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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속에선 주인공인 내가 현실에선 은거기인-54화 (54/62)

〈 54화 〉 의지를 다지다

* * *

"유현, 이 병신같은 새끼야. 노력 좀 해라, 제발."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설마 하는 의심이 들었고.

"오래 살고 싶어 환장한 새끼가 뒤지고 싶어서 노력을 안 하냐?"

이 말에 확신했다. 이 녀석들은 진짜다.

최근 들어 욕을 제법 뱉었지만, 정말 말 같지도 않은 일들이 벌어져서 그런 거지 평소에는 속으로도 욕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게 내 성향이었다. 그런 성향에도 이따금씩 속으로 되뇌는 말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저 첫 문장이었다. 저 말은 할 일을 미뤄두고 놀고 있는 나 자신의 한심한 행위를 의식할 때면 속으로 곱씹곤 하던 자기비하적인 말이었다. 예를 들면 시험을 코앞에 두고 게임을 하고 있는 내 자신에게 '게임 좀 그만해라 병신같은 새끼야, 시험이 코앞인데 게임을 하루종일 하고 있냐?' 이런 식으로 자기비하를 일삼았다. 물론 그렇게 자신을 욕한다고 해서 게임을 멈추진 못했다.

'결국, 시험은 망치고 말았었지.'

시험뿐만 아니라 해야 하지만 마음이 가지 않는 그런 일들은 미뤄두는 경향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일종의 도피 심리로 보이는데 다시 떠올려봐도 참 어리석었다.

꼭 해야 할 일들을 뒤로 미루는 건 나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행위였는데 당시에는 눈앞에 보이는 잠깐의 편안함에 쉽게 눈이 멀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도피 심리가 이제는 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저 말을 듣고 보니 여전히 남아있다는 걸 깨달았다.

지난 한 달간, 마냥 논 것은 아니었지만 정작 해야 할 중요한 일들은 미뤄두고 있었다. 능력의 상승을 확실히 가져다줄 등급 시험을 단지 고통스럽다는 이유로 미뤘고, 마찬가지의 이유로 불의 속성력을 키우는 일도 미뤘다.

가슈일에게 패배한 이후로 심기일전하여 매일같이 입몽을 하고 시간이 흐르지 않는 꿈속에서 이길 방법을 모색했다면 지금쯤 시험을 통과했을지도 몰랐지만 2주 동안은 입몽조차 하지 않았고 그 후로도 꿈속에 들어가면 그저 평온한 환경에 심취해 유유자적 퀘스트나 완료할 뿐이었다.

그리고 불의 속성력에 관해서는 여건도 안 되거니와 시간도 오래 걸릴 테니 의미가 없다는 핑계로 미뤄왔는데 사실 시간은 몰라도 여건을 만들 방법은 충분했다.

그 방법이란 바로 시험의 방에서 뤼오레의 불꽃을 이용해 속성력을 수련하는 것.

시험의 문을 열고 그 기괴한 촉수가 몸을 집어삼키고 나면 가상의 공간이 되는 듯했지만, 문을 열기 전인 시험의 방 안에서의 내 육신은 진짜였다. 그곳에서 최소한의 노력이라도 했었다면 뤼오레의 말마따나 오래 걸릴지언정 조금씩이라도 성장하는 게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난 그런 가능성 전부를 포기한 것이다.

물론 가장 중요한 '목표 의식'이 결여된 게 컸다. 이미 충분하다고 느낄 만큼 강하다고 생각했기에 고통을 감수하며 노력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조차 비겁한 타협일 뿐이었는데 예고도 없이 온 세상이 하루아침에 격변한 게 불과 한 달 전이다. 내가 시험에서 온갖 사투를 벌인 10등급 이상의 괴물들이 당장 내일 모습을 드러낸다고 해도 누구에게 따질 수도 없는데 그저 안일하게 먼 미래의 일일 것이라고 단정 짓는 건 정말 짧은 생각이었고 어수룩한 태도였다.

지금 세상은 만의 하나에 속하는 상황조차 아닌 누구도 현실에서 벌어질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한 공상의 영역에 속해있었는데 이 사태를 만들어낸 존재들의 의도는 알 수 없었고, 의도를 알 수 없으니 언제 사태가 급변할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런데도 여태 요행을 바란 건 앞서고 있다는 우월감에 돋아난 자만심 때문이었을까?

이 정도로 힘을 키웠으니 내가 먼저 죽는 일은 없을 것이고 상황이 악화되면 그때부터 노력해도 될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은 제니퍼가 뱉은 두 번째 문장으로 인해 산산이 깨어졌다.

'오래 살고 싶어 환장한 새끼.'

이 말을 듣자마자 심장이 쿵 하고 무겁게 내려앉았다. 이건 기억이 존재하는 순간부터 죽음을 두려워한 나를 지칭하는 말이다. 나는 왜인지 모르겠지만 어렸을 때부터 유달리 죽음에 대한 막대한 공포를 느끼곤 했다.

