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속에선 주인공인 내가 현실에선 은거기인-61화 (61/62)

〈 61화 〉 신성 기사 알테온(1)

* * *

뜨거운 여름의 태양이 폐허의 음산함을 거두고 있었다. 언젠가는 신도들이 신을 모시던 신전이었겠지만 지금은 이름 모를 신의 조각상과 이끼가 잔뜩 낀 돌무더기만 남아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만 풍기고 있는 숲속을 검은 옷을 입은 무리가 걸어 올라가고 있었다.

저마다의 무기를 꼬나쥔 그들이 발걸음을 멈춘 곳은 오랜 세월의 풍파로 빛이 바랜 하나의 조각상 앞이었다.

목 위에 마땅히 붙어있어야 할 것이 없는 조각상은 이곳저곳이 갈려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변한 두 손으로 힘겹게 잔을 받쳐 들고 있었다.

"이겁니다."

가장 앞에서 무리를 인도하던 자가 조각상이 들고 있는 잔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 잔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만."

묵직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그의 손길을 멈추었다. 하얗게 센 수염이 드문드문 섞인 턱수염을 멋스럽게 기른 중년인이었다.

"성배다. 우리가 함부로 만져도 될 물건이 아니야. 노완 신관님."

멋들어진 수염보다 나이와 맞지 않는 커다란 체구가 눈에 띄는 중년인이 몸을 비켜서자 그 뒤에 가려져 있던 작은 체구의 여자가 신음성과 함께 앞으로 나섰다. 여자는 검은 옷을 입은 무리 중 유일하게 금빛 테가 둘러진 하얀 옷을 입고 있었다.

"아아, 거룩한 빛 젤루아시여. 다른 신의 성물에 손을 대는 저희를 벌하소서. 탐욕에 눈이 먼 자를 매질하소서. 그리고 당신을 위해 잊혀진 자의 무덤을 파헤치는 저희를 용서하소서. 저희가 당신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다면 이름 모를 신의 발밑에 벌레처럼 으깨어져 죽을 것입니다."

신관의 말과 함께 그녀의 몸에서 찬란한 빛이 쏟아져 나오며 그녀와 조각상, 그리고 그 주변이 환한 빛으로 물들었다.

"오오! 신이시여!"

뒤에 머물러 있던 다른 자들이 일제히 땅에 머리를 조아렸다. 단 한 사람만 빼고.

#

'미친놈들.'

하도 오두방정을 떨며 머리를 조아린 탓에 이마를 땅에 찧기까지 한 몇몇 사람들의 모습은 진짜 광신도 그 자체였다.

'남의 집 털러 온 도둑놈들이 자기 안위는 끔찍이도 챙기네.'

혹여나 지켜보고 있을 이름 모를 신에게 해코지당할까 싶어 열심히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보니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혼자 멀뚱히 서 있을 수도 없어 뒤따라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바닥까지 숙인다. 그 상태에서 상황을 살피기 위해 고개만 살짝 들자 갈라진 돌바닥 틈새로 자라난 잡초의 풀냄새가 코를 찔렀다.

'킁, 그나저나 노완이 언제 신관이 된 거야?'

불과 다섯 달 전만 해도 채광반의 기도를 전담하던 사제였던 그녀는 어느새 멀끔한 신관복을 차려입은 신관이 되어있었다. 물론 사제가 곧바로 정식 신관이 되는 것은 아니니 지금은 견습 신관일 테지만 어쨌든 신관은 신관이었다. 여리여리한 몸에서 뿜어지는 예사롭지 않은 빛이 한동안 주변을 밝히다 그녀의 몸으로 되돌아간다.

"이제 다 되었습니다. 저주는 없군요."

그리곤 지그시 감고 있던 눈을 살며시 반개했다.

"아, 감사합니다. 노완 신관님."

전투 반장 벨로스가 그녀의 말에 몸을 일으키고 뒤에 서 있던 수색정찰조의 인원들도 모두 기립한다. 오늘은 던전 공략을 위해 수색정찰조의 3개 조가 모두 모였기에 하나의 동작으로도 부산스럽게 먼지가 일었다.

'뒤에 사람들까지 오면 발 디딜 틈도 없겠는걸?'

전투반의 편성은 수색정찰조 3개 조, 정보통신조 2개 조, 공략조 10개 조, 포획조 2개 조, 보급조 3개 조로 총인원이 200명을 넘어선다. 던전을 공략하는 날에는 이 인원이 모두 출동하기에 지금 여기 모인 서른 명 남짓한 인원을 제외하고도 170명가량이 더 와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던전이 크다 해도 200명이 넘는 인원을 수용할 수는 없는 노릇. 그렇기에 역할을 나누어야 했다.

