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박민준은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수첩을 열고 뭔가를 찾아 읽기 시작했다.
“3월 21일. B등급을 포함해서 총 6명 명단을 넘기고 주작 길드 김정빈 인사팀장에게 5천 받음. 다른 말은 없었음.”
“헉. 그건!”
“4월 20일. A등급 한 명 포함 총 10명 명단 넘기고, 주작 길드 김정빈 인사팀장에게 3억 받음. A급 영입에 성공했다고 들음.”
끼~익!
놀란 김정빈이 차를 갓길에 세웠다.
그러든 말든.
박민준은 계속 수첩을 뒤적거렸다.
“5월…….”
“그만 되었습니다. 더는 읽지 않으셔도 됩니다.”
“역시 대가리가 잘 돌아가는 놈이구나.”
“그건 대체 어떻게 얻으신 겁니까? 박만용이 죽으면 죽었지, 절대 내놓을 인간이 아닌데?”
그걸 알기 때문에 김정빈도 그를 배신한 거였다.
박만용이 자기 명예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분풀이만 좀 하고 그냥 돌아올 줄 알았는데. 비리 명부까지 가지고 나오다니.’
저건 분명 큰일이었다.
박만용이 얼마나 많은 곳과 부정부패를 저질렀는지 모르지만. 아니 관심도 없지만, 주작 길드와 연관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정부 기관의 임원이 외부 민간 길드에 돈을 받고 신규 각성자의 정보를 넘겼다?
게이트에서 괴물이 나오는 세상인데?
A급, 아니 B급 이상만 되어도, 외국에서 서로 데려가려고 한다. 국민의 안전을 위해서, 또는 정치인 개인의 인기를 위해서.
또는 민간 기업이나 길드에서도.
그래서 경제, 군사적 강국들은 물론이고, 특히 개발도상 국가에서는 이런 경우 사형까지 처해 진다는 중범죄였으니.
다행히, 한국은 사형을 시키지는 않았다.
대신 각성자의 정보를 비밀로 취급하고 철저하게 관리하고자 노력했고, 엄중한 처벌을 했다.
그걸 아주 잘 알고 있는 김정빈이었다.
‘아차! 표정 관리를 했어야만 했는데.’
아무리 노련한 그라고 해도.
순간 안색이 어두워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그걸 공개하진 않으시겠지요?”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그 수첩에 있는 내용을 공개하면 정말 걷잡을 수 없는 파국이 대한민국에 몰려올 겁니다.”
단순히 주작 길드만 정보 요원들과 내통하고 정보를 빼돌렸을까? 그런 의심이 국민과 정치인 사이에 돌면?
전면적인 조사가 이뤄질 것이다.
그건 주작 길드나 다른 대형 길드라고 해도 막을 수 없다.
민간 길드 주도의 헌터 세계를 아니꼽게 보던 정부로서는 그들에게 큰 피해를 주고, 규모마저 줄일 기회였으니까.
‘아마 관련 법을 신설하고, 우리 민간 헌터 길드의 숨통을 조여올 거다.’
특히, 김정빈이 속한 주작 길드가 그 시발점이었으니.
모든 민간 길드를 대표해서 언론과 국민에게 좋지 않은 여론을 받으며, 죽도록 얻어맞을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고.
‘여기서 내가 죽더라도 그건 막아야 한다.’
혼자 머리를 굴리며 이런저런 상상의 날개를 펼치던 김정빈이 목숨을 걸고서라도 막을 각오를 했지만.
박민준은 그런 자세한 사정까진 몰랐다.
실제로 박민준에게 너무 심하게 당해서 과대망상에 가까운 피해의식을 보이는 김정빈이기도 했고.
머리를 잘 쓰는 놈들과 높은 자리에 있는 자들, 특히 권력을 가진 놈들을 상대할 때 어떻게 제압하는지.
그걸 다른 세계에서 얻은 경험과 지식을 통해 알고 있었을 뿐.
그래서 비리 수첩을 반드시 챙기고자 했고.
그걸 성공해서 지금 효과를 보고 있었다.
“그걸 원하면 네가 앞으로 나한테 알아서 기어. 그럼 내가 입을 꾹 다물어 줄 테니까.”
“알겠습니다. 제가 잘 모실 테니까. 그 수첩은 태워버리심이 어떠신지요?”
“야. 내가 바보로 보이냐? 이걸 왜 태워? 오히려 복사까지 해 놓을 건데?”
