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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속에선 주인공인 내가 현실에선 은거기인-55화 (55/62)

〈 55화 〉 계획 수립

* * *

두 자매는 나와 두 시간가량 이야기를 나눈 후 내일 한국을 떠나기 전까지 해야 할 일들이 있다며 급하게 자리를 나섰다.

'무슨 일이었을까?'

정말 다급하게 떠난 터라 물어볼 틈도 없었다.

"후…."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멍하니 생각에 잠긴다.

'뭐부터 해야 하지?'

"던전, 등급 시험, 입몽, 속성력 수련, 그리고 능력 수련…."

일단 생각나는 것들을 하나씩 읊어본다. 지금 생각나는 건 이 정도.

우선 던전에 관해 생각을 집중해본다. 지난 한 달간 던전에 관해 알려진, 또 알아낸 정보는 꽤 많았다.

하나는 튜토리얼 사태가 끝나고 30일이 지난 시점에서 시작된 변화로 일부 던전의 등급이 상승한 것이다.

변화가 시작되기 전 전국 곳곳에 퍼져있는 던전의 분포도를 살펴보면 던전의 대부분을 1등급 던전이 차지하고 있었고 2등급 던전은 1등급 던전의 10%가량을 차지하고 있었다.

3등급부터는 그 수가 급격하게 줄어 읍, 면, 동마다 하나꼴로 존재했고 4등급은 시, 군, 구마다 하나씩, 5등급은 특별시, 광역시, 도마다 하나씩 존재했다.

그랬던 게 최근 드러난 자료에 의해 변화가 포착되었는데 1등급 던전 중 일부가 2등급 던전으로 상승하였고 2등급 던전 중 극히 일부가 3등급으로 상승했다고 한다. 그 위로는 아직 변화가 감지되지 않았다고 하는데 시간문제일 뿐 던전은 앞으로 계속 진화할 것이라는 게 사람들의 주된 예상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두정동에도 3등급의 던전이 하나 늘어났고 요즘은 1등급 던전과 마찬가지로 포화 지경이 되어버린 2등급의 던전은 기다리는 메리트가 없어 최근에는 매일 근처의 동을 순회하며 3등급의 던전만 십여 차례 돌고 있었다.

그로 인해 2등급의 던전을 돌 때마다 던전에 진입하는 횟수는 현저히 줄었지만, 오히려 그때보다 업과 전리품의 수준은 현저히 늘었다.

3등급의 던전은 던전 퀘스트만 보상만 해도 6천 업에 달했고 4등급은 2만, 5등급은 5만에 수렴했다. 그리고 등급이 오를수록 업도 업이지만 해당하는 등급의 전리품을 습득하게 되면 업 이상의 가치를 보장했기에 빠른 성장을 위해서라면 고등급의 던전은 필수였다.

그렇기에 나도 처음엔 4, 5등급의 던전을 찾아 돌아다녔지만, 이상하게도 4, 5등급의 던전은 모두 클리어된 후였다. 그래도 찾아온 김에 맨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 던전 진입 시간이 될 때까지 잠자코 기다려보니 딱 시간에 맞춰 짙은 선팅의 대형 SUV가 나타났고 차에선 열댓 명의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나는 곧바로 엘리와 함께 던전 내부로 진입했고 던전을 클리어하고 나왔을 때 그들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이후에 다른 4, 5등급의 던전을 찾아나섰지만 모두 클리어된 상태였다.

이때 차를 사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차를 산다고 해서 뭐가 바뀔 것 같지는 않았다.

'전문적으로 던전을 털고 다니는 것 같았어.'

딱 던전의 진입시간이 되자마자 나타난 거로 보아 시간을 분, 초 단위로 체크해가며 고등급의 던전을 쓸고 있는 것 같았는데 괜히 시간 낭비를 하거나 다툼이 벌어질 우려가 있어 그 후로는 집 근처의 2, 3등급 던전만 돌며 시간을 보냈다.

'뭐 하는 녀석들이었을까?'