내 눈엔 영 못 미더웠지만, 수색 정찰에 특화된 수색정찰조가 던전 내부로 선진입하여 던전의 특성을 파악하고 나면 그 정보를 토대로 공략조가 후진입하여 던전을 공략한다.

그렇게 공략조에 의해 던전의 일부가 공략되면 후방으로 물러났던 수색정찰조가 다시 그다음 경로를 수색 정찰하여 함정과 기관 장치 등의 트랩들을 제거하고 수색정찰조가 뚫지 못하는 관문은 다시금 공략조가 투입하여 뚫는 것이 던전 공략의 기본 형식이었다.

그리고 관리자(조장 및 반장)의 판단하에 포획할 가치가 있는 몬스터가 있다면 조마다 배치된 정보통신조를 통해 명령을 하달하여 포획조가 임무에 투입되고 보급조는 후방에서 대기하며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필요한 물품을 즉각적으로 보급한다.

'이렇게 보면 나름대로 체계를 갖추긴 했는데…. 개개인의 수준이 너무 떨어져.'

전투반 인원들의 전투력을 등급으로 나눈다면 일반 조원들의 수준이 2등급 정도, 조장이 3~4등급 사이, 반장이 5등급 정도였다. 물론 시스템이 아닌 내 정보분석 능력에 의존하여 판단하였기에 오차는 존재할 수 있었다.

어쨌든 절대다수가 2등급에 머문 상황. 뭐, 이 정도도 따지고 보면 괜찮은 전력이긴 했지만, 눈앞의 던전은 지금까지처럼 그리 호락호락한 던전이 아니었다.

"그럼 던전을 개방하겠습니다."

이번 던전의 최초 발견자, 구프가 다시금 손을 뻗어 잔의 윗부분을 잡고는.

끼리릭.

그대로 시계 방향으로 돌렸다.

쿠구구궁!

"어엇! 진짜 계단이?"

바닥에서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듯한 기관 장치의 소음과 함께 폐신전의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계단의 너비는 꽤나 넓어서 세 사람이 한 칸에 서도 여유가 있었는데 어둠으로 인해 바깥에서 그 깊이를 가늠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꿀꺽!

옆에서 율리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려온다. 율리 뿐만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 역시 마른 침을 삼키며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던전 공략에서 수색정찰조의 역할은 가장 먼저 미지의 위험을 맞닥뜨리는 것.

단 한 번의 실수가 곧 죽음과 직결될 수도 있었기에 늘 선두의 부담감과 압박감이 장난이 아니었고 이번에는 내가 속한 1조가 그 선두를 맞게 되었다.

"수색정찰조 1조 던전 진입을 시작하겠습니다! 진입!"

"진입!"

조장 벤트의 명령을 복명복창하며 1조 10명과 통신조 2명이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하고 뒤이어 2조와 3조가 차례로 따라붙었다.

"……."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은 다들 긴장감에 숨소리마저 죽이고 있어 무거운 적막만이 맴돌았다.

­ 정지!

어느덧 계단의 끝에 도달한 벤트가 주먹을 움켜쥔 채 들어 올렸다. 정지를 뜻하는 수신호였다.'

­ 빛!

그는 이번에는 손가락 다섯 개를 오므려 동그라미를 만들었다가.

­ 비춰!

검지를 핀 손을 뻗어 전방을 가리켰다.

그의 지시에 조원들이 일제히 손전등의 불빛을 전방으로 향하자 멀리서 희끄무레한 형체가 보였다.

나는 때가 되었기에 앞에 서 있는 조원들의 틈을 비집고 계단을 내려가 벤트의 앞에 섰다.

­ 뭐야?

미간을 찌푸리며 소리는 내지 않은 채 입 모양만으로 의사를 전달하는 그의 귀에 손을 가져다 대고는 작게 속삭인다.

"조장님, 미스릴 골렘입니다."

"…그게 뭔데?"

벤트는 고개를 뒤로 빼며 의아한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곤란한데.'

예상과는 다른 반응에 당황스러웠지만 침착함을 유지한 채 다시 한번 귓속말의 제스처를 취하며 소곤거렸다.

"아무튼, 조장님이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무지하게 센 놈입니다. 이 앞으로 더 나아가면 움직일 겁니다."

"흠…. 너 그 말… 쩝, 아니다."

벤트는 무언가 말하려다 말고는 엄지를 뒤로 찌르는 수신호를 보냈다.

­ 후퇴!

'후, 이제 신뢰를 좀 쌓은 건가?'

지난 4개월 동안 전투반에서 쌓아온 공적들로 인해 제법 신뢰가 쌓였는지 벤트는 생각보다 순순히 내 의견을 받아들였다.

"아니, 들어간 지 얼마나 되었다고 나오는 겐가?"

밖으로 나오자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벨로스와 노완, 통신조 인원 2명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우리를 맞이했다.