두려움에 떨던 어린 나를 어머니께선 살포시 감싸며 미소와 함께 자신이 죽으면 하늘에서 데리러 오겠다 하였지만, 어머니도 아버지도 돌아가신 후로는 꿈에서조차 뵙지 못했다.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는 죽음에 관한 생각을 애써 떨쳐낼 수 있었는데 두 분이 돌아가시고 나서는 한 번씩 찾아오는 죽음의 공포를 떨쳐내기가 쉽지 않았다.

생각만으로 심장을 옥죄는 듯한 마음의 고통은 기이할 정도였고 나이가 한살 한살 먹을수록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서서히 다가오는 압박감을 느꼈다.

28살. 인생으로 치자면 이제 고작 3분의 1에 다다랐을 뿐이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긍정적이라 불리던 나도 죽음에서만큼은 긍정적이지 못했다. 한 것도 없는데 벌써 생이 3분의 1이나 지났다는 생각과 함께 남은 3분의 2가 지나고 난 후에 싸늘한 시체가 되어 생을 마감하는 나를 상상하기 싫어 눈을 질끈 감고 외면했다.

나를 좀 먹는 생각은 외면하는 것 말고는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죽음의 공포는 그리 자주 찾아오는 편은 아니었고 일상생활을 할 때는 떠오르지도 않았다. 또한 시간이 흐를수록 외면하는 방법 또한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무언가에 몰두하는 것.

그래서 어렸을 때 본능적으로 게임에 몰두했는지도 모른다. 집중하는 동안에는 다른 생각이 끼어들기 힘들었으니까. 커서는 일에 집중했고.

그리고 술, 담배 등 몸에 해롭다고 알려진 것들은 일절 손도 대지 않았으며 몸에 좋다는 영양제는 매 끼니 챙겨 먹었고 적당한 운동으로 건강한 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꾸준히 관리해 왔다.

오래 살고 싶어 환장했다는 말이 전혀 과하게 느껴지지 않는 삶을 살아온 것이다.

그렇게 살아가던 중에 갑작스럽게 세상에 상태창이니 몬스터니 하는 것들이 나타났고 내 몸에 깃들게 된 알 수 없는 능력으로 인해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심대한 변화가 일어나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애써 무시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말끔히 사라진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게 상태창과 영약 등으로 향상된 신체 능력을 느끼고 있으면 100년이 아니라 300년도 거뜬히 살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내가 죽는다고…?'

나는 슬금슬금 고개를 내미는 긴장감에 불규칙적으로 요동치는 맥박을 느끼며 물었다.

"내가 어떻게 죽지?"

"이제 저희의 말을 믿는 건가요?"

"그래, 믿어. 방금 한 말은 내가 했을 말이 분명하니까."

"다행이네요. 이렇게 찾아온 게 의미가 없게 되면 어쩌나 했는데…."

내가 원하는 답은 내놓지 않은 채 말꼬리를 흐리는 제니퍼를 보자 애가 탔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죽는데? 그리고 시기는?"

"그건…. 저도 몰라요."

"뭐…?"

'지금까지 실컷 예지 능력자라고 떠들어놓고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사실 당신을 찾아온 것도 반신반의하며 찾아온 거예요."

"그게 무슨 소리야?"

"이제 한 달이 조금 넘었을 뿐이에요. 세상이 이렇게 변하고 제게 예지 능력이 주어진 것도. 당신을 만나기 전까진 당신의 존재조차 의심스러웠죠. 과연 존재하기는 할지 내 예지가 확실하긴 한 건지 말이에요. 실질적으로 예지의 힘을 확인한 사례는 타임스퀘어 테러 사건밖에 없으니까요."

"그조차 미리 막지 못했어."

에리카가 침울한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제니퍼의 예지 능력으로 타임스퀘어에서 수많은 사람이 끔찍한 죽음을 맞이하는 사건이 벌어진다는 건 알았지만, 그 시기가 정확히 언제인지 또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는지는 알지 못했으니까."

"뭔가 벌어지는 건 아는데 시기가 언제인지 어떻게 벌어지는지도 모른다는 거야?"

"아예 모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어요. 그저 가깝다, 멀다 정도의 느낌만 있을 뿐…. 보이는 인물도 흐릿한 사람이 있는 반면 무척이나 선명한 사람도 있어요. 바로 당신처럼."

"나?"

내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묻자 제니퍼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처음 예지 능력을 깨우쳤을 때 선명하게 보이는 건 에리카와 유현 님뿐이었어요. 나머지는 정황상 동료분들이라는 건 알 수 있었지만, 얼굴이 흐릿했고요. 왜 에리카의 수많은 동료 중 유현 님만이 선명했는지는 아직도 알 수 없지만."

"음…."

"이런 상황이라 우리는 며칠이나 타임스퀘어에 머물렀어. 시기가 가깝다는 건 알았지만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었으니까. 기다리는 동안 혹시나 하고 경찰에 알리기도 해봤지만 듣지도 않더라. 우리도 그때까진 직접 겪어보진 않았으니까 강경하게 말할 수도 없었고. 뭐, 강경하게 말한다고 들어줄 놈들도 아니지만. 하여튼 그러다 찾게 된 거야. 미래의 희망이라는 너를."

"……."

'…희망이라는 말은 좀 부담스러운데.'

