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입을 일자로 꾹 다물고, 한참을 고민하는 그녀였다.
‘갑자기 물어보니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
그 모습이 박민준과 똑 닮았다고 생각한 김 팀장이었지만, 자신이 끼어들 처지가 아니라, 그냥 한쪽에 찌그러져 있었다.
누나를 지켜본 박민준이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먼저 말해볼게. 중간에 생각나면 언제든지 말해.”
대답을 듣지도 않고, 그가 멋대로 말하기 시작했다.
“누나 첫사랑은 같은 동네 살았던 고등학생 형이었어. 그때 누나는 겨우 초등학생이었는데 말이지.”
“어? 그걸 어떻게?”
“내가 8살 때였나? 엄마가 누나 생일 케이크를 사놨는데. 누나가 오기 전에 그걸 나 혼자 다 먹어 버렸어. 그래서 화가 난 누나가 날 뒤지게 때렸지.”
“내가 그랬나?”
“응. 그때 내가 너무 우니까. 누나는 엄마한테 혼날 게 두려워서 나한테 500원을 줬지. 과자 사 먹고 입 다물라고. 아니면 또 때린다고.”
“...”
“2002 월드컵이 시작하고 누나랑 매형이 나에게 휴대폰을 새로 사줬잖아. 삼성에서 나온 무려 40화음짜리였지.”
“그건 기억난다. 그 비싼 걸 사줬는데 네가 바로 잃어버려서, 얼마나 속상했는데.”
“사실 나 그거 잃어버렸던 게 아니야. 술값 대신 술집에 맡겼어. 미안해.”
박민준이 실종되고, 얼마 뒤 동생의 폰을 술집에서 찾았었다.
주인이 외상값을 받으려고 대신 받아놨다는 그 말을 듣고, 얼마나 화가 났었는지.
“진짜 너구나?”
“이제 날 믿어?”
“그래.”
동생을 안으려던 그녀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아니야. 잠시만. 하나만 더 확인하자.”
돌연, 박민준의 바지를 벗기려고 했다.
“뭐 하는 거야? 미쳤어?”
“잠깐이면 돼. 엉덩이만 살짝 까자.”
처음엔 놀란 그가 서둘러 막았지만, 누나의 의도를 바로 알아차렸다.
“왼쪽 엉덩이에 있는 파란 색 콩알만 한 점을 보고 싶었어? 근데 그건 지금 없을 텐데?”
“왜 없어?”
“환골탈태라고 알아? 내가 그걸 했거든. 그때 몸에 있던 점이 전부 사라졌어.”
“환……. 뭐? 뭘 했다고?”
***
내가 맞는다는 확인이 끝나고.
누나에 이어 아빠와 엄마까지 다시 만나고 감동의 눈물바다였다는 건 말하기 또 부끄럽기도 하니 넘어가고.
내가 22살 때 쓰던 방이 아직도 그대로인 걸 보고 또 울었다는 것도 그냥 넘어가자.
아. 조카 채영이는 아직 만나지 못했다.
벌써 성인이 되어서 함께 살지 않는다고 했다.
회사 근처에서 따로 나가 산다나?
세상에 그 어린 녀석이 벌써 직장인이라고?
‘그나저나 예전엔 몰랐는데, 방이 참 좁게 느껴지네.’
그래도 다른 세계에서 내가 누렸던 무림 맹주의 황제 같은 삶보다는 지금이 더 행복하다.
진심으로.
‘이젠 나만 잘하면 되겠구나.’
부모님도 무사히 살아계시고, 누나도 사별했지만, 조카 채연이를 데리고 잘살고 있으니.
앞으로 가족을 잘 보살피고 효도하면서 살아야지.
마침 운 좋게? 괴물 거미를 만나 죽일 수 있었다.
게이트 관리국인지 뭔지 하는 곳에서 검사를 받고 S등급이라는 걸 받았다.
보상금도 4,000만 원을 현금으로 받았고.
팀장이란 자식도 그렇고, 직위가 높아 보이는 다른 놈들이 나에게 쩔쩔매는 걸 보면, 분명 S급이 굉장한 것 같기는 한데.
‘조만간 대통령도 만날 거라고 했던가?’
그때 관직 아니, 높은 공무원 자리를 달라고 할까?
대통령 직속으로 단독 임무를 수행하는 특수직이면 좋겠는데.
그 양반의 부탁만 들어주고, 그것도 내 마음에 안 들면 안 하고 말이야.
