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와. 진짜 뒤지는 줄 알았네.”
천마가 강하긴 강하구나.
마지막 순간.
놈이 날린 최후의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면, 지금 쓰러져 있는 건 천마가 아니라, 바로 나였을 거다.
천마는 그걸 몹시 억울해하는 눈빛이었다.
“치사하고 더러운 놈 같으니! 받아칠 것같이 굴어놓고 뇌려타곤으로 피해? 부끄럽지도 않은가?”
뇌려타곤은 미친 당나귀가 땅바닥을 구른다는 뜻.
제대로 된 무림인이라면 죽을 땐 죽을지언정 절대로 하지 않는다는 회피 방법이었다.
그러니 무림 맹주씩이나 되는 내가 뇌려타곤을 써서 피할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거다.
그 전에 녀석의 공격을 제대로 정면에서 받는 양, 기를 잔뜩 모으는 척 굴며, 가슴까지 쫙 펴고 있었거든.
근데 그건 이쪽 세계에 살던 놈들 생각일 뿐이지.
죽고 사는 싸움에 정정당당한 게 어딨어?
당한 놈이 바보 아닌가?
그래서
“웃기고 있네. 이기면 장땡이지. 뭐가 더럽고, 치사하냐?”
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도 이쪽 세계 생활을 오래 해서 그런지, 속마음과 다른 말이 입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네놈의 수법이 너무나 오묘하고 강해서 나도 어쩔 수 없었다.”
“흥! 내가 그것만 말하는 줄 아느냐?”
“그럼? 다른 게 또 있다는 건가?”
녀석의 시선이 주변을 훑었다.
천마를 중심으로 주위를 가득 메운 시체들.
발 디딜 틈도 없다.
모두 무림맹의 무인들 그리고 정파를 자처하는 인물들이었다.
“저놈들을 나에게 먼저 보내놓고 넌 뒤에서 내가 힘이 빠질 때까지 계속 숨어있었지.”
“개소리. 난 중간에 길이 엇갈려서 조금 늦게 왔을 뿐이다.”
“그거야말로 개소리지. 무림 맹주란 놈이 이렇게 파렴치인 걸 다른 놈들도 알아야 하는데. 괜히 다 죽여버렸구나.”
내가 일부러 차륜전을 펼친 걸 알고 있었나?
그건 나보다 강할 거라 거의 확실시 되는 천마를 죽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렇게 많은 인원으로 천마 저놈의 힘을 미리 빼놓지 않았다면 내가 마지막 공격을 피할 수 없었겠지.
“네놈을 죽이고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희생이었지.”
“흥! 미친놈. 네놈이야말로 악마다. 살성이다. 내가 네놈의 속을 모를 줄 아느냐?”
알면 어쩔 건데?
곧 죽을 놈이 말이 너무 많네?
“그런데, 너 왜 안 죽냐? 설마 지금 그렇게 누워서 힘을 몰래 회복하고 있는 건 아니지?”
움찔!
순간, 천마 녀석의 눈이 아주 미약하게 흔들렸다.
아니, 진짜 그런 거였어?
일부러 나에게 말을 걸고 시간을 끌었던 거야?
그렇다면 더는 시간을 줄 수 없다.
여유를 부리는 건 여기까지.
쓱!
손에 들고 있던 반쯤 부러진 검으로 녀석의 목을 잘라냈다.
이것도 천하에서 알아주는 명검인데, 저놈 때문에 반 토막이 났다.
뭐 지금은 무기에 의존하는 단계는 지났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천마는 정말 소름 끼치게 강한 놈이다.
‘내가 어떻게 이겼지. 두 번 다시 못 할 짓이야. 어휴.’
어차피 뒤져버렸으니.
이젠 저놈과 싸울 일도 없다.
천마의 죽음과 동시에.
띠 링!
드디어, 맑고 경쾌한 알림음과 함께 안내창이 떴다.
[최종 임무 – ‘천마를 죽여라’ 완료를 축하드립니다!]
[경험치 획득 - 이미 최종 레벨이라 경험치 획득에 따른 추가 능력치 향상은 없습니다.]
[칭호 획득 – 천하제일인]
[아이템 획득 – 비급 ‘천마신공’]
[아이템 획득 – 천잠사의 장포]
경험치야 이미 만렙을 찍어서 저럴 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전혀 아쉽지 않다.
만약 내가 레벨을 끝까지 달성하지 않았다면, 계략이고 뭐고 천마에게 이미 당해버렸을 테니까.
그럼 획득한 천하제일인 칭호는?
[칭호 ‘천하제일인’ - 모든 능력치 +20, 내공 소모량 -20%]
“와! 이거 대박인데?”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만렙을 찍어도 순수 신체 스탯은 최대 99를 넘어설 수 없다.
이건 절대 변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천하제일인 칭호를 얻고 보니.
119로 변경된 게 보였다.
‘아무리 최종 획득한 칭호라고 해도 이건 정말 미친 것 같은데? 마지막이라고 막 퍼주나?’
그럼 다음으로 천마신공의 비급은?
좋다 말았다.
‘그림의 떡이네.’
시스템상 몸에 익힐 수 있는 건 비슷한 성향을 지닌 무공뿐이다.
정파를 선택했으면 끝까지 정파 계열 무공, 그것도 서로 통하는 것만 익힐 수 있다.
그걸 무시하고 아무 무공이나 막 익히면?
100%의 확률로 주화입마에 걸려 죽는다.
천마를 죽이고 얻은 천마신공은 마도계열 무공.