하나같이 머리를 포함해 전신을 감싸는 완전무장 차림이라 얼굴은 보지도 못했다.

'짐작 가는 녀석들은 있지만….'

어쨌든 이런 상황이라 지금 던전을 돈다면 3등급 던전을 돌아야 했고 등급 시험은 시기상조였다. 아직도 가슈일을 떠올리면 이길 자신이 없었다.

입몽을 통해 잡지식이 늘었지만, 말 그대로 전투와 하등 상관없는 잡지식이었고 던전에서 일부러 몸을 혹사하여 능력치가 소소하게 늘긴 했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했다.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해.'

데스나이트 가슈일이 나보다 앞서고 있는 건 다름 아닌 기술이다. 녀석은 등급에 걸맞은 검술과 기술들을 갖추고 있었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이 능력치와 능력 사이의 격차를 어떻게 매워야 할지 한 달 내내 고민을 했다.

인터넷에 알려진 정보로 상점에서 이능과 관련된 서적을 구매해 봤지만, 책의 내용을 실제로 적용하기는 쉽지 않았다.

일례로 초급 마나 운용 기술, 중급 마나 운용 기술이란 책을 구매하여 읽고 있었는데 초급의 내용은 워낙 간단하기도 하고 내가 알고 있는 내용이라서 금방 넘어갔지만 중급 마나 운용 기술 중에 마나 밤(Mana Bomb)이라는 마나를 체외에서 모아 응집한 후 최대한으로 응축하여 폭발적으로 터뜨리는 기술을 연습한 적이 있는데 일부의 마나를 소모하였을 뿐인데도 어마어마한 폭발에 휘말려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

시험의 방이 그리 넓지 않았기에 피할 공간도 없어 내가 만들어낸 폭발에 실시간으로 몸이 찢겨나가는 고통은 정말이지 끔찍했다. 덕분에 쓸데없이 상당한 업이 회복용 포션을 구매하는 데 쓰이고 난 후로는 너무 위험하다는 핑계로 그조차 그만두었다.

그리고 나서는 던전에서 던전으로 이동하는 틈틈이 지식만 머릿속에 넣어두고 있었는데 이제부터 그런 알량한 생각은 뿌리째 뽑아내야 했다. 고통을 받는 일은 진짜 싫지만 죽는 건 더더욱 싫으니까!

'절대 안 죽는다!'

"현아, 우리 밥 언제 먹어?"

그렇게 의지를 불태우고 있는데 엘리가 배를 쓰다듬으며 거실로 나왔다.

"어, 맞다."

그러고 보니 벌써 점심시간이었다. 대낮부터 너무 충격적인 말을 들은 터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네.

"지금 먹자."

"나 돼지갈비랑 냉면 먹고 싶어!"

"좋지! 나도 그거 먹어야겠다."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나서 엘리와 함께 집을 나서 가까운 3등급의 던전부터 차례로 클리어했다. 지나가는 길에 혹시나 하고 2등급 던전도 확인하며 갔지만, 화요일인데도 2등급 던전의 던전은 빈 곳이 없었다.

"엘리, 뒤로 물러서."

"응!"

슈아아아악! 콰과과과광!

던전에 입장하자마자 엘리를 한참이나 뒤로 물리고 땅을 밟으며 검을 휘두르자 어떠한 묘리도 담겨있지 않은 순수한 힘만으로 던전이 그야말로 초토화가 된다. 일격에 숲의 수풀과 나무 따위와 함께 던전 내부의 몬스터까지 모조리 베어 넘기고 사체가 된 몬스터 중 2등급 이상의 몬스터에게서 전리품을 습득한다. 사실 요즘에는 나라 차원에서 2등급 이상 몬스터의 사체를 비싼 값에 사들이고 있었기에 어떻게 보면 사체를 인벤토리에 수거해 가는 게 이득이었지만, 지금 현실의 돈은 큰 의미가 없었다. 이미 먹고 사는 데는 아무런 지장도 없었으니까.