"자세한 설명은 이 친구가 할 겁니다."

"으음?"

"수색정찰조 1조의 지크입니다."

"아니, 이 친구는 전에 채광반에서 온 친구가 아닌가? 그…… 지도 그리는 재주가 뛰어났던."

"하하, 기억해주시다니 감사합니다. 제가 이번 던전에 대해 설명드리겠습니다."

나는 최대한 가식적으로 보이지 않게 자연스러운 미소를 표현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앞으로 있을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선 슬슬 관리자한테 눈도장을 찍어놔야 해. 되도록 좋은 이미지로.'

"그래, 안에 무엇이 있길래 이토록 빨리 나온 건지 이유나 좀 들어보지."

"일단, 수색이 가능한 곳에는 이렇다 할 함정이나 기관 장치는 없었습니다. 다만…."

"다만?"

"던전 입구에 고대에 만들어진 가디언이 있었습니다. 정식 명칭은 미스릴 골렘으로 몸 전체가 미스릴로 이루어진 고대 마법 공학의 산물입니다. 가공할 마력과 더불어 현시대에는 파악하기 힘든 고대의 마법 술식이 내재되어 있을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에 전투반의 인원으로는 공략이 불가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이 정도면 잘 알아들었으리라 생각하고 스스로의 설명에 만족감을 느끼며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는데 왜인지 모르게 주변이 조용했다. 아니, 조용하다 못해 싸늘하달까?

"흠."

등 뒤에서 들려오는 작은 콧소리에 몸이 순간 딱딱하게 굳는다.

'뭐, 뭐지? 분명 내 뒤엔 수색정찰조 사람들만 있을 텐데 이 압도적인 존재감은 대체…….'

태어나서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듯하다는 말이 이렇게 와닿은 적이 있었던가? 딱딱하게 굳은 등허리로 순식간에 솟아난 식은땀이 줄줄 흐른다.

"놀랍군요. 전투반에 고대의 지식을 갖춘 인재가 있었습니까?"

"아, 아, 아, 알테온 신성 기사님…!!!"

경악한 벨로스의 외침에 전신의 마나를 빠르게 돌려 잔뜩 경직된 근육을 풀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아, 오랜만입니다. 벨로스 님. 신전 순회를 돌고 있었는데 마침 이곳에서 던전을 발견했다길래 참관 겸 들러봤습니다."

"그, 그러시군요! 잘 오셨습니다! 저, 정말 잘 오셨습니다!"

고개를 돌려 마주친 알테온은 눈에 이채를 띤 채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나저나 미스릴 골렘이라고 했습니까?"

'크윽! 전투 반장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기회다! 이번 기회를 무조건 살려야 해!'

나는 짧은 순간 머리에 김이 날 정도로 생각을 가속했다.

"예! 오랜만입니다. 알테온 성기사님. 아, 이제는 신성 기사님이 되셨군요."

"아…? 우리가 인연이 있었던가요?"

'역시나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고개를 갸웃하는 알테온에게 나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기억하지 못해도 상관없어. 우리가 인연이 있는 건 사실이니까.'

10년 전 지크를 구했던 성기사 알테온은 10년이 지난 지금 차석 성기사와 수석 성기사를 지나 교단에 단 4명뿐인 신성 기사가 되어있었다. 그 인연을 잘만 활용한다면 이번 꿈에서 한몫 단단히 챙길 수 있을지도 몰랐다.

"예전에 신성 기사님께서 야크 산맥의 산적에게 붙잡혀 있던 저와 어머니를 구해주신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대신관이 되신 루엘 신관님과 함께요."

놀랍게도 과거 지크를 구했던 두 사람은 10년이란 세월이 흘러 젤루아 교단의 핵심 인사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에게 지크란 스쳐 지나가는 바람과도 같아서 기억할 리 만무했지만.

"아아, 기억이 날 것도 같습니다."

"저, 정말요?"

'아니, 그걸 기억한다고?!'

나는 진심으로 놀래서 말까지 더듬었다.

"그런데… 그래서요?"

"……예?"

순간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 두 눈을 빠르게 깜빡이다 말을 이었다.

"아니, 인연이 있었냐고 물으셔서…."

"그거야 당신이 무슨 대단한 인연이라도 있는 것처럼 아는 척을 하니 그런 거 아닙니까. 미스릴 골렘에 관해 물었는데 10년 전 일을 꺼내는 연유가 뭡니까?"

"어, 그…."

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벙긋대다 힘겹게 할 말을 떠올렸다.

"그냥 반가워서…."

내가 생각해도 참 뭣 같은 말이었지만 그 순간엔 달리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그의 목소리는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저는 하나도 반갑지 않으니 어서 미스릴 골렘에 관해서나 얘기하세요."

"예, 예…."

'이 씨발!!'

욕을 끊을 수가 없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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