내가 익힌 곤륜파의 무공과는 성향이 극과 극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말인즉, 여태 만렙까지 익힌 곤륜파의 무공을 모두 버리고 난 뒤에야, 천마신공을 익힐 수 있다.
그것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으니.
‘곤륜파의 무공을 대성하는 것도 20년이 걸렸는데. 그보다 강한 천마신공을 다시 익히려면?’
최소 20년보다 더 오래 걸리지 않을까?
만렙을 찍은 스킬을 버리고 다른 걸 취할 이유가 없다.
어차피 이젠 이 세계에 나보다 강한 놈도 없는데?
굳이?
그래서 천마신공을 익히는 건 보류.
아마 크게 상황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절대 배우지 않을 거다.
그럼 마지막으로, 천잠사의 장포는 어떨까?
이거 전설급 아이템이다.
천마와 싸우기 전에 입으려고, 그렇게 천하를 쥐잡듯이 뒤져도 나오지 않았는데.
정작 그걸 천마가 가지고 있었구나.
그러니 내가 발견하지 못했지.
천마가 입고 있던 이 천잠사의 장포는 인간이 만든 그 어떤 무기로도 뚫거나 찢을 수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실제로 이걸 입은 천마를 찌르고 내 검이 반 토막 났으니까.
물론 녀석이 장포에 내공을 두르긴 했겠지만, 나 또한 검으로 강기를 만든 상태였다.
이렇게 무림 최강의 천마를 죽이고, 최고의 방어구를 얻었으니.
“이젠 정말 천하의 그 누구도 두렵지 않다.”
“그런가요? 자신감이 보기 좋네요.”
나 혼자 한 말이었는데?
주변에 살아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절대로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면 안 될 텐데?
귀신?
아니면 히든 보스?
둘 다 싫다.
속으로 흠칫 놀라며,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봤다.
10대 초반으로 보이는 소년.
눈빛이 맑고 똘똘하게 생겼다.
‘천마의 아들인가? 아니면 흑막?’
천마가 끝이었을 텐데?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니요. 난 천마란 인간의 자식이 아닙니다. 하지만 흑막이라… 어감은 좋지 않지만, 당신이 보기에는 비슷하긴 하겠군요.”
내 속마음을 읽고 대답한 소년? 아니 인간이 아닌가? 뭐지?
“나 말입니까? 그러고 보니, 아직 내 소개를 하지 않았군요.”
“넌 뭐지? 사람이긴 한 건가?”
“내 이름은 알파. 당신이 시스템이라고 불렀던 존재입니다.”
“네가 시스템이라고?”
“네. 그리고 이곳 사람들은 날 신이라고도 부릅니다. 저도 그렇게 불리는 게 더 익숙하군요.”
“신? 근데 왜 이름이 알파야? 베타, 델타 같은 것도 있나?”
“당신이 그것까지 알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 왜 이제야 나타난 거지?”
“박민준 씨 당신이 주어진 임무를 모두 수행했으니까요. 이젠 그 보답을 해주려고?”
“보답? 뭘 어떻게 해줄 건데? 날 집으로 돌려 보내주기라도 할 건가?”
“맞습니다. 당신을 이세계에 부른 게 나였으니. 다시 돌려 보내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도 나뿐입니다.”
“네가 날 이곳으로 납치한 장본인이라고? 이런 개자식이!”
녀석에게 달려들어 머리를 부수고, 몸을 갈가리 찢어놓으려 했다. 내가 영문도 모르고 이세계에 끌려와서 얼마나 죽을 고생을 다 했는데.
그게 저놈이 한 짓이었어?
녀석이 날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팡!
보이지 않는 장벽에 막히며, 몸이 뒤로 튕겨 나갔다.
“방어막? 흥! 이까짓 거.”
최후의 심득을 담아 기를 모았다.
부러진 검을 뛰어넘어 3m가량의 검강을 만들었다.
그걸 휘둘러 방어막과 녀석을 동시에 베어버리려고 했다.
“경거망동하지 마십시오.”
“지랄. 이거나 먹어라.”
쾅! 쾅! 쾅!
내 검강에도 녀석이 친 방어막은 멀쩡했다.
‘이게 안 통해?’
녀석이 더욱 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무 소용없습니다.”
“난 아직 널 죽이고 싶은데? 혹시 천마신공을 익히면 되나?”
그걸 익힌 천마는 나보다 월등히 강했다.
놈의 무공이라면 저 신이란 놈의 얼굴에 검을 박아 넣을 수 있지 않을까?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는 겁니까? 보기보다 상당히 뻔뻔하시군요?”
“그래서 대답은 안 해줄 건가?”
“네. 내가 잘못되면 당신은 평생 여기서 살아야 합니다. 죽어서도 혼이 여기 남아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도 날 죽일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싶습니까?”
죽어서도 집에 못 간다는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생각 같아서는 미소 짓는 저놈의 얼굴을 반으로 쪼개 버리고 싶었지만, 그보다 집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더 컸으니까.
‘이곳에 너무 오래 있었어. 부모님과 누나도 보고 싶어. 그걸 저놈이 할 수 있다고?’
“그렇습니다. 그럼 이제 당신을 원래 살던 세상으로 돌려보내 드리지요.”
“지금 바로?”
“네. 지금.”
녀석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번쩍!
강한 빛이 내 시야를 가렸다.
너무나 눈부셔서 계속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데.
빵! 빵빵!
날카로운 경고음이 들렸다.
‘뭐지?’
시스템에 이런 소리도 있었나?
억지로 눈을 떠서 확인하려 했다.
그 전에 쾅!
강한 충격이 온몸으로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