아니면, 공무원 하지 말고 그냥 나 혼자 일해?
다른 누구 명령을 듣는 건 별로인데.
다른 세상에서도 자유롭게 사는 낭인 왕이란 놈이 있었다.
세력도 없고, 혼자서 잘난 호랑이처럼 나대던 녀석이었는데.
‘나도 그놈처럼 낭인. 아니 프리랜서 헌터를 해도 좋겠네.’
아무튼, 뭘 하든 간에 1년에 100억만 벌자.
덩치 큰 벌레 한 마리 잡고 500만 원인데.
더 강한 놈들도 있을 테니 그만큼 돈을 더 줄 테고.
충분히 벌 수 있겠지?
미래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띵! 동!
손님의 방문을 알리는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도 박민희가 나섰다.
“누구세요?”
“안녕하십니까? 여기가 박민준 씨 댁 맞습니까?”
“그런데요?”
“제가 제대로 찾아왔군요. 혹시 안에 박민준 씨 계십니까?”
***
박민준의 집 앞.
제멋대로 찾아온 불청객을 안으로 들일 생각이 전혀 없었는지.
박민준이 밖으로 나왔다.
그를 본 주작 길드 인사팀장이 서둘러 고개 숙여 인사했다.
“불쑥 찾아왔는데도 이렇게 만나주셔서 감사합니다.”
“너 뭐냐?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지?”
“하하. 그게 그렇게 궁금하셨군요. 우선, 제 소개부터 하겠습니다. 저는 김정빈이라고 주작…….”
박민준이 보기에 김정빈이란 놈은 일반인이었다.
또한, 대충 보면 인상이 좋지만, 자세히 살피면 눈빛이 상당히 교활했다.
‘현장도 모르면서, 안전한 곳에서 머리만 굴리고, 자기가 잘난 줄 아는 놈.’
박민준 자신도 잔머리를 잘 쓰는 주제에, 상대가 그런 건 또 싫어했다.
“됐고. 너도 헌터 공무원이냐? 너무 약해 보이는데?”
“아닙니다.”
“그럼 김 팀장이 보내서 온 게 아니야?”
“누구요? 아닙니다. 겨우 그런 사람들이 절 움직일 수 있을 리가 없지요. 제 소개를 하자면 저는.”
더욱이 지금은 가족과 함께 있는 상황.
‘나도 모르는 놈이 멋대로 우리 집에 찾아와? 어떤 놈이 정보를 흘린 거지?’
이번에도 주작 길드 팀장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잘라버린 그였다.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그는 낯선 사람이 가족들 앞에 나타난 것만으로도 무척 화가 난 상태였다.
“그래? 그럼 그냥 꺼져. 다신 네 멋대로 내 앞에 나타나지 마.”
“네? 그럼 제가 어디서 온 누군 줄 알고 이러시는 겁니까?”
“알고 싶지 않고. 알 필요도 없어. 내가 널 부른 게 아니니까.”
박민준은 지금 굉장한 인내심을 발휘하는 중이었다.
‘다른 세상이었다면 상대의 팔이나 다리를 하나 뽑아놓고 대화를 나눴을 텐데.’
그가 가족을 만난 기쁨으로, 최대한 자제하면서 자신을 봐준 것도 모르고.
김정빈 팀장은 오히려 박민준을 속으로 욕했다.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막무가내군. 너무 건방져. 저런 태도를 보니 역시 S등급이 맞긴 맞나 본데?’
그래 봤자 상대는 이제 갓 각성한 헌터.
뻣뻣하게 굴지만, 당연히 경험이 부족할 거다.
그걸 감추려고 일부러 더 저러는 게 아닐까?
하지만 나에겐 어림도 없지.
‘저 애송이 녀석에게는 당근과 채찍을 써야겠군.’
원래는 깍듯이 S급 대우를 해주면서 달콤한 말로 계약을 따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말도 제대로 못 하게 하자, 계획을 바꿔서 주작 길드라는 이름으로 박민준을 압박하기로 했다.
“각성이 처음이라 아직 잘 모르시나 본데. 저는 주작 길드에서 왔습니다. 우리 주작의 이름은 당연히 들어보셨지요?……전폭적인 모든 지원을 약속드리겠습니다. 지금 기회를 놓치면 평생 후회할 겁니다. ”
회유와 은근한 협박.
