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속에선 주인공인 내가 현실에선 은거기인-58화 (58/62)

〈 58화 〉 전투반 수색정찰조 (1)

* * *

"이……야! 쥐크!! 내 친구…. 하하!"

'이 자식, 많이 취했네.'

얼굴이 벌게져서 나를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루크를 마주 바라보다 고개를 젓는다. 이미 혀가 된통 꼬여서 발음이 상당히 어정쩡했다.

"얌마! 그거 뭐야! 그 도리도리! 어? 나, 안 취했거든?!"

"누가 뭐래냐?"

"내가 말이야, 모험가 시절엔 말이야…어? 그 뭐냐, 어. 용병들이랑 같이 술잔을 기울여도…. 마지막까지 남는 게 나였다­ 이 말이야! 어? 그 무식한 용병 놈들조차도! 어?!"

벌써 몇 번째 듣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오크통에 담긴 맥주를 루크의 잔에 따랐다.

"어유, 잘 나셨습니다. 그럼 술이나 받으시죠?"

"어, 어…. 더 먹으면 안 되는데…. 욱!"

루크는 헛구역질을 하면서도 자리를 뜰 생각을 않았다. 다른 조원들. 아니, 이제는 다른 조의 조원이 되어버린 3조의 광부들은 모두 자리를 뜬지가 한참인 데다 종업원이 가게의 마감을 하기 위해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는 와중에도 우리가 이러고 있는 건 이 녀석이 자꾸만 나와 처음으로 가지는 술자리를 이렇게 빨리 끝낼 수는 없다며 고집을 부렸기 때문이다.

꿀꺽!

"쫄?"

그러나 우리의 길었던 2차도 이제 끝이 다가왔다. 루크의 피부는 손등부터 시작해 목과 얼굴까지 모두 벌게졌고 반쯤 감긴 눈꺼풀은 연신 파르르 떨려 애처로울 지경이었으니까.

"쪼, 쫄?"

그렇게 내가 내 잔에 담긴 맥주를 단숨에 털어 넣고 도발하니 루크는 무슨 말인지 이해 못 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린다. 다만 뉘앙스에서 무언가를 느끼긴 했는지 미간을 찌푸렸고 나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2연타를 날렸다.

"훗, 쫄았네. 용병은 무슨. 처음으로 술을 마시는 나보다도 못 마시는구만."

"허! 아니? 아니거든?"

"뭐가 아닌데? 그럼 마셔보던가."

"야…! 나, 루크야! 루으크! 이, 이깟 술 따위, 어?"

"말이 기네. 못 마시겠어? 그럼 이만 일어나고."

내가 한쪽 입꼬리만 들어 올리며 비틀린 미소와 함께 의자를 짚고 엉덩이를 살짝 들자 루크가 잔을 들고 그대로 들이마시기 시작하고.

꿀꺽꿀꺽꿀­쿵!

잔을 채 비우기도 전에 테이블에 얼굴을 처박는다.

"쯧쯧. 이기지도 못할 술을 왜 이리 좋아해. 계산할게요."

"네!"

나는 술값을 지불하고 루크를 들쳐업은 채 기숙사로 향했다.

'어우, 돈 아까워. 이 돈이면 고기가 몇 근이냐, 대체.'

1차는 나를 제외한 전 조원들이 계산하고 갔지만 2차가 워낙 길었기에 지출이 상당했다. 루크의 품을 뒤져 돈주머니에서 반을 빼내려 했지만 몇 푼 들어있지 않은 실버를 보니 가져갈 맘도 들지 않았다.

'갚을 돈도 얼마 되지 않는데, 돈을 왜 안 모으는 걸까?'

루크의 경제 관념에 관한 의문은 뒤로하고 루크의 품에서 열쇠를 꺼내 루크를 침상에 눕히고 나왔다.

그저 기숙사일 뿐이지만 빛의 여신 젤루아의 교단은 제국뿐만 아니라 전 대륙에 영향을 끼치는 범국제적 종교. 그런 만큼 노예를 위한 기숙사조차도 1인 1실로 쾌적한 환경을 자랑했다.

'뭐, 사실은 워낙 기숙사 내에서 사건·사고가 자주 일어나니 취한 조치이지만.'