“그건 좀.”
“됐고. 아무튼, 날 배신하거나 내 정보를 나쁜 놈들에게 퍼트려서 날 어떻게 해볼 생각 따윈 하지 마.”
단순히 말뿐 아니라.
운전석을 향해 엄청난 살기가 쏟아졌다.
‘어떻게 인간이 저런 살기를? 정녕 사람이 맞긴 한 건가?’
기절할 것 같은 순간.
그를 강하게 압박하던 기운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순간 숨통이 트인 김정빈이 빠르게 말했다.
“네. 절대 그런 생각을 하지 않겠습니다.”
박민준에게 말하는 거였지만, 달리 보면 마치 스스로 다짐이라도 하는 듯도 보였다.
“당연히 그래야지. 그땐 이걸 세상에 공개할 거니까.”
김정빈은 자신이 된통 걸렸다고 확신했다.
‘애초에 저 인간하고 엮이는 게 아니었는데.’
하지만 S등급 신규 각성자가 나왔다는 말을 듣고, 어떻게 안 만날 수가 있었겠는가?
조금만 늦어도 다른 놈들에게 빼앗길 수 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문제는 역시 박민준이었다.
다른 신규 각성자와는 달리, 과감하게 행동하더니.
결국, 자신과 박용만을 꼼짝 못 하게 만들 증거까지 확보했다.
“뭐 해. 다시 출발해.”
“네. 그럼 다시 모시겠습니다.”
차가 출발하고.
김정빈이 룸미러 각도를 피해서, 얼굴을 잔뜩 구겼다.
‘빌어먹을. 망할. 이런 개 같은.’
그런 그를 향해 박민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너 지금 속으로 내 욕하고 있었지?”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
“그럼 인상 펴라. 속도도 좀 내고. 기어가냐?”
“죄송합니다. 여긴 제한속도가 30이라,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 뭐 그렇게 느려?”
새삼스럽게 저 인간이 왜 저럴까?
게이트가 열리고, 도로 일부의 주행속도가 저속으로 바뀐 지, 벌써 십수 년이 넘었는데.
‘아직 어려서 면허가 없나? 그래서 몰랐나? 그건 너무 심한데?’
박만용에게 그의 이름과 주소, 각성 등급 정도만 전해 들었기 때문에 생긴 오해였다.
“선생님. 다 왔습니다.”
도착했다고 말한 그가 서둘러 뒷문을 열어줬다.
하지만 박민준은 내리지 않았다.
“왜 안 내리십니까?”
“너 전화번호 뭐냐?”
“네? 제 번호 말입니까?”
“그래. 같은 말 반복하지 말고 어서 불러.”
“010-7……. 입니다.”
“앞으로 필요한 게 있거나 심심하면 연락할게. 그래도 되지?”
아.
순간 눈앞이 깜깜해진 김정빈이었다.
대놓고 티를 내지도 못하고 그가 억지로 웃음 지으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당연히 그래야지.”
“그럼,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그래. 적당히 부려먹고 놓아줄게. 나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야. 너도 알지?”
“네. 박 선생님. 저도 알고 있습니다.”
“잘 가라. 안녕.”
박민준을 집에 데려다주고 곧장 주작 길드로 복귀하지 않은 그였다.
가까운 포차를 보고 차를 세우더니.
그대로 들어가 병나발을 부었다.
‘내가 수원에 다신 안 온다. 아니 저 인간이 있는 곳에 절대 가지도 않을 거다. 퉤퉤퉤.’
말은 그렇게 해도, 당장이라도 연락이 오면?
놈에게 달려가 꼬리를 흔들 테지만.
지금은 그냥 그놈 욕하면서 술이나 마셔야겠다.
‘마누라가 점보고 왔을 땐 올해 내 운세가 좋다고 했는데? 굿이라도 해야 하나?’
***
다음 날 오전.
9시가 되자마자, 박민준의 집 앞에 나타난 기동 2팀 김철진이었다.
그는 어젯밤, 경기지부장에게 이미 메일로 보고서를 올렸다.
그리고 그날.
“야. S등급 신규 각성자가 나왔으면, 실시간으로 보고를 해야지. 내가 출장 나왔다고 그냥 돌려보내? 너 미쳤어? 내일 땡 하자마자 가서 데려와. 알았어? 다른 민간 길드 놈들에게 절대 정보 흘리지 말고. 철저하게 막으라고.”