그렇게 빠른 속도로 던전을 클리어하고 나오자 던전을 도는 속도보다 던전을 찾아 이동하는 시간이 훨씬 길었다. 하나의 던전을 클리어하고 다시 하나의 던전으로 향하는 시간이 대략 10~15분, 던전을 클리어하고 전리품을 수습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이 1분 남짓, 택시를 잡는데 걸리는 시간이 대략 4, 5분 정도 걸렸는데 이 시간조차 아까워 나중엔 개인택시 아저씨에게 50만 원을 지급하고 오늘 하루 동안 운행을 부탁했다.

그러자 효율은 1시간에 4번의 던전을 도는 정도가 되었고 그 상태로 저녁 8시까지 천안의 3등급 던전이란 던전은 다 찾아다니자 무려 30번이나 던전을 클리어했다.

내일도 연락주라며 명함을 주고 간 택시 기사를 뒤로하고 오늘 얻은 것들을 정리했다.

'내가 얻은 업이 30만, 엘리가 얻은 업이 18만 정도인가?'

몬스터란 몬스터는 죄다 내가 잡았기에 엘리와 내가 얻은 업의 차이가 있었다.

'진작에 이렇게 돌았어야 했는데!'

지난 한 달 동안 얻은 업은 150만 업 정도. 한 달 동안 얻은 업의 5분의 1을 하루 만에 벌어버렸으니 그동안 내가 얼마나 대충 살았는지 알만했다.

"하아! 오늘 너무 지루했어!"

"수고했다, 푹 쉬어라!"

그러나 엘리는 계속 차와 던전을 오가는 것이 질려버렸는지 계속 집에 가자고 보챘었다. 사실 엘리가 보채지만 않았어도 12시까지는 던전을 돌 생각이었는데 참 아쉽게 됐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나는 빠르게 전리품을 비어있는 장롱 한편에 쏟아붓고 저녁을 차려 엘리와 함께 먹고는 집을 나설 준비를 했다. 뭐, 밥 정도야 이제 엘리 혼자서 차려 먹을 수는 있지만 어느샌가 함께 먹는 것이 뭔가 규칙처럼 굳어져 버렸다.

"어디가?"

"잠깐, 산에 갔다 올게. 어디 나가지 말고 컴퓨터 하고 있어."

"응! 조심히 다녀와!"

그리고 곧장 인근의 노태산으로 향해 세계수의 장막에 손을 뻗었다.

[시험의 방에 입장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예.'

[등급을 선택하세요. (1등급/2등급/3등급/4등급/5등급/6등급/7등급/8등급/9등급)]

'1등급.'

[시험의 방(1등급)이 개방됩니다. 입장 시 100 업이 소모됩니다.]

내가 1등급 시험의 방으로 입장한 이유는 별거 없다.

'가장 싸니까.'

이제부터가 문제였다. 시험의 방 자체는 아직까지 현실. 이곳에서 수련한다면 실질적으로 육체가 변화하겠지만, 부상까지도 함께 안고 가게 된다.

'여기서는 속성력만 수련해야 해.'

크게 다칠 수 있는 기술의 훈련은 이곳에선 너무 위험했다.

'마나 응용 기술은 시험장 내부로 진입해서 갈고 닦는다.'

나는 자리에 앉아 등을 벽에 기댄 채 뤼오레를 인벤토리에서 꺼냈다.

­ 뭐야? 오늘은 끝난 거 아니었어?

"오늘이 오늘인지 내일인지 어떻게 아냐?"

­ 옷이 그대로잖아.

뤼오레는 인벤토리에 들어가면 수면에 빠져든 것과 같은 상태가 된다고 하는데 용케도 하루가 지나지 않았다는 걸 알아챘다.

"오늘부터는 매일 속성력을 단련할 거야."

­ 어이쿠, 오늘따라 왜 이러신데? 어제랑 다르게 의욕이 활활 타오르는데?

"이제 그만 놀아야지. 불 좀 뿜어봐."

­ 뭘 어떻게 하려고?

화르르르륵!

