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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자가 힘을 안 숨김-15화 (15/175)

15화

‘아까는 무례해서 좀 별로였는데. 계약만 해준다면야. 다 좋지.’

박민준이 서류를 그녀 쪽으로 밀어내더니.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거절이라고요? 정말 우리와 계약 안 할 거예요?”

“그래.”

“왜요? 뭐가 또 문제인데요?”

다 잡은 대어를 놓쳤다고 착각했나?

그녀가 침착함을 잃었다.

“문제가 많지. 거기다 다른 건 몰라도, 다른 사람이 나한테 명령을 내린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박민준이 게이트 관리국 소속이 된다면, 오직 국장과 부국장의 명령만 받는다고 쓰여 있긴 했다.

상당한 배려였지만, 그는 그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건 어쩔 수 없잖아요? 그분은 국장이고 난 부국장인걸요?”

“난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이겠다. 다른 사람의 명령 따윈 받지 않는다. 특히 나보다 약한 사람의 명령은 더욱 싫다.”

약한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때.

치.

그녀가 대놓고 얄밉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봤다.

“아니. 그건 그냥 프리랜서잖아요? 헌터 공무원이 될 거면 게이트 관리국 소속으로 국장님과 내 명령을 받아야 해요. 상명하복 몰라요?”

꼭 게이트 관리국이 아니더라도 민간 길드, 아니 다른 나라 어딜 가서도 그곳 수장의 명령을 받아야 한다.

그걸 다시 깨달은 박민준은 프리랜서를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뭐? 내 조건을 받아줄 수 없으면 난 이만 일어나지.”

박민준을 이대로 보낼 순 없었다.

‘안 돼. 국장님께 반드시 영입하겠다고 말해놨는데. 이렇게 끝낼 순 없어.’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막아섰다.

“잠시만요. 정말 이대로 그냥 가겠다고요?”

“날 막을 건가? 네가 할 수 있겠나?”

순간, 그녀의 투지가 불타올랐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더니.

“싸우자는 게 아니에요. 그냥 나하고 대화나 더 나눠 보자고요.”

“넌 내가 원하는 걸 하나도 들어줄 수 없다면서? 그럴 만한 권한이 있는 사람과 대화를 해야겠다.”

부국장이라고 해서 기대를 좀 했는데.

말끝마다, 그건 국장님께 전달할게요. 라는 소리만 들었으니.

“그건 그런데. 제가 당신의 요구 사항을 국장님께 전해드리고 최대한 반영해볼게요.”

“또 그 소리군.”

상대의 말이 무슨 뜻인지. 그녀도 드디어 깨달았다.

얼굴이 새빨개진 것도 모자라, 귀까지 달아올랐다.

그런 이지원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더니.

그가 돌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대화를 더 나누는 대신에 다른 조건이 있다.”

“그게 뭐죠? 어서 말해보세요.”

“앞으로 1시간 안으로 내 헌터 등록이라는 걸 완료해라.”

박민준의 요구는 사실 너무 터무니없었다.

정상적으로 처리하면 아무리 빨라도, 14일은 족히 걸릴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다급해진 이지원은 그의 요구를 바로 승낙했다.

“알았어요. 그 정도는 내가 해줄 테니까 다시 앉으세요.”

원래 국장의 권한이지만, 부국장인 그녀가 못 해줄 일은 아니었다.

‘국장님이 해외 순방 가셔서 다행이야. 내가 임의로 처리할 수 있는 사안이다.’

국장 대행의 권한으로 그녀가 박민준의 헌터 등록을 마칠 수 있었으니까.

그녀가 옆에 있던 부지부장에게 말했다.

“저 대신 경기지부장을 만나서, 여기서 검사한 박민준 씨의 서류를 나에게 바로 보내라고 하세요. 30분, 아니 20분 안에 반드시.”

“지부장이 말을 듣겠습니까? 아까 보니, 기분이 엄청나게 상한 것 같던데요?”

“내가 징계 수위를 줄여준다고 전하세요. 그럼 할 거예요.”

그렇다면 지부장도 움직일 거다.

송 부지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가 나가고.

이지원이 아까보다 더욱 박민준과 가까운 곳으로 옮겨 앉았다.

이번에야말로 계약서에 서명하게 만들겠다는 듯.

일에 대한 의지와 열정이 가득한 그녀의 모습이란.

박민준이 순간, 피식 웃었다.

“갑자기 왜 그렇게 웃어요? 내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니. 그냥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서 그랬던 거다. 더는 신경 쓰지 마라.”

신경 쓰지 말라는 그의 말을 듣고도, 그녀는 오히려 미소 지으며 물었다.

“누군데요? 날 닮았으면 예쁘겠네요. 혹시 여자친구?”

“아니. 그냥 다른 세상에서 알던 사람.”

