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 노예가 되다 (1)
* * *
기억의 시작은 따스한 온기가 감도는 작은 오두막집이었다.
"뜨거우니 조심하렴."
한 여자가 소년에게 주의를 시키며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수프가 담긴 냄비를 둥근 나무 식탁의 중앙에 올리더니 잘 가공된 나무 접시 세 개와 숟가락 세 개를 마저 식탁 위에 올렸다. 그녀는 소년의 엄마였다.
"제가 할게요!"
"후후, 그래 주겠니?"
소년은 부리나케 숟가락과 접시를 각 의자 앞에 하나씩 놓고는 다시 자신의 자리로 가 앉았고 여자는 그런 소년을 보고 미소 짓더니 이내 오두막집의 문을 열었다.
"여보! 식사 준비 다 됐어요! 그만 들어오세요!"
"아, 여보. 이것만 마저 하고 들어가겠소."
"당신도 참. 얼른 하고 오세요."
"하하, 조금만 기다리시오. 금방 갈 테니."
마당에서 장작 패는 소리가 몇 차례 들려오더니 커다란 덩치를 울긋불긋한 근육으로 가득 채운 남자가 소년과 여자가 있는 오두막집으로 들어왔다. 그는 소년의 아빠였다.
"아빠!"
소년은 땀으로 질척해진 남자에게 달려가 그의 허벅지에 자신의 양손을 종아리에 자신의 양다리를 감았다.
"어이쿠, 요 녀석! 이거 놔!"
"헤헤헤헷!"
소년이 그의 다리에 매미처럼 찰싹 달라붙자 남자는 잠시 당황하더니 이내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과 함께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호호호. 지크가 요즘 부쩍 응석을 부리네요."
"그러니까 말이오. 슬슬 학교에 보낼 나이가 된 것 같은데."
"벌써요?"
"벌써라니, 이만하면 다 컸지. 읏차!"
소년의 아빠는 소년이 매달린 다리를 들어 의자 위에 올리고는 다리를 감싼 소년의 손과 다리를 하나씩 떼어냈다.
"자자, 식사합시다!"
나무 접시 위에 가운데가 파진 딱딱한 빵을 하나씩 놓고 그 위에 수프를 담자 조촐한 식사가 완성되었다. 식사를 마치고 침대에 누운 소년은 부모의 품에 안겨 그들의 따스한 손길에 왠지 모를 아늑함을 느끼고 있었다.
'좋다. 따뜻해.'
자신의 살결과 부딪치는 두 사람의 살결에서 전달되는 온기를 느끼고 있을 때 문득 여자가 입을 열었다.
"지크, 넌 꿈이 뭐니?"
갑작스러운 엄마의 질문에 소년은 곰곰이 생각했다. 긴장이 되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이 질문은 소년에게 중요한 질문이었다.
'아빠처럼 멋진 용병도 좋지만….'
최근 소년의 관심사는 하나뿐이었다. 소년은 결심하고 호기롭게 외쳤다.
"전 엄마, 아빠를 지키는 기사가 될 거예요!"
"어머나! 기사가 되겠다고?"
"허허! 고 녀석. 누구 아들인지 꿈 한 번 야무지구나!"
"내 아들이에요!"
"하하! 우리 아들이지!"
그저 꿈 하나를 말했을 뿐인데도 작은 오두막집에선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그러나.
행복한 기억은 매우 짧았다. 그 뒤에 펼쳐질 참혹한 기억에 비하면 찰나라고 할 정도로.
끼익.
어느 날 저녁. 여느 때처럼 들려오는 경첩의 마찰음이 그날따라 유독 불쾌하고 불편하게 느껴졌다.
"꺄아아악!!! 여, 여보!"
수프를 젓고 있던 여자의 황망한 비명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린 소년은 가지고 놀던 나무 조각들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크헤헤헤! 이런 곳에 숨겨두고 있었구먼?"
"어, 엄마."
"보지마! 지크, 보면 안 돼!"