라는 욕을 지부장에게 걸려온 전화로 한 사발 얻어먹었다.
그렇게 아침부터 박민준을 찾아왔는데.
상대의 표정이 좋지 못한 걸 보고 의아한 김 팀장이었다.
“무슨 언짢은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아니.”
“그런데 저를 보는 표정이 왜?”
“내가 널 보면 항상 웃어야 하나?”
“그건 아니지만.”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어서 가자. 너희 지부장 만나자면서.”
“네. 그럼 제 차로 가시지요.”
“당연하지. 어차피 나 면허도 없어.”
“네?”
“왜?”
“면허가 없으시다고요?”
“22살에 이계로 끌려가서 내가 면허 딸 시간이 없었어.”
“그러셨군요.”
“진짜야. 지금은 몰라도, 그땐 운전면허 따는 데 돈도 많이 들고, 실기도 너무 어려웠다니까.”
“아! 맞습니다. 그땐 그랬지요.”
박민준이 너무 동안이라 42살인 걸 잠시 잊고 있었다.
뒤늦게 2002년 당시를 떠올린 김 팀장.
당시 그는 아직 어렸지만, 운전면허 시험이 지금보다 훨씬 어려웠다는 걸 어렴풋이 기억해냈다.
‘막내 삼촌도 그때 실기에서 4번인가 5번 연속으로 떨어졌다고 했었지. 아마?’
***
게이트 관리국 경기지역 지부장.
차율건이 초췌한 얼굴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는 원래 내일 오후에나 돌아올 예정이었다.
오늘은 출장에서 돌아와 농땡이 치다 내일 출근하려 했는데.
‘피곤해 죽겠네. 박 사장이랑 골프를 너무 오래 쳤나?’
갑작스러운 신규 S등급 헌터의 등장으로 인해, 일정을 조절하고 급히 사무실로 나왔다.
“지부장님. 김철진 팀장이 지금 S등급 헌터를 데리고 로비에 들어섰다고 합니다.”
“그래? 알았어. 나 어때 보여?”
“조금 피곤해 보이시지만 그래도 위엄이 넘치십니다. 참으로 멋지십니다.”
“역시 그렇지? 난 자네가 솔직해서 좋다니까.”
지랄. 빨리 이직하고 싶다.
임 비서가 고개를 돌리고, 소리 없이 입을 뻥끗하며 욕했다.
지부장은 거울을 살피느라 그걸 보지 못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별 이유 없이 도로 앉았다.
어쩐지 안절부절못하는 모습.
한 지역을 대표하는, 그것도 경기도 헌터 공무원을 관리하는 지부장이지만, 전혀 긴장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내 지역에서 3번째 S등급이 나오다니. 이건 기회야.”
“맞습니다. 지부장님. 그자를 잘 구슬려서 헌터 공무원이 되게 만드시면.”
“아니. 그런 인재를 왜 다른 사람에게 넘겨?”
“그럼요?”
“당연히 내가 가져야지. 그럼 그놈이 쌓은 실적으로 나도 승진해서 본부로 올라가겠지.”
어디 그뿐이겠는가?
그 뒤로 한국 게이트 관리국장까지 할 수 있지 않을까?
게이트가 열리고 바뀐 세상에서 진짜 권력자라고 할 수 있지.
지부장이 갖가지 상상을 펼치면서 혼자 기뻐했다.
똑똑.
“지부장님. 김 팀장이 손님을 모셔왔습니다.”
“어서, 들어오라고 해.”
부하 김철진 팀장 옆에 선 젊은 청년.
아니. 보고서에는 분명 42살이라고 했으니.
젊어 보이는 중년인이라고 해야 하나?
‘나와 몇 살 차이도 안 나는데. 저렇게 어려 보여? 부럽네.’
김철진이 먼저 박민준을 소개하려 했는데.
“지부장님. 여기 이분이.”
차 지부장이 참지 못하고 먼저 나섰다.
“반갑습니다. 박민준 씨. 나는 게이트 관리국 경기지역 지부장 차율건이라고 합니다.”
인사를 듣고 박민준이 고개를 까닥 끄덕였다.
“박민준이다. 네가 여기서 제일 높은 사람이군.”
“맞습니다. 하하. 제가 이곳의 수장입니다.”
지부장을 살핀 그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 너도 별로 강해 보이진 않는데? 어떻게 그 자리에 앉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