그녀는 박민준의 말을 듣고 순간 그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다른 세상이요?”

“내 이름과 등급도 알면서 그건 못 들었나? 이미 몇 번이나 말했었는데.”

세상에 다른 세상이라니.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했으면 전혀 믿지 않았을 텐데.

그녀는 왠지 박민준의 말에서 진심을 느꼈다.

“다른 세상은 어떤 곳이에요? 어떻게 가게 됐어요?”

“날 믿나?”

“그럼요. 다른 사람이 말했으면 거짓말이라고 했을 텐데. 왠지 당신은 그러지 않을 것 같지 않…….”

그녀는 말을 끝까지 하지 못했다.

삐 빅! 삐 빅!

그녀의 폰에서 날카로운 경고음이 울렸다.

화면을 본 이지원이 얼굴을 찌푸렸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미안하지만, 다음에 다시 얘기해요.”

“무슨 일이지?”

“정말 미안해요.”

그 말만 남기고 뛰쳐나갔다.

혼자서 넓은 사무실에 남은 박민준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온 그를 지부장의 비서가 맞이했다.

다른 사람은 어디 갔는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겼나? 다들 어디 갔지?”

“오산에서 예상하지 못한 게이트가 갑자기 열린 모양입니다. 거대 괴물을 봤다는 신고를 받고 급히 출동하셨습니다.”

“괴물 때문에 급히 나갔군. 그런데 그렇다고 전부 다 나가?”

“크기가 엄청나다는 걸 보면, 보통 괴물이 아닐 듯싶습니다. 아마 6등급이 아닐지.”

“6등급?”

“네. 그 정도 괴물이라면 근처에 있는 길드의 헌터가 총동원되어도 막기가 힘들 테니까요.”

거대 다발 거미란 괴물이 3등급 아니, 4등급이었던가?

6등급은 어느 정도로 강할까?

“너 운전면허 있나?”

“네? 저요?”

“그래. 아니면 다른 사람이라도 날 좀 거기로 데려가 줘.”

“6등급일지 모르는 괴물이 나온 곳으로 가시겠다고요?”

“좋은 구경거리잖아? 그런 괴물과 대체 어떻게 싸우는지 봐야겠어.”

6등급 괴물도 궁금하지만, 특히, S등급이라는 부국장의 실전 전투능력을 직접 보고 싶었다.

“그건 좀 곤란하겠는데요.”

“안 돼?”

“네. 너무 위험합니다. 제가 각성자이긴 하지만, 전투 요원은 아닙니다. 절대 그런 곳에 가고 싶지 않습니다.”

어쩐지.

너무 약해빠졌다고 느꼈었는데.

전투능력이 아예 없는 건가?

의지도 없고.

그럼 데려갈 수가 없지.

“그래? 그럼 위치만 말해봐. 내가 아는 곳이면 직접 가지.”

“오산역 근처로 가시면 될 겁니다.”

오산역은 그도 아는 곳.

20년 사이에 옮기지 않았다면 말이다.

“거기 위치가 20년 전하고 똑같나?”

“네. 그렇겠지요?”

“알았다.”

열려 있는 복도 창문을 본 그가 훌쩍 몸을 날렸다.

그걸 보고 놀란 비서가 비명을 질렀다.

“어?! 여긴 꼭대기 층인데?”

왜 갑자기 스스로 목숨을 끊어?

서둘러 창가로 다가간 그는, 하늘에 뭐라도 있는 양, 성큼성큼 밟으면서 저 멀리 땅 위로 내려서는 박민준을 볼 수 있었다.

바닥에 그의 몸이 닿자마자, 일직선처럼 보일 정도로 순식간에 사라지는 모습까지.

‘사람이 하늘을 날았어? 거기다 저 엄청난 달리기 속도는 뭐지? 정말 굉장하네.’

S등급은 저런 것도 할 수 있구나.

역시 그자들은 사람이 아니야.

저게 어떻게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겠어?

그의 오해였지만, 지금 신경 쓸 사람은 그 말고 아무도 없었다.

***

오산역 옆에는 오산대학교가 있다.

그래서 오산역을 오가는 일반인은 물론이고, 등하교하는 대학생들로도 무척이나 붐볐다.

나름 활발한 유동인구를 가진 번화가이지만, 지금은 개미 새끼 한 마리 찾아볼 수가 없었다.

대신, 곳곳에 무너진 건물 잔해 사이로, 처참한 몰골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괴물이 부순 건물 잔해가 떨어지면서 깔려 죽거나, 또는 직접 괴물에게 짓이겨졌다.

차라리 그건 그나마 나았다.

일부 시체는 몸의 체액을 전부 빨린 듯.

미라처럼 말라비틀어진 끔찍한 모습이었으니까.