황급히 그녀가 소년의 시야를 가리지만 충격적인 광경은 이미 소년의 뇌리에 단단히 틀어박힌 후였다.
턱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사내는 한 손에는 피가 잔뜩 묻다 못해 엉겨 붙은 도끼를, 한 손에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머리를 들고 있었다.
사내의 우악스러운 손아귀에 갈색 머리칼을 붙들린 머리는 주름진 이마를 훤히 드러내고 있었는데 피눈물이 딱딱하게 응고되어 시뻘건 두 눈을 부릅뜬 채 잘린 목 아래로 핏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불과 아침까지만 해도 소년에게 자상하게 미소짓던 얼굴은 온데간데없었지만 그것은 분명 소년의 아빠였다.
"어, 엄마. 아, 아빠가…!"
"괜찮아. 괜찮을 거야."
소년은 엄마의 품에 안겨 그녀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애써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와 달리 덜덜 떨리는 손길에선 참을 수 없는 두려움이 드러났다.
그렇지만 소년은 괜찮을 거라는 여자의 말을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엄마의 말은 항상 옳았으니까.
끼익. 끽.
저벅저벅.
잇따른 경첩 소리와 발소리가 들려오며 방 안의 인기척이 늘었다.
"와! 형님. 요년 겁나게 맛있어 보이는데요?"
"이런 년이 산속에 틀어박혀 있을 줄이야! 오늘 땡잡았구만!"
"크큭! 미친놈들. 내가 충분히 즐기기 전까지 니들 몫은 없어, 새끼들아!"
"아무렴요! 아무리 산중에 여자가 귀하다지만 위아래도 구분 못 하겠습니까."
"그래도 홧김에 죽이지는 말아주십쇼. 지금 여자에 굶주린 애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얼른 애새끼나 데리고 꺼져 있어!"
"예이, 예이!"
불순하기 짝이 없는 대화를 끝으로 딱딱하고 거친 손길이 소년과 여자를 갈라놓으려 하자 그녀가 그 손을 할퀴고 물어뜯으며 몸부림쳤다.
"아악! 이 미친년이!"
찰싹!
"꺄악!"
"엄마!!"
여자의 몸부림에 화가 난 사내가 손찌검을 하자 여자가 뺨을 맞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웬 솥뚜껑만 한 커다란 주먹이 사내의 얼굴을 향했다.
"이 싸가지없는 새끼가!"
퍼억!
"아악! 형님!"
"아직 나도 손도 안 댄 것에 손을 대, 이 씨발럼이?"
퍽! 퍽!
"끄악! 자, 잘못했습니다! 하, 한 번만 용서해 주십쇼!"
"잘못을 했으면 쳐 맞아야지! 고블린 발싸개 같은 잡놈의 새끼가, 거두고 먹여줬더니 혼자 생지랄을 하고 있네!"
퍽! 퍼억! 퍽!
살벌한 타격음은 사내가 실신을 하고 나서야 끝이 났다.
"후, 이 새끼랑 애새끼 둘 다 데리고 나가!"
"예, 옙!"
다른 사내가 성큼성큼 다가와 축 늘어진 사내의 옷깃을 거머쥐며 남은 손을 소년에게 뻗자 소년의 엄마가 두 손으로 사내의 손을 붙들었다.
"내 아들은 안 돼!"
"혀, 형님. 어떡하죠?"
막 벌어진 사태를 보았기에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던 사내가 곤란하다는 듯 뒤를 돌자 맨 처음 집에 들어선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가 씩 웃었다.
"아들 앞에서 당하고 싶은 거요? 취향은 아니지만, 가끔 그런 것도 나쁘지 않겠지."
"아, 아아…."
우두머리의 말에 여자의 손이 스르륵 풀린다.
"어, 엄마! 싫어요! 이거 놔요!"
남자의 어깨에 둘러 메여 소년과 여자의 거리가 멀어지자 소년이 심하게 발버둥 쳤다.
"괜찮아, 지크. 얌전히 있으렴."