청아한 푸른 검신에서 영롱하게 타오르는 청염이 뿜어져 나오자 순식간에 주변의 대기가 뜨겁게 달아오른다.

"후욱! 뜨뜻하구만."

­ 꺄아아악! 뭐, 뭐 하는 거야?!!

나는 속옷까지 벗어 인벤토리 속에 집어넣은 후 알몸으로 청염을 마주했다.

“옷까지 태울 수는 없잖아.”

그리고 검 손잡이를 서서히 내 몸쪽으로 끌어당기자 뤼오레가 연신 비명을 질러대며 불길을 일렁거렸다.

­ 꺄아아아악! 뭐 하는 거냐고!!!

"크아아아악!!! 가만히 좀 있어! 몸에 닿잖아악!!"

불규칙적으로 일렁이는 불꽃이 몸을 한차례 훑고 지나가자 가슴팍이 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와 황급히 검을 몸 바깥으로 뻗었다.

­ 어떻게 가만히 있어! 미친놈아!! 알몸으로 지금 뭐 하는 건데!!!

"네가 불 구덩이 속에 몸을 던져야 한다며!"

­ 아니, 불 구덩이 속에 몸을 던지랬지. 누가 내 몸에다 갖다 대래?

"웬만한 불보다 네가 뜨거울 거 아냐? 그리고 네가 있는데 뭐하러 다른 불 구덩이를 구하냐!"

우리는 한동안 실랑이를 벌이다 서로 타협을 봤다.

­ 가만히 있어!

"알았으니까 빨리 시작이나 해!"

검에서 빠져나와 인간의 형체를 갖춘 뤼오레는 내 등 뒤에서 불길로 뒤덮인 손을 서서히 뻗어왔다.

"크흠!"

­ 더?

땀이 삐질 흘러내릴 정도였지만 아직까진 참을 만했다.

"좀 더! 크하악! 너, 너무 가까워! 오케이, 거기까지."

등 뒤로 이글거리는 화염이 느껴진다. 온 신경을 등 뒤의 열기에 집중한 채 눈을 감았다. 시작은 화기를 느끼는 것부터다.

"……."

'아니, 근데 이게 화긴가?'

화기를 느껴본 적이 없으니 뭐가 화기인지 모르겠다. 뜨거운 열기는 느껴지지만, 이걸 뭐 어떻게 하라는 건가?

한 10분 정도를 가만히 앉아있자 내가 지금 찜질방을 온 건지 수련을 하러 온 건지 아리송해졌다.

­ 이거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해?

"나도 그게 궁금한데. 여기서 뭘 어떻게 해야 속성력이 오르는 거야?"

­ 뭐야, 뭐 알고 시작한 거 아니었어?

"네가 불 구덩이 속에 몸을 던지라며."

­ 마나 속에 화기를 담아야지!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 일단 피부 위로 마나를 운용해 봐.

뤼오레의 말에 따라 마나를 피부 위로 흘려보내 등 전체를 감쌌다.

­ 지금부터 마나에 화기를 흘려보낼 테니까 한 번 어떻게든 해 봐.

"어떻게든 해보라고?"

­ 나도 이런 경험은 없으니까 그만 물어봐!

"알았어! 시작해!"

그리고 등 뒤로부터 꾸물거리며 무언가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치이익!

"끄아아악! 야! 야! 이거 맞아?"

­ 집중해.

"이, 이거 아닌 것 같은…! 크하아아악! 자, 잠깐만!!"

­ 집중하라고. 기껏 도와주고 있는데.

'이 자식, 멈출 생각이 없잖아!'

"아, 알았으니까. 좀 천천히 해 봐! 아파서 집중도 못 하겠어!"

나는 등을 움찔거리며 용암을 얇게 꼬아 찌르는 것 같은 화기를 피해댔다.

­ 지금 충분히 천천히 하고 있거든? 가만히 있어!

"네가 가만히 있어. 내가 천천히 다가갈 테니까!"

­ 그럴까?

"후우우우."

코와 입으로 뿜어져 나오는 후끈한 열기를 느끼며 천천히 등 뒤에 꽈리를 튼 화기에 가져다 댔다.