이곳에 들어온 사람들은 인생의 끝자락에 몰린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교단에 의해 목숨을 보장받고 삶을 영위하고 있다지만 이런 게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밖에서 일자리도 없이 하루하루를 구걸로 연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과 비교하면 양질의 삶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막상 그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평생동안 일을 해도 빚만 갚아갈 뿐인 인생. 이미 자신의 삶을 교단에 의탁한 채 시키는 일만 묵묵히 수행하며 교단이라는 시스템의 명령에만 반응하는 주체가 사라져버린 기계였다.

그러다 보니 속에 쌓여만 가는 욕구는 날로 커져가고 그런 사람들을 모아두니 도난, 살인, 성폭행 등의 사고가 끊이질 않아서 기숙사를 증축 및 새롭게 쌓아 올려 지금의 상태가 된 것이다.

끼익.

"후우. 끄아아!"

세면장에서 간단히 이만 닦고 방에 들어온 나는 침대에 몸을 던지고 기지개를 켰다. 오늘은 운동을 한 것도 아니건만 몇 시간을 의자에 앉아있었더니 온몸이 찌뿌둥했다.

'어우, 술 냄새.'

이를 닦았는데도 속에서 올라오는 알코올 냄새가 숨과 함께 딸려 나온다. 회식하는 틈틈이 마나로 간의 기능을 활성화해 알코올의 분해 효소를 보다 신속하게 분비했지만, 마력이 낮아서인지 한계가 명확했다.

마력이 높고 마나 회로가 잘 개발되었다면 간의 기능을 활성화할 것도 없이 알코올과 알코올이 분해되며 생성된 아세트 알데히드를 땀구멍을 통해 배출해 냈겠지만, 아직은 요원한 일이었다.

'몸이 무겁네.'

방에 들어오기 전에 볼일을 봤는데도 워낙 많이 먹은 탓에 몸이 늘어지는 느낌이다. 실질적인 무게의 증가도 있었고 미처 분해되지 못한 알코올과 그 부산물들이 혈관을 타고 흘러 신체의 기능을 저하하고 있었다.

'일단 술기운부터 몰아내자.'

우선적으로 마나를 마나 회로에 집중시켜 빠르게 회전시켰다. 아직 회로가 너무나 비좁고 중간에 끊긴 영역과 뭔지 모를 노폐물 같은 기운 등으로 막힌 구역들이 있어도 마나 회로는 마나 회로였다. 길이 아닌 곳을 움직이는 것보다 마나의 움직임이 훨씬 빨랐다.

일차적으로 회로 근처에 쌓인 음습하고 끈적한 기운을 몰아내는 한편 동시에 겸사겸사 회로의 개척을 진행하고 나자 상당한 마력의 소모와 함께 전신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다 흐른다.

다음으로 한참 동안 전신 구석구석을 돌리자 그제야 술기운이 말끔히 사라졌다.

"어우, 몇 시지?"

이곳에서 시계는 사치품으로 적용되는 물건이라 본래는 방 안에 존재하지 않았지만, 나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써야 했기에 큰돈을 들여 시계를 산 상태였다.

시간을 확인해보니 벌써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아쉽지만 오늘은 마나의 축적까지는 무리라고 판단하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면장에서 간단히 몸을 씻고 다시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는 생각을 정리했다.

'슬슬 본격적으로 돈을 벌어야겠어.'

채광반이 노동의 강도가 크고 환경이 좋지 않은 만큼 급여도 노예 중에서 높은 편이었지만, 그보다 높은 보수를 받는 노예들이 널리고 널렸다.

식당에서 요리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요리반, 신전의 각종 건축물 및 부자재를 취급하는 건축반과 약초와 몬스터에 관한 해박한 지식으로 약을 배합해 상처를 치료하는 의료반 등이 채광반의 바로 윗선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 위로 잡다한 건 제쳐두고 최상위에 있는 두 개의 반이 있었다.

하나는 '신성반', 정식명칭은 수습 사제반이었지만 노예들 사이에서는 신성반으로 불리고 있었다. 뭐, 노예도 명목상으로는 교단에 도움을 받은 신도일 뿐이니까 이름 따위야 아무래도 좋았다.

