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S등급은 선망의 대상이지만, 동시에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빌런이 알게 되면, 당신을 죽이고 싶어 할 겁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빌런이 뭔지 모르겠지만. 아마 나쁜 놈들을 말하는 걸 거다.
‘이계에서도 내가 강해질수록 도전하는 놈들이 줄을 섰었지.’
그런 놈들은 대부분 박민준의 손에 죽었다.
살아남은 놈은 부하나 친구가 되었고.
‘심지어 무림 맹주가 된 뒤에도 심심하면 도전자가 찾아와 나와 결투를 원했었는데.’
세상이 달라도 사람은 똑같구나.
옛 생각에 잠긴 박민준을 보며 안심하고 있는데.
그가 돌연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 빌런이라는 게 뭐냐? 악당?”
“네. 각성한 능력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을 말하는 겁니다.”
“역시 그랬군. 근데 넌 설마 내가 그런 놈들에게 당할 거라고 생각한 거야? 내가 그렇게 약해 보이나?”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요. 박민준 씨의 가족들도 S등급인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나쁜 놈들입니다. 나중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조심하셔야지요.”
끄덕끄덕.
가족을 납치해서 그를 협박하지 말란 법도 없으니.
바로 수긍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보며, 김 팀장이 속으로 생각했다.
‘대범한 것 같으면서 변덕이 대단하군.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이다. 그래도 가족 걱정은 하나 봐?’
행동을 종잡을 수 없고, 변덕이 심하면 보통 세상은 그런 사람을 미친놈이라고 부르긴 하는데.
김철진이 보기에 박민준은 덜 미친놈이긴 했다.
나름대로 말이 통하고 스스로 자제하는 모습을 보이긴 했으니까.
대신. 지부장을 만나기 전까지.
부디 박민준의 정체가 외부에 알려지지 않기를.
그래야 아무 문제도 안 생길 텐데.
저렇게 강한 인간이 저 성격으로 날뛰면?
김철진은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 끔찍했다.
***
그의 염려는 단순한 기우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의 정체를 당분간 숨길 생각이었는데.
그가 모르는 사이.
너튜브에 동영상이 하나 떴다.
그걸 겨우 몇 시간 만에 10만 명이나 봤고,
곧 거의 모든 인터넷 사이트에 동영상이 퍼지기 시작했다.
조회 수가 급격하게 증가하는 그 영상 속엔 건물 사이를 날아다니듯 뛰어다니며 거대 다발 거미를 죽인 정체불명의 남자가 나왔다.
게이트가 열린 이후, 대중들은 새로운 각성자의 등장에 굉장한 호기심과 흥미를 불러왔고.
이번에도 동영상을 본 사람 모두가 열광했다.
- 다들 이제 봤냐?
- 실제로 보면 정말 미침.
- ㄹㅇㅋㅋ.
- 완전 날아다니잖아? 슈퍼맨이야 뭐야?
- 각성하면 저런 동작도 가능한가?
- 아무나 못 할걸?
- 특성일 듯.
- 저 정도면 A등급이지 않을까?
- 에이 설마. 그건 아닌 듯.
- 그럼 B등급?
- 내 친구가 B등급인데 저거 못함.
헌터 길드도 전부 난리가 났다.
수원의 블루썬더 길드.
“뭐야? 저기 이 근처 아냐?”
“우리나라에 저런 헌터도 있었어? 건물 사이를 뛰어다니네?”
“처음엔 그냥 수직으로 빌딩 외벽을 타더라고요.”
“누구지? 혹시 저자가 누구 아는 사람?”
“처음 보는 얼굴인데요.”
“저도 처음 봅니다.”
“설마 신규 각성자인가?”
“젊다는 걸 보니, 그런 것 같은데요.”
“어디 소속이려나?”
“어? 마크가 안 보이는데요?”
“뭐? 마크가 없어?
국가기관이든, 민간 길드든.
소속된 곳의 공식 마크가 있다.
보통 그걸 보고 누군지, 어디 소속인지 파악하곤 하는데.
저자는 이상한 옷을 입었을 뿐.
마크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동영상을 찍은 사람 말로는 헌터 공무원 아닌 것 같다 했고.
그렇다면 이제 막 각성한 신규 헌터이거나, 아직 소속이 없는 프리랜서일 가능성이 컸다.
‘저런 특성을 가진 인재라.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겠는데?’
남현수 부장은 영상 속 인물이 욕심났다.
“안 되겠다. 누군지 당장 알아봐. 포상금도 걸고.”
“네. 부장님.”