처연한 미소를 짓고 있는 여자의 목소리를 끝으로 오두막집의 문이 닫힌다.
"크크, 너희 엄마가 얌전히 있으라잖냐. 가만히 있어라, 힘들다."
오두막집의 불은 날이 밝을 때까지 꺼지지 않았다.
그저 수 시간 동안 거친 숨소리와 옅은 신음, 삐걱거리는 소음 등이 커졌다 작아지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처음으로 들어갔던 우두머리가 비지땀을 흘리며 나오고 나서는 서너 명의 사내가 소년 가족의 보금자리를 침범했다.
다른 소리는 모두 그대로였지만 옅은 신음은 점차 들리지 않게 됐다.
모든 사내가 오두막집을 들르고 나자 교대로 소년을 붙잡고 있던 사내들이 소년을 놓아주었다. 그때는 새가 지저귀는 아침이었다.
밤새 졸았다 깨기를 반복하던 소년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집으로 달려갔다.
"엄마!!!"
"지크, 왔니…?"
오두막집으로 들어가자 소년의 엄마는 얇은 이불로 몸을 가린 채 소년을 맞이했다.
집안에는 이상한 냄새가 가득했고 그 냄새는 자신의 엄마에게 다가갈수록 심해졌지만, 소년은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가 안겼다.
"엄마, 괜찮아요…?"
"응, 엄만 괜찮아. 지크도 괜찮니?"
전혀 괜찮지 않은 얼굴로 도리어 괜찮냐고 물어오는 자신의 엄마를 보자 소년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갑자기 왜 울고 그래."
정작 울고 싶은 건 본인 일 텐데도 여자는 손을 쓸어 쓱쓱 소년의 눈물을 닦아내었다.
"흐어어엉! 어, 엄마아아…. 히끅! 아, 안 괜찮아. 끄읍! 안 괜찮아 보여어엉!!!"
어린 소년이 보기에도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칼과 금방이라도 감길 듯 힘없이 늘어진 눈매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한참이나 울음을 터뜨리는 소년을 여자는 말없이 토닥였고 잠시 후 사내들이 다시 집 안에 들이닥쳐 소년과 여자를 짊어지고 산속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향한 곳은 산속 깊숙이에 있는 산채였는데 규모는 50여 명이 머물 정도였다.
소년과 여자는 식사할 때와 잠을 잘 때를 제외하고는 항상 떨어져 있었고 그마저도 같이 자던 중에 깨어 보면 여자가 사라졌었다. 소년의 엄마는 그것을 일하러 가는 것이라 하였지만 소년은 믿을 수가 없었다.
이곳에 오고 나서 여자의 안색은 하루가 다르게 파리해지다 못해 창백해졌고 함께 잠을 잘 때면 이따금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어댔다.
그리고 두 사람이 산 채로 온 지 나흘이 되었을 때 어김없이 소년이 자던 중 모습이 사라졌던 여자가 점심 무렵이 되어서야 몸을 덜덜 떨며 입구를 천막으로 가린 판잣집 안으로 들어왔다.
"아, 아냐. 그, 그럴 순 없어. 어, 어떻게 애 혼자만 남겨두고…."
"엄마…?"
그녀의 상태는 한눈에 봐도 이상했다. 횡설수설하며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는가 하면 손가락을 입에 넣고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어찌나 심하게 물어뜯었는지 손끝에선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그도 모른 채 있지도 않은 손톱을 연신 뜯고 있었다.
"엄마, 손에서 피나요!"
"이, 이거 놔!"
"아악!"
여자가 소년의 손을 뿌리치자 소년이 바닥에 넘어졌고 누군가 천막을 들추었다.
"무슨 일이야!"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엄마가 아픈 것 같아서…."
"뭐? 아프면 안 되는데…."
사내는 풀을 짓이겨 만든 풀죽을 천막에 밀어 넣고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품에서 먹음직스럽게 잘 익은 고기 한 덩이를 꺼냈다.