그들은 무척 억울하게도, 이곳에 게이트가 열릴 거라는 경고도 받지 못했다.

예상하지 못한 비정규 게이트.

더욱이 거기서 나온 놈은 무려 6등급.

혼자서 도시 하나를 파괴할 수 있다는 괴물이다.

키는 7m가 넘고, 촉수까지 치면 15m는 족히 될 듯싶다.

오징어 다리 같은 빨판 촉수가 머리에 수없이 달려 있다.

길이도 상당히 길어서 무려 20m 정도인 애벌레의 모습.

녀석이 움직이면서 촉수가 버들잎처럼 흔들렸다.

쯔르르르!

그때마다 괴상하고, 기분 나쁜 고음을 발산했다.

그걸 들은 사람들은 두려움에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거대한 녀석의 몸이 움직일 때마다, 오산역 부근도 자연스레 맷돌에 갈리듯 박살이나 버렸고.

한편, 수원에서 쉬지도 않고, 오산역까지 달려온 박민준이었다.

그가 주위를 살피고 눈살을 찌푸렸다.

엉망이 된 광경도 참혹하지만, 그보다 부국장이 보이지 않았다.

‘아직 오지 않은 건가?’

그의 경신법이 너무 빨랐다.

차를 타고 먼저 출발한 이지원과 다른 국가직 헌터들보다 그가 먼저 와 버렸으니.

‘도착할 때까지 괴물이나 자세히 살펴야겠군.’

그가 멀리서 봤던 괴물을 가까이 살피고 입을 떡 벌렸다.

다른 세상에 다녀온 그였지만, 이런 광경은 일찍이 본 적 없다.

“정말 엄청나군. 크다는 말은 들었지만 설마 저렇게 큰 괴물이었을 줄이야.”

6등급이 저런 놈이면 그 이상은 과연 어떤 괴물들일까?

헌터란 존재를 보며, 연이어 실망했던 그였다.

오히려 그래서 지금 저 괴물을 보고 싸우고 싶은 마음이 솟구쳐 올랐다.

‘저놈이라면, 나도 오랜만에 제대로 실력 발휘를 할 수 있겠다.’

박민준이 괴물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마침, 근처에서 출동한 오산 기반의 헌터들이 녀석을 상대하고 있었다.

아니, 그가 보기에는 괴물과 싸우는 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몰이 당하듯, 이리저리 도망 다니기 바빠 보였다.

“빌어먹을. 촉수가 너무 많아!”

“그래.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는 기분이 들 정도야.”

일부 실력에 자신 있는 헌터들이 검 같은 근접 무기를 들고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기회가 되면 촉수부터 전부 제거해.”

“가자!”

검을 든 헌터가 자길 노리는 촉수를 잘라내더니.

기세 좋게 촉수를 향해 뛰어들었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바로 후퇴했다.

“젠장. 너무 많아. 이러다 내가 먼저 당하겠어.”

“아직 대피하지 못한 민간인들이 있다. 너희는 그들을 도와라.”

명령을 받은 하급 헌터들이 민간인을 대피시키면서 총을 쐈다.

한 명은 대전차용 미사일도 쐈다.

그걸 본 박민준이 눈을 빛냈다.

‘저건 바주카포인가?’

저런 무기에 대해 잘 모르는 박민준이라.

괴물에게 어떤 타격을 줄지 무척 궁금했다.

피 융~쾅!

표적이 커서 그런지.

다행히 명중했다.

그럼, 녀석은?

괴물의 두꺼운 외피를 뚫지 못하는 모습.

총을 쐈을 때보다는 제법 눈에 띄는 상처를 입히긴 했지만, 놈의 몸에 비하면 그 범위가 너무 작았다.

‘저래선 별 타격을 주지 못하지.’

사람으로 치면 가시에 찔리거나 모기에 물린 수준일 터.

별로 타격을 받지 않았지만.

연이은 헌터들의 공격에 녀석이 화가 난 걸까?

아까보다 촉수가 더 빨리 움직이며, 가까이 있던 헌터들을 연이어 잡아채는 광경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촉수에 매달린 사람들이 순식간에 말라비틀어진 모습으로 죽어버렸고, 녀석의 상처가 사라졌다.

잘려나가 촉수도 다시 빠르게 자라났다.

그걸 본 박민준의 눈이 커졌다.

‘저런! 전혀, 상대가 되질 않잖아? 그 여자가 올 때까지 버티지도 못한다는 건가?’

원래는 이지원이 도착하길 기다리려 했는데.

‘S등급 헌터의 실전 전투를 구경하는 일 따위.’

이젠 상관없다.

어찌 그걸 보고자 눈앞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모른 척할 수 있을까?

눈을 매섭게 뜬 박민준이, 드디어, 녀석을 향해 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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