어쨌거나 신성반은 투철한 신앙심으로 신성력을 깨우친 자들로 구성된 집단이다. 사실상 신성반에 가게 되면 더 이상 노예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이마의 각인이 지워지기 때문이다.

채무는 남지만, 이마의 각인은 지워질뿐더러 자동으로 제하는 이자를 빼고서도 지급되는 보수가 상당했다. 그리고 수습 사제들에게는 교단에서 시행되는 다양한 복지 정책이 적용되기 때문에 생활면에서도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에 들어가기만 한다면 그야말로 인생이 피는 것이다. 게다가 수습을 벗어나 정식 사제가 되기라도 하면 그때부터는 정말 탄탄대로였다. 모든 빚의 탕감과 동시에 무려 대륙 전체에서 한 손에 꼽히는 빛의 여신 젤루아의 정식 사제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신성력을 깨우치는 자는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암만 기도하고 신앙을 울부짖는다고 해도 신성력이 몸에 깃드는 일은 드물었고 깃든다 해도 신성반에 들 정도로 강한 신성력을 갖추는 것은 힘들었다. 그런데도 다들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매일 열성적으로 눈을 감은 채 기도를 하고 있었다.

'희망을 안고 살아가는 건 좋은 거지. 그 신이라는 작자가 기도를 들어줄지는 의문이지만.'

그런 희망조차 없다면 삶을 포기했을 것 같은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이 세상은 현대의 평온함과는 거리가 먼 약육강식이 곧 진리인 세계였으니까.

그리고 남은 하나의 이름은 '전투반', 말 그대로 전투력이 출중한 자들로 구성된 집단이다. 성인이면서 신전의 도움을 받아 채무를 지게 된 자들은 모두 전투력 시험을 치르게 되는데 거기서 뛰어난 면모를 보이면 바로 이 전투반에 속하게 된다.

전투력 시험은 단순히 개인의 무력을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전투에 도움이 되는 모든 능력을 아우르는 시험.

지크 역시 성인이 되며 전투력 시험을 치렀지만, 개인의 무력은 물론이고 이렇다 할 능력이 전무했기에 감독관에게 형편없는 평가를 받으며 채광반으로 오게 되었다.

전투반은 기본적으로 몬스터를 사냥하고 포획하는 임무를 수행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인간과도 전투를 벌인다. 항시 목숨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에 별도의 위험수당이 존재했고 성과에 따라 추가 보수가 지급되기도 한다고 들었다. 또한, 전투반은 다른 반들과 달리 단순히 숫자로 조가 나뉘는 개념이 아니었는데 수색정찰조, 정보통신조, 공략조, 포획조, 보급조의 5개 조로 나뉘어 각자의 역할에 맞게 임무에 투입된다고 한다.

이중 내가 노리고 있는 곳이 바로 수색정찰조.

수색정찰조는 공략조가 몬스터의 무리, 던전 등을 공략하기에 앞서 주변의 지형과 몬스터의 종류, 개체 수 등의 정보를 수집하고 몬스터의 자취를 쫓아 상황을 정보통신조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인류연합(人??) 소속 지구방위군 제8군단 101 우주기갑여단 145 기갑수색중대 중대장 육준오 대위의 기억을 가진 나로서는 이 역할에 특화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나인의 기억까지 뒤섞여 흔적을 쫓는 일이라면 도가 튼 상태였다. 이미 지난 한 달간 채광반에 있으면서 주변 몬스터의 분포와 숨겨진 던전까지 두 개나 찾아냈으니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물론 던전에 관한 건 숨기는 게 좋을 듯하지만.'

이곳의 던전은 현실의 던전과는 개념이 조금 달랐다.

현실의 던전이 포털을 타고 들어가 몬스터의 둥지를 깨부수는 느낌이었다면 이곳의 던전은 일종의 보물창고였다. 던전 내부에 설치된 각종 함정과 보물을 지키는 가디언을 처치하고 나면 던전을 만든 자가 남긴 유물을 습득하는 형식이었는데 그 유물이 보물에 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난이도는 던전에 따라 천차만별이기에 추측하는 게 무의미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당연히 무리였다. 일단 능력을 보여 전투반에 들어간 후 높은 보수를 토대로 힘을 빠르게 키우고 내가 발견한 던전을 클리어하는 것을 목표로 잡고는 잠에 빠져들었다.