"자, 오늘은 특별히 사슴 고기를 내주지. 내 몫을 주는 거니까 감사하게 생각하라고! 대신 있다가 저녁에 기대해도 되겠지?"
"……,"
여자는 사내가 들어온 순간부터 겁먹은 듯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을 뿐이었다.
"안 받고 뭐 해?"
"아, 감사해요! 아저씨!"
"짜식! 너네 엄마 잘 보살펴! 우리 산채에 귀중한 인력이니까 말이야!"
"네, 네. 들어가세요."
소년은 사내를 돌려보내고 풀죽을 여자에게 내밀었다.
"엄마, 이것 좀 드셔보세요. 오늘은 고기도 있어요."
"이, 이리 내놔!"
여자는 소년의 손에 들린 풀죽과 고기를 빼앗듯이 낚아채더니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소년도 고기를 먹고 싶었지만, 안쓰러운 엄마의 모습을 보니 차마 달라고 할 수가 없어 한 곳에 자리 잡고 풀죽만 후룩 마셨다.
쩝쩝, 우걱우걱.
"엄마, 천천히 좀 드세요. 그러다 체하겠어요."
"우, 우웨에엑!"
"아앗!"
소년의 우려대로 여자는 너무 급하게 먹은 나머지 먹던 음식물을 죄다 토해내고 말았는데 사람이 토하는 모습을 처음 본 소년이 당황하며 천막 밖으로 나가려 하자 여자가 소년의 팔을 붙들었다.
"지크."
"엄마, 제가 밖에서 사람을 불러"
"지크!"
여자는 소년을 조용히 다그쳤다. 그제야 여자와 눈을 마주친 소년은 여자의 눈이 불안정하게 떨리지 않고 자신을 직시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 눈빛이 무척 따스하다는 것도.
"어, 엄마…?"
"그래, 엄마야. 아이고 우리 아들 엄마 때문에 많이 힘들었지?"
"엄마아…!"
소년이 와락 달려들자 여자가 다급히 소년의 입을 막으며 소년을 끌어안았다.
"쉿! 조용히 해야 해! 할 수 있지?"
끄덕끄덕.
"아들…. 엄마가, 엄마가 정말 미안해."
자신을 끌어안고 흐느끼는 여자를 소년은 꼭 끌어안았다.
"아니에요. 제가 죄송해요. 제가 엄마를 지켜드려야 하는데…."
"흑, 우리 아들. 정말 다 컸네?"
"그럼요. 빨리 어른이 돼서 평생 지켜드릴게요."
"그럼 엄마가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어려운 부탁인데…."
"뭐든지 말만 하세요."
이곳에서 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없었지만, 소년은 호기롭게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며칠 만에 돌아온 엄마가 자신을 두고 저 멀리 떠날 것 같았으니까.
"고마워, 아들."
여자는 자신의 가슴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뭐, 뭐 하는 거예요, 엄마."
소년은 당황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직 무얼 알지도 못할 나이였지만, 본능적으로 부끄러움을 느낀 것이다.
"자, 이걸 받아."
여자의 목소리에 다시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여자의 손에는 손가락 두 개를 이어붙인 크기의 나무 막대가 들려있었다.
"이게 뭐예요?"
"양쪽으로 잡아 당겨봐."
수욱.
얼떨결에 막대를 받아든 소년이 여자의 말대로 막대를 좌우로 잡아당기자 막대가 양쪽으로 나뉘며 한쪽에는 속이 빈 나무집이 한쪽에는 나무집에 감춰져 있던 날카로운 칼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걸 여기, 이곳에 찔러줘."
여자는 고개를 틀어 자신의 하얀 목덜미를 내밀었다.
"에?"
"아프지 않게 한 번에 찔러야 한단다."
"어, 엄마. 그게 무슨 소리예요?"
"누가 오기 전에 어서. 나……더는 못 견디겠어. 부탁이야, 아들. 엄마 좀 쉬게 해줘."
