으면 바로 은행이 넣어라. 절대 도박하거나 어디 사업한다고 투자하고 그러면 안 돼. 네가 몰라서 그렇지. 요즘 사기꾼이 얼마나 많은데.”
“내가 다 알아서 할게. 그런 걱정 하지 마.”
“알아서 하기는. 아무튼, 내가 여기서 이럴 게 아니구나.”
그녀가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영애니? 오랜만이지…. 무슨 일이냐고? 글쎄 우리 민준이가…. 응? 누구긴. 내 동생이지. 너도 알잖아?”
친구들에게 자랑하기 바빴다.
굳이 엿들으려고 할 필요도 없이, 거실에 있는 모두에게 다 들렸다.
박민준은 누나를 말릴 생각이 없었다.
그저.
‘누나도 저렇게 자기 일처럼 좋아해 주네. 역시 가족이 최고구나.’
자신이 아는 사람이 너무 잘되면, 그걸 시기하고 무척이나 배 아파할 사람이 참 많다.
그건 지구뿐 아니라, 다른 세상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고.
슬픔을 위로하고 함께하는 것도 좋지만, 기쁜 일이 생겼을 때 진정으로 축하해주고, 좋아해 주는 게 가족이라는 걸 새삼 느낀 박민준이었다.
그의 헌터 일은 이제 시작이었으니.
‘앞으로 누나 지인 중에 날 모르는 사람이 전혀 없겠네.’
방수열이 헛기침하고 어색한 웃음을 보였다.
그런 그에게 박민준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보상금 말고 다른 건 없어? 중요한 일이라 부장인 네가 직접 왔을 거 아냐?”
“맞습니다. 여기 이것부터 받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