#

깡! 깡!

"자, 다들 마무리하고 밖으로 나와!"

오늘도 평소와 같은 하루가 지나갔다. 새로운 조원들과 합을 맞춰 광석을 캐내고 순위 발표와 함께 보수를 지급받는다. 오늘의 순위는 3위였지만, 순위는 큰 의미가 없었다. 몇 실버 더 받는다고 이 삶이 달라지진 않을 테니까.

그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다들 해산하고 편히 쉬도록!"

"예!"

"지크, 너는 따라와라."

"예!"

정산과 기도까지 마치고 나서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광부들의 뒷모습을 힐끔 보고는 작업반장 론을 따라나선다.

'이렇게 바로 진행될 줄은 몰랐는데….'

론을 따라 도착한 곳은 멀리 떨어진 전투반 전용 기숙사였다. 한눈에 봐도 내가 쓰던 기숙사와는 외관부터가 남달랐다. 좌우의 너비는 물론이고 높이까지 비교가 불가할 정도로 높디높은 건축물과 잘 가꾸어진 정원, 운동장처럼 널따란 공터의 한 편에는 수련용 목각 인형들이 즐비해 있었고 창가에 비치는 1층의 모습은 그 전체를 전용 수련 시설로 만들어 놓았는지 여러 사람이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런 1층을 지나쳐 2층의 집무실이라 적힌 방으로 향한 론은 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벨로스 님! 채광반 작업반장 론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세요."

끼익.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널찍한 집무실에 커다란 덩치를 지닌 중년의 남자가 서류를 읽고 있었다. 서류가 손바닥만 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두툼하고 거대한 손이 눈에 띄었다.

'저 손에 맞았다간 단번에 골로 가겠는데?'

"흠, 흠! 벨로스 님. 이 친굽니다."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전투반에 지원하게 된 지크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아, 반장님은 나가보셔도 됩니다. 면접이 길어질 수도 있으니…."

"아, 예. 저는 이만! 잘해 봐라, 지크."

"예,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여 감사를 표하자 론이 빠르게 방을 나섰다.

"음…."

그리고 방 안에 묵직한 중저음의 감탄사가 울려 퍼지고 짧은 침묵 끝에 벨로스라 불린 남자가 입을 뗐다.

"왜 전투반에 지원을 했지?"

"제 능력을 전투반에서 십분 발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 기억은 안 나지만 기록을 보아하니 전투반에 어울리는 인물은 아닌 것 같은데?"

그는 서류 한 장과 나를 번갈아 보며 의문을 표했다.

"이것을 보시겠습니까?"

나는 미리 준비해둔 종이를 벨로스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지?"

"지난 한 달 동안 광산과 기숙사 주변의 몬스터 생태에 관해 조사한 자료입니다."

일일이 수기로 작성한 터라 조잡한 면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래도 알아보는 데 문제는 없을 것이다.

"흐음…. 이걸 자네가 전부 그렸단 말인가?"

"예! 전투반의 수색정찰조는 남들보다 앞서 지형과 지물을 파악하고 몬스터에 관한 정보를 정보통신반에 알려 공략조의 공략을 돕는 역할이라 들었습니다. 제가 그린 지도는 지형과 지물, 몬스터의 종류와 서식 지역, 대략적인 개체 수를 적어놓았기에 앞으로 공략조의 공략에 분명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지도는 이미 있어."

"아…."

'괜한 짓을 했나?'

"그럼­"

내가 무력이라도 어필하기 위해 마력을 끌어올리며 입을 열었을 때 그가 내 말을 끊고 담담히 말을 내뱉었다.

"내일부터 당장 전투반으로 출근하게."

"예…?"

"지도는 있지만, 이토록 정교하게 몬스터의 분포도가 나와 있는 건 처음 보는군. 괜찮은 재능이야. 수색정찰조에 가고 싶다고 했나?"

"예!"

"마침 한 자리가 비어있으니 내일 조회부터는 이쪽으로 와서 받도록 하게."

"예! 감사합니다!"

"허허, 이만 가보도록 해."

"예! 들어가 보겠습니다!"

나는 벨로스에게 직각으로 몸을 굽혀 인사를 하고는 절도 있는 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후우!"

전입 성공이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