여자는 엄마로서 할 수 없는 말들을 소년에게 내뱉고 있었다. 그만큼 현재 여자의 정신은 망가진 상태였다.
챙그랑.
"모, 못해요. 제가 어떻게 엄마를 찔러요."
소년은 여자가 쥐여준 장도를 바닥에 떨어뜨리며 뒷걸음질 쳤다.
"…정말 안 되겠니?"
"다, 다른 부탁이라면 들어드릴게요. 이건 안돼요."
"그래? 그럼 잠시 뒤로 돌아줄래?"
"네?"
"부탁이야."
뒤로 도는 것 정도는 소년에게도 쉬운 일이었지만 어쩐지 께름칙했다.
"어서."
"아, 알겠어요."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그러나 소년은 그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자신은 아직 부모의 말에 따를 뿐인 아이였으니까.
푸욱.
"어, 엄마 죄송해요."
푸욱.
"제가 앞으로는 더더 엄마 말도 잘 듣고…. 그럴 테니까…응?
좀 전부터 무언가 뜨끈한 것이 소년의 몸 뒤쪽에 튀고 있었다.
푸욱.
"끍…!"
"엄마……?"
그리고 그와 함께 뒤편에서 들려오는 묘한 소리에 소년의 눈이 크게 뜨인다.
"저 이제 뒤돌아도 되죠?"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숨 막히는 정적 끝에 소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으아앗! 엄마!!!"
소년이 고개를 돌렸을 때 판자 안은 온통 피투성이였고 여자는 온몸에 피 칠갑을 한 채 소년에게 덜덜 떨리는 손을 뻗었다.
"엄마! 엄마아아!! 흐어엉! 주, 죽으면 안 돼요! 제발! 혼자 남기 싫어요!!"
여자는 가까스로 뻗은 손으로 소년의 뺨을 감싸며 그저 입 모양으로 자신의 마지막 의사를 전달했다.
엄마가 미안해.
"시, 싫어! 엄마 죽는 거 싫다고!!"
아들.
그 말을 끝으로 여자의 손은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엄마아아!!!!"
소년이 크게 울부짖었지만, 천막을 들추는 사람은 없었다.
"흐흑! 누구 없어요?! 저희 엄마 좀 살려주세요!!!"
빠르게 식어가는 여자의 육신을 붙들고 통곡하던 소년이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도움을 청해봐도 밖은 조용하기만 했다.
그렇게 한참이나 여자의 품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을 때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천막이 열렸다.
"이, 이게 뭐야!"
"도, 도와주세요…. 엄마가…."
너무 울어서 탈진 상태가 되어버린 소년이 힘겹게 도움을 청했다.
"빨리 여자랑 애새끼 챙겨 나와! 미친 신전 놈들! 여긴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야?"
"자, 잠깐만 여자가…. 여자가 죽었어…!"
"뭐? 씨발 그게 무슨 소리야? 이런 미친…. 썅년이 지 새끼 놔두고 죽어버렸네. 빨리 튀자!"
"애, 애는?"
"애새끼는 노예로 팔아봐야 돈도 안 돼. 어미 때문에 데리고 온 거니까 그냥 놔두고 빨리 튀자고!"
"어, 어. 알았…으앗!"
서걱!
"크아아악!!"
"버, 벌써? 으아악! 부, 부디 자비를"
서걱. 데구르르.
천막 앞에 서 있던 사내 중 한 명의 머리가 바닥을 굴러 소년의 발치에서 멈추었다.
"……."
소년은 놀랄 기력도 없어 그저 멍하니 충혈된 두 눈을 부릅뜬 머리를 바라보다 훌쩍이며 자신의 엄마를 끌어안았다.
화악!
그때 천막이 다시 열리며 누군가 소년에게 다가왔다.
"세상에! 알테온 경! 여기 아이가 있어요!"
"루엘 신관님! 그런 곳에 함부로 들어가시면 위험합니다. 악의 무리가 숨어있으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소인은 전능하신 젤루아 님께서 항상 지켜주시니 괜찮습니다. 그보다 큰일이에요! 아이와 여자의 상태가 좋지 않아요!"