실제로 그가 속한 주작이 한국 헌터 길드 11위라고 하지만,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규모와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이 유난히 헌터 강국이기도 했고, 주작 길드는 세계 길드 서열 100위권 안에 들 정도였으니까.
‘저자도 이 정도면 알아들었겠지?’
다행히, 이번에는 그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었고, 이젠 상대의 반응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가 기대한 반응과는 달랐다.
박민준은 오히려 미소 지었다.
그것도 아주 싸늘한 비웃음이었다.
‘뭐야? 왜 저렇게 기분 나쁘게 웃는 거야?’
뭔가 잘못된 걸 느낀 김정빈이 다시 입을 열려는데.
박민준이 먼저 말했다.
“누가 내 정보를 너에게 팔아먹었지?”
“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립니까?”
“내가 오늘 돌아왔거든. 근데 나도 모르는 놈이 불쑥, 내 이름과 집을 정확히 알고 찾아왔단 말이야.”
“그게 뭐 중요하겠습니까? 그냥 우리 주작과 손을 잡고…….”
말을 하던 그를 향해 박민준이 한 팔을 들었다.
‘저자가 갑자기 팔은 왜 드는 거지?’
거리가 있어서 딱히 직접 얼굴을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왜 갑자기 하관이 따끔하지?!’
그런 느낌이 든 이후로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입 주변을 아예 움직일 수도 없다.
‘이거 뭐야? 왜 이래?’
놀라서 입을 연신 만지고 있었는데.
박민준이 그를 향해 손을 가볍게 내젓는 게 보였다.
‘짜증 나 죽겠는데. 저건 또 뭐 하는 거야?’
순간.
김정빈의 온몸에 엄청난 고통이 느껴졌다.
‘씨발. 이건 또 뭐야? 너무 아프잖아!’
갑작스러운 아픔에 자신도 모르게 욕설이 나올 정도.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차가운 땅바닥만 떼굴떼굴 나뒹굴었다.
한참을 그렇게 죽음과 같은 고통으로 몸부림치는데, 박민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날 상대하는 게 처음이니까. 우선은 이 정도로 봐주지. 감사히 여겨라.”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몸의 고통이 사라졌다.
‘뭐였지? 저놈이 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차마 몸을 바로 다시 일으키진 못하고, 눈만 동그랗게 뜬 김정빈이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위를 올려다봤다.
박민준과 눈이 마주쳤다.
감정이 전혀 담겨있지 않다.
오직 죽음만이……. 죽음?!
‘내가 실수했구나. 저자에게는 이런 식으로 대하면 안 되는 거였어.’
애송이가 아니다.
오히려, 사신(死神)이다.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죽일 수 있는 냉혹한 눈빛.
‘저 눈빛을 내가 이제 알아보다니.’
오늘 각성 등급 검사를 했다는 걸 듣고, 애송이라고 판단해 버렸다. 속으로 크게 후회하는 그를 향해 박민준이 말했다.
“누가 내 정보를 팔아먹었지? 그걸 말해줘야겠다.”
끄덕끄덕.
아까 같은 고통은 두 번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땐 차라리 죽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그래서 고개를 빠르게 위아래로 흔들었는데.
“건방지게 고개만 까닥거리지 마라. 너는 지금 말할 수 있다.”
내가 다시 말할 수 있다고?
정신이 번쩍 든 김정빈이 서둘러 대답했다.
“네. 알아들었습니다. 제발. 용서를.”
그가 자신도 모르게 소리치듯 목소리를 높였다.
동시에.
퍽! 퍽!
주저앉아있는 그를 향해 박민준의 발길질이 이어졌다.
몇 번을 얻어맞은 그가 억울한 눈빛을 했다.
“목소리가 너무 크다. 안에서 가족들이 들었으면 내가 널 괴롭히는 거로 착각할 거 아냐?”
그게 맞지 않나?
자신이 살짝 협박하긴 방금 죽을 정도로 고통받은 건 나인데?
“죄송한데. 제 목소리보다 지금 선생님 목소리가 더 큽니다.”
“괜찮아. 기로 차단했거든.”
“네?”
“쓸데없는 말을 하는 걸 보니. 너 아직 살만하구나? 좀 더 고통을 느껴야겠네. 그렇지?”
주작 길드 팀장이 필사적으로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선생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상대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박민준이 살짝 웃으며 다시 물었다.
“그래? 그럼 이제 누가 내 정보를 팔아먹었는지 말해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