'뭐가 느껴지긴 해.'

뤼오레가 직접 뽑아내서인지 꿈틀거리는 화기는 불꽃에 고르게 분산되어 있을 때 보다 극명한 존재감을 뿜어댔다.

"크, 크으윽!"

눈을 감고 온 신경을 마나와 닿고 있는 화기에 집중한다. 마나가 화기에 닿으면 마치 화들짝 놀란 것처럼 뒤로 물러나며 치익하는 소리와 함께 등 쪽의 살갗이 타들어 간다.

'화기를 감싼다. 아니, 감싸는 거로는 부족해. 집어삼켜야 해.'

나는 소극적으로 등을 감싸고 있던 마나를 거칠게 뿜어내 뤼오레가 뿜어내고 있는 화기를 감싸 끊어냈다.

­ …뭐 하는 거야!!

"……."

대답할 겨를은 없었다. 마나에 둘러싸인 화기가 실시간으로 마나를 녹여내고 있었기에 화기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체내의 마나를 계속해서 방출해 감싸며 화기의 덩어리를 몸 안으로 끌어당겼다.

"…크읏!"

마나로 꽁꽁 싸매서 체내로 들여보냈음에도 화기가 등가죽을 뚫고 몸 안에 들어오는 순간 막대한 열기가 치솟아 오르며 몸에 존재하는 땀구멍이란 땀구멍은 죄다 열린 듯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비처럼 땀이 쏟아져 내렸다.

나는 거듭 호흡을 통해 체내의 열기를 바깥으로 빼냄과 동시에 마력을 끌어올렸다.

'마나 폭주.'

잔잔하던 마나가 갑자기 돌변하여 흥분한 야생마처럼 달려나가 화기 덩어리를 걷어차자 화기가 뚝 하며 반으로 갈라졌고 나는 폭주하는 마력을 이용해 화기를 잘게 잘게 갈라놓았다. 그리고 잘게 갈라져 작아진 화기는 점차 열기가 약해지더니 이윽고 폭주하는 마력에 압사되듯이 짓눌리며 마나에 흡수되었다.

"커헉!"

화기가 마나에 흡수되자 체내에 흐르는 마나가 불에 달궈진 것처럼 뜨거워졌다.

[불의 속성력이 2만큼 상승했습니다.]

"…허억! 허억!"

­ 이게 말이 돼?! 뭘 어떻게 한 거야?

꿀꺽꿀꺽!

나는 상점에서 1.5리터짜리 냉수 한 병을 구매해 반은 마시고 반은 몸 위로 부었다.

쉬이이익.

"푸하아. 어우, 야, 이거 왜 이래?"

몸 위로 부운 물이 순식간에 증기가 되어 날아간다. 그 자리에서 1.5리터짜리 물병을 12개나 마시고 뿌리고 나서야 속이 타는 듯한 열기가 조금은 진정이 되었다.

­ 쯧쯧. 화기를 그렇게 무식하게 받아들이니 부작용이 없을 리가 있겠어? 불을 집어 삼킨 거나 다름없다고!

"후아아…. 뭐, 성공했음 된 거지. 근데 이거 연속으로는 절대 못 하겠는데?"

겉만 조금 진정되었다뿐이지 여전히 체내의 마나는 열기를 머금고 있어서 시간이 지나면 다시 순환하며 몸 전체가 달아올랐다. 이 상태에서 방금처럼 화기를 받아들였다간 체내의 마나가 팽창해서 몸이 터져나갈 게 분명했다.

나는 본래 속성력 수련 후에 시험장으로 들어가 기술을 연마하려 했지만, 도저히 이 상태로는 기술이고 자시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아 곧장 집으로 향했다.

"현아, 왔어?"

"어어, 나 좀 씻을게."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저 멀리서 들려오는 엘리의 목소리에 힘없이 대꾸하고는 현관 바로 앞의 욕실로 향해 그대로 욕조에 몸을 담고 샤워기를 틀었다.