“만약 신규 각성자가 맞는다면 반드시 우리가 영입한다.”
“맞습니다. 저런 인재를 다른 놈들에게 빼앗길 수는 없습니다.”
블루 썬더 길드원 전체에게 영상 속 남자를 찾으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
단순히 인터넷에 영상이 뜬 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걸 봐도 사람들이 박민준의 정체를 확실히 모르긴 했으니까.
서울의 주작 길드.
한국 헌터 서열 11위.
그 유명한 청룡 백호 현무 주작에서 이름을 따왔다.
공교롭게도 10위 안에 나머지 이름을 가진 길드가 있었고.
주작의 인사팀장 김정빈에게 한 통의 연락이 왔다.
발신자는?
게이트 관리국 경기지부 박만용.
“이 늙은이는 잊을 만하면 연락을 하는군. 그런다고 우리가 자리라도 하나 내어줄 줄 아나?”
어림없는 소리.
혼잣말한 그가 전화를 받았다.
“박 선생님? 그동안 안녕하셨는지요. 제가 먼저 연락을 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그래. 자네는 그동안 잘 지냈나?”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선 어쩐 일로 저에게 연락을 주셨는지요?”
“오늘 오후에 우리 본부 등급 검사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나?”
“좋은 인재라도 발견하신 모양이군요. B등급 정도 됩니까?”
그렇다면 나쁘지 않다.
‘이래서 내가 이 인간 전화를 받는 거지. 아니면 뭐하러 귀찮게 상대하겠어.’
속으로 자길 비웃은 줄도 모르고, 혼자서 신이 난 목소리의 박만용이었다.
“겨우 그 정도? 그럼 내가 이렇게 연락하지도 않았지.”
“그럼, 설마 A등급? 이거 정말 대박이군요.”
“그것도 아니네.”
“네? 그렇다면?”
“그래. S등급이네. 무려 S등급 헌터가 한국에서 또 나왔다네.”
“뭐라고요? 그게 사실입니까?”
“날 의심하는 건가? 우리가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이야?”
“죄송합니다. 너무 놀라서 그만.”
“이해하네. S등급이니까.”
“맞습니다. 그럼 그자가 누굽니까?”
대답 대신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크크흠.
“박 선생님?”
“그래. 내가 요즘 몸이 영 시원치 않아서.”
“아. 그러셨군요. 제가 섭섭하지 않게 잘 챙겨 드리겠습니다. 그걸로 보약도 해 드시고, 아니지. 그걸로 몇 년간 해외여행이라도 다니십시오.”
“그래 주겠나? 딱히 그런 걸 바라고 전화를 한 건 아닌데. 뭐, 주면 고맙긴 하지.”
“그렇지요. 박 선생님께서 그럴 분은 아니시지요.”
“그. 새로운 S등급 각성자가 누구냐 하면….”
전화를 끊고.
황급히 길드장실로 향한 김정빈이었다.
잠시 후.
길드장의 명령을 받은 그가 직접 수원으로 향했다.
‘그자만 영입하면 우리도 한국 제일의 길드로 도약할 수 있다.’
박민준 영입 쟁탈전의 시작이었다.
***
박민준의 집 앞.
차에서 먼저 내린 그를 따라, 김철진 팀장도 운전석에서 서둘러 내렸다.
초인종을 누르려는 박민준에게 그가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그래.”
“내일 오전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래도 되겠지요?”
“마음대로 해.”
“감사합니다.”
“그래.”
“여기 제 명함입니다. 혹시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십시오.”
“알았어.”
김 팀장은 스스로 조금 과하지 않나 생각했지만, 상대가 한국에 3명밖에 없는 S등급 헌터라는 걸 떠올렸다.
실력만큼이나 성격도 굉장했고.
S급 헌터인 그가 내일 지부장을 만나 말을 잘못하면?
예를 들어.
“어제 팀장인지 뭔지 나한테 좀 불친절하던데? 여기엔 그런 인간도 팀장을 하나? 기분 나빠서 당신들하고 같이 일 못 하겠는데?”
라고 말한다든가.
아니면.
지부장을 만난 뒤엔 본사로 데려가 국장과 대통령을 만날 테고. 여태 그래 왔듯이 말이다.
아무튼, 그 상황에서 자신에 대해 나쁜 말이라 저 인간의 입에서 나오면?
‘당장 사표를 내야 할 수도, 아니지 한국에서 헌터 일을 영원히 못 하게 되는 거 아냐? 외국은 싫은데.’