"이런! 큰일이군요! 사제님들, 어서 이쪽으로 와주십시오!"
"세상을 비추는 위대한 빛의 여신 젤루아 님이시여 그 거룩하고 성스러운 빛으로 여기 피 흘리는 어린 양에게 한줄기 구원을 내리소서! 그레이트 힐(Great Heal)!"
환한 빛이 소년과 여자를 감싸자 탈진했던 소년의 몸에 일순간 활기가 돌았다.
"이럴 수가. 안타깝지만 한 사람은 이미 먼 길을 떠났군요. 너무 많은 피를 흘렸어요."
"젤루아 님의 빛이 인도하기를."
"젤루아 님의 빛이 인도하기를."
신관과 성기사가 성호를 그으며 작게 고개를 숙일 때 소년이 몸을 비틀거리며 신관에게 다가갔다.
"시, 신관님! 저희 엄마 좀 살려주세요!"
챙!
"멈춰라!"
"으악!"
소년은 성기사가 뻗은 검에 화들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내버려 두세요. 알테온 경."
"예? 하지만…."
"괜찮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막아서는 게 아니라 받아들이는 거예요. 이처럼 부득이한 경우는 어쩔 수 없지만."
신관은 바닥을 구르는 사내의 머리를 발로 차더니 소년에게 넘어진 소년에게 손을 내밀었다.
"괜찮니? 미안하구나. 도움이 못 되어서. 저분이 너희 엄마니?"
"네, 신관님! 저희 엄마 좀 살려주세요! 저 진짜 신님 잘 믿을게요!"
"젤루아 님."
"젤루아 님 잘 믿을게요! 그러니까 제발! 저희 엄마 좀…!"
"아이야. 믿음을 거래 대상으로 삼는 건 굉장히 불경하고 불손한 태도란다. 그리고 미안하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구나."
신관이 소년을 감싸 안고 천천히 등을 토닥이자 따스한 빛이 소년에게 스며들었다.
스르륵.
소년의 몸이 축 늘어지며 신관에게 달라붙자 성기사가 소년의 허리를 들어 올려 자신의 어깨에 얹었다.
"루엘 신관님. 부르셨나요?"
그리고 성기사가 부른 사제들이 뒤늦게 신관 앞에 도열했다.
"아, 이미 먼 길을 건넜습니다."
"이런. 젤루아 님의 빛이 인도하기를."
"젤루아 님의 빛이 인도하기를."
소년은 젤루아 교단의 신전으로 옮겨지고 나서야 자신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산적들에게 부모를 잃은 고아.
그리고 소년을 신전으로 데리고 온 교단은 자선 단체가 아니라는 것.
교단에 도움을 받은 자들은 그 형태가 어떠하든 그 값을 치러야 했다. 소년처럼 목숨을 구원받은 자들은 기본적으로 100골드였고 치료를 받은 자들은 그 수준에 따라 추가적인 값을 치러야 했는데 그 값이 목숨값보다 더 나오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이외에도 몬스터에게 터전을 잃고 숙식을 제공받거나 잃어버린 터전을 다시 찾는 일 등 교단의 도움을 받는 일은 너무도 많았고 교단은 그 모든 것을 돌려받았다.
소년은 목숨비에 19세의 청년이 될 때까지 자는 것, 먹는 것, 입는 것까지 모두 빚이 되었고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는 신의 종, 즉 노예로서 살아가야 했다.
그 빚이라는 게 이자가 어마어마해서 사실상 평생 노예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도망을 치려고 해도 이마 중앙에 찍힌 노예 각인으로 인해 배정된 신전에서 일정 반경 이상 멀어지면 점점 심해지는 극심한 두통에 시달리다 쓰러지고 말기에 도망칠 수도 없었다.
그러다 붙잡히면 잠도 자지 못하는 끔찍한 형벌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차라리 자살을 택하는 게 나을 것이고.