솨아아아.

"와, 이거 미치겠네."

잠깐 가라앉았다가도 금세 치솟는 열기에 숨이 막혀온다. 급하게 상점에서 대량으로 얼음을 구매하여 물이 차오른 욕조 안에 뿌려놓고 그중 두 개를 입안에 집어넣고 굴리자 한결 편안해진 기분이다.

'이대로 좀 쉬어야겠다.'

그대로 차가운 욕조 안에서 눈을 감자 어느 순간 길을 걷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으음, 그새 잠들었나?'

남자는 아마도 나인 듯했는데 검붉은 돌바닥 사이로 뜨거운 용암이 흐르며 곳곳에서 화산 가스와 함께 불길이 치솟는 화산 지대를 걷고 있었다.

퍽!

'아!'

그때 무언가 하얀 것이 남자의 머리로 날아가 맞추자 남자가 휘청거리며 걸음을 멈춰 섰다. 하얀 것은 눈이었다. 차가운 눈. 남자가 눈을 맞으니 나 또한 시원한 느낌이 들어 눈이 날아온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엘리가 손에서 연신 눈덩이를 만들어 내게 던지고 있었다.

'이게 무슨 개꿈이냐?'

나는 이상한 어지러움 속에 휘청거리는 남자를 바라보다 빛을 불러들였다.

'입몽.'

파앗!

눈이 멀 듯한 섬광이 터져나가자 용암의 열기도 눈의 차가움도 모두 사라진다.

"…캑! 콜록콜록!"

'뭐야, 여긴?'

섬광이 잦아들기도 전에 나를 반긴 건 가루 같은 것이 잔뜩 섞여 있는 텁텁하고 매캐한 공기였다. 덕분에 기침을 토하느라 눈도 뜨지 못하다 가까스로 호흡을 가다듬고 눈을 뜨자 눈앞엔 웬 우둘투둘한 벽과 내 시선을 따라 움직이는 노란 빛이었다. 아, 자세히 보니 시선이 아니라 고개의 움직임에 따라 빛이 이동하고 있었다.

고개를 숙여 빛으로 팔과 다리를 비추자 검은 장갑과 검은 장화 그리고 옷 소매가 너덜너덜하게 해진 잿빛의 천 옷이 보였고 바닥에는 널브러진 여덟 자루의 곡괭이와 광석 같은 것이 반쯤 담긴 가죽 포대가 보였다.

'광부…인가?'

느껴지는 힘은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좋게 봐줘도 평범한 성인 남성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으, 너무 더러운데.'

환경이 몹시 좋지 않았다. 허공을 지나 벽을 비추고 있는 빛은 벽뿐만 아니라 허공에 흩날리는 정체불명의 가루들까지 선명히 비추고 있었는데 콧구멍이 텁텁한 게 이미 내 콧속은 가루 범벅이 된 듯했다.

'이런 곳에서 일하면 돈을 벌기는커녕 그 전에 폐병에 걸려 죽겠어.'

제대로 된 방진 마스크라도 있으면 모를까, 딱 봐도 안전 장비라곤 장갑과 장화, 그리고 머리의 안전모가 끝인 열악한 작업 환경이었다.

'이번에도 별 도움은 안 되겠네.'

광부의 지식이라고 해봐야 전투에는 하등 쓸모없을 지식이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도움이 안 되는 꿈도 도움이 되게끔 만들어볼 생각이었기에 의지를 다잡았다.

'하나의 꿈도 허투루 보내면 안 돼. 자, 그럼 상태…!'

"크윽!"

생각을 이어가기도 전에 아찔한 두통과 함께 한 사람의 인생이 내 기억을 비집고 짓쳐들어온다.

"으아아아!"

이건 평범한 광부의 삶이 아니었다.

"지크, 넌 꿈이 뭐니?"

"전 엄마, 아빠를 지키는 기사가 될 거예요!"

푸욱!

"어, 엄마 죄송해요!"

이건 평범한 소년이 뒤틀린 청년이 되기까지의 이야기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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