그도 B급 헌터라 공무원이 아니더라도 먹고살 염려는 없다.
막말로 타국에 가서 헌터를 하면 되니까.
용병이라 험한 일을 더 많이 하고, 음식도 입에 안 맞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S급 헌터에게 밉보여서 좋을 게 없구나.’
높은 양반들이 저 S급 헌터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라면, 그깟 기동 2팀장인 나 같은 인물은 그냥 자를 수도 있겠지.
‘어휴, 생각만 해도 식은땀이 나네. 그냥 자존심이고 뭐고 저 인간에게 잘 보이는 게 최선이네.’
S등급 헌터의 존재는 박민준이 자각하는 것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걸 잘 알고 있는 사람이 김철진 팀장이었고.
한편, 박민준이 대문으로 다가갔다.
그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띵 동!
침을 한 번 꿀떡 삼키고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중년 여인의 목소리다.
익숙한 듯하면서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엄마? 아니야. 목소리가 달라.’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제 이름이 박민준이라고 하는데요. 혹시 아십니까?”
스스로 말해놓고 참 바보처럼 느껴졌다.
‘나 지금 뭐라고 한 거냐?’
그가 자책하고 있는데.
“지금 장난하는 거면, 그냥 돌아가세요. 안 그래도 힘든데. 사람이 그러는 거 아니에요.”
“장난치는 게 아닙니다. 제가 박민준입니다.”
인터폰 너머로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흐르고.
안쪽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나왔다.
세월이 느껴지긴 했지만, 길에서 지나가다 보고, 한 번 더 눈길이 갈 정도의 외모였다.
그런 그녀를 본 박민준의 몸이 순간 휘청거렸다.
목소리를 듣고 왜 못 알아봤는지. 이제 알겠네.
“누나?”
작게 중얼거린 그가 벽을 부여잡고 간신히 몸을 바로 세웠다.
‘내 기억 속 누나는 아직도 24살인데. 지금 보이는 건….’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누나에게만 흐른 듯 보이는 세월의 적이란. 충격이 너무 컸다.
한편, 박민희는 그의 중얼거림을 듣고 어리둥절했다.
“누나라니요? 제 하나뿐인 동생 민준이는 지금 42살…. 어? 얼굴이…. 우리 민준이 젊었을 때랑 너무 똑같은데?”
박민준은 늙은 누나를 본 충격으로 잠시 벽에 몸을 기댄 상태.
누나 박민희는 동생을 닮은, 사실 자기 동생이 맞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어린 청년을 보고 엄청난 혼란에 빠진 상황.
‘내가 나서야겠군.’
눈치 빠른 김철진 팀장이 슬쩍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아이고. 반갑습니다. 박민준 씨의 누님을 이렇게 만나 뵙게 되었다니.”
“그쪽은 또 누구세요?”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김철진이라고 합니다. 여기 제 명함.”
그가 90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하며 내민 명함을 박민희가 얼떨결에 받아 읽었다.
“게이트 관리국?”
“그렇습니다. 그 밑에 보시다시피, 제가 경기지부 기동 2팀 팀장 김철진입니다.”
박민희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무려 20년이다.
그동안 동생을 찾겠다고 뿌린 전단이 얼마나 많은가?
사기도 많이 당하고, 그래서 돈도 많이 날렸다.
“혹시 사기꾼들 아니에요?”
“절대 아닙니다. 여기 계신 박민준 씨의 신분은 저와 게이트 관리국에서 보증해 드리겠습니다.”
“정말요? 이 청년이 우리 민준이를 닮았지만, 그래도 너무 어린데? 사기를 치려면 제대로 쳐야지. 이 개새끼들아.”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이내 욕설로 끝났다.
김철진 팀장이 멋대로 끼어들어 시간을 끌어준 사이.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진정시킨 박민준이었다.
“누나. 여전히 욕쟁이구나.”
“날 욕쟁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우리 민준이뿐이었는데?”
“나라니까. 아무튼, 아직도 씩씩해 보여서 좋네.”
“진짜 너야? 이게 말이 되나?”
“왜 안 되겠어? 20년 만에 돌아온 지구에 괴물도 막 돌아다니고 있는데. 나도 좀 젊을 수 있지.”
“조금이 아니잖아! 만약 너라고 해도 어떻게 하나도 늙지 않을 수가 있어?”
“나도 몰라. 아무튼, 내가 박민준이야.”
“못 믿겠어. 확신하기 전엔 아빠, 엄마한테 절대 널 보여주지 않을 거야.”
“당연히 그래야지. 내가 뭘 어떻게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