그래도 뭐, 지크의 기억을 되짚어보니 노예의 삶이 자살을 택할 정도로 고단한 것은 아니었다.
매일매일 일정량의 일만 해내면 밥도 주고 잠자리도 제공하는 데다 나이를 막론하고 싹수를 보인다면 고등 교육을 받을 기회도 주어졌다. 물론 그 교육도 빚이지만.
"제기랄! 콜록콜록!"
어찌 됐건 더러운 기억이었다.
신전의 노예, 지크는 부모를 잃은 충격으로 인해 마음이 뒤틀려 청년이 될 때까지 아무런 의욕도 없이 그저 신전의 일과를 마치고 먹고 자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 덕에 신전에서 함께 자란 다른 아이들과 달리 청년이 되고 나서도 이렇다 할 능력이 없어 노예 업무 중 최악이라는 광산 채광 현장에 투입되었고.
그런 삶이 이어진 지 벌써 2년이었다.
"켁, 콜록! 끄으으…. 콜록!"
'아오, 기침 겁나 나오네. 상태창.'
[상태창]
이름 : 지크
등급 : 1
능력치
체력 : 12 근력: 13 민첩 : 9 정신력 : 7 마력: 2
잔여 능력치 : 0
능력 : 채광(9급)
채광 : 광석을 캐내는 기술.
'하, 답 안 나오는 상태창이네.'
그나마 광부 일을 해서 그런지 체력이나 근력은 괜찮았지만, 그 외에는 모두 10을 넘기지 못하고 있었다. 고작 하나 있는 능력이라고는 채광이 끝이었고.
[메인 채무 청산]
퀘스트 설명 : 빛의 여신 젤루아 교단의 도움으로 목숨을 부지한 것도 모자라 의식주까지 해결한 지크는 그 도움에 보답하기 위해 젤루아 교단의 신전에서 종으로 근무하고 있다. 하루빨리 채무를 청산하고 젤루아 교단의 앞날에 이바지하도록 하자.
퀘스트 완료 조건 : 채무 청산.
퀘스트 완료 보상 : 출몽, 지크의 소지품 중 택 1.
'채무 청산이라….'
거듭 말하지만, 교단에 진 빚은 갚을 수 있는 종류의 빚이 아니었다. 액수가 작으면 모를까. 어렸을 때부터 교단에 몸을 의탁한 지크의 경우는 이미 빚이 불어날 대로 불어난 상태였다.
'생각은 나중에 하자.'
쉬는 시간이 끝났는지 광산 밖에서 광부들이 우르르 몰려오고 있었다.
"자자, 휴식 끝났으니까. 다들 일들 시작하라고!"
누가 이렇게 말을 잘하나 싶어 고개를 돌려보니 채광반의 작업반장인 론이였다. 그는 코와 입을 가리는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소리가 다소 먹을 뿐 말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부럽구만.'
같은 조원인 3조의 조원들이 나를 힐끔 보며 지나쳐 곡괭이를 든 채 묵묵히 작업을 시작한다. 작업 중에 말할 여유는 없었다. 공기 중에 가루도 많을뿐더러 그날그날의 채광량에 따라 순위가 매겨져 보수를 차등 지급받기 때문에 채광량이 많을수록 좋은 보수를 받았고 낮을수록 낮은 보수를 받았다. 꼴찌의 경우에는 보수가 0이었느니 다들 꼴찌가 되지 않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이다. 아무리 일의 능률을 위해서라지만 지독한 운영 방침이었다.
어차피 신전에서 숙식을 제공하는데 돈이 왜 필요하냐고 하겠지만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었다. 기본적으로 이자가 차감된 보수였지만 하루 업무가 끝나고 나면 휴식 시간이 주어졌고 휴식 시간을 알차게 보내기 위해서 그리고 노예 생활을 청산하기 위해선 보수가 필수였다.
어쨌든 돈이 많을수록 생활이 나아지는 건 이곳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일단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자.'
깡! 깡! 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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