"그리고 최근에 또 한 번 유현 님의 미래를 봤어요. 그것도 굉장히 가까운. 장소는 명확하지 않았지만, 주변에 머무는 여자는 없었는데 갑자기 방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려오니 놀란 거죠."

"그건 혼자 있을 때의 모습을 본 거 아니야? 주변에 여자가 아예 없는 건 아닌데? 두 층 위에도 살고 있고."

"아니에요."

엘리와 내가 항시 붙어있는 것은 아니기에 물었지만, 제니퍼의 언사는 단호했다.

"분명 스치듯 지나치는 여성의 모습은 봤지만, 같이 살 정도로 가까운 사람이라면 스치는 정도로 끝이 아니었을 텐데 뭔가 이상해요. 그래서 확인해 보려고 한 거예요. 내가 스치듯 본 그 여자가 맞는지. 아니면 전혀 새로운 사람인지."

"아…."

"아직 저도 제 능력을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그런데 한번 확인해 봐도 될까요?"

방을 향해 시선을 던지는 두 사람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 얼굴만 보면 되는 거지?"

"네, 그거면 충분해요."

"잠시만 기다려줘."

내가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엘리가 모니터 속에 빨려 들어갈 기세로 고개를 내민 채 입까지 벌리고 있었다.

'아주 무아지경이구만?'

그런 엘리에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가가 비니를 씌웠다.

"악! 갑자기 모자는 왜 씌워?"

"너를 보고 싶다는 사람이 있어. 잠깐이면 되니까 쓰고 있어라."

"응! 나 초코 우유랑 마카롱 좀 갖다 줘!"

"그래그래. 들어와!"

내 외침과 동시에 방 안으로 들어온 에리카와 제니퍼는 들어오자마자 감탄사를 터뜨렸다.

"와! 정말 아름다워요!"

"와아! 뭐야?"

"뭐가?"

에리카가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오자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지난 한 달 동안 저런 반응은 수도 없이 겪었다. 특히 오래간만에 만난 친구 녀석들이 얼마나 난리던지 나와 엘리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온갖 호들갑을 다 떨어댔다.

"두 사람 무슨 사이야?"

"친척 누나야. 지금 그런 게 궁금하냐? 어때?"

"음…. 처음 보는 얼굴이에요. 이런 얼굴이나 머리는 못 봤는데."

들은 게 있어서 그런지 순간적으로 안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설마 얘한테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니겠지?"

"확실하진 않지만 그런 건 아닐 거예요. 만약 그랬다면 어떤 식으로든 드러났을 텐데 제가 본 미래에 그런 조짐은 없었어요. 흠…. 예지가 정확한 건 아닌가?"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자신의 능력을 의심했다.

'혹시 몽환석으로 소환된 존재는 예지에 포함되지 않는 건가?'

문득 그런 가설이 떠올랐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미래의 동료라고 했어도 오늘 처음 본 사이였고 거짓과 진실을 교묘하게 섞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지만. 능력이 알려져서 좋을 건 없어.'

엘리에게 초코 우유와 마카롱 몇 개를 전해주고 우리는 다시 거실로 돌아왔다.

"그래서 내가 언제, 어떻게 죽는지는 모른다는 거지?"

"무척이나 먼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리 멀지도 않은 미래에 당신은 처절한 전투 끝에 동료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어요. 그 대상은 인간이라기엔 너무 흉포한 기운을 가진…. 형체조차 보지 못했지만 아마도 몬스터가 아닐까 싶어요. 그리고 미래의 당신은 입에서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와중에도 마치 제게 전하라는 것처럼 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어요. 유현, 이 병­"

"됐어! 그 뒷말은 더 안 해도 돼!"

나는 다급히 말을 끊고는 물었다.

"무척이나 멀지만, 그리 멀지도 않다는 건 멀다는 거야 안 멀다는 거야?"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느낌이에요."

"하…."

"죄송해요."

제니퍼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이자 나는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냐, 아냐. 네가 죄송할 일은 아니지."

"그래도…."

"오히려 내가 고마워해야지. 덕분에 대비할 수 있게 됐으니까."

이건 진심이었다. 이대로 설렁설렁 살다 몇 년 후에 죽었다면 절대 편히 눈감지 못했을 거다.

'근데 내가 희생을 한다고? 내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닌데.'

아무리 생각해도 미래의 내가 보인 행동은 지금 내 가치관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 자신의 안위를 누구보다 아끼고 희생정신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내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죽음에 이르면서까지 동료들을 위해 희생을 했다? 가당치도 말이었다.

'도대체 미래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냐….'

물론 제니퍼의 예지 능력을 100% 다 신뢰할 수는 없었다. 지금은 엘리가 함께인 미래를 보지 못한 것처럼 또 다른 변수가 존재할 가능성도 있었고 무엇보다 내가 희생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내가 죽는 게 몬스터와 관련된 일이라면 그보다 더 강해지면 될 문제였다.

'노력, 노력이라…….'

나는 미래의 내가 내뱉은 말을 머릿속에 굳게 새겨 넣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까짓 노력 질리도록 해주마! 난 